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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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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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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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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쪽

'재앙' 19.4

DUMMY

“난 지금까진 불만이 없었어.” 스케이프고트가 말했다. “뉴스가 사태를 과장한 거라고, 브록턴 베이가 뉴스에 나오는 것만큼 무서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드래곤 기체들이 투입됐다가 쫓겨나긴 했지만, 시장도 워싱턴 청문회에서 안전하다고 했잖아. 언론에서 뭔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일을 부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 클론들을 뱉어내는 여자애가—”


“에키드나.” 태틀테일이 말했다.


“에키드나가 뱉어낸 클론들의 시체를 봤을 때도 어떻게든 흘려 넘겼어. 특이한 능력을 갖춘 강한 파라휴먼이 있을 수도 있지. 과장일 수도 있잖아. 사방에 널려 있는 잔해와 무너진 건물과 아직도 물이 다 안 빠진 거리도 보였지만, 뉴스에서 본 게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 개를 괴물로 만들거나 벌레를 조종하는 빌런들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게나 열심히 나 자신을 속여왔는데,” 스케이프고트가 태틀테일을 가리켰다. “얘가 말 한마디로 모든 환상을 부숴버리네.”


“차원과 차원 사이에 구멍을 뚫고 싶다고?” 테크톤이 태틀테일에게 물었다.


“그래. 스크럽의 능력을 다른 차원에 깊숙이 접근하는 또 다른 능력과 함께 사용할 거야. 그래서 폴트라인 일당한테 연락한 거지. 그나마 그게 가장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야. 미르딘의 능력을 써도 되겠지만 협력해줄 리가 없고, 스케이프고트의 능력도 통하겠지만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고 사람을 희생시켜야 할 수도 있어. 스케이프고트가 손을 댄 사람이 스크럽의 능력을 맞아야 할 테니까.”


리젠트가 나를 쿡 찔렀다. “그루가 갔으니 이제 규칙을 정하는 건 너잖아. 빨리 ‘인신 공양은 안 돼.’라고 말해야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루의 말투를 흉내 냈다.


사람을 희생시키지 말자고? 쓸 수 있는 패를 섣불리 제한하는 게 올바른 선택일까? 종말초래자나 에키드나 같은 위협에 맞서는 상황에서?


“안 된다고 안 하네.” 리젠트가 말했다.


“태틀테일,” 내가 말했다. “이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야? 그런 구멍을 뚫어서 어떻게 하게?”


“일단 노엘을 집어넣는 데 쓸 수도 있겠지.”


“다른 방법으로도 막을 수 있어.” 내가 말했다. “무적은 아니잖아.”


“아직은 말이지.”


“그래, 아직은. 우리 힘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어. 레전드와 아이돌른과 알렉산드리아만 있어도 재생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야.”


“모르지. 아까도 힘들었잖아. 우리 화력이 더 세지긴 했지만, 그래도 쉽지 않을 거야. 여행자들의 협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여행자들이 원하는 게 우리 손에 들어온다면 그 협력을 받아낼 수 있을 거야. 집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을 테니까.”


“돌려보낸다고?” 테크톤이 물었다.


“사람들을 다른 차원에서 납치해서 기억을 지우고 문신을 새기고 몸을 변형시키는 장본인이 바로 콜드론이야.” 태틀테일이 말했다. 그녀는 걸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땋은 머리카락 뒤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여행자들도 같은 경우에 속하지.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야. 마치 노엘이 일행 전부의 몫을 몰아받은 것 같네.” 태틀테일이 말했다.


걸리가 삽을 거칠게 휘둘러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을 돌려보내기 위해서 차원 사이에 구멍을 뚫겠다고?”


“그게 우리가 가진 최고의 교섭 재료야. 노엘을 치료할 방법이 있지 않은 이상.”


“어느 차원에서 왔는지는 어떻게 알고?”


“모르지만, 물어보면 되지.” 태틀테일이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우리가 가진 최강의 무기이자 최강의 교섭 재료이자 최강의 도구라는 거야. 내 이론이 조금이라도 들어맞는다면, 이 방법으로 능력을 원천부터 차단할 수도 있겠지.”


