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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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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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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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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0쪽

'여왕' 18.y (막간 : 크루세이더)

DUMMY

“물고문은 어때,” 저스틴이 말했다. “CIA에서는 그렇게 하던데.”


“안돼요, 제발.”


저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애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 고문이라는 게 상대가 원해서 하는 건 아니잖아.”


“물고문은 물을 들이마셔서 잘못될 위험이 있어요.” 도로시가 말했다. 마치 옷 색깔을 고르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잘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죠.”


“그럼 불을 쓰지. 등이랑 가슴, 배부터 시작해서 말단까지 이어가는 거야. 면적으로 따지면 화상이 다른 어떤 고통보다도 심하다는데,” 저스틴이 말했다. “얼굴이나 겨드랑이, 발바닥까지 갈 때쯤이면···”


“맙소사.”


“흉터가 생긴다.” 신문을 보던 제프가 말했다. “감염될 수도 있지. 위험으로 치자면 물고문 이상이다. 치료하기도 더 힘들지. 의사한테 설명하기도 더 힘들고.”


“면도날은?” 저스틴이 제안했다. “그건 괜찮을 수도 있겠네요.” 도로시가 말했다. “전 면도날 잘 써요.”


“들었냐?” 저스틴이 물었다. “면도날 잘 쓰신대.”


“안돼요.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다른 방법은 많아요.” 도로시가 말했다. “이빨을 뽑는다거나, 손톱이나 발톱도 있죠. 거세, 강제급식, 골절, 쥐 떼, 채찍질···”


“고문 말고 다른 방법이요.”


“정신적인 방법인가,” 저스틴이 제안했다.


“격리,” 도로시가 말했다. “감각 차단, 약물. 커피에 크림 넣어드릴까요, 여보?”


“아니, 됐어.”


“베이컨이 다 됐어요. 둘은 와서 먹어요.”


저스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와라, 테오.”


소년은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들을 보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나 호텔 방 건너편으로 향했다. 도로시가 차려 놓은 상은 만찬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베이컨, 달걀, 잉글리시 머핀, 프렌치토스트, 딸기, 블루베리, 과일 샐러드가 있었다. 오렌지 주스도 있었고 커피와 차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베이컨을 내려놓자 각자의 접시를 놓을 공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여덟 사람이 먹기에도 많은 양이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저스틴이 테오를 데려와 앉히고 자리에 앉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도로시의 옷차림은 도망자의 복장이 아니라 면접을 보러 가려고 꾸민 사람의 복장 같았다. 그녀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으며, 화장에 귀고리까지 끼고 있었다. 제프 역시 아내와 마찬가지로 필요 이상으로 꾸미고 있었다. 그는 갈색 블레이저 위에 단추 달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긴 상태였다.


형편없는 연기야, 라고 저스틴은 생각했다. 매일같이 대본을 따라 하는 삼류 연기자처럼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지. 가족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 그리고 식탁에 앉아있는 남편.


그는 부부가 매일 똑같은 행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계나 마찬가지였다. 잠에서 깨고, 가운을 걸치고, 신문을 가져왔다. 도로시가 나오면 제프가 샤워하러 들어갔고, 그가 나올 때쯤에는 도로시가 화장을 마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옷을 갖춰 입은 뒤에는 주방으로 향했고, 도로시가 요리하는 동안에 제프는 신문을 읽었다.


하지만 항상 어딘가가 이상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여길 것들이 잊히거나 과장되어 있었다. 도로시는 항상 음식을 너무 많이 준비했다. 다른 사람의 허기를 잘 가늠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 저스틴이 알아챈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제프가 신문을 볼 때면 몇 분 동안 첫 장을 보다가 다음 장을 넘긴 뒤에 거기서 멈추고는 했다.


이제는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도로시가 음식을 요리하고 상을 차리는 데 드는 이삼십 분 동안 제프는 신문에 둘째 장과 셋째 장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저스틴이 신문의 내용에 관해 물어봐도 제프는 기억하지 못했다.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읽지 않을 뿐이었다. 기계처럼 매일매일 그는 사십 분씩 신문을 읽는 척을 하며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신문 그만 보고 아침 먹어요.’ 저스틴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여보. 음, 맛있는 냄새네.’


“신문 그만 보고 아침 먹어요.” 도로시가 말했다. 커피포트를 든 그녀는 제프 뒤로 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몸을 숙여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애정 없는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래, 여보.” 제프가 아내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음, 맛있는 냄새네.”


