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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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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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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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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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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5쪽

'여왕' 18.z (막간 : 심리치료사, 제시카 야마다)

DUMMY

[2011년 6월 16일 목요일, 22시 11분]


“몸 상태는 괜찮은가요? 필요한 건 없나요?” 제시카 야마다가 물었다.


“A··· 네.” 간호사가 말했다. 이 사람 이름이 뭐였지? 워드-로 시작했던 것 같았는데. 나이든 여성이었고 철자를 필요 이상으로 천천히 불렀다. “M··· 네. M, n, o, p, q, r, s, t, u···”


A··· M···


“이제 됐어요.” 제시카가 말했다. “알 것 같으니까.”


“그래도 끝까지 해야 해요.” 간호사가 말했다. “환자의 권리거든요. T, u, v, w, x, y··· Y. 세 번째 글자는 Y에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빅토리아.” 제시카가 말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빅토리아는 눈을 세 번 깜박였다. 알파벳을 달라는 뜻이었다. 간호사가 다시 철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빅토리아가 오른쪽 눈만을 뜨고 있었으므로, 알파벳은 뒷부분부터 시작했다. “M, n, o, p··· P, 네.”


빅토리아는 눈을 바꿔 떴다. 앞부분을 불러달라는 뜻이었다.


“A, b, c, d, e, f, g, h···.”


그녀가 다시 눈을 깜박였다.


“H. 네.”


“전화 말인가요?” 제시카가 끼어들었다.


빅토리아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긍정이었다.


“통화도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새장에 들어갔다고—”


제시카가 말을 멈췄다. 가슴이 점점 빨리 뛰고 있었고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 땀이 한 방울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간호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그만 하세요.” 제시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목소리가 떨리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새장은 본인의 뜻에 따라 들어간 거예요.” 제시카가 말했다. “그리고 그 뜻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비슷한 상황이 생겼을 때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험 때문이었죠.”


그녀가 눈을 세 번 깜박였다. 간호사는 꿋꿋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 “A, b, c, d, e, f, g, h, i··· I. 네.”


“빅토리아,” 제시카가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의 떨림을 숨길 수가 없었다. “능력을 해제해 주지 않으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빅토리아는 능력의 효과를 줄였다. 이제는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지는 정도였다.


“고마워요.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에이미를 어딘가에는 수용해야 했어요.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관계자가 같은 의견이었죠. 위험이 너무 컸어요. 통제도 치료도 불가능하고, 플라스틱도 금속도 뚫어버리는 병원체가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요.”


제시카는 간호사가 철자를 읊는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I. D. O. N. T. C. A. R. E.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다른 많은 사람과 상관이 있는 문제에요, 빅토리아.” 제시카 야마다가 내담자에게 말했다. “에이미 본인도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였죠. 에이미는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어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에요. 그녀에게도 관계자들에게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모두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다시 철자가 불렸다.


N. O. T. M. E.


‘저는 아니겠죠. 모두를 위해서라고 했으면서.’


“당신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다시 당신한테 능력을 쓰는 게 올바르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녀가 눈을 두 번 깜박였다. 부정이었다.


“그런···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나요?”


한 번. 긍정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눈을 세 번 깜박여 알파벳 판을 찾았다.


A. L. O. N. E.


‘혼자에요.’


“완전히 혼자가 된 건 아니에요, 빅토리아.” 제시카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다른 사람도 있어요.”


그녀는 이제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처음으로 돌아가죠. 뭔가 필요한 게 있나요?”


B. A. T. H.


‘목욕이요.’


“좋은 생각이네요.” 제시카가 말했다. “한번 마련해보죠. 또 있나요?”


그녀는 눈을 두 번 깜박였다. 부정이었다.


“화요일에 조금 더 오래 보기로 하죠.” 그녀가 말했다. “그 전에 이야기하고 싶다면 간호사분들에게 말해주세요. 전 주중이든 주말이든 24시간 내내 대기 중이니까요.”


그녀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제시카가 병실을 나섰다. 문을 닫자 틈새가 단단히 맞물리며 병실이 폐쇄되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죠?” 간호사가 물었다.


“진전이 조금은 있었네요.” 제시카가 말했다. 그녀는 재킷을 벗어서 가장 가까운 의자에 걸쳤다. 그녀의 등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땀에 절어 있었다. “견디기 힘들었어요.”


“많이 괴로워하고 있어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죠.”


“알아요. 앞으로 이야기해 나가면서 어떻게든 마음 상태를 나아지게 해 봐야겠죠. 이번에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뭔가를 줄 수 있게 되면 대화를 이어가기가 더 쉬워지죠.”


“그래도 정말로 원하는 걸 줄 수는 없을 텐데요.”


“하지만 목욕 정도라면 좋은 시작점이 되겠죠. 가능한가요?”


“네. 신체가 불편한 환자들을 위한 장비는 잘 갖춰져 있어요. 승강장치를 써서 욕조로 옮기도록 하죠.”


“부러질 염려는 없나요? 찢어지거나?”


“아니요. 보기보다 훨씬 튼튼한 몸이에요.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무적이라는 점은 예전 그대로죠.”


“그렇군요.”


“다음 환자는 누군가요?”


“스베타(Sveta)에요.”


“가로트(Garrote) 말씀이시군요. 보호 장구에 대한 설명은 이미 수백 번 들으셨겠지만—”


제시카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말을 안 할 수는 없어요. 아시겠지만 규정이 있잖아요. 이번에는 C형 강화 보호복을 입게 되실 거예요. 보호복은 내피와 외피로 구성되어 있고, 내피 쪽에는—”


“손바닥에 버튼이 하나 있죠. 바깥쪽 장갑에서 손을 빼고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중간중간에 간호사님이 제게 신호를 보낼 거고···”


“신호가 오면 버튼을 눌러서 문제가 없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긴급 상황의 경우에는 버튼을 두 번 누르시면 돼요.”