“네가 말했던 존재들을 죽이거나 연결을 끊을 방법이 있다면 말이지.” 테크톤이 말했다.


“어디서 대량살상무기라도 구해올 수 있겠지.” 태틀테일이 말했다.


“잠재적인 위험들이 너무 많아.” 테크톤이 말했다. “나도 이해해. 나도 같은 마음이었던 적이 있었어. 지금까지 수많은 팅커들과 몇몇 씽커들이 지금의 너와 같은 갈림길에 서 있었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전 세계를 바꿀 수도 있는 생각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었지. 대부분은 그 선을 넘지 않아. 그래야만 하니까.”


“이건 세상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아니야.” 태틀테일이 말했다. “이 방법을 쓴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온 모든 문제의 근원에 접근해서 가장 위험한 부분들만 정교하게 제거할 수 있어. 능력의 원천을 찾아내서 꺼버릴 수도 있다고. 이건 해결책이야.”


“그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테크톤이 말했다. “그리고 정교하다는 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인 것 같네. 차원을 찢는 것부터가 폭장량도 모르면서 일단 터트리고 보자는 거나 마찬가지야.”


“추측이야말로 내 전문이지.” 태틀테일이 말했다.


“이쯤에서 내가 끼어들어야겠네.” 내가 말했다. “우린 지금 시간이 없어. 나는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이건 너희끼리 의논하고 있어. 난 그사이에 스케이프고트랑 같이 가서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올 테니까.”


“가 봐.” 태틀테일이 말했다.


“나도 갈게.” 레이첼이 내게 말했다. “시발, 말이 뭐가 저렇게 많은지.”


“악명높은 빌런 두 명한테 스케이프고트를 혼자 딸려 보낼 수는 없어.” 테크톤이 말했다.


“그럼 누굴 붙이던가.” 내가 말했다.


“걸리와 원튼을 보내지.” 테크톤이 말했다. “걸리 네가 괜찮다면 말이야. 여행자들은 우리가 감시할 테니까.”


“물어는 볼게.”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 내가 말했다.


“아틀라스는 네 영역 근처에 있어.” 태틀테일이 말했다. “조금만 북쪽으로 가면 범위 안에 들어올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통화를 하던 걸리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고, 우리는 밴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탈 수 있고 면허가 있는 사람은 원튼뿐이었다.


걸리와 비치가 뒤에 탄 만큼 나도 뒤에 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 레이첼도 많이 누그러진 편이었지만, 그녀와 히어로 사이에 시비가 붙는다면 심각한 사태가 될 수도 있었다.



개들을 모두 태우느라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사이에 벌레들을 주위의 건물에 모아놓았다. 돌아오면서 회수할 수 있을 것이었다.


레이첼은 말이 없었고 걸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원튼과 스케이프고트는 앞자리에 타 있었다. 내가 먼저 주도하지 않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고,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는 밴의 앞 유리에 벌레들로 화살표를 그렸다. 녀석들이 우회전 모양으로 움직이자 밴이 로드 스트리트 쪽으로 움직였다. 순조로운 이동이었다.


누군가가 대피 명령을 내렸는지 사람들이 대피소로 향하고 있었다. 사태가 더 나빠질 거라는 근거는 두 가지였다. 확실하지 않은 태틀테일의 직감, 그리고 에키드나에 의해 도시에 광범위한 피해가 나올 것을 암시했던 다이나의 예측뿐이었다.


어쩌면 에키드나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에키드나는 이미 잔해에 완전히 갇혀서 무력화된 상태고, 도시가 반파되는 건 태틀테일의 계획 때문일 수도 있었다. 평소의 우리 운수를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쯤 졸음이 왔다.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다가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감지한 벌레들 때문에 다시 깬 게 두 번이었다. 밴의 내부는 따뜻하고 어두웠으며 차가 움직이는 진동에 마음이 묘하게 진정됐다.


세 번째로 잠들었을 때는 벌레들이 그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기댄 채 선잠에 빠졌다.


아틀라스가 감각에 잡힌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원튼에게 밴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녀석은 차고 안에 있었다. 나는 녀석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본능이 없는 녀석인 만큼 최소한의 활동만을 할 수 있었다. 숨만 쉴 수 있을 정도였다.