미친놈들. 보고 있는 내가 소름이 끼치네. 저스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가짜 웃음을 지으며 그릇에 음식을 덜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테오도 똑같이 음식을 덜었다. 웃지는 않았지만.


케이든이 침실에서 나왔다. 잠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대로였고 가운을 입고 있었다. 수수한 갈색 머리에 키가 작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도로시 슈미트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아스터는 지난밤에 잘 잔 모양이네.” 저스틴이 말했다. “우는 소리가 안 들렸어.”


“잘 잤지. 이동하면서도 생활을 규칙적으로 유지하기만 하면 돼.” 케이든이 말했다.


“테오의 촉발사건을 어떻게 일으킬지 이야기하는 중이었어.”


“알아서 오겠지.” 그녀가 말했다. “아직 이 년 남았잖아.”


“1년 11개월이에요.” 테오가 말했다.


케이든은 그를 힐끗 보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이미 일어났어야 해.” 저스틴이 지적했다. “부모가 능력이 있으면 더 쉽다면서. 테오는 카이저의 아들이고, 카이저는 그 올파더의 아들이잖아. 무려 3세대라고.”


“전 물려받지 못했을 수도 있죠.” 테오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니면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살아서 촉발할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지.” 저스틴이 반박했다.


“고문당하고 싶지는 않아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고문이라고?” 케이든이 물었다.


“생각해볼 만은 하지.” 저스틴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며 말했다. 일부러 케이든이 없을 때 했던 말이었다. “어떻게 하면 잭과 싸워야 할 때가 왔을 때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고 있었어.”


“고문은 안 돼. 테오 말이 맞아. 다른 방법이 있겠지.”


저스틴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루를 기다릴 때마다 능력을 훈련할 시간이 하루 줄어드는 셈이야. 하루가 아쉬운 상황인데.”


“도살장의 9인방과 잭 슬래시와 싸워야 하니까요. 싸우지 않는다면 사람 천 명이 죽겠죠,” 테오가 말했다. “저랑 아스터도 죽고.”


저스틴이 소년을 보았고, 그가 손이 하얘질 정도로 나이프와 포크를 세게 쥐고 있는 걸 보았다. 케이든은 프렌치토스트를 포크에 꽂아놓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녀가 가만히 있는 동안 메이플 시럽이 그릇 위로 흘러내렸다.


자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


“넌 좋은 핏줄을 타고났어.” 저스틴이 말했다. “올파더와 카이저는 브록턴 베이의 중심부를 지배할 정도로 강했지.”


“제가 능력을 얻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이야기잖아요.”


“정 안 된다면,” 케이든이 말했다. “우리가 9인방과 싸울게. 나이트, 포그, 크루세이더, 그리고 내가 힘을 합쳐서 말이야. 알겠지.”


저스틴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테오는 저스틴이 말하려다 말았던 말의 절반을 내뱉었다. “저번에는 안 싸웠잖아요. 떠난 게 잘못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안 싸웠지. 네 말이 맞아.” 케이든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막아주리라 생각했지. 히어로들, 언더사이더, 후크울프···.”


“하지만 실패했지.” 저스틴이 말했다. “잭은 그때 말했던 대로 할 거야. 그러니 우리한테는 시간제한이 걸려있지. 테오에게는 능력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해. 우린 9인방을 찾아서 막아야 하고. 게셀샤프트한테 가면 어떨까?”


케이든은 나머지 두 명을 힐끗 보았다. 도로시와 제프였다. 두 사람은 자신을 탄생시킨 조직의 이름에도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미국인 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오히려 도살장의 9인방을 돕지 않을지 걱정되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테오가 그놈들 방식의 능력을 받게 되는 건 달갑지 않아.”


“크리그를 통해 연락한다면···.” 저스틴이 말을 흐렸다.


“뭐?” 케이든이 물었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떨어트렸고 큰 소리가 났다. “그놈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도움을 줄 거로 생각하는 거야? 크리그한테 부탁만 하면 테오한테 능력만 준 다음 깔끔하게 관심을 끊어 줄 거라고?”


“아니.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그놈들은 사람을 무기로 만들어.” 케이든이 말했다. “그런 다음에 그 무기들을 어디에 배치해야 ‘대의’에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지 결정하지.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나이트와 포그가 새로운 명령을 받지 못한 이유가 있어. 연락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거나—”


“그렇지는 않겠지.”