“지난 일곱 번의 상담 중에서 세 번은 그 망할 물건이 오작동하는 바람에 중간에 끊겼어요.”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안전 확인이 이뤄지지 않거나 긴급 상황이 생긴다면 저희 측에서 스프링클러를 통해 억제 거품을 투입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한 시간 동안 여기 갇혀 있어야 하겠죠. 보고를 위해서 문서도 네 장쯤 작성해야 할 테고.”


“가로트가 마지막 환자신가요?”


“아니요. 아직 니콜라스가 남아 있어요.”


“새드보이(Sadboy) 말씀이시군요.”


제시카는 수간호사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코드네임을 싫어했다. 내담자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느낌이었다. “네. 오늘은 거기까지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PRT 당번이에요. 일요일은 휴일이죠.”


“휴일 계획은 있으신가요?” 간호사가 물었다.


“그런 건 세우지 않은 지 꽤 됐어요. 항상 뭔가 문제가 터지다 보니.”


그들은 탈의실에 들어섰고 제시카는 보호복 내피를 뒤집어썼다. 내피는 몸에 딱 맞는 크기였고, 누군가의 땀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으며, 유연한 재질 위에 가는 철사가 엮여 있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 위로는 철심이 격자처럼 보호복을 촘촘히 감싸고 있었고, 관절 부위의 철심에는 경첩이 달려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지퍼를 올리자 철심이 목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쭉 이어졌다. 턱 바로 밑까지 오는 철심 탓에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가 없는 탓에 외피를 입기가 그만큼 어려웠다. 외피는 동물 잠옷처럼 통째로 한 덩어리였고, 차단재와 철망이 겹겹으로 쌓여서 무거웠다.


그녀는 실전에 뛰어들기 전에 먼저 정보를 갖추는 것을 선호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첫 정신병동 근무에 긴장한 그녀는 보호 장구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했었다. 장비에 적용된 특허를 찾아서 공개된 정보를 읽어볼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들어서는 하지 않게 된 행동이었다. 자신감이 붙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담자들의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된 뒤로는, 보호 장구를 설계하는 사람들이 대비를 잘 해 뒀을 거라고 대충 믿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직접 조사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버리는 것보다는.


무거운 외피까지 걸치자 마치 위험물 처리반의 복장 같았다. 보호복은 크고 두꺼웠으며 몸과 옷 사이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내장된 에어백이 부풀어 올라 그 공간을 채웠다.


그녀가 통로로 들어서자 그녀 뒤의 문이 닫혔다. 곧이어 앞쪽의 문이 열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벽에는 파도치는 바다와 아름다운 건축물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제시카는 그 양식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작고 투명한 탁자 위에 화구들이 놓여 있었고, 고양이가 발톱을 갈 때 쓰는 기둥처럼 생긴 것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단단히 못 박혀 있었다.


“나오세요, 스베타.”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습격에 대비했다.


스베타는 문 위에 잠복하고 있었다. 기다란 촉수가 보호복의 목 부분을 감싸며 순식간에 조여들었다.


보호복의 성능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제시카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심호흡하자.


아주 작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금속이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제시카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더 많은 촉수가 그녀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방 저편으로 휙 날아가 기둥 모양의 ‘침대’를 바닥에 고정하는 지름 2인치짜리 나사를 휘감는 촉수도 있었다.


“미안해요.” 스베타가 속삭였다. “정말 미안해요.”


오른팔을 휘감은 촉수가 팔을 따라 올라오며 손가락까지 감싸자 제시카의 팔에도 느낌이 왔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 당겨졌지만, 외피의 철망이 버텨준 덕분에 팔이 휴짓조각처럼 구겨지는 결과는 피할 수 있었다.


“이완 운동을 하세요, 스베타. 본능에 한꺼번에 맞서려고 하지 말고,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스베타는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비틀었고 모든 촉수가 더 거세게 조여들었다. 제시카는 금속으로 된 무언가가 망가지는 소리를 들었고, 부품 같은 것이 어깨를 때리고 지나가며 외피의 안쪽에 튕기다가 장화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침착하게. 목소리는 침착해야 해. “신체의 말단에 집중하세요. 힘을 줬다가, 풀었다가, 계속 반복하세요.”


다시 몸이 뒤틀렸다. 제시카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이 불량 장비를 그대로 반납한 사람을 저주했다.


“정말 미안해요.” 스베타가 말했다. “시도는 하고 있지만, 더 안 좋아지고 있어요.”


“천천히 해도 돼요.” 그녀가 대답했다. 버튼을 누르거나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라는 모든 본능적인 경고를 거부하고 나온 대답이었다. 지금은 그녀의 본능이든 스베타의 본능이든 본능이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스베타는 자신의 본능에 맞설 수 없을지라도, 그녀는 맞설 수 있었다.


스베타는 몸을 다시 비틀었고 압력을 견디지 못한 몸통 부분의 에어백 하나가 터져나갔다.


“아!” 스베타가 말했다. 에어백이 터졌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아차리자 촉수의 압력이 한층 강해졌다. “죄송해요, 야마다 선생님! 안 돼, 안 돼!”


“괜찮아요.” 제시카가 거짓말했다. 보호복이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어째서지? 분명 다른 병원 직원과 과격한 환자 사이의 몸싸움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이미 손상을 입은 상태였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안전장치가 이렇게 한꺼번에 망가질 리가 없었다.


보고가 빠진 탓에 손상된 보호복이 그대로 반납된 모양이었다.


“유리로— 유리를 사이에 두고 해야 했어요.” 스베타가 신음했다. “죄송해요. 선생님은 좋아하는데.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목표는 사회화였잖아요. 그러려면 사람과 꾸준히 접촉하는 수밖에 없죠.”


“제가 선생님을 죽이고 말 거예요.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될 거예요. 분명—”


“쉿.” 제시카는 속마음보다 훨씬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그녀는 순간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세요,’라고 말할 뻔했다가 정신을 다잡았다. “—잠깐 마음을 다잡으면서 이완 운동을 계속하세요. 힘을 줬다가, 풀었다가. 줬다가, 풀었다가, 말단부터 시작했다가 천천히 올라가는 거예요. 저를 보세요. 저는 걱정 안 해요. 이걸 입고 있잖아요. 저는 안전해요. 알겠죠?”


