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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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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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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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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8쪽

'재앙' 19.x (막간 : 블래스토)

DUMMY

레이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는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도시는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문손잡이를 만지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바닥이 꺼질 수도 있었고 천장에서 칼날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는 용기를 끌어 올린 끝에 문에 달린 고리쇠로 대문을 두드렸다. 옛날 빅토리아 시대 양식의 저택이었다.


문이 바로 열렸다.


“블래스토.” 어코드가 그를 맞이했다. “드디어 만나는군.”


“그래.” 레이가 대답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준이 높은 저택이었다. 소득의 구십 퍼센트를 장비에 재투자하지 않아도 돼서 좋겠네.


“가면은 없나?” 어코드가 물었다.


“그래.” 레이가 대답했다. 그는 얼굴의 한쪽 모서리를 접어 보였다. “균류야. 사람의 피부와 같은 질감으로 만들었지.”


어코드의 정교한 기계 가면이 그의 표정에 따라 움직였다. “고상하군.”


“아직 믿기 힘들구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도 있고 말이야.” 레이가 말했다. 그는 현관으로 돌아와 신발을 조심스럽게 벗어서는 문 오른쪽의 수납장에 올려놓았다.


“협력하기만 한다면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망할 나치들 같으니.” 레이가 말했다. “연구소가 통째로 날아갔어.”


어코드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오게.”


레이는 그를 따라갔다. 지나치는 방마다 서재와 응접실이 보였고, 오래된 가구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물건들이었고 싸구려나 주문제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어코드라면 이 집 안의 모든 물건을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각 방에는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 팀이라 하면 공통된 주제 같은 게 있는 법이었다. 코스튬이 똑같이 생겼거나, 무의식적으로나마 복장의 특징이나 품질이 비슷해지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는 어코드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결과였다. 그들은 모두 격식 높은 정장과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고,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은 윤이 날 정도로 손질되어 있었다. ‘코스튬’이라고 해 봤자 정장의 색과 옷에 달고 있는 배지, 그리고 표정을 가린 가면만이 다를 뿐이었다.


“저들처럼 차려입으라는 뜻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어코드가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네는 내 기준을 결코 따라올 수 없을 거로 생각하네, 그러니 난 최선을 다해 자네의 존재를 무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네. 이 건물 안에서는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말고, 나갈 때는 내 눈에 띄지 않도록 뒷문을 이용하게.”


“날 감금할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 아닐세. 이건 거래일 뿐이야. 내가 자네의 재기를 돕고, 그 대신 자네가 공동의 적을 제거하는 거래지. 내 영역 안에서는 부수적인 피해를 일으키거나 범죄활동을 벌이지 않도록 주의하게. 그리고 일이 마무리되면 자네가 내게 영역의 절반을 넘기게 되어 있지. 그걸로 끝을 내고 앞으로는 부딪힐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래.” 레이가 말했다.


“메냐, 스톰타이거, 크리켓, 룬, 오탈라, 니플하임, 그리고 무스펠하임이 표적일세. 모든 정보를 공유해주지. 알고 싸워야 하지 않겠나.”


“그래.”


“내 부하들은 내어줄 수 없네. 자네가 혼자 나서는 것이 거래의 조건이니까.”


“알았어.”


“말수가 적군. 질문이나 부탁은 없나?”


“풀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원 말인가?”


레이가 씩 웃었다. “말하자면 그렇지. 무슨 뜻이냐면—”


“알겠으니까 그만하면 됐네. 내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지정된 구역에서는 뭘 하든 상관없네. 하지만 나나 부하들은 약물을 제공하지 않을 거고, 어떤 경우에라도 취한 상태로 내 눈에 띈다면—”


“그래.” 레이가 끼어들었다. “알았어.”


“이쪽일세.” 어코드가 말했다.


어코드가 앞장섰고 레이는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굉장히 넓은 지하실이었다. 벽은 보이지 않았고 기둥만 보였다. 바닥은 미끄럼 방지용 고무 매트가 깔린 콘크리트였고, 유사시에는 고정할 수 있는 바퀴 달린 책상이 여럿 있었다. 각 책상에는 투명한 수납장도 달려 있었는데, 레이의 눈에 보이는 모든 수납장은 재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상시에 쓰는 연구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레이에게 익숙한 연구실은 몇 년에 걸쳐서 잡동사니가 쌓이고, 오래전에 낡아서 망가진 도구들이 가득하고, 몇 년을 버려둔 끝에 쓰기에는 너무 오래됐지만 버리기에는 너무 비싼 시약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슬라이드글라스에는 얼룩이 져 있고 걸핏하면 망가지는 장비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처음 연구실을 장만했을 때의 장비들도 대학에서 훔쳐온 싸구려들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꿈에서나 바라던 모습이었다. 그는 사람도 들어갈 만한 크기의 대형 유리 수조를 살펴보았다. 한쪽에는 시약을 주입할 수 있는 관로와 증류수가 담긴 듯한 용기가 있었고, 혼합 속도와 비율을 조작할 수 있는 제어판도 달려 있었다. 내용물을 자동으로 폐기 처분하는 관로도 있었다.


힐끗 둘러봤을 뿐인데도 없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온갖 화학 약품이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각종 장비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새것처럼 깔끔했다. 방 반대편의 동물 우리마저도 으레 있어야 할 짐승 냄새나 배설물 냄새 없이 깨끗했다. 고운 흙을 채워 넣은 대형 화분들도 보였다.


레이 안디노는 무생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가장 기본적인 재료들만으로 인조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약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무슨 명령이든 듣는 충성스러운 괴물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 연구실과 마주하자 자기 자신이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분명 자신 때문에 이곳이 더럽혀질 테고, 쓰다 보면 망가지는 물건도 있을 것이었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만족스러운가?” 어코드가 물었다.