“나이트와 포그가 죽었거나 행방불명되었다고 생각해서 잊어버렸거나.” 케이든이 말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알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저스틴이 말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럼 뭔데? 왜 이 둘을 나한테 맡겨 놓는 건데?”


“그게 자기들한테 이득이 되니까.” 저스틴이 답했다. 접시를 비운 그는 블루베리를 조금 덜고는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무슨 이득인데?”


“제국은 무너졌어. 선택받은 자들도 무너졌지. 케이든 앤더스와 순수한 자들이 남아있을 뿐이야. 게셀샤프트가 미국에서 조금이나마 영향력을 유지할 생각이라면, 그 수단은 너뿐이겠지.”


“난 그놈들한테 그걸 줄 생각이 없는데.”


“네 존재 자체가 그런 역할을 해. 네 명성과 네 업적이 있다면 게셀샤프트는 그걸 가리키며 ‘아메리카에서도 우리 대의가 실현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지. 넓게 해석하면 목적은 같으니까. 그래서 나이트와 포그를 네 곁에 남겨둔 거야. 그래야 네가 그 힘으로 성공할 테고, 혹시나 네가 대의를 거스른다면 보복할 수단도 남아있을 테니까.”


케이든은 도로시를 힐끗 보며 나이트의 민간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커피 더 줄까요?” 도로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부탁할게.” 케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잔을 내밀었다.


“당신은 어떤데요?”


저스틴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누구, 나 말이야?”


“당신의 생각은 어떻죠? ‘대의’에 대해서 말이에요.” 테오가 물었다. 저스틴은 ‘대의’에 실린 강세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아주 단순한 사람이야.” 저스틴이 웃으며 말했다. “스테이크와 감자요리를 좋아하고, 싸움이나 제대로 된 스포츠도 좋아하지. 야구나 미식축구 말이야. 좋은 여자가 있으면 더 좋고—”


케이든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저스틴을 노려보고 있었다. 질투보다는 모성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저스틴은 슬쩍 웃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미소였다. “—그리고 나는 그놈들이 세상을 다 망쳐놓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말인가요.”


“‘차이’가 있는 놈들 말이야.” 저스틴이 말했다. “호모들, 애자들, 깜둥이들. 카이저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어. 둘이서 이야기해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지. 카이저는 미국이 우리 거라는 것도, 그런 놈들을 들여오는 게 우리 땅을 더럽히는 거라는 것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어. 하지만 카이저는 너무 큰 그림에만 집중했지. 게셀샤프트와 협력하고 있었는데, 그놈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짓을 벌이고 있어. 그래도 끼리끼리 모일 수밖에 없는 법이지. 내가 카이저 밑으로 들어간 이유는 다른 데서는 동료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아서였어. 그러다가 퓨리티를 소개받았지.”


테오는 한때 의붓어머니였던 사람을 힐끗 바라보았다.


“난 케이든과 나야말로 잘 맞는다고 생각해.” 저스틴이 말했다. “카이저가 수십 년 앞의 미래를 그리는 선지자였다면, 퓨리티는 골목길을 누비는 탐정이라고 할 수 있지. 나한테는 그런 단순한 방식이 더 어울려.”


“그럼 게셀샤프트를 지지하지는 않는 건가요?”


“이해하지 못하는 건 지지할 수도 없지.” 저스틴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실은 네가 빨리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거야. 잭과 그놈의 사이코패스 패거리야말로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부류거든. 이번에 네가 져버리면 나도 엿 되는 거야. 그놈들한테 우리가 질 수는 없지. 너도 그 우리의 일원이고.”


테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그대로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좋든 싫든 말이야,” 저스틴이 작게 말을 더했다.


테오가 그를 힐끗 보았다. 그의 말을 놓치지 않은 듯했다.


다시 평소 목소리로 저스틴이 말했다. “고문은 안 된다는 거지. 안전하고 통제 가능한 환경에서 촉발사건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럼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네.”


케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은 됐어. 상은 도로시가 치우라고 하지. 아침 대련은 한 거야?”


저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샤워하는 동안 테오를 훈련 시키고, 내가 나오면 둘이 씻어. 테오의 능력에 관해서는 나도 감이 잡히는 게 하나 있어.”


저스틴은 접시를 들고 일어섰지만 도로시는 이미 하이힐 소리를 내며 식탁을 돌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접시를 가져갔다.