“ㄴ—네.”


“올해 초랑 비교했을 때 정말 많이 나아졌잖아요. 그걸 떠올려 보세요.”


“방금 보호복 안에서 뭔가가 망가지지 않았어요?”


“이건 다용도 보호복이에요. 방금은 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발동했을 뿐이죠. 용도가 다른 장비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시카는 내담자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런—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요.” 제시카가 그녀를 달랬다. “목표를 기억하죠?”


“크리스마스요?”


“저는 목표가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을 때 그걸 떠올린다고 했죠? 분명 당신이 있어도 위험해지지 않는 다른 환자들 몇 명이랑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사실 방금 그런 사람 한 명을 만나고 왔어요. 제가 새로 맡은 환자죠. 그 사람도 친구가 필요해 보이던데요.”


촉수 열댓 개가 마치 개구리의 혀처럼 순식간에 방 반대편으로 튕겨 나가듯 움직이며 ‘침대’를 휘감았다. 바로 다음 순간 촉수들은 마치 있는 대로 늘린 고무줄처럼 다시 수축했고, 스베타도 한순간에 기둥으로 날아가 매달렸다. 제시카는 풀려난 것이었다.


창백한 얼굴과 머리카락처럼 그 주위로 흐르는 가느다란 촉수들, 그게 스베타의 전부였다. 얼굴 뒤에서 뻗어 나온 가장 두꺼운 촉수에는 작은 내장 기관들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었다. 광대뼈에는 작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색으로 솜씨 좋게 새겨진 알파벳 ‘C’였다.


스베타는 조금은 진정했는지 기둥에 감겨 있던 촉수들을 약간 풀었다. 촉수들은 사람의 사지가 있을 법한 위치에 둥둥 떠 있었고, 장기들은 기둥의 ‘선반’에 걸쳐졌다.


“죄송해요.” 스베타가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제시카가 말했다. 그녀가 자세를 바꾸자 촉수 하나가 쏘아져 나와 그녀의 무릎을 휘감고 조이면서 비틀었다. 맨몸이었다면 무릎의 모든 힘줄이 끊어지고 종아리가 허벅지로부터 뜯겨나갔을 법한 힘이었다. 스베타는 움찔하며 눈을 잠깐 감았고 촉수는 다시 기둥으로 돌아갔다. 보호복은 버텨준 모양이었다. 상처는 없었다.


“그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주실 수 있어요? 새로 만난 환자에 대해서.”


“다른 환자들 이야기를 해 줄 수는 없어요. 다른 환자들한테 당신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는 것처럼요.”


스베타는 기둥을 더 꽉 붙잡았다. “알겠어요. 그 사람도··· 그 사람도 나쁜 사람이었나요? 저처럼?”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네. 전 사람을 죽였잖아요.”


“당신이 아니었어요. 능력이 한 짓이었죠.”


“그래도 제가 죽인 거예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면 되겠네요. 하지만 그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몇 가지 있으니 좀 있다가 시작하도록 하죠.”


“네.”


“그 사람은 슈퍼히어로였어요. 그 정도는 말해도 되겠죠.”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간호사들한테 듣게 될 텐데, 그러느니 나한테 듣는 게 낫지. “그리고 어떻게 꼼수를 써 볼 수도 있겠죠. 간호사를 설득해서 인터컴으로 그 사람 이야기를 해 주도록 해 볼까요? 물론 본인이 허락한다면요.”


스베타의 눈빛이 밝아졌다. “네. 부탁드려요.”


“장담은 할 수 없어요.”


“네.”


“일기는 계속 쓰고 있나요?”


스베타는 화구가 놓인 탁자에 있던 노트 하나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휙 집어서 가져왔다. 그녀는 그 속도 그대로 제시카에게 노트를 건넸다. 에어백의 완충 효과에도 불구하고 제시카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봐도 될까요?”


스베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촉수들을 이용해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였다는 의미였다.


스베타가 침대-기둥을 감쌌고 기둥이 S자로 구부러졌다. 무언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시카는 일기장의 최근 내용을 읽어보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과장되어 있었고, 주인이 감정이 격양될수록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걱정거리, 평범한 몸이 되는 상상, 벽화 속의 풍경과 같은 장소를 떠올렸을 때의 생생함, 평범한 몸으로 남자애와 침대에 같이 누워 있는 꿈을 꿨다가 깨고 나서 일주일 내내 우울했던 일···


제시카는 일기장을 닫았다. 딱히 특이한 내용은 없었다. 방금 보인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설명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게··· 왜 선생님은 절 무서워하지 않으시나요?”


“무서워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제시카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거짓말했다.


사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에요. 괴물 근처에 있었던 시간으로 따진다면 제가 레전드보다도 더 위라서 그런 거죠,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 정도는 무서운 축에도 못 든답니다.




[2011년 6월 17일 금요일, 10시 15분]


“사람이 바뀌었네요.” 붉은 머리의 남자애가 문을 닫고 들어오며 말했다.


“매번 바뀌어요. PRT 측에서는 상담사가 망토를 심리적으로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죠. 지역마다 서너 명의 상담사를 순환시켜서 그중 한 명이 나쁜 마음을 품더라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죠? 서로 믿음을 쌓을 수가 없을 텐데.”


제 말이요, 라고 제시카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요. 그런 걸 원하나요?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믿음 있는 관계를?”


“슬슬 시작되네요.” 그가 말했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기.”


“직업상 어쩔 수 없죠. 앉는 게 어때요?”


그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불러드리는 게 좋을까요?” 제시카가 물었다. “저는 가능한 한 본명을 쓰는 걸 선호하지만, 익명성이 있는 코드네임이 더 낫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어요.”


“클록블록커, 데니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저희 정체를 발설하면 사지가 찢기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거였죠?”