“그럭저럭 괜찮네.” 레이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렇지. 추가로 입수한 샘플과 데이터도 있네. 원래는 자네를 이 도시에서 내보내기 위한 최후의 교섭 재료로 아껴 둘 셈이었네만.”


“무슨 소리야?”


“저쪽 구석에 있을 걸세. 데이터는 컴퓨터에 있고, 그 옆의 기계가 요청에 따라 샘플을 제공할 것이네.”


“그래.” 레이가 말했다.


“내 특사들이 교대로 자네를 관찰하겠지만, 긴급사태가 아닌 이상 내게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을 것이네. 첫 순서로는 시트린(Citrine)이 올 걸세.”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컴퓨터로 향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하고 귀중한 정보길래 그가 도시를 떠나게 만들 수도 있는 교섭 재료라는 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성능이 좋은 컴퓨터였다. 레이는 원래 연구실을 습격한 백인우월주의자들로부터 도망치며 간신히 건져 온 몇 장의 구겨진 설계도를 주머니에서 꺼내 펼쳤는데, 다 펼쳤을 때쯤에 이미 컴퓨터는 부팅을 마치고 대기 화면을 띄우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자가 보였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A: 데이터베이스 열람


B: 샘플 열람



그는 A를 입력하고 엔터 키를 눌렀다.


이름들이었다. 망토들의 이름이었다. 이름들이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그는 엔터 키를 다시 눌러서 출력을 멈췄다.


목록을 계속 위로 올리던 그는 어떤 이름을 찾아내고는 클릭했다.


블래스토, 본명 미상


분류: 팅커 6 (하위: 마스터 5, 블래스터 2, 시프터 2, 브루트 2); 식물


성향: 빌런 (B)


최종 목격 장소: 보스턴 (올스턴 동부)




2009년 4월 이후부터 올스턴 동부에서 범죄 행각을 벌임. 부하 없음. 조직에 속했던 이력 없음. 최대 전과는 2급 살인, 막대한 부수적인 재산 및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음. 증식과 통제가 불가한 생명체들을 만들어냄. 어코드(#13151), 스프리(#14755), 체인 맨(#14114)과 적대 관계.




주의: S급 위협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큼. 창조물들이 자가증식할 경우 척살령이 사전 승인되어 있음.




A: 추가 정보/이력


B: 추가 정보/능력


C: 추가 정보/인적 관계


D: 뒤로



데이터가 조금 손상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확실한 정보였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어코드가 PRT의 시스템 데이터를 손에 넣어서 그들과 접촉한 모든 파라휴먼에 대한 정보를 얻은 모양이었다.


척살령에 관한 내용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그는 그때부터 마지못해, 정말 어쩔 수 없이 증식이 가능한 생명체를 만드는 것을 피해왔었다.


“대체 어떻게 구한 거야?” 그가 물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서 있는 것은 어코드가 아니었다. 격식 높게 금빛 테두리를 두른 노란 실크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가면도 같은 색이었다. 이마의 보석이 두드려졌고, 귀에는 같은 보석으로 만든 귀고리가 샹들리에처럼 걸려 있었다.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있었다.


“제가 구한 건 아닌데요.” 그녀가 말했다.


“네가 어코드의··· 뭐라고 그랬더라?”


“특사요.”


“그랬지. 이름은?”


“시트린이요.”


“그래. 어코드가 이걸 어떻게 구했지?”


“그건 말해드릴 수 없어요.”


“안 말하는 거야, 못 말하는 거야?”


“네.”


그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컴퓨터를 보았다. 그는 D를 고르고는 상위 목록을 다시 띄운 뒤에 적당한 지점에서 멈췄다.


아이돌른.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추가 정보? 아무것도 없었다.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능력에 대한 추가 정보? 역시 없었다.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뜰 뿐이었다.


레전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덜 유명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슈발리에를 선택하자 기본 정보가 나왔다. 그는 추가 정보를 요청했다.


능력은 어떨까? 능력을 선택하자 몇 페이지에 걸친 실험 데이터가 나왔다. 레이는 결과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느낌이었다. 한 줄만 보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배경 지식을 갖추고 쭉 훑어보면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개별적인 요소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팅커의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연구와는 달랐다. 기술을 갈고 닦는 것은 연구가 필요했지만, 능력의 활용법 자체는 거의 정반대에 가까웠다.


좋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먼저 설정한 다음 가설을 세우고, 결과를 예상한 다음 실험을 해야 했다. 그걸 반복하고 반복해서 밑바탕이 되는 지식을 갖추고, 그걸 기반으로 추가적인 조건을 설정해 가설을 개선해야 했다.


하지만 팅커에게는 결과물이 가장 먼저 보였다. 순간적인 영감, 또는 주요 과정 중의 한 단계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 팅커들은 그 순간에 닿기 위해서 과정을 되짚어가면서 움직여야 했다. 레이는 슈발리에의 능력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정보를 보면서 자신의 능력이 작용하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과정을 통해 재현해낼 수도 있는 힘이었다. 대작이 될 것이었다. 이번에는 들개와 풀떼기를 합쳐서 만들 수는 없었다. 곰과 같은 모습이 필요할 것이었다.


어쩌면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슈발리에의 파일을 닫고 원래 화면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코드가 제공해준 샘플들을 살펴보았다.


하위 데이터베이스:


A) PRT (보호국, 워드) 샘플


B) 비-PRT (증거품) 샘플


C) 기타 샘플



더 조사한 결과 실상을 알 수 있었다. 어코드가 얻은 데이터베이스에는 PRT와 워드 구성원들의 DNA 정보도 담겨 있었고, 부산물을 남기는 몇몇 능력의 경우에는 물리적인 표본도 있었다.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C를 선택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여러 팅커와 마스터들이 창조한 생명체들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그의 창조물들도 등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목록에서 마지막 항목을 골랐다. 컴퓨터 오른쪽에 있는 밀폐 공간 속의 기계 팔이 미세한 샘플이 담긴 슬라이드글라스 하나를 꺼냈다.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아주 미세한 파편이었다. 시무르그의 깃털의 한 조각이었다.