“그럼 따라와라.” 저스틴이 소년에게 말했다. “얼마나 배우고 있나 보자고.”


“큰 발전은 없어요.” 테오가 말했다.


“그렇겠지.” 저스틴이 대답했다. 그는 능력에 몸을 맡기며 자신의 신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신적인 세포분열이었다. 같은 옷을 입은 유령 같은 분신이 호텔의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분신을 두 개 더 만들었다. 하나는 소파를 그대로 통과해서 걸어갔다.


“사 대 일이라고요?” 테오가 물었다.


“9인방이 페어플레이를 해 줄 것 같냐? 자, 이제 말해봐. 1순위가 뭐였지?”


“자기방어입니다.”


“항상 방어가 먼저야. 그게 모든 무술과 호신술의 기본이지. 그리고 두 번째는 상황파악이야. 상황을 파악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언제 공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팔 들어. 자세 좀 보자.”


테오는 다리 사이를 넓히며 양팔을 들어 준비 자세를 취했다.


저스틴은 소년을 훑어보았다. 살은 조금 빠진 듯했지만, 이대로 계속 운동을 한다면 체격이 가늘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근육이 붙어서 우락부락할 것이었다.


하지만 저런 자세라니···


저스틴은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좆됐네, 그 천 명.




“하버드.” 저스틴이 말했다.


“이쪽이야.” 케이든이 말했다. 그녀는 아스터를 포대기로 안고 있었다.


“하버드 길을 안단 말이야? 놀랍네.”


“인터넷으로 찾아봤어. 이쪽으로 와. 공공장소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아.”


주위에 이십 대 초반 정도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여름방학 기간이었지만 캠퍼스는 사람이 많았다. 날씨는 따뜻했고 학생들은 짧은 소매 옷과 반바지, 그리고 짧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저스틴은 여자들 한 무리를 지나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힐끗 훑어보았다.


“저스틴,” 케이든이 목소리를 높였다.


“가고 있어.” 그가 말했다. 젠장.


그들은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도로시와 제프는 거점에 남아있었다. 이곳에 온 것은 케이든과 저스틴과 테오, 그리고 딸려온 아스터뿐이었다.


캠퍼스의 다른 건물들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진 탑이 하나 있었다. 저스틴은 케이든과 테오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입구에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파라휴먼학부’였다.


적절한 선택이었다. 이제 케이든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섰고, 케이든은 메모지를 확인하더니 9층 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아스터의 등 뒤에 있는 주머니에 메모지를 다시 집어넣고는 잠든 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빨리 들어갔다 빨리 나와야겠어.” 저스틴이 말했다.


케이든이 입술을 꽉 오므렸다.


“누가 우리 얼굴을 알아보고 경찰을 불렀을 수도 있으니까.”


“알아.” 그녀가 말했다.


“염병할 코일 놈.” 저스틴이 으르렁댔다.


케이든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과 머리카락에 약간의 빛이 스며들었다. 빛과 함께 떠오르는 머리카락도 있었다. 마치 물속에라도 들어간 것 같았다. “아스터가 있을 때는 말조심해.”


“지금은 못 알아듣잖아.”


“언젠가는 알아듣겠지.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


저스틴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거칠게 들어갈까, 부드럽게 들어갈까?”


“꼭 그렇게 표현해야겠어? 어쨌든 이번엔 부드럽게야.”


“그래.”


그들은 9층에서 내렸다. 케이든은 메모지를 한 번 더 확인했고 그들은 사무실을 찾기 시작했다. 방 번호가 뒤죽박죽이라 찾기 쉽지 않았다.


그들은 914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명패에는 ‘비소츠키 교수’라고 쓰여 있었다.


“비소츠키는 또 무슨 이름이야? 폴란드 놈인가?”


“파라휴먼 연구의 최고 권위자야.” 케이든이 말했다. “매사추세츠 지역에서는 일인자지.”


“보스는 너니까 마음대로 해.” 저스틴이 말했다. “난 분명히 미리 지적했어.”


“무슨 차이인데요?” 테오가 물었다. “일만 잘하면 상관없잖아요.”


“귀엽네.” 저스틴이 말했다. 그는 테오의 뺨을 쓰다듬었고, 테오는 그의 손을 밀쳐냈다.


케이든이 노크하자 문은 그대로 반쯤 열렸다.


나이가 많아 봤자 스물다섯 정도일 것 같은 청년이 회전의자에서 일어나며 귀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아. 안녕하세요?”