열두 시간 정도 굶은 모양이었다. 나는 주변의 벌레 중에서 쓸모가 없는 녀석들을 골라 녀석의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내 기지도 범위 안에 있었다. 나는 기지 안에 저장해 뒀던 모든 벌레를 내게로 불러왔다.


허약해진 상태였지만, 상처는 없었다. 코일이 아틀라스를 그냥 내버려 둔 것도, 여기로 데려온 것도 이유는 같을 것이었다. 달리 무언가 일을 벌였다가는 다른 언더사이더의 의심을 살 수 있었을 테니까.


원튼이 밴의 뒷문을 열었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걸리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밖으로 나왔다.


아틀라스가 내 명령에 따라 닫힌 문을 열고 차고를 벗어나 내게로 날아왔다.


하늘에서 거대한 딱정벌레가 내려와 밴 옆에 내려앉자 원튼은 순간적으로 다른 형태로 변했고 걸리는 삽을 방패처럼 자기 몸 앞에 들어 올렸다.


나는 내 손과 아틀라스의 갑각을 훑는 벌레들로 녀석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배에 긁히고 파인 자국이 있었다. 들어서 트럭에 태웠던 걸까?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낫 같은 앞발을 쓰다듬었다. 시간을 들여서 보살피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발톱을 갈고, 갑각을 정비하고···


나는 눈을 깜박였다. 지친 상태였고, 위험할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개들은 뛸 수 있어?” 내가 레이첼에게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밴에 타 있었다. 그녀는 개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뛰어내렸다. “아마도.”


“그럼 가자.” 내가 말했다. 나는 아틀라스의 등 위로 올라섰지만, 앉지는 않았다. 나는 녀석을 날아오르게 하는 동시에 주위의 모든 벌레를 내 주위로 끌어들였다. 내가 앉은 건 내 모습이 완전히 가려진 이후였다.


스케이프고트와 너무 멀리 떨어질 수는 없었다. 나와 그는 길이 백오십 피트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반 블록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머리 바로 위를 난다면 8, 9층 정도 되는 높이였다. 무적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안전해진 기분이었다.


“···들리나?” 원튼이 말했다.


나는 벌레들로 ‘YES’를 띄웠다.


“소름 끼치네.” 그가 말했다. “···향을 알려줘.”


분명 ‘방향’일 것이었다. 나는 그를 로드 스트리트로 돌려보냈다. 벌레들은 최대한 많이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아틀라스가 태울 수 있는 한계가 있었고 밴의 뒷좌석에 실었다가는 다른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는 대신에 나는 거미줄을 뽑아낸 다음 느린 벌레들을 내 등에다가 느슨하게 묶었다.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들이 뒤로 길게 늘어졌다. 마치 실에 꿰인 구슬과도 같았다. 나머지 벌레들은 내 코스튬의 여러 빈틈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낮게 날며 일행을 따라갔다. 스케이프고트와 가까이 붙어 있어야 했고, 아틀라스의 체력도 미지수인 만큼 신중하게 확인해야 했다.


하늘을 날자 머리카락과 코스튬의 찢어진 옷자락들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노엘의 체액 때문에 여기저기가 뭉친 모습이었다. 나는 벌레들로 체액을 먹어치우며 뭉친 부분을 떼어냈다. 거미줄에 매달린 채로 빠른 날벌레들과 함께 나를 따라오는 벌레들은 무사했다. 그게 중요했다.


간단한 작업 덕에 깨어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집중력이 온전하지는 못했다. 내가 타이밍을 놓친 탓에 밴이 한 번 길을 잘못 들었다. 아드레날린이 나오면 깨어날 것이라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전투에서 불리할 테니까.


아드레날린의 효과는 예상보다 빠르게 시험해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던 공터가 텅 비어 있었다. 여행자들, 태틀테일, 리젠트, 스크럽, 그리고 다른 히어로들 모두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지면에 착지했고 밴의 문이 열렸다. 비치가 내 옆에 멈춰 섰다. 벤틀리는 최대 크기였고, 다른 개들도 조금씩 커져 있었다.