“계속 조그맣게 오오, 아아, 그러고 계시네요.” 시트린이 말했다. “누가 보면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갖는 줄 알겠어요.”


“맞아, 그러는 중이지.” 레이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야? 지금 나한테 뭘 준 건지 이해는 하는 건가?”


“물론 그렇겠죠.”


뼈대만 튼튼하다면 슈발리에의 능력을 재현하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곰이나, 인간의 모습을 쓴다면. 하지만 이제 그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냈던 설계도들을 뒤지다가 봉투 모양으로 접혀 있는 종잇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찢어 열고는 툭툭 두드려서 내용물을 꺼냈다.


강낭콩만 한 크기의 씨앗들이었다. 양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하얀색과 갈색으로 얼룩진 씨앗들이었다. 그는 급하게 대형 유리 수조로 가서는 장비를 만져서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혹시 말이 많은 편인가요?”


“뭐?”


“사실 지금까지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걸 보니 의미 없는 질문인 것 같기는 하지만, 떠드는 걸 좋아하는 망토인지 조용한 망토인지 궁금해서 그래요.”


“조용해. 왜?”


“솔직히 말하자면 지루해요. 페이스북을 키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코드 밑에서 그러다가 걸리면 살해당한다고요?”


“재롱이라도 부리라는 건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네요. 그래도 뭐라도 주의를 돌릴 데가 있어야 시간이 빨리 가지 않겠어요?”


그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레이는 본인이 원해서 과묵해진 건 아니었다. 바깥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연구실에 머무르는 게 더 쉽다 보니 혼자 지내는 습관이 생겼을 뿐이었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진절머리가 났다. 브록턴 베이에서 온 나치들이 연구실 건너편의 건물을 점거하기 전까지는 그곳이 그의 안식처였다. 자신의 기술과 자신의 작품들에 집중하는 것으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작품이라. 설명을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근처에 있었던 사람 중에서는 그나마 이 여자가 가장 매력적인 편이기도 하고···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어색한 표정이었다. “우리 팅커들의 연구는 기술보다는 예술에 가까워. 과정 하나하나가 어떤 목표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지. 방금 그 샘플을 보고 목표를 정한 거야.”


“그게 뭔데요?”


“내 평소 방식은 알고 있겠지. 내 창조물들과 싸워 봤을 테니까.”


“네.”


“이 씨앗들은,” 그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씨앗을 집었다. “줄기세포와 같은 역할을 하지. 뭐든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어. 어떤 부족한 정보라도 메울 수 있지.”


“개구리 DNA로 공룡을 복원하는 것처럼요.”


“그렇지. 상당히 무식한 방법으로 정보를 채워 넣을 수 있도록 설계했어. 처음에는 서로 연결된 몸체 두 개를 만들 거야. 그리고 내가 생존력이 떨어지는 한쪽을 죽이면 다시 갈라져서 살아남은 쪽과 비슷하게 다음 세대를 만들겠지. 보통 둘에서 넷 정도를 만들 거야. 이런 식으로 하나만 남기고 다 죽이는 걸 반복하면 돼.”


“쓸만한 게 나올 때까지 말인가요.”


“바로 그렇지.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식물과 동물이 섞인 잡종을 만들 수 있고, 그걸 대충 적이 있는 방향으로 보내면 되는 거야. 아니면 간단한 명령을 학습시켜도 되지. 식물-쥐 혼종들을 보내서 반짝이는 물건을 모아 오게 한다던가.”


“그건 어떻게 하는 거죠?”


“영업 비밀이야.” 레이가 말했다. “그런 중요한 내용을 알려줄 리가 없잖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래요. 오늘 목표는 뭔데요?”


“자기 전에 일을 열댓 개는 벌여놔야지. 일단 가장 큰 건 종말초래자를 재현하는 거야.”


힐끗 보자 시트린이 얼어붙어 있었다.


“가서 어코드한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럴 필요 없어.” 레이가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 이런 샘플을 줘 놓고 내가 쓸 거란 생각을 못 했겠어?”


“제어가 안 된다면서요? 그럼 어코드도 제어할 수 없을 것 아니에요. 어코드답지 않은 짓인데요.” 시트린이 말했다.


레이는 잠시 멈칫했다. 확실히 어코드가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다른 가능성이 있나?


어코드가 이번 일이 끝나면 그를 살해할 생각일까? 레이는 페로몬으로 자신의 창조물들을 통제했다. 연구실과 그 주변 지역에는 페로몬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녀석들은 풀려나는 즉시 페로몬이 없는 가장 가까운 장소로 이동할 것이었고, 그가 어코드의 자택에 페로몬을 뿌린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그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치고는 너무 허술한 계획이었다. 어코드가 그 정도로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죽이려고 안달이 나 있나?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는 걸까?


“조용해졌네요.” 시트린이 말했다.


“생각 중이야.” 그가 말했다. “당분간은 조용히 좀 해줘. 저기 구석에 TV가 있으니까 그거라도 보던가.”


“안 돼요. 어코드가 화낼 테니까.”


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TV로 걸어가서 소리를 없앤 뒤에 자막을 켰다. “내가 켠다면 뭐라고 못 하겠지.”


“네.”


“그래.”


그는 컴퓨터로 돌아가서 다시 시무르그의 조직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자르기 힘들었고, 현미경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얇게 자르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결정 구조군.” 그가 현미경에 집중하면서 중얼거렸다. 40배로 확대하자 깃털의 구조가 마치 눈송이 같았다. 배율을 800배까지 올리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세포가 없었다.


깃털만 그런 건가? 손톱이나 머리카락의 케라틴처럼 죽은 조직인가? 그는 컴퓨터를 켜서 레비아탄의 ‘피’ 샘플을 불러온 뒤에, 슬라이드를 준비하는 작업을 기계 팔에 맡겼다. 액체인 만큼 피가 깃털보다는 다루기 쉬웠다.