“질문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 케이든이 말했다.


“학생이 가족을 데려오는 경우는 없었는데요.”


“학생이 아닙니다.” 케이든이 말했다. 그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저스틴은 테오의 어깨를 꾹 밀어서 앞으로 내보냈다. 모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문을 닫고 문에 등을 기댄 채 섰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요. 강의에서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했다.


“학생 아니라고 했다.” 저스틴이 케이든의 말을 반복했다. 생각만큼 위압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청년은 두려움보다는 염려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면담시간이라 온 게 아니라고요? 젠장, 일주일에 이틀씩 하루에 세 시간을 가만히 앉아있었던 게 벌써 다섯 주짼데 처음 찾아온 사람이 학생도 아니라니.”


“당신이 비소츠키요?”


“아니요.” 청년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진짜 학생이 아닌가 보네요. 저는 조교예요. 교수님은 지금 학회에 가 계시죠. 피터 고슬리라고 합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잡지 않았다.


“시발,” 저스틴이 말했다. “전부 시간 낭비였잖아.”


“혹시 질문이 있으시다면···” 피터가 손을 떨구며 말을 흐렸다.


“촉발사건이요.” 테오가 조용히 말했다.


피터가 테오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최근에 능력을 얻은 건가요?”


“얻어야 해요.” 테오가 대답했다.


피터가 그들에게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지금···.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촉발사건에 대해 아는 걸 말해주신다면 설명해 드리죠.” 케이든이 말했다.


“그건··· 범위가 넓네요. 알고 싶으신 게 뭐죠?”


“겪는 방법이요.” 테오가 말했다.


“그거야 세상의 정부란 정부는 전부 찾아내려고 시도는 하고 있죠. 성공한 적은 없어요.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방법이 나온 적도 없죠. 성공한 사람이 있더라도 숨기지 않겠어요? 보호국이라면 어떻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무슨 방법을 시도했지?” 저스틴이 물었다. “그 정부들이.”


“뭐든지 했죠. 할 만한 건 다 해봤을 거예요. 약물, 납치, 고문, 지원자로 실험한 적도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했던 적도 있죠. 퀸즐랜드 실험에서는—”


“잠깐,” 케이든이 말했다. 피터가 말을 멈췄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도 실험했다고요? 그런데도 아무것도 안 통했어요?”


“가끔은 통했어요. 가끔 통하는 방법들이야 많았죠. 문제는 촉발사건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통제된 상황을 무너트린다는 거예요. 어떤 정부나 조직이 엄청난 인력과 수십만 달러의 자금을 동원해서 잠재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은밀하게 끌어들인 다음 촉발사건을 일으키려 해도···. 이백 번쯤 시도하면 한 번쯤 성공할 뿐이었죠. 그렇게 성공한다 쳐도 그중 반절 정도는 흥분한 파라휴먼 때문에 모든 게 난장판이 되어버렸죠. 성공이라기보다는 다른 형태의 실패일 뿐이었어요.”


“일관적으로 촉발사건을 일으킬 방법은 결국 못 찾았다는 겁니까?” 케이든이 물었다.


“그래요. 실제로 촉발사건이라는 건 인위적으로 일으키려고 하면 더 안 일어나요. 그 대상자가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말이죠.”


“그건 왜 그렇죠?” 케이든이 물었다.


피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론이야 있죠. 사람마다 필요한 촉발사건의 성격이 정해져 있으므로 특정 촉발사건을 유도하려 해도 의미가 없다는 촉발 특이성 이론도 있고, 특정한 촉발사건이 아니라 특정 시점이나 상황에만 촉발사건이 일어난다는 상황 특이성 이론도 있어요.”


“처음부터 다 정해져 있다는 거요?” 저스틴이 말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렇게 말하죠.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리고 다른 이론이라면··· 지적 개입 가설도 있죠.”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말해주시지.” 저스틴이 말했다.


“그렇게 무례하게 굴 필요가 있나요?” 피터가 말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인상을 찡그렸다.


“부탁이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말해주시지.” 저스틴이 말을 정정했다.


“설명 부탁드려요.” 케이든이 저스틴을 쏘아보며 말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능력 획득의 시기나 대상을 결정하고 있다는 가설이죠. 하위 이론도 있어요. 능력과 촉발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목적의식의 존재가 도출된다는 미학적 동치이론도 있고, 능력 자체가 지성이 있어서 자기들이 판단한다는 지적 이능이론도 있죠. 이쪽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론이에요. 다른 연구 분야로도 이어지는데, 그게—”


“이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저스틴이 끼어들었다.