“걸리, 넌 완장이 있잖아. 히어로들이 뭔가 말한 건 없어?” 내가 물었다.


“없어.”


“그럼 태틀테일이나 다른 사람이 어디 있나 한번 물어봐 줘. 일단은 방어선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명령하는 거야?” 원튼이 물었다.


“제안이라고 생각해.” 내가 말했다. 분명 걸리는 임시 지휘관이 된 걸 기쁘게 생각했었지. 그녀에게 결정권을 양보한다면 비위를 맞출 수 있을 것이었다. “결정은 걸리의 몫이야.”


그녀가 나를 힐끗 보았다. “일리가 있네. 원튼이 차를 모는 동안 내가 완장으로 물어볼게.”


파괴된 건물 주위의 방어선에 다다랐을 때쯤에 대답이 왔다. 태틀테일은 주요 히어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레전드, 알렉산드리아, 아이돌른도 있었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 모양이었으니.


내가 다가오자 망토 여러 명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민해진 히어로들한테 공중에서 격추되다니, 죽는 방법 중에서도 안 좋은 축에 들었다.


밴이 한 히어로 일행 옆을 천천히 지나갔고 나도 똑같이 속도를 늦췄다. 레이첼은 딱히 양해를 구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무례한 행동에 점수가 깎였겠지만, 지금은 합류 지점에 있어야 할 태틀테일과 리젠트가 다른 장소에서 히어로 스물일곱 명한테 포위당해 있는 상황이었다. 총을 겨누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암묵적인 위협은 분명했다.


나는 스케이프고트가 밴에서 나오는 걸 확인한 뒤에 아틀라스를 착지시켰다. 앉은 상태에서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나는 일어선 다음 주위의 벌레들을 흩트렸다.


“무슨 일이죠?” 내가 물었다. 내 벌레들이 모여든 사람들 속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벌레들이 걸리적거리거나 얼굴이나 맨피부에 내려앉지 않도록 주의하면서도 주위의 모든 사람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대답한 건 테크톤이었다. “태틀테일이 끝까지 물고 늘어졌어. 내가 상급자한테 보고하자고 제안했고, 태틀테일은 동의했지.”


“너무 위험하다.” 미르딘이 말했다. 그의 옆에는 미스 밀리샤와 슈발리에가 있었다.


“최선의 선택지예요.” 태틀테일이 말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엄청난 위험에 빠트리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계획이지.”


“시간은 있죠.” 태틀테일이 쏘아붙였다. “지금 아무런 움직임이 없잖아요.”


“통할 거라는 보장도 없잖나.” 미르딘이 대답했다.


“대표적인 차원 조작 능력자로서 하는 말인가요, 아니면 콜드론의 진상을 숨기기 위해 하는 말인가요?”


내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벌레들의 감각에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쉬는 모습이 잡힌 것 같았다. 전원은커녕 다섯 명 중 한 명도 아니었지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진 거지?


“무슨 말이지?” 미르딘이 물었다.


“아? 아무 반응도 안 보이네요. 당신은 결백한가 봐요.” 태틀테일이 대답했다.


“태틀테일.” 미스 밀리샤가 끼어들었다. “지금은 이런 수작을 부릴 때가 아닙니다.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혐의를 제기하다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말했다. “원래 이야기에 집중하자.”


“이건 수작이 아니에요.” 태틀테일이 말했다. 그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를 무시한 채로 어떻게 이야기를 하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시도라도 해 봐.”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슈발리에가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강렬한 것이 슈발리에였다. 황금빛과 은빛으로 반짝이는 갑옷도 갑옷이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가볍다는 듯이 어깨에 걸친 채 들고 있는 거대한 캐논블레이드였다. 길이 십이 피트에 너비 삼 피트에 달하는 칼날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유사시엔 더 커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중에 해도 되는 이야기야, 슈발리에.”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듣고 싶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긴급상황에 정신을 딴 데 팔 수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미르딘이 말했다.

“부탁이니까 믿어주십시오.” 미스 밀리샤가 대답했다.