레비아탄의 조직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액체로 가득한 수조에 소형 레비아탄을 키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베히모스의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영웅살해자는 반경 32피트 안에서는 무조건 맨튼 효과를 무시하는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잘 생각해야 했다.


레비아탄의 피도 깃털과 마찬가지였다. 결정 구조였다. 밀도가 높고 불투명한 결정이었다.


조직은 더 있었다. 살도 있었고, 피도 더 있었고, 털도 있었다. 손상된 조직도, 멀쩡한 조직도 있었다. 그는 각각의 샘플을 관찰했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모두 결정이었다. 세포가 없었다. 심지어 결정의 종류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부위로부터 채취한 결정보다 더 깊은 곳의 같은 부위로부터 채취한 결정 사이의 차이가 더 클 정도였다. 털과 피의 차이보다 같은 피 결정 사이의 차이가 더 컸다.


그는 씨앗을 조금 긁어내서 물을 더한 다음 시약과 시무르그의 깃털 샘플을 합성했다.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다. 양 끝이 꽃봉오리처럼 뭉치며 배아 같은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나는 사족보행이었고, 하나는 인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죽어 있었다.


이번에는 조직이 약해진 만큼 다루기도 쉬웠다. 결정들 자체는 생명을 만들어내거나 유지할 수 없더라도, 이 형태가 결정들로부터 수집한 데이터로 만들어진 형태라면 종말초래자가 어떻게 자기 몸을 유지하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순환계도, 기관의 발생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 만들어진 형태가 생존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애초에 생명 활동을 할 수 없는 형태였다.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는 미르딘의 조직을 꺼내서는 씨앗과 시무르그의 깃털 파편과 합성했다.


종말초래자의 샘플로 이것저것 시도해 본다니 미친 짓이었지만, 무언가 실마리를 잡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에너지와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살아있는 조직으로 종말초래자의 조직을 유지하면 될 것이었다. 그의 씨앗들이 연결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십 분이나 십오 분은 지나야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그사이에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었다.


마취한 원숭이에 그의 조직과 씨앗 하나를 더한다면 인조인간이 태어날 것이었다. 일반적인 지능 수준은 아주 멍청한 사람 정도겠지만, 화학, 생물학, 식물학, 그리고 기타 과학적인 지식은 그와 공유할 것이었다. 조수 역할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연구실이라면 조수가 필요했다.


남은 씨앗들은 복제를 위해 수조에 들어갔다. 앞으로 씨앗이 더 필요할 것이었다.


그는 시무르그-미르딘-식물 혼종이 만들어지고 있는 수조를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다리 대신에 날개가 있었다. 그는 레이저를 작동시켜 그쪽을 사멸시켰다. 한쪽은 팔이 네 개였지만 그중 두 개가 날개와 비슷했다.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수조에 전류를 흘려보내 발생 과정을 재시작했다. 다시 두셋으로 갈라질 것이었고, 하나만 남기고 없애면 될 것이었다.


어코드가 그의 지난번 연구실에 있었던 장비들을 참고해 이 장비들을 만든 모양이었다. 어코드 때문에 쫓겨났던 연구실이었다. 수조에 레이저가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밀폐성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문득 뭔가를 떠올린 그는 레이저를 가시광선으로 바꿔서 수조 벽면에 대고 발사했다. 그러자 작업물들의 이름이 글자로 떠올랐다. 씨앗을 피워내는 식물은 ‘재생’이었고, 두 번째 수조에서 자라고 있는 원숭이는 ‘호문쿨루스’였다.


반면 진짜 작품에는, 좀 더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었다.


모리건.


예술이었다. 그는 수조 안에서 자라나는 세 배아를 살펴보고는 둘을 사멸시켰다. 마치 가지치기와도 같았다.


TV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몸을 돌리자 시트린과 또 다른 ‘특사’가 TV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록색 셔츠를 입고 청동색 도마뱀 가면을 쓴 남자가 음량을 키우고 있었다.


“지금 일하고 있잖나.” 레이가 말했다.


“일이 생겼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남자가 말했다.


레이는 조바심을 내며 그쪽으로 향했다. 너무 지체한다면 성장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안 될 일이었다.


TV 화면 속에서는 기자가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게 왜 중요하다는 거야?


곧이어 화면이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을 비췄다. 철갑을 두른 거대한 기체 세 기가 일련의 무리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도살장의 9인방이었다. 그것도 이곳, 보스턴에 있었다.


기체 하나는 드론을 떼로 발진시키고 있었지만, 드론들은 나오는 족족 베여서 추락하고 있었다. 9인방 중에는 사람 가죽을 외투처럼 헐렁하게 걸친 사람도 있었다. 그는 거대한 기계 도마뱀의 등에 달린 수레바퀴가 모종의 흡인력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것을 막기 위해 가죽을 길게 늘여서 주변의 건물을 붙잡았다.


세 번째 기체는 시베리안에게 붙잡혀 박살이 나고 있었다.


고공의 또 다른 기체가 레이저를 발사하자 시베리안이 몸이 날려 광선을 막았다.


다음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레이저의 충격력 때문에 카메라맨이 넘어졌는지, 화면이 끊겼다.


레이는 코를 훌쩍였다. 드래곤의 작품을 보고 싶기는 했다. 그의 작품과 공통점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걸작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작업물이 우선이었다.


그는 결과물을 쓱 훑어본 뒤에 호문쿨루스의 가지 두 개와 모리건의 가지 하나를 쳐 냈다. 전기 충격이 발생 과정을 재시작했다.