“조용히 해. 지금은 뭐라도 건져야 하니까.”


“시간이 없어.”


피터가 그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이봐요, 솔직히 난 지금 당신들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이런 데 관심을 가진다는 건 분명 기쁜 일이지만, 아들이 능력을 원한다고 촉발사건을 일부러 일으키려 드는 건 좀 이상하다고요.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건 사실상 아동학대에요.”


“복잡한 상황이에요.” 케이든이 말했다. “이론 말고 촉발사건에 대해서 또 뭐가 있죠?”


“촉발사건의 내용이 얻게 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쳐요. 이건 신입생도 아는 사실이죠. 육체적인 고통이나 육체적인 위험을 겪으면 육체적인 능력을 얻고, 정신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위기를 겪으면 정신에 엮인 능력을 얻죠.”


저스틴은 표정을 구겼다. 그럼 반병신으로 죽어가는 귀머거리 여동생한테 관심을 전부 빼앗긴 오빠는 어떻게 되나? 그 여동생한테 돈이고 정성이고 다 쏟아붓고, 그년을 살려보겠다고 나한테 수술을 강요해서 내 수명을 몇 년이고 깎아 먹은 부모 밑에서 큰 오빠는? 뽑아봤자 경보가 울릴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생명유지장치의 전원을 뽑았던 오빠는 무슨 능력을 얻지?


자신의 능력이 정신적인 능력이었던가? 그는 항상 육체적인 능력으로 여겨왔었다.


그는 케이든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았다.


피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케이든의 질문에 대답하는 모양이었다. “약물은 조건부 능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죠. 완전히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사용자의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상태와 관계가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능력이 처음 생길 때 능력의 형태가 정해진다는 게 중론이죠.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촉발사건을 겪는다면, 그때의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능력은 더 효과적으로 작동해요. 특정한 감정이나 약물에 의해서 능력이 강해진다는 거죠. 촉발사건을 인위적으로 일으키려던 사람 중에는 이 사실을 이용해서 대상자를 통제하려던 사람들도 있었어요.”


“어쩌면 굶주림이 그런 조건부 능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네요.” 케이든이 말했다.


“지금··· 지금 아이를 굶기겠다는 건가요?” 피터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니요. 조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저스틴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 시절에 소문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운전을 처음 하는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옆길을 타고 가다가 굴러떨어졌다고 했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 물도 음식도 없이 갇혀서···


무언가를 흡수해야 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빛이었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피터’라는 인간이 진짜 전문가인 것 같다는 뜻을 말없이 나눈 것이었다.


“파라휴먼의 자손으로 태어나면 무슨 영향이 있죠?” 그녀가 물었다.


“음··· 관심이 있으시다니 다행이고, 제가 딱히 하던 일이 있던 것도 아니지만, 이 정도로 질문이 많으시다면 그냥 강의를 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아이도 파라휴먼의 아들이에요.” 케이든이 테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못 숨기겠군.


“진짜요? 놀랍네요. 누구죠?”


“카이저요.” 케이든이 말했다.


피터가 테오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케이든과 저스틴은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래.” 저스틴이 말했다. “똑똑한 친구가 이제야 알아차리네.”


“뉴스에 나왔었죠. 분명 어디선가 봤다고 생각했는데, 퓨리티와···”


“크루세이더지. 그럼 이제 우리가 아주 진지하다는 것도 알 테고, 강의를 들을 마음도 없다는 걸 알았겠지?”


“아이가 카이저의 아들이고, 카이저가 올파더의 아들이라면··· 3세대군요.”


“그런데도 능력이 없어요.” 케이든이 말했다. “빠르게 고쳐야 할 문제죠.”


“그건··· 모르겠네요. 2세대가 능력을 열 배는 더 쉽게 얻는다는 건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3세대에 대해서는 데이터가 없죠. 3세대 망토가 처음 나온 것도 최근의 일이에요. 토론토에서 아기가 능력을 얻었었죠.”


“그 이야기는 못 들었었는데요.” 케이든이 말했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기라고요?”


피터가 아스터를 보았다. “아, 그러네요. 아기도 3세대인가요?”


“집중 좀 하지?” 저스틴이 말했다.