“콜드론의 중심에는 삼—”


미스 밀리샤가 태틀테일을 후려쳐서 말을 끊었다. 그녀가 한쪽 무릎으로 태틀테일의 목을 압박한 채 무릎을 꿇고 나서야 그녀의 손에 들린 총이 보였다. 그녀는 태틀테일의 뺨을 잡아 늘이고는 총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레이첼이 나서는 것이 느껴졌고 리젠트가 미스 밀리샤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레이첼을 막아 세우고, 리젠트의 손목을 잡기 위해서였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십시오, 태틀테일,”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왜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던지려는 겁니까?”


태틀테일은 나를 힐끗 보더니 총구를 문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얻어맞은 광대뼈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미스 밀리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반대쪽 손에 똑같은 모양의 총을 불러냈지만, 내게 겨누지는 않았다. “문제 있습니까, 스키터?”


“방아쇠를 당기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겠죠.” 내가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곳에서 싸움을 걸 생각은 없어요. 자살 행위일 테니까.”


나는 ‘자살 행위’를 강조하며 태틀테일과 눈을 맞췄다.


“클론인가?” 미르딘이 물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내가 대답했다. “본인이에요.”


“왜 이러는 건지 알겠습니까?”


“몰라요.” 내가 말했다. “짐작은 가지만 그것뿐이죠.” 다들 피로가 쌓여 있었지만, 이유가 그것뿐인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지난 삼십 분 동안 태틀테일이 보여준 자살 행위에 가까운 무모함은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태틀테일.”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총을 빼겠습니다. 말하기 전에 잘 생각하십시오. 의도적으로 내부 분열을 획책하는 것은 협정 위반에 해당하고, 일이 그렇게까지 간다면 정말로 척살령을 요청할 겁니다.”


태틀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입을 빠져나가는 총구에 몸을 움츠렸다. “다른 언더사이더들한테 척살령을 걸 수는 없겠죠. 제가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니까요. 심지어 그중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아요. 무고한 사람을 죽이겠다는 건가요?”


“여러분이 무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요.”


“상대적으로 무고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태틀테일이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미스 밀리샤가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까지 처벌이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 조용히 하죠.”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M. M.” 슈발리에가 작게 말했다. “난 네 결정에 반대하지 않을 거고, 이 도시의 책임자는 너니까 삼대장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이상 명령권은 네게 있지만··· 넌 지금 말 한마디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애를 공격하고 있어. 지금은 보는 눈이 많은 상황이라고.”


“겉보기에 좋지 않다는 뜻이네.”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태틀테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의 경력에 좋지 않겠지.”


“경력 따위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녀가 대답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이번 일을 죽는 사람 없이 무사히 넘기는 거야.”


“태틀테일이 입을 여는 것만으로 여기 모두가 위험해질 거라는 거야?”


“그래. 태틀테일이라면 위험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끔찍한 피해를 줄 수도 있겠지.”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파일을 읽어봤을 텐데.”


“나도 읽어봤다.” 미르딘이 말했다.


“지금 말하려는 정보가 이번 사태와 관련이 있긴 한 거야?” 슈발리에가 물었다.


“당장 급한 정보는 아니야.”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태틀테일이 발언권을 청하듯이 헛기침을 했지만, 미스 밀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스키터와도 이야기했었어.”


“잠시만요.” 내가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리젠트의 손을 놓고 레이첼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지?” 미르딘이 물었다.


“제가 설명해보죠. 다른 망토들은 돌려보내고, 제가 세 분한테 설명할게요. 부하들한테 어떤 정보를 전할지는 여러분이 결정하세요. 제가 신경을 써서 태틀테일보다는 덜 민감한 정보를 말해 볼게요. 태틀테일의 계획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완전한 정보 없이 결정을 내리는 건 위험한 일이고 그중에서는 여행자들이나 노엘의 협력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도 있어요.”


미르딘이 미스 밀리샤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르딘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으러 갔으면 좋겠군.”


몇몇 사람이 발걸음을 옮겼다. 헬리콥터들이 거품을 뿌리고 있는 무너진 건물과 원튼이 세워둔 밴을 제외하면 걸어갈 방향이라고 해 봤자 두 방향뿐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일련의 사람들이 보였다.