이제 시무르그와 비슷한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깃털과 머리카락은 갈색이나 검은색에 가까웠고, 자웅동체였으며 피부색은 흰색보다는 반투명함에 가까웠다.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레이는 그것이 가느다란 실 같은 살점으로 연결된 채 절반으로 나뉘었다가 분해되고 재구축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짜 시무르그의 절반만 된다 하더라도··· 모든 걸 뒤바꿀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코드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레이가 종말초래자 샘플로 이런 짓을 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제어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나 무언가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페로몬이 있었고, 거부감을 느끼게 해서 피하게 만드는 페로몬도 있었다. 분노와 증오를 일으켜서 공격하게 만드는 페로몬도 있었다.


어코드가 페로몬들을 찾아낸 거라면 레이를 치워 버리고 그사이에 만든 창조물들을 자기 것으로 할 수도 있었다.


모리건이 성체가 되기까지는 하루 정도가 걸릴 것이었다. 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문이 닫혔다. 시트린이 올라간 것이었다. 도마뱀 가면을 쓴 남자는 TV를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고, 그는 결과물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제 모리건에게는 팔다리가 한 쌍씩 달려 있었고 날개는 흔적 기관처럼 퇴화해 있었다. 2개월 정도까지 발생을 이어간 다음 가지를 쳐낸 것이었다. 그는 내부 구조를 조정하기 위해 X선 검사와 조직검사를 시작했고, 이 생명체의 어디까지가 시무르그고 어디까지가 미르딘이나 식물인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가지들을 제거했다. 실수로라도 자의식이 생길 여지조차 없도록.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이능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생명체가 완전히 성장한다면 초능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계단 위의 문이 닫혔다. 도마뱀 가면이 물러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사고 친 건 없겠죠?” 여자가 물었다. 그녀는 갈라진 틈 사이로 허벅지를 드러내는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매혹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가면은 새까만 색이었다. 검은 수정과 가시들이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었다. 브로치는 검은 별이었다.


“잘 진행되고 있지.” 레이가 대답했다.


“작년에 당신이 만든 괴물한테 다리가 부러졌었죠. 구실이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뭐라도 한번 저질러 보세요. 부탁이니까.”


“사양하지.” 레이가 호문쿨루스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는 신호를 조정하고는 전극을 자기 이마에 갖다 댄 뒤에 데이터를 창조물에 전송했다.


작업을 끝마친 그는 액체를 배출하고 수조를 환기했다. 유리가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호문쿨루스가 고릴라처럼 주먹으로 땅을 짚으며 기어 나왔다. 녀석의 피부는 마치 나무껍질이나 딱지처럼 벗겨지고 있었다.


“영어 기억하나?” 그가 물었다.


호문쿨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인어는?”


녀석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이드를 폐기해. 전부 최고 위험도의 생체 폐기물로 취급해서.”


호문쿨루스는 고무장갑을 끼고는 초기 실험의 부산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레이는 모리건을 살펴보았다. 연령이 1개월을 지나가면 알람이 울리게 되어 있었다. 미르딘의 뇌 조직과 시무르그 조직의 현재 상태로 볼 때 자의식을 갖출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창문을 내다보자 어두워지는 거리의 모습이 보였다. 하루종일 이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문이 쾅 닫혔다. 그는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시간이 너무 빨랐다. 이번에 온 놈도 협박하는 말을 지껄일까?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TV에 처박혀 있었다. 몸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나 있었고, 온몸에 갈기갈기 찢긴 상처가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의 몸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도마뱀 가면이었다. 이번에도 시신이었지만, 찢겨 있지는 않았다.


계단을 내려온 여자는 기이한 체형에 기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소년 같은 모습에 지나치게 마른 체형이었고, 끈 없는 드레스는 상체에는 착 달라붙으면서도 다리 쪽의 옷자락은 느슨하게 흩날렸다. 긴 머리카락은 흰색이었고, 크게 뜬 눈은 동공과 홍채가 작았다. 입술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런데 팔이··· 팔에 기계장치가 쑤셔박혀 있었다. 팔이 정상적인 길이의 두 배에 가까웠고 손가락도 길쭉했다. 여자가 팔을 움직이자 불똥이 튀었고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두 번째 인물이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서 내려왔고, 맨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연구실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녀가 레이를 보았다.


“아는 사람이다!” 그녀가 말했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본소우.” 레이가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컴퓨터 버튼을 눌러서 모리건의 용액에 영양분을 투입했다.


“좋은 연구실이네요.”


“내 건 아니야.”


“이건··· 상당히 수준이 높네요. 계속 도망 다니다 보면 이런 게 그리워진다니까요.”


“예전 연구실은 이 정도가 아니었지.” 그가 말했다. 잡담으로 시간을 끌자. “이 사람은 누구야?”


“댐젤 오브 디스트레스에요. 제가 직접 개조했죠. 줄여서 댐젤이라고 부르면 돼요. 이제 능력도 잘 제어한다고요.”


“안녕 댐젤.”


댐젤은 그를 보고는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했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건 뭐예요?” 본소우가 물었다. 그녀는 모리건이 담긴 수조로 다가왔다.


“모리건.”


“시무르그처럼 생겼는데요.”


“맞아. 절반은 말이야. 나머지 절반은 미르딘의 조직에서 따 왔어. 복잡한 균 같은 게 연결 통로 역할을 해 주고 있지.”


“우와. 어떻게 그런 걸 한대요?”


“영업 비밀이야.” 그가 말했다. 댐젤이 쓰러진 TV를 들어 올려서 화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보스턴의 다른 9인방의 행적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답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요.”


“그렇지.” 레이가 인정했다. “하지만 작업물을 지키는 척이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팅커라고 할 수 있겠어.”


“그렇긴 하죠.”


본소우는 호문쿨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녀석의 배를 꾹 찔렀고 그러자 녀석은 그녀에게 으르렁거렸다.


지금 모리건을 풀어준다면··· 본소우는 호문쿨루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댐젤은 TV에 정신이 팔려있었으니···.