“그··· 그러죠. 세대를 거듭할수록 망토의 나이가 어려져요. 필요한 촉발사건의 강도가 낮아지니까 그런 거겠죠.”


“그럼 저는 왜 이런 거죠?” 테오가 물었다.


“모르죠. 모르는 게 많아요. 그냥··· 그냥 능력이 없는 걸 수도 있고.”


“있어야 해요.”


“이건 운의 문제인데.”


“그 뜻이 아니에요. 제가 능력이 없으면 사람들이 많이 죽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상관없어.” 저스틴이 말했다. “가진 정보를 전부 말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시도해 왔던 모든 방법과 그 방법들이 전부 어떻게 됐는지.”


“그것만으로도 한 학기짜리 강의에요!”


“말을 빨리하면 되겠네.” 저스틴이 말했다.


“음. 명상도 있어요. 무의식에 접촉하거나 최악의 공포와 마주하는 거죠. 능력 자체가 지성이 있어서 촉발사건 전이나 후에 이미 숙주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는 이론이 있어요. 명상도 그거랑 관련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2차 촉발사건을 원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죠.”


“그건 이 애랑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저스틴이 물었다.


“관련이 있는 연구에요! 2차 촉발사건에 관한 연구가 많은 이유는 거기에 자원하는 파라휴먼을 구하기가 잠재적인 파라휴먼을 찾아내기보다 쉽기 때문이죠. 시도하는 방법도 다들 비슷해요. 문제는··· 보통은 정반대되는 이유로 실패한다는 거죠.”


“정반대라고요?” 케이든이 물었다.


“확실한 건 아니에요. 이론일 뿐이죠. 능력이 자체적으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 있죠? 2차 촉발사건이라는 건 그 존재와의 소통을 늘려서 능력을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걸 수도 있고, 능력을 제어하는 변형된 뇌 조직과 일반 뇌 조직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걸 수도 있어요.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렇죠. 문제는··· 이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2차 촉발사건을 겪은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촉발사건이라는 게 연속으로 두 번 빠르게 일어나는 거랑 한 번 일어난 거랑 구분이 잘 안 되거든요.”


“오르가슴처럼 말이지.” 저스틴이 말했다. 케이든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셈이죠. 사실 비슷한 점은 그것 말고도 더 많아요.”


“크루세이더 말이 맞아요. 이건 애한테는 도움이 안 되겠죠.” 케이든이 말했다.


“카이저나 올파더는 어떻게 능력을 얻었죠?”


케이든과 저스틴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르겠네요.” 케이든이 말했다.


피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도움이 됐을 텐데요. 적어도 그 두 사람이 비슷한 능력이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올파더는 허공에 강철 무기를 만들어내서 날릴 수 있었고, 카이저는 주위의 단단한 표면으로부터 금속을 뽑아낼 수 있었죠. 두 경우 모두 거의 순수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나올 법한 능력이에요. 그 추세가 계속된다면···”


그는 말을 흐렸다. 테오도 정신적인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카이저가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게 상상하기 힘드네.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 보였는데.”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아버지가 올파더였는데.” 저스틴이 별생각 없이 말했다. 여대생들을 떠올린 그는 이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까 싶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바싹 얼어붙었다.


“케이든.” 그가 말했다.


“왜?”


“경찰이야. PRT 밴도 왔어.”


“누가 우릴 알아봤다고?” 케이든이 물었다.


“그리고 이 건물에 들어오는 것까지 본 모양이야.” 저스틴이 말을 마쳤다. “지상에서 우릴 포위하고 있어.”


“빌어먹을!” 케이든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스터가 끙끙대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스터 앞에서 말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라고 저스틴은 생각했다.


테오는 의자에 앉은 채 양손을 무릎에 올리고 케이든을 바라보며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스틴은 테오의 긴장한 자세와 움츠러드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이저와는 전혀 닮지 않은 뚱뚱한 남자애였다. 카이저의 아들이 아니라서 능력을 물려받지 못한 건 아닐까.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워서 이 펑퍼짐한 놈을 낳은 거라면 능력이 없는 것도 설명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녀석은 3세대는커녕 2세대도 아니었다.


“흠.” 저스틴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PRT 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케이든의 포격에 대비하기 위해 넓게 퍼져 있었고, 비행 능력자를 상대하기 위해 쓰는 망할 거품 그물 발사기를 갖추고 있었다. “테오, 어머니가 누구냐?”


“히스요.”