걸리였다. 쌍둥이 중 하나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걸리.” 내가 모르는 망토가 말했다. “가자.”


“전 답을 들어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언더사이더가 들려줄 수 있는 답이겠죠.”


“슈발리에가 나한테 필요한 내용을 전해줄 거야. 내가 그 정보를 너와 네 팀에 전할 거고.” 망토가 말했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그녀가 말했다. “요약본은 필요 없어요. 전 제가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알아야겠으니까.”


웅성거림이 퍼졌다. 아까 반응했던 망토 중 일부가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숨이 가빠진 사람도 있었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식의 명령 불복종이야말로 기록에 남아서 진급 심사에서 발목을 잡는 거야.” 그 망토가 말했다.


“이미 수도 없이 떨어지면서 말뜻을 똑똑히 알아들은 지 오래예요. 괴물은 팀장 안 시켜주잖아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하고 있네요, 로노.”


웰드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웰드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 그녀의 오른쪽에 가만히 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스 밀리샤가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이다.” 미르딘이 말했다. “S급 위협과의 전투를 앞둔 상황이지. 도움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정보가 언더사이더들에게 있다면, 자네들이 물러나야 우리가 그걸 활용할 수 있어.”


“몇 년을 이렇게 보냈어요.” 걸리가 말했다. “저뿐만이 아니죠. 웰드도 있고···”


“헌치.” 웰드가 말을 덧붙였다. “젠틀 자이언트, 상귄.”


“웰드와 헌치, 젠틀 자이언트와 상귄 모두 같은 처지죠.” 걸리가 말했다. “워드나 보호국과 접촉하기도 전에 곤경을 겪은 수많은 사람은 또 어떻고요. 저 혼자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모두를 위해서라도 알아야겠어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죄송하지만 하루라도 제 처지가 되어보세요. 단 하루라도 제가 겪는 일을 겪고 나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세요. 그전에는 하루, 아니 일 분도 더 기다릴 수 없으니까.”


지면이 울렸다. 처음에는 걸리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도 놀란 기색이었다.


노엘, 에키드나였다. 그녀가 뚫고 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이 이야기도 끝내야겠군.” 미르딘이 말했다. “걸리, 웰드, 팀에 합류해라.”


걸리가 삽을 지면에 단단히 꽂아 넣고 삽날에 발을 올리고는 손잡이 위에 팔짱을 꼈다.


“이대로 정보를 공유해도 되지 않을까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웰드는 모범적인 히어로고, 필요하다면 비밀을 지키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슈발리에가 말했다. “걸리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그쪽은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시 지면이 흔들렸다. 히어로들이 서둘러 전선을 갖췄고, 무너진 건물 주변을 포위했다. 무적인 사람, 능력에 면역인 사람, 강인한 하수인을 거느린 마스터, 그리고 포스필드 능력자들이 일정한 간격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 없어요, 미르딘.” 내가 말했다. “당신도 나도 날 수 있으니까, 근처 옥상에라도 가서—”


“빌어먹을,” 태틀테일이 말했다. “시간을 너무 낭비하고 있어.”


그녀는 미스 밀리샤의 총을 붙잡았다. 미스 밀리샤가 손을 놓지 않자 태틀테일은 한 걸음 다가가 자기 이마를 총구에 갖다 댔다. “쏴. 날 죽이라고. 당신, 사람 죽는 건 많이 봤지. 소중한 사람들이 고작 생각 하나 때문에 죽어 나가는 걸 봤을 거야. 나도 죽이면 되겠네. 나도 지금 어떤 생각을 사람들한테 전하려고 하고 있잖아.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네.”


왜 이러는 거야?


“삼대장이야.” 태틀테일이 말했다.


미스 밀리샤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


“삼대장··· 이라고?” 걸리가 물었다.


“어차피 난 이미 엿 됐어.” 태틀테일이 말했다. “여기까지 말한 것만으로 이미 끝장이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지. 슬프지만 모든 걸 폭로하는 게 오히려 생존 확률이 높을 거야. 삼대장이 콜드론이야. 아이돌른, 레전드, 알렉산드리아, 그 세 사람이 콜드론을 시작했거나, 그렇다고 간주해도 될 정도로 관계가 깊어.”