하지만 지금 풀어줬다가는 죽을 것이었다. 아직 너무 어렸다. 농축 용액 안에서의 이삼 초가 일주일 동안의 성장과 같았다. 네다섯 살까지는 성장시켜야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고, 그렇게 하더라도 이능관이 제대로 된 초능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였다.


계단 위로 또 다른 누군가의 발이 보이자, 그는 지금껏 살아오며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그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왔고, 내려올 때마다 그 인물의 모습이 점점 더 드러났다. 또 다른 9인방이라면 그는 죽게 될 것이었다. 어코드의 특사 중 하나라면···


그래도 아마 죽겠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온 남자가 주위를 살폈다. 그는 기사의 안면 보호대처럼 생겨서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는 최첨단 바이저를 착용하고 있었고, 그 바이저가 헬멧과 만나는 지점은 마치 도마뱀의 벼슬이나 용의 날개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든 봉을 앞으로 내밀어 펼쳤고, 봉은 터무니없는 길이의 창으로 변했다.


도마뱀 장식이라··· 도살장의 9인방과 싸우던 기계들이 드래곤의 작품들이었다면, 이 사람은 드래곤의 조수나 부하가 아닐까?


아니면 그녀 본인인가?


댐젤이 휙 돌아서며 손을 뻗었지만, 갑주를 입은 남자는 기둥 뒤로 몸을 감췄다. 댐젤의 능력이 기둥 주위의 공간을 찢어발겼다.


갑주를 입은 남자는 다른 엄폐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철제 책상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 움직임을 멈추고는 양발을 모아 책상을 걷어찼다. 날아간 책상이 댐젤을 덮쳤다.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남자가 창을 휘둘렀다. 창끝이 댐젤의 눈을 베고 지나가며 그녀의 시각을 앗아갔고, 이어서 그는 창을 거꾸로 쥔 채 휘둘렀다. 창 손잡이에 관자놀이를 맞은 댐젤이 능력을 다시 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가 창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뛰어올라 댐젤을 향해 달려들었다. 착지 직전에 그의 다리가 회색 안개에 둘러싸였고, 그는 그 다리로 댐젤의 등을 내려찍었다.


마치 허공을 가르는 것 같았다. 그의 다리는 댐젤의 몸을 너무나도 손쉽게 반으로 갈랐고, 그는 이어서 몇 차례의 발길질로 그녀의 머리와 어깨 한쪽을 소멸시킨 뒤에 회색 안개를 해제했다. 그가 발을 내려찍자 그 소리가 지하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본소우는 팀원의 죽음에도 그리 동요한 것 같지 않았다. “못 알아볼 것 같나요? 마네킹이 지목했던 사람이잖아요. 이름이 뭐였더라? 암즈맨? 암즈마스터?”


갑주를 입은 남자가 창을 그녀에게 겨눴다. “이제는 디파이언트다.”

“제가 자기 몸에 전염병을 엄청나게 심어 놨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디파이언트.” 본소우가 말했다. “제가 죽으면 몸이 폭발하면서 수천만 가지 병균이 터져 나올 거예요. 처리하기 곤란할걸요?”


“곤란할 것 없다.”


“저 하나 죽이겠다고 세상에 수천 가지 전염병을 퍼트리겠다는 거예요? 저 같은 여자애 하나 죽이겠다고?” 본소우가 활짝 웃었다.


“그래.”


“당신도 당할 텐데요.”


“차폐복이다.” 디파이언트가 말했다. 그는 창끝으로 갑주를 두드렸다.


“그래도 저 사람은 끔찍하게 죽을 거예요.” 본소우가 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빌런이다. 허용되는 손실이지.”


“이 동네 사람들은요?”


“주위를 스캔했다. 이 연구실 안의 대기는 바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검역 시설과도 같지.”


“다 계획이 있나 보네요?”


“그래.”


본소우가 레이를 힐끗 돌아보았다. “당신—”


디파이언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그의 창이 본소우의 가슴을 꿰뚫었다.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으윽, 시발.” 본소우가 신음했다.


디파이언트가 창을 휘둘러 그녀를 벽에 처박았다. 그 궤적에 휘말린 화학약품들이 선반에서 요란하게 굴러떨어졌다.


“왜—” 본소우가 말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디파이언트가 창을 들어 올려서 그녀의 머리를 천장에 처박은 탓이었다. 그는 이어서 창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왜···” 본소우가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다. 심장을 꿰뚫렸는데도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야. 혀를 깨물었네요. 왜 그렇게 멀찍이서 그러고 있어요, 아저씨? 가까이 와서 마무리하기는 겁나나 봐요?”


디파이언트는 대답하는 대신에 그녀를 다시 벽에 처박았다가 창끝을 철제 선반에 들이박았다. 허공에 뜬 본소우의 양발 밑으로 깨진 유리가 쏟아져 내렸다.


“겁쟁이같이!” 그녀가 남자를 도발했다.


레이는 문을 향해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도망치는 게 나을까, 남아있는 게 나을까?


본소우가 손을 뻗어 창대를 붙잡았다. 그녀는 가슴에 난 구멍을 통해 창대를 끌어들이며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웃고 있었다.


창대에서 칼날이 솟아나더니 프로펠러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가오는 칼날에 본소우는 앞으로 미끄러졌지만, 앞에서도 칼날이 솟아 나왔다. 그녀는 프로펠러 사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이거 마네킹이 하던 짓이잖아요! 따라 하는 게 귀엽—”


디파이언트가 창을 기울이자 본소우는 뒤로 미끄러졌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등이 칼날에 휘말렸다. 본소우는 창대를 잡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 칼날을 피하고는 계속해서 창대를 꽉 쥐었다. 디파이언트는 다시 창을 휘둘렀지만, 그녀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저기요, 식물 좋아하는 아저씨!” 본소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여기서 죽으면 당신도 죽는 거예요! 생각 좀 해 보시죠!”