“그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가혹한 처벌을 받게 돼요. 긴 감옥살이는 물론이고 8년을 공부해서 얻은 의사 자격을 잃게 되겠죠. 당신은 조직의 시스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인 것 같네요. 사람들이 어디에 속해 있고,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런 것들을 무시하다 보면 언젠가 엿을 먹을 수밖에 없으니까.”


“만난 지 2분도 안 됐는데 치러야 할 대가에 관한 이야기가 두 번이나 나왔네요. 그런 것들을 걱정하고 있나요? 치러야 할 대가를?”


“아버지의 백혈병이 재발했어요. 고향의 삼 분의 일이 레비아탄 때문에 날아갔고, 종말초래자한테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동료가 죽었어요. 전부 지난 석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에요. 거기에 팀원이 한 명 더— 언더사이더들이 제 팀원을 납치했어요.”


“섀도우 스토커 말이죠.”


“네.”


“그 사건 때 저도 그분과 이야기를 해 봤었죠. 말을 끊어서 미안해요.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그랬을 뿐이에요.”


“그놈들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지 몰라도 감찰을 깰 정도로 사람이 망가져 버렸어요. 음··· 그렇게 전부 무너져가고 있죠. 저한테 소중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있어요. 방심해서 그렇게 된 사람도 있지만,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인 사람도 있죠. 이지스, 갤런트, 에이미, 빅토리아, 배터리, 섀도우 스토커···”


“섀도우 스토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팀원이었잖아요.”


“그랬죠. 하지만 생각이 그렇게 이어지는 걸 보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던 것 같은데요.”


데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입 밖으로 내면 좀 추잡하게 들릴 생각이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래도 되는 거죠?”


그녀는 조금 웃었다. “네.”


“야하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네다섯 시간씩을 똑같은 사람들이랑 보내는데 그중에 제 나잇대의 여자애는 걔밖에 없었거든요. 그렇게 예쁘면 계속 보고 싶어지게 되는 거겠죠.”


“그게 왜 추잡한 생각인가요? 누군가가 신경 쓰이는 건 십 대 남자로서는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걸까요? 아니요, 사실 그런 감정은 아니었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정말 싫었거든요. 하지만 그 모든 일을 당해놓고 소년원까지 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죠.”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무슨 뜻이죠?”


“치러야 할 대가와 일에 따르는 위험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잖아요.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운가요?”


“잘 모르겠네요. 아니요. 그런 걸 걱정할 거라면 그보다 더한 최후를 맞을 걸 걱정하겠죠.”


“더한 최후라고요?”


“망토들의 능력들이 있잖아요. 삼십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끔찍한 결말이 수십 가지는 새로 생겼다고요. 빅토리아와 에이미 자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들으셨나요?”


빅토리아라. 순간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생각을 방해했다. “네. 네, 들어본 적 있어요.”


“그런 거죠.” 데니스가 말했다. “그리고 도살장의 9인방 사건도 있고요.”


“무서운 세상이죠.”


데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은 잘 자고 있나요?”


“일이 일인 만큼 잠을 못 자진 않아요. 누우면 바로 기절하거든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 텐데, 식사는 잘 하고 있고요?”


“네. 물론 잘 챙겨 먹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야간 순찰 같은 것들 때문이죠.”


“그렇겠죠.” 제시카가 웃었다. “저도 일 때문에 힘들어요. 오늘은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기법들을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이미 잘 감당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사실 너무 바빠서 생각할 틈이 없어요. 그게 오히려 나은 걸지도 모르죠. 불안감이 아니라··· 다른 말을 써야 할 것 같네요.”


“그래요? 어떤 감정인가요?”


그는 멈칫했다. “모르겠어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설명이 잘 안 되더라도 상관없으니까요.”


“그게 뭐냐면··· 아마 다른 언어에는 그걸 나타내는 단어가 있을 텐데, 영어에는 없는 것 같아요. 절망감도 아니고··· 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지고 있는 것 같다고요?”


데니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죽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저희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항상 상대편보다 우리 편이 더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죠. 레비아탄과 싸웠을 때 사람들은 마치 우리 편이 이긴 것처럼 굴었어요. 실제로는 사상자 비율이 지난 9년 동안 있었던 전투 중에서 제일 낮았을 뿐이었는데도요. 9인방이 왔을 때도 놈들이 반절만 살아서 빠져나갔다는 이유로 이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하지만 그놈들은 아직 살아있잖아요. 무사히 탈출한 거잖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눈을 돌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죠.”


긴 침묵이 흘렀다.


“지난번 상담 때는 분노 조절 기법을 연습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기록에 남겨도 된다고 했었네요?”


“네.”


“그건 계속 연습하고 있나요? 아니면 어느 정도 조절이 되고 있나요?”


“이젠 괜찮아요. 그때는··· 아버지가 아프셨죠. 에이미가 치료해 줬어요.”


“그렇군요.”


“···후회되네요.”


“뭐가 후회되나요?”


“워드에 들어온 게 후회돼요. 규칙에 따르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게 후회되죠. 왜냐면···젠장,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덕분에 코스튬도 맞출 수 있었고, 이런 것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저와의 시간 말인가요?”


“네. 정신머리가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받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레비아탄이 쳐들어온 직후인데 교실에 갇혀 있어야 해요. 학교에 하루에 몇 시간씩은 있어야 한다고, 규칙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요. 거지 같은 상황이죠. 빌런들이 계속 이기는 게 그런 걸 신경 안 써도 돼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해가 안 돼요. 이해할 수 있었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죠. 왜 이렇게 돼 있는 건가요? 어째서 그 빌어먹을 놈들이 매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죠?”


“제가 대답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렇게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면 바라는 만큼 빨리 나타나 주지도 않겠죠.”


“그렇겠죠.”


“하지만 방금도 말했듯이 당신은 관찰력이 아주 우수한 사람이에요, 데니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열심히 찾는 걸 멈췄을 때 그제야 찾고 있던 것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더라고요.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해답을 얻을 기회가 오면 그때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어떨까요?”


“말장난이네요.” 그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녀가 똑같이 웃으며 말했다.