“시발,” 리젠트가 중얼거렸다.


숨이 막혔다. 나는 미스 밀리샤가 방아쇠를 당길 것을 예상했다.


“콜드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걸리가 물었다. “왜?”


“몰라. 빚을 갚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고일 수도 있고, 널 세뇌하고 약점을 심은 다음 풀어놓으면 다른 고객한테 팔아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게 다야? 답이 그거라고?”


“미안해.” 내가 말했다. 부족한 답이라서 나온 사과인지, 태틀테일이 벌인 짓에 대한 사과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지면이 더 과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헬리콥터들의 소음으로 주변이 가득 찼다.


반면에 그가 날아오는 것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놓칠 뻔했을 정도였다. 일대에 깔린 벌레들이 없었고, 눈으로는 걸리와 코일의 무너진 기지 쪽을 보고 있던 탓이었다.


레전드가 일행 한가운데로 내려온 것이었다.


“들린 모양이네요.” 태틀테일이 말했다.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독순술입니다.” 그가 말했다. “전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으니까요. 총을 내려놓으세요, 미스 밀리샤님. 이미 전부 탄로 났으니까.”


“인정하는 겁니까.” 슈발리에가 말했다.


다시 땅이 흔들렸다. 다들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레전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분명 비행 능력으로 지면 바로 위에 떠 있을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전부 사실인가요?” 걸리가 물었다.


“콜드론을 만든 건 초창기 때였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에게는 사람에게 초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고, 저희 셋은 각자 다른 이유로 필사적이었죠. 촉발사건을 진작에 겪었어야 했는데 잠재력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들 위험은 알고 있었습니다. 죽거나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죠.”


“그런 위험을 알면서, 괴물들을 만들어냈다는 건가요.” 걸리가 말했다.


“약물을 복용한 사람은 전부 모든 걸 안 상태에서 복용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콜드론은 기술을 개선했고, 위험은 점점 줄어들었죠. 나중에는 이삼 퍼센트까지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쯤 저희도 알아차리기 시작했죠, 콜드론이 만들어내는 히어로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들인지. 트라우마 없이 능력을 얻은 망토라면 빌런이 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콜드론은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히어로들을 만들어내고, 그 대가로 받은 자금으로 종말초래자 복구 사업과 초능력 연구를 시작했죠. 완벽하진 않았고, 빌런이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살장의 9인방이 나타나고 종말초래자들이 날뛰기 시작한 이상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죠.”


“여행자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미스 밀리샤가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야 했을 약물을 받은 겁니다. 검사도 받지 않고, 필요한 절차도 밟지 않고, 심리검사나 신체검진도 없이 약물을 복용한 거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에키드나 같은 존재는 완전히 예상 밖입니다.”


“여행자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게 아니었나요?” 내가 말했다. “그렇다고 들었는데.”


“시무르그입니다.” 그가 한마디로 답했다. “위스콘신의 매디슨, 일 년 반 전의 일이었죠. 시무르그가 차원의 통로를 열었습니다. 당신도 있었을 텐데요, 미르딘. 트릭스터와 에키드나를 만났을 겁니다.”


미르딘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병실의 두 사람이.”


땅이 다시 흔들렸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의 불탄 잔해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사람들을 납치해 오는 게 콜드론이 아니라면,” 걸 리가 말했다. “누가—”


“콜드론이 아닙니다.” 레전드가 말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가 걸리와 눈을 마주쳤다. “콜드론의 직원 중에는 맨튼도 있었죠. 그는 딸과 관련된 사고 때문에 이성을 잃고 조직을 이탈했습니다. 맨튼이 가지고 간 약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그중 하나가 콜드론이 미처 대처하기 전에 돈을 받고 그 약물을 팔아넘겼죠. 53번들을 만든 사람도 그중 하나일 겁니다. 저희도 지금까지는 맨튼 본인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니었죠.”


그는 태틀테일을 힐끗 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왜죠?” 걸리가 물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왜 저희를 이렇게 만든 거죠?”