레이가 디파이언트를 힐끗 보았다. 갑주 안에 있을 남자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떠한 빈틈도 없었다. 그는 갑주일 뿐이었다. 멈출 수 없는 집념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이어서 그는 회전하는 칼날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본소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레이가 말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고, 언젠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거나 자신을 알아주는 여자를 만나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아이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본소우의 죽음을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가 살아서 이룰 수 있는 어떠한 일보다도 그녀가 끼칠 피해가 더 크다고,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래.” 그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상관없어.


뭔가가 씹히는 소리가 났고 디파이언트는 고개를 홱 돌려 본소우를 보았다.


그녀가 침을 뱉자 침에 맞은 칼날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끊어져서 날아간 칼날 하나가 동물 우리를 강타했다. 칼날을 회전시키던 장치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제 디파이언트와 본소우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본소우는 다시 무언가를 씹었고, 그녀의 입이 산성 용액으로 녹아내리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녀는 마치 가래침을 뱉으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혔고—


디파이언트는 본소우의 뒤에서 회전하던 프로펠러를 해제하고는 무기를 크게 휘둘러서 그녀를 내던졌다.


그녀는 바닥에 착지하며 땅에 침을 뱉었다. 콘크리트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림없다.” 디파이언트가 말했다.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창을 휘둘렀다. 본소우의 몸이 둘로 잘렸다.


완전히 잘린 것은 아니었다. 사슬갑옷 같은 것이 척추를 감싸고 있었다. 같은 재질로 되어 있는 복부 장기들의 외피는 뚫은 창날이 척추는 뚫지 못한 모양이었다.


디파이언트가 몸을 돌렸다. 기계 거미가 계단을 통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창으로 거미를 꿰뚫고는 바닥에 짓찧어 해체했다. 곧이어 그는 창을 한 번 더 찔러서 환기구에 숨어 있던 기계 거미를 처치했다.


본소우는 기어가고 있었다. 다리가 잘리고 몸통이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피의 양이 비정상적으로 적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그녀는 앞치마에서 약병들을 꺼내 던졌다. 깨진 약병으로부터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자 디파이언트가 뒤로 물러났다. 안개가 점점 짙어졌고 디파이언트는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폐복이라면서! 레이가 생각했다. 그는 기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본소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뚫고 와!


그러나 디파이언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쩌면 저 하얀 가루의 효과를 잘 알고 있어서 피하는 걸 수도 있었다.


본소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는 뒤로 물러났다.


본소우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 주위가 어두웠고,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손에는 약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마개를 따려다가 손이 미끄러졌다.


다가간다면 당하겠지만, 그렇다고 막지 않는다면—


두 번째로 시도한 끝에 그녀는 약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녀는 레이를 향해 약병을 굴렸고, 그는 재빨리 그 약병을 오른쪽의 하얀 안개 안으로 걷어찼다.


그러나 약병이 굴러가며 남긴 액체가 그의 발밑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발이 묶여 버린 것이었다.


그는 본소우를 피해 선반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언가가 그의 발을 잡아챘다.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척추가 마치 꼬리처럼 유연하게 늘어나 있었다. 그것이 그의 발목을 휘감은 것이었다. 안에 장비가 감춰져 있었나.


하얀 연기가 서로 엉기며 거미줄처럼 끈적끈적한 가닥을 만들어냈다. 계단 쪽을 틀어막는 장애물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갇힌 디파이언트가 창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빠져나오는 속도가 느렸다.


안 돼. 안 돼.


레이는 그녀를 걷어차서 떼어내려고 했지만, 본소우는 그의 반대쪽 발도 붙잡았다. 그녀는 그의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키보드를 잡아당겼다. 머리 위에서 달랑이는 키보드를 벽에 밀어붙인 그는 모리건의 수조에 개방 명령을 내렸다.


수조를 미리 비우지 않은 만큼 유리가 내려가자 수조 안에 들어있던 용액이 그대로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본소우는 그의 가슴까지 올라와 있었다. 더 올라오지 못한 건 순전히 그의 발버둥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계속해서 쳐 냈다. 힘이 그렇게 세지는 않았지만 끈질긴 공격이었고 유연한 척추는 한번 붙잡은 것을 놓지 않았다.


손이 하나 더 많은 쪽이 유리했다. 그는 일어서려 했지만 일어설 수 없었다. 무게중심이 맞지 않았고,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용액이 전부 흘러나왔고, 모리건이 첫걸음을 내디뎠다. 겉보기에는 대여섯 살 정도였고, 시무르그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능력이 있다면 시무르그와 미르딘이 뒤섞인 능력일 것이었다.


그 순간 본소우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창조물에 눈을 돌린 탓에 허를 찔린 것이었다. 그녀는 그와 자신의 상체가 완전히 서로 맞닿을 때까지 자신의 몸을 끌어올린 다음 척추의 기계장치를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뼈와 기계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그의 목구멍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끼고 몸부림쳤지만, 들어오는 공기가 없었다.


모리건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사멸한 것이었다.


결정 구조였던 깃털이나 레비아탄의 피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형태로 자라난 것이었다. 실패한 실험이었다.


본소우의 척추에서 돋아난 주삿바늘들이 그의 척추에 꽂혔다. 순간적으로 목 아래의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감각은 바로 다시 돌아왔지만, 이제는 그녀가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상반신 전체의 무게가 그의 머리를 압박했고, 그는 입을 강제로 벌린 채 고개를 치켜들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얼굴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손을 새로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런 일이 일어나네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다리를 이식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감도 안 잡히는데.”


본소우는 그의 손을 자신의 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의사에 따라 그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그의 몸이 그녀의 눈에 디파이언트가 보이도록 옆으로 돌았고, 그의 손이 디파이언트에게 약병 하나를 더 던졌다.


그는 다시 컴퓨터로 돌아갔다.