[2011년 6월 17일 금요일, 13시 01분]


“선생님?” 웰드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들어와요,” 그녀가 말했다. “다시 보니 반갑네요, 웰드. 꽤 오랜만이죠?”


웰드는 문을 닫으며 들어왔고 그녀가 미리 준비해온 보강된 의자에 앉았다.


“이름은 정했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웰드가 제 이름이죠.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모은 채 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그녀가 말했다.


“종말초래자가 있었고, 도살장의 9인방도 있었죠. 도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요. 도시 밖에서 오셨나요?”


“네.”


“이곳의 일이 뉴스에도 나오던가요?”


“나왔죠. 11시 뉴스를 틀면 매일 밤 브록턴 베이의 소식이 들려오는 것 같아요.”


“어떤 모습인가요?”


“무엇의 모습 말인가요?”


“도시 말이에요. 저희는 어떻게 그려지나요? 빌런들은요?”


“TV에 나오는 모습은 실제보다 안 좋아 보이죠. 히어로들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오고 있어요. 마땅히 그래야겠지만요.”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웰드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확신은 없어요. 도살장의 9인방이 달아난 뒤로 이제 닷새가 지났을 뿐이에요. 연기는 걷히고 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아요.”


“상황이 어떻죠?”


“모든 게 무너지기 전에 영역을 지배하고 있던 빌런들이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어요. 저희도 좋은 상황이 아니죠. 배터리가 목숨을 잃었어요.”


“저도 들었어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


“큰 타격을 입었어요. 빌런들은 자기들끼리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저희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런가요?”


“플레셰트는 곧 뉴욕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렇다고 새로 사람이 오는 것도 아니죠. 죽은 사람의 후임자도 온다는 소식이 없어요. 어쩌면 여기가 저주받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죠. 어차피 끝장난 도시에 와 봤자 진급이 막힐 뿐이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당신도 진급을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약간은요. 절 높이 올리겠다는 말도 나왔었어요. 괴물이지만 팔아먹을 수 있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말이네요.”


“제가 직접 들었던 말이에요.”


“그렇군요. 유감이네요. 동료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신경 안 써요. 정말로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죠.”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의 전화가 울린 것이었다.


“죄송해요.”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상황이 상황이라서—”


“완전히 이해해요. 어서 받으세요.”


그는 전화를 받았다. “웰드야. ···스키터가? 파리안한테··· 그래, 이해했어. 아니, 알겠다니까. 어디 한번 따라가 보자.”


그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가요. 팀을 이끌어야죠.”


“플레셰트로부터의 연락이에요. 실권을 쥔 빌런 팀이 자기 로그 친구에게 접촉했다고 하네요. 저도 이제··· 혹시 다음 주에 더 길게 약속을 잡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해 보죠. 가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문을 나서는 그의 등에 대고 외쳤다. “그리고 이름은 좀 제대로 된 거로 정하세요, 웰드!”




[2011년 6월 17일 금요일, 18시 01분]


“시발! 개 같은 년!”


“릴리—”


“시발! 시발!” 릴리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릴리, 부탁이니까 앉아 주지 않을래요?” 제시카가 물었다.


릴리는 걸음을 멈추고 의자 등받이에 팔을 기댔다.


“무슨 일이 있다는 건 알겠어요.” 제시카가 말했다. “제게 와 달라고 부탁한 것도 문제 될 게 전혀 없는 부탁이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당했어요.”


제시카는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요?”


“파리안이요. 스키터한테 당했어요.”


“그 로그 말이군요. 당신의 팀원에게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많이 다쳤나요? 생명에 지장은—”


“넘어갔어요.”


“넘어갔다고요?”


“포섭당했다고요. 발리스틱이 난장판을 벌이는 와중에 스키터가 찾아왔어요. 뭔가 꾸미고 있다는 티가 났죠. 태틀테일의 심리전이 분명했어요. 스키터는 당근과 채찍을 쓰기 시작했죠. 발리스틱을 채찍 역할로 해서, 자기 계획에 따르지 않는다면 발리스틱한테 죽을 거라는 식이었어요. 그렇게 판을 깔아놓고 파리안한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죠.”


“권력이었나요? 돈이었나요?”


“돈이었어요. 이십만 달러요. 그 돈이면 도살장의 9인방한테 난도질당한 파리안의 가족과 친구들이 수술을 받을 수 있어요. 파리안이 대학을 다시 다닐 수도 있죠.”


“큰돈이네요.”


“그래놓고 파리안한테 떠나라고 말했어요. 그것 때문에 너무··· 너무 괴로워요. 전 이 도시에 친구라고는 파리안밖에 없어요. 아니, 친구 이상이죠. 그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요. PRT 상담사들은 다 비슷한 느낌이라서···”


“이야기했었어요.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다고 했었죠.”


릴리는 등받이를 팔로 감싼 채 손목에 이마를 기댔다.


“본인한테는 그 마음을 고백했었나요?”


“아니요. 안 했어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절대로 못 하겠죠. 그랬다가 사이가 멀어진다면 정말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완전히 그쪽 편으로 넘어가 버리겠죠.”


“상대도 마음을 받아주는 것 같았나요?”


“몰라요. 어떨 때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제가 느끼는 감정만큼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죠. 그리고 전혀 아닌 것 같았던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죠. 용기를 냈을 때쯤에는 파리안의 가족과 친구들이 도살장의 9인방한테 죽임을 당하거나··· 살아도 산 몸이 아니게 됐으니까요. 제 마음 얘기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고요.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게, 지켜 주는 게 우선이었어요. 친구라면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 사람도 좋은 친구를 뒀네요.”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스키터가 쳐들어와서는··· 그대로 파고 들어와 버렸죠.”


“그건 어떤 의미죠?”


“설명도 못 하겠어요. 스키터와 서로 마주치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소름이 돋아요. 다른 사람 눈에 뭔가가 들어가 있으면 자기 눈도 가렵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물론 스키터의 경우에는 벌레 때문에 그런 거지만.”


“네.”