“대답해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세상에는 단지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레전드가 그녀에게 말했다. 목소리에 허무감이 섞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것도 같은 충동일 수 있겠죠. 그래도 53번들의 출현은 사실상 완전히 멈춘 상태입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본인이 죽었거나 약물이 다 떨어진 거겠죠.”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네요.” 걸리가 대답했다. 땅이 흔들렸다.


“그래도,” 레전드가 말했다. “맨튼의 행방은 알아냈습니다. 맨튼과 시베리안의 소환자가 동일인물로 밝혀졌어요. 드래곤과 디파이언트가 9인방을 쫓고 있습니다. 곧 전투가 벌어질 거라는군요.”


하지만 나는 내가 레전드와 함께 9인방을 내려다봤을 때의 기억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는 그때도 시베리안의 소환자를 알아봐 놓고는 내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뭔가를 숨기고 있을까? 그때처럼 거짓말하고 있을까?


“시베리안이 맨튼입니까?” 미르딘이 물었다.


레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53번들을 만든 장본인이 맨튼입니다. 다들 바라던 설명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된 거죠. 아시겠나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 말고 본 사람이 없는 건지, 태틀테일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눈치를 못 챈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틀테일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여유를 갖고 친근하게 굴 때의 미소가 아니었다. 은행 때 파나시아를 몰아붙이기 직전에 보여줬던 미소, 그리고 코일에게 승패가 어떻게 갈렸는지 설명할 때 보여줬던 그 미소였다.


나는 벌레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게 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하라는 뜻을 담은 채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하든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진 몰라도 레전드가 와서 말을 한 덕분에 상황이 정리된 것이었다.


태틀테일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내 벌레들에게만 느껴질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 그녀가 뒤늦게 말했다.


땅이 계속해서 흔들렸다. 이제는 진동이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미르딘이 내게 물었다. “방금 레전드가 콜드론에 대해 한 말을 하려던 거였나?”


“여행자들이 전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만 한마디 보탤게요. 트릭스터만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전부 우리 편이죠. 발리스틱, 선댄서, 제네시스한테 집에 보내줄 테니까 협력하라고 전하면 협력할 거에요. 지금 우리한테는 여행자들의 화력이 필요해요.”


“그렇게—”


벌레들의 감각에 에키드나의 몸부림이 잡혔다.


“완장!” 내가 슈발리에의 말을 끊었다.


“뭡니까?”


“경고하세요. 에키드나가 왔어요!”


그러나 뒤늦은 반응이었다. 에키드나와 함께 있던 그루 클론이 그녀가 파낸 구멍을 통해 나왔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어둠이 퍼져 나와서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히어로들을 뒤덮었다.


무너진 기지 아래가 아니었다. 신체 변형 능력과 그루의 순간이동을 이용해 옆길로 빠진 다음 주차장 밑으로 길을 뚫은 것이었다. 그곳이 공격의 시작 지점이었다.


에키드나가 그루가 만들어낸 어둠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몸높이가 전보다 두 배는 커져 있었다. 맨 위에 있는 사람의 몸이 작은 티끌 한 점으로 보일 정도였다. 삼 층 건물 위에 타 있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다리도 한층 강인해져 있었다. 벌레들의 감각에 잡혔던 앙상한 다리가 아니었다. 뼈로 된 껍질이 하반신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몸 앞에는 머리 두 개가 더 돋아나고 있었다. 하나는 입의 윤곽이 보였고, 하나는 커다란 눈 두 개와 주둥이 같은 덩어리가 보였다. 성장한 것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에 그녀의 발톱의 범위 안에 서 있었던 망토가 열 명이었다. 싸움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열 명이 붙잡힌 것이었다.


움직임을 추적하기 위해 레전드에게 붙여뒀던 벌레들이 있었다. 녀석들은 날아오른 레전드를 따라 알렉산드리아와 아이돌른에게 향했다. 녀석들 덕분에 레전드가 오랜 전우들에게 살짝 고갯짓을 하는 움직임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에 대한 의심이 내 안에서 확신으로 변했다.


나였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작가의말

[업로더 코멘트]


이전 연재 분량에서 스포일러성 댓글 몇 개를 삭제했습니다.


앞으로도 댓글이 스포일러성이라고 판단된다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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