“샘플. 증거.” 본소우가 중얼댔다. 그녀의 목소리가 일으키는 진동이 얼굴로 느껴졌다. 그녀의 척추에 있는 관으로부터 나와 그의 폐 속으로 흘러드는 공기에서는 매캐한 악취가 났지만, 그녀는 그에게 숨을 쉬게 했고 그는 숨을 쉬었다.


“크롤러.” 그녀가 말했다.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의 손을 휘둘러 샘플이 담긴 유리 시험관을 깨트렸다. 손이 베이는 통증에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그의 손을 움직여 로봇 팔이 들고 있는 샘플을 가져오게 했다. “마네킹.”


본소우는 자신의 손으로 샘플들을 모으며 그의 손으로는 자판을 두드렸다.


“번스카, 섀터버드···. 생각보다 저희가 현장에 남기고 간 DNA가 많네요. 윈터, 처클스···.”


디파이언트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으르렁거리듯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이스 가이, 머더 랫, 해쳇 페이스. 팀원이 참 많이도 바뀌었네요.” 그녀는 플라스틱 용기에 샘플들을 모아 담았다. “스크리머, 하빈저, 킹.”


레이는 숨을 참아서 질식하려 해 보았다. 머리와 입은 움직일 수 있었다. 의식을 잃는다면 그의 몸도 쓰러질까? 본소우도 쓰러질까?


“이 연구실을 못 쓰는 게 아쉽네요.” 본소우가 말했다. “쓸 수 있다면 복제 작업도 훨씬 쉬워질 텐데. 그래도 당신의 작업물은 본 적이 있으니까, 재현할 수 있겠죠. 이것도 가지고 있다면···”


그녀가 그의 손으로 자판을 두드렸고 유리 수조에서 용액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성장 수조의 씨앗들이었다.


“이 정도로 행운이 따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요.” 본소우가 말했다. “잭 아저씨가 그랬거든요. 세상이 제시간에 멸망해주지 않을 모양이니 자기가 조금 앞당기고 싶다고요. 그래서 조사를 좀 하고 실력 좋은 팅커를 찾아 나섰는데, 마침 당신이 제일 가까웠던 거예요. 물론 이런 대도시는 감시카메라가 문제긴 하지만···. 우와! 그레이 보이! 잭 아저씨의 첫 팀원 중 하나였대요! 재밌는 이야기도 진짜 많이 들었는데.”


그녀가 또 하나의 샘플을 담았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고는 모리건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만두죠.” 본소우가 말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으니까.”


본소우는 그의 손으로 자판을 두드려 모리건의 수조의 레이저를 작동시켰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샘플 한 상자를 움켜쥔 채 그녀는 레이의 몸을 움직여 지하실 뒷문으로 향했다. 어코드가 드나들 때 쓰라고 했던 문이었다.


아직 희망을 잃을 수는 없었다. 디파이언트도 기갑 기체를 타고 왔을 것이었다. 그 기체가 주위를 순찰하고 있다면, 디파이언트가 드래곤에게 연락해 공습이나 지원군을 요청했다면—


아니었다. 문 건너편에는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었다. 사다리는 새까만 어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녀가 디파이언트 쪽을 돌아보자 레이에게도 그의 모습이 잠시나마 보였다. 그는 여전히 붙잡혀 있었다. 다리의 흐릿한 안개가 점액질을 잘라내고 있긴 했지만,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점액이 그의 상체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건 발차기로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레이의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고는 새까만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실패했다.” 디파이언트가 말했다.


“상처를 입혔잖아요. 실패한 건 제 쪽이죠.” 드래곤이 대답했다. “몸을 빼낼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로봇 몸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그의 주위로 엉겨 있던 점액질을 녹여냈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우리가 얻은 게 있기는 한가?”


“조금 있다가 보여줄게요. 괜찮아요?”


“개조가 부족하다. 팔에도 나노 쐐기를 달아야겠어. 그랬으면 이길 수 있었을 거다.”


“그건 나중에 어떻게든 하면 되죠. 몸은 괜찮은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상황은 어떻게 됐나?”


“기체 둘이 파괴됐어요. 그리고 본소우가 뭘 가져갔는지도 모르고요. 잭이 팀원 일부를 데리고 도망쳤어요. 하지만 합쳐서 네 명을 처치했죠.”


“네 명이라.” 그가 말했다. “지금 움직여야 해. 부상자가 있는 만큼 놈들의 이동속도에도 한계가 있다. 지하철로로 들어간 본소우는 다시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새로 들어온 순간이동 능력자와 접촉한다면—”


“당신을 빼낸 다음 바로 움직일 거예요, 콜린. 제가 이 몸을 쓰지 않는다면 당신을 버리고 갈 수밖에 없고, 그건 당신도 저도 바라지 않는 일이잖아요.”


“너 혼자서라도 추적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성과는 있었어요. 격차를 좁히고 있다고요. 감시카메라에 잡힌 즉시 대응해서 몇 분 안에 출동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 수 있겠죠.”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증기가 작용하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이마의 금속이 그의 가면에 닿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얻은 건 많고, 잃은 건 적으니까.”


점액질이 녹기까지는 삼십 초가 더 걸렸다. 그녀는 팔을 풀었고 그는 몸을 움직여 남은 찌꺼기들을 뜯어냈다. 그들은 순식간에 지하실을 나와 엉망이 된 어코드의 저택을 통과했다.


밖으로 나오자 저녁 공기가 서늘했다. 콜린은 코스튬의 환기구를 열어 시원한 공기를 들여보냈다. 드래곤은 자신의 의체에 와닿는 바람의 감촉을 즐겼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는 우서와 그녀의 기체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콜린이 발걸음을 멈췄다. 드래곤의 기체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기체의 강철 턱에는 사람의 몸이 물려 있었다.


맨튼이었다.


“시베리안이 죽었다고?”


“시베리안이 사라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죽은 건 맨튼이니까요.”


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잘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우서의 선실이 열린 문으로 그를 맞이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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