“그런 모습으로 말을 막 해요. 그것도 정말 이상주의적이고 순진한 소리를 하죠. 얼굴에 바퀴벌레 떼가 기어 다니는 모습으로 하는 소리가 어떻게 이상주의적이고 순진하게 들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다고요. 그걸 듣고 있다 보면 무심코 방심해버리고, 그렇게 되면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해버리죠. 사— 파리안이 그렇게 당했어요.”


“당신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나요?” 제시카가 물었다.


“그때는 속셈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말도 했죠.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나는 답은 두 가지가 있는데, 둘 중 하나겠죠.”


릴리는 문까지 걸어가서는 가지고 왔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가방을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게 뭐죠?” 제시카가 물었다.


“두 가지 답 중 어느 쪽이 정답인지 알려줄 물건이요.”


“그 두 가지 답이 뭔데요?”


“제 직감이 맞았고, 스키터가 태틀테일이 미리 준비해 준 역정보를 뿌렸을 뿐이거나··· 아니면 스키터 말이 맞았거나, 그 두 가지에요.”


“그 해답이 이 가방 안에 들어 있다는 건가요?”


“네.”


“봐도 될까요?” 제시카가 앞으로 나섰다.


“아니요.”


제시카는 움직임을 멈췄다.


“싫다고 말해도 되죠? 선생님도 제 물건을 뒤질 권한은 없잖아요.”


“네.” 제시카가 다시 등을 기댔다. “건드리지 않을게요.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모르겠어요.” 릴리가 말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그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파리안이 내린 선택은 바뀌지 않아요.”


눈물이 한 방울 흘렀고 릴리는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정말 바보 같지 않나요? 레비아탄이나 도살장의 9인방과 싸울 때는 멀쩡하게 버텨 놓고,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다니. 이런 것 때문에 집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래도 괜찮아요.”


“안돼요. 그렇게 한다면 다시는 코스튬을 입지 못하겠죠. 완전히 달라져 버릴 거예요. 버텨야죠. 강해져야죠.”


릴리는 강해 보이지 않았다. 제시카의 눈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실연을 당하고 집을 그리워하는 십 대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제시카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릴리는 그녀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릴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제시카에게서 떨어졌지만, 휴대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끝나지를 않네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받을 건가요?” 제시카가 물었다.


“못 받아요. 이런 상태로는.”


“제가 받아도 될까요? 규정 위반일지도 모르지만···”


“네. 그래 주세요. 하지만—” 릴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파리안을 만나러 갔다고는 하지 말아주세요. 몰래 간 거거든요.”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를 받았다. “야마다가 플레셰트 대신 받았습니다.”


“미스 밀리샤입니다. 트라이엄프가 병원에 실려 갔다고 플레셰트에게 전해주세요. 과민성 쇼크입니다.”


“어느 병원이죠?”


“맙소사,” 릴리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PRT 본부에 있는 병원이에요. 플레셰트가 위치를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본부에 있어요.” 제시카가 말했다. “그리고 바쁘시겠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제게 다시 연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죠.”


제시카는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이 건물에 있는 병원이에요. 트라이엄프가 당했어요.”


릴리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섰다. “어떻게 된 건데요?”


“과민성 쇼크에요.” 제시카가 대답했다.


“스키터군요.”


제시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표정이 굳어졌고 어깨가 곧게 펼쳐졌다. 방금 보여줬던 감정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가요? 남에게 보여도 될 모습인가요?”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릴리는 이미 가방을 잡아채며 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방을 나섰고 문이 쾅 닫혔다.


제시카는 릴리가 그렇게나 순식간에 페르소나를 바꿔 끼웠다는 사실에 너무 깊게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직업상 그럴 수밖에 없는 걸까. 그래도 미성년자인데, 약한 마음이 들 때는 그냥 약한 채로 있게 둬도 될 텐데.


오 분 뒤에 전화벨이 울렸다.


“미스 밀리샤입니다. 연락해 달라고 하셨죠?”


“네. 그게··· 오늘 당신이 이끄는 워드들의 절반을 만났거든요. 다들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압니다.”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다들 희망을 잃고 있어요.”


“압니다.”




[2011년 6월 18일 토요일, 09시 01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키드 윈이에요.” 남자애가 말했다. 코스튬 차림은 아니었다. 갈색 머리가 아직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씻고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내밀었고 제시카는 그와 악수했다. “클록블록커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이 바뀌었다고.”


“규정이죠. 트라이엄프는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무사해요. 회복됐죠. 어썰트나 다른 몇몇 사람들이 화가 많이 났어요. 진짜 거물들을 불러오겠다는데요.”


“이제 좀 안심이 되겠네요. 짐을 나눠 들 사람들이 생겼잖아요. 지금까지 무거운 책임을 지느라 힘들었을 텐데.”

키드 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모르겠어요. 드래곤의 장비를 보고 싶기는 하네요.”


“그렇겠죠.”


침묵이 흘렀다. 제시카는 그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캠던 선생의 기록에는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강하다고 쓰여 있었다.


“사실 아직도 저희가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키드 윈이 말했다.


“이야기하는 거죠. 여긴 안전한 곳이에요. 무슨 고민이 있든 말할 수 있는 곳이죠.”


“전 문제가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편인데요.”


“팅커는 내향적인 경우가 많긴 하죠. 하지만 누구든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답니다. 대신 장비 이야기는 안 돼요. 저도 개인적인 철칙이라는 게 있거든요.”


키드 윈은 머쓱하게 웃었다. “며칠 전에 카일즈 선생님께 모듈화 장비의 종류에 관해서 한참을 떠들었었죠. 끝났을 때쯤에는 오히려 선생님 쪽이 심리치료가 필요해 보였어요.”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나요? 지난 한 달 동안 힘들었을 텐데.”


키드 윈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없나요?”


“그런 건 저랑은 안 맞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부분이요?”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상담을 받거나 하는 거요.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모든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다가 생긴 문제들이었거든요. 그걸 그만두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죠. 그제야 부품들이 제대로 들어맞기 시작했어요.”


“부품이라는 건 비유적인 표현인가요, 아니면 장비 이야기인가요? 팅커와 이야기할 때는 구분이 잘 안 될 때가 있더라고요.”


“비유에요.”


“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신경 쓰는 걸 그만두고 나서부터 삶이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거군요. 하지만 저는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생각은 없어요. 당신을 틀에 맞추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상담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키드 윈이 말했다. “빠져도 되나요?”


“안타깝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게 되어 있어요. 왜 빠지고 싶은 거죠?”


“다른 길이 더 편하니까요. 조금 망가지더라도 차라리 저만의 길을 가고 싶어요. 다른 사람과 같은 길을 가는 것보다요. 제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마음이 편해졌죠.”


“그런 마음가짐이 워드에서의 업무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아니요. 전 규칙은 잘 따르고 있거든요.” 키드 윈이 자신감 있게 말했다. “우습죠. 얽매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으니까 오히려 규칙대로 하기가 더 쉬워졌다는 게.”


“전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얽매이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예를 들어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만약 제가 상담을 받는다고 했을 때, 제가 빌런들이 이렇게 날뛰고 있는 지금이 딱히 괴롭거나 열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다들 지쳐 나가떨어지고 있지만 저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선생님이 제가 그렇게 느끼지 않도록 설득하려 들 것 같단 말이죠.”


“저는 그렇게 할 생각은 없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뭔가를 물어보면,” 그가 물었다. “전 꼭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대답하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진 않아요.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라도 있나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요.” 그는 주머니에서 헤드폰을 꺼냈다. “차라리 삼십 분 동안 긴장 풀고 노트에 생각을 정리하는 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정신건강에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실제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11년 6월 18일 토요일, 11시 06분]


“어,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비스타라고 불러드릴까요, 미시라고 불러드릴까요?”


“비스타요.”


“비스타라고 부를게요. 만나서 반가워요.”


비스타는 의자에 앉았다. 편한 자세로 앉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등을 완전히 기대면 발이 땅에 닿지 않았고, 기대지 않으면 불편하게 앉아야 했다.


“거물을 불렀다면서요.”


“드래곤을 불렀죠.”


“확실히 거물은 거물이네요.” 제시카가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요?”


“네?”


“내려다보듯이 말하는 거요.”


“아니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요.”


“그렇게 들렸어요.”


제시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나요, 비스타?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나요?”


“여기서 지내셨나요?”


맥락 없는 말에 제시카는 순간적으로 허를 찔렸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일이 터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브록턴 베이에서 지내셨나요?”


“아니요. 저는 일 때문에 항상 옮겨 다녀요. 호텔에서 지내죠. 주말이나 휴가 때는 보스턴에 살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죠?”


비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말투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왜냐면 저도 사람들을 도우려 하고 있지만 그럴 수 없을 때가 더 많거든요. 저도 그런데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전혀 모르잖아요.”


“공부를 아주 오랫동안 했거든요.”


“멘토가 습격당한 사람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도 가르쳐주던가요?”


“트라이엄프 이야기인가요?”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는 건가요? 잘 몰라서?”


“제가 질문을 하는 건,” 제시카가 말했다. “당신만이 당신의 관점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어요. 직접 조사한 것도 있고, 당신의 동료들에게 들은 것도 있죠. 하지만 당신이 그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제가 알아야 할 건 당신의 의견과 당신의 관점뿐이에요.”


“흥.” 비스타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시카가 물었다. “그 모든 일에 대해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긋지긋해요.” 비스타가 말했다.


“그렇겠죠.”


“순찰을 나갈 때도 열네 살이 될 때까지는 혼자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항상 제가 다른 사람들이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요. 온갖 이야기를 다 하죠.”


“현장에서는 의무병이 의사의 역할을 대신하잖아요. 당신도 심리치료사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스타는 전혀 호응해주지 않았다. “내려다보지 마세요.”


“저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약속할게요.”


잠시 말이 끊겼다. 제시카는 가만히 앉아서 침묵이 흐르게 두었다. 갑작스러운 침묵도 유사시에는 내담자의 입을 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비스타는 마침내 말했다. “웰드는 제가 팀의 마음이라고 했어요.”


“웰드라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네요.”


비스타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섀도우 스토커는 도울 수 없었어요. 웰드 말로는 이미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다고 했죠.”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클록블록커와는 어떻게든 말이 통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언제 웰드한테 화낼까 조마조마했거든요.”


제시카는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시 다물었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 비스타가 고백했다. 그녀는 어디 말할 테면 말해보라는 듯이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어떻냐면··· 한편으로는 다들 힘을 합쳤으면 좋겠어요. 이지스는 죽었어요. 갤런트도 죽었어요. 배터리도 죽었어요. 벨로시티도 죽었어요. 던틀리스도 죽었고, 브라우비트도 죽었어요. 암즈마스터는 은퇴했어요. 섀도우 스토커는 감옥에 갔죠.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트라이엄프도 다쳤죠.”


“저였어도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제시카가 말했다.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사람을 잃어버렸죠.”


“저는··· 저는 팀이 단단히 뭉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을 뿐이에요. 모두 힘을 합쳐서 싸웠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하지만요?”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중 차가운 쪽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쪽은 그래 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뭉치려고 해도 뭉칠 수 없을 거라고, 한 명 한 명씩 끔찍한 짓을 당할 거라고, 친구들이 전부 죽을 거고 그중에서도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만 싸우다 죽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딱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에요. 무슨 상관인가요? 2년 뒤에는 세상이 멸망할 텐데.”


“그건··· 저도 들어봤어요. PRT 안에서 도는 소문일 뿐이고, 정식으로 발표된 건 아니지만요.”


“제대로 된 예지 능력자가 저희 쪽에 별로 없어요.” 비스타가 말했다. “그렇게 먼 미래에 대해서 의미 있는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괴롭나요? 친구들이 고통스럽게 죽고,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아니요. 냉정하게 생각하면··· 딱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세상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제시카가 말했다.


“그런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는 그쪽의 마음은 제가 죽을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머지않아 끔찍하게 죽을 거라고, 무슨 일을 해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죠.” 비스타가 말했다. “그런 상황이에요. 어디 한번 상담해 보시죠.”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도전장일까?


“네.” 제시카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디 한번 해 보죠.”


“정말로요?” 비스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네, 정말로요.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숙명론과 친구들을 돕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갈등보다 훨씬 심각한 사례들도 다뤄 봤거든요. 당신의 팀원들에 대한 정보를 발설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그 현장 심리치료가 더 효과적일 수 있도록 이런저런 기법을 알려 드릴 수는 있어요. 그쪽으로 무장을 잘 해 둔다면 머릿속에서의 줄다리기에서도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겠죠. 어때요, 한번 해 볼까요?”


비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2011년 6월 19일 일요일, 17시 39분]


제시카는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전화를 찾기 위해 주위를 뒤졌다. 피자 상자와 감자 칩 봉투를 옮긴 끝에 휴대전화를 찾아낸 그녀는 수신 버튼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침대에 몸을 다시 기댔고 TV의 소리를 껐다. 오직 피자를 받기 위해서 대충 걸쳤던 바지가 벗겨져서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네.” 그녀가 한숨을 꾹 참으며 말했다. “아니요, 바쁘지는 않아요. 그 환자는 리치먼드의 담당 아니었던가요? 교외에 있다고요? 맙소사. 알겠어요. 한 시간 안에 갈게요.”




[2011년 6월 20일 월요일, 12시 50분]


제시카는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토요일에 워드들을 만났을 때는 일이 대부분 해결이 됐다고 생각했었다. 드래곤이 오고 있었고, 기체가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였다.


일요일에 임무를 실패한 기체들이 도시를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그녀는 최소한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런 무력감을 느껴 본 건 처음이었다. 토론회를 습격한 미친 빌런을 막으러 워드들이 출동한 현장이 끔찍하게 잘못된 모양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사망자 수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적어도 워드들은 무사했다. 육체적으로는.


온종일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할 일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그녀는 불안감 속에 기다렸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옥상으로 올라가 인턴에게서 담배를 빌려 피웠다. 담배는 대학원생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06시 10분]


제시카는 다리를 흔들며 옥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담배는 다섯 대째였다.


“야마다 선생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깜짝 놀랐다. 평범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와. 세상에.


아이돌른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저··· 네.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전 주로 청소년들을 담당하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상담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옥상을 가로질렀다. 아래층 어딘가에는 히어로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언더사이더들도 와 있었다. 또 다른 위협이었다. 플레셰트의 말대로였다. 끝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워드들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직접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조언을 할 수 있냐고 비스타는 말했었지만, 그때 제시카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대답이 하나 있었다. 만약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었다면, 똑같은 압박을 받고 있었다면, 절대 객관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없을 거라고. 애초에 본인이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여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거라고.


이번에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돕고는 싶었지만, 그러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아이돌른이 찾아온 것이었다. 세계 최강의 반열에 들어 있는 사람이.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는 후드를 뒤로 넘겨 어깨에 걸쳤고, 가면의 끈을 풀었다. 빛나는 가면은 그녀의 휴대전화와 담뱃갑 옆에 놓였다.


겉모습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었고, 머리숱이 적었고, 코가 크고 눈썹이 두꺼웠다. 외모로 따지자면 못생긴 쪽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길에서 만났을 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존재감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대는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 없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갈 수 있는 그 힘은 엄연히 바로 옆에 있었다. 그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바로 이래서예요, 스베타. 그녀가 생각했다. 이래서 당신 근처에서도 침착하게 있을 수 있는 거죠. 이런 괴물들의 근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아이돌른이 아주 평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정말 드물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를 찾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밤이 늦었고, 요즘은 좋은 성직자를 찾기가 정말 힘들지 않습니까. 저는 사이코메트리로 당신의 지난 며칠간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라면 제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말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야? “저— 네.”


“제 능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류는 이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종말초래자를 상대할 때 놈들을 정말로 막을 수 있는,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둘뿐입니다. 사이언이 있고, 제가 있지요. 저희 각각이 다른 망토 일백 명, 혹은 그 이상의 몫을 할 겁니다. 이건 과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능력이 매일 조금씩 약해지고 있습니다. 파라휴먼들이 능력을 쓰기 위해 어떤 거대하고 끝없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것은 말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능력을 잃으면 사이언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죄송합니다.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안 돌아가네요.”


“괜찮습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두세 번만 결정적으로 패배해도 그걸로 끝이 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없다면 놈들은 더 자주 승리하게 되겠죠.”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야마다 선생님. 저는 싸울 때마다 잃어버린 힘이 손에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직 끌어내지 못한 잠재력이라던가, 새로운 우물이던가,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진심으로 싸울 기회가 너무나도 적다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네. 알 것 같아요.”


“저는 오늘이 그런 기회가 되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싸울 생각입니다. 진지하게 싸울 생각입니다. 이번 위협에 대한 정보를 고려했을 때 제가 실패하더라도 상황은 어떻게든 수습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전략 미사일 공격으로라도 매듭을 지을 수 있겠지요. 제가 없더라도 히어로들은 몇 주의 여유를 두고 다음 종말초래자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자기가 죽었을 때를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종말초래자가 상대라면 그런 도박은 하지 못하겠지만, 이번의 이 괴물이 상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이번에는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제가 죽거나, 상대가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그는 말을 이어갔다. “새로운 우물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럴 가치가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어차피 저는 그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겠지요.”


“그래도 다른 삶의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니에요.”


그는 회의감과 연민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제시카는 비스타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고, 그녀가 내려다보지 말라고 쏘아붙였을 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제시카가 말했다. “왜 절 선택했죠? 제가 무슨 역할을 하게 되는 건가요?”


“이제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제가 목숨을 잃는다면 선생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알아본 선생님이라면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는 남에게 제가 한 말을 발설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리고 제가 성공하더라도 말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녀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성직자셨다면,” 그가 말했다. “기도와 축복을 부탁했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행운을 빌어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행운을···”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행운을 빌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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