저스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히스는 페냐와 메냐의 사촌이자 보호자였다. 카이저의 첫째 부인인 그녀는 오래전 브록턴 베이에서 있었던 티스(the Teeth)와의 항쟁에서 목숨을 잃었었다. 적어도 엄마 쪽은 능력자겠군.


테오가 사생아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있을 일이 조금은 쉬워질 것이었다.


“크루세이더,” 케이든이 말했다. “시간을 좀 끌어 줘. 아직 질문이 남아있으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고 능력을 끌어올렸다.


가만히 선 채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유령 같은 분신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계단으로 향했다. 나머지는 바닥을 뚫고 하강했다.


“또 뭐가 있죠? 쓸 만한 거로.” 케이든이 말했다.


“경찰이 와 있다면 말하는 게 맞는 일일지 모르겠는데요.”


“말하는 게 좋겠지.” 저스틴이 말했다. “좋게 말할 때 말이야.”


“그러지 마요.” 테오가 말했다.


저스틴은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순순히 도와줬잖아요.” 테오가 말했다.


“네 문제는 해결이 안 됐어.” 저스틴이 말했다. 그는 적과 싸우고 있는 분신들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분신 하나가 계단을 막고 있었다. 분신에는 어떤 타격이나 총탄도 통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계단 아래로 밀치거나 목을 조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피터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해답을 주고 싶어도 해답이 없다고요!”


“알아내.” 저스틴이 말했다.


“세계 최고의 연구자들이 삼십 년 동안 알아내지 못한 걸 오 분 안에 알아내라고요?”


“잘 요약했네.” 저스틴이 말했다. 분신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며 바닥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건물 밖에서 밴과 포탑을 운용하는 대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분신들도 있었다. 운이 따라준다면 그와 케이든은 아이들을 데리고 날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건··· 이건 미친 짓이에요! 뭘 더 말하라는 거죠? 최신 이론이라면 이미 전부 말했는데!”


“만족스러운 답이 안 나온다면,” 저스틴이 피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가기 전에 널 죽일 거다. 그 사실을 떠올린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케이든,” 테오가 말했다. “설마 죽이게 둘 생각은 아니겠죠?”


“크루세이더,” 케이든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지 않아?”


“이런 상황에서 생각을 어떻게 하라고요!” 피터가 내뱉었다.


“아마 지금 네 심리상태가 촉발사건을 겪기 직전의 심리상태와 비슷하겠지.” 저스틴이 말했다. “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겠어? 예전에 휘갈겨 놨던 뭔가가 정리될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고립이라는 요소도 있죠.”


“독방같이?” 저스틴이 물었다.


피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고립이요. 촉발사건을 겪는 사람들은 보통 인간관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요. 뒤에서 받쳐줄 사람이 없는 거죠. 가족이나 친구가 자신을 저버리거나 오히려 문제의 원인인 경우가 많아요. 얼마 전에 논문을··· 마스터들이 고독함과 관련이 있는 촉발사건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으로 논문을 하나 썼었어요. 마스터들이 대부분 빌런인 것도 그게 이유일 수 있다고도 썼었죠. 인간관계나 사회적인 압력이 없으면 빌런이 되기 쉬우니까요. 그때 교수님이, 그러니까 비소츠키 교수님이 제 이론을 완전히 박살 냈어요. 다른 파라휴먼도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면서요. 고립 말이에요. 상관관계가 안 나왔죠. 거의 모든 촉발사건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그때 교수님이 그랬어요.”


분신을 만들고 있던 저스틴이 움직임을 멈췄다. 분신이 다시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가자, 케이든.”


“뭐?”


“답을 찾았어. 가자.”


“확실해?”


저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으로?” 그녀가 물었다.


“최대한 빨리 가.”


케이든이 눈과 머리카락을 빛내며 날아올랐다.


“가자, 테오.” 저스틴이 말했다. “내가 들어주지.”


케이든이 사무실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그는 분신을 만들어냈다. 분신이 다가오자 테오는 주저했다.


“왜 그러는데?” 저스틴이 물었다.


“방금 말했던 대로··· 두고 가려는 거잖아요. 고립시키려는 거죠?”


“그래.” 저스틴이 말했다. 분신이 앞으로 뛰어들었고 테오는 의자가 넘어갈 정도의 힘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순식간에 따라붙은 분신이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조르며 바닥에 밀어붙였다.


“그러지 마세요. 방금 한 말 들었잖아요. 일으키려 하면 안 일어날 거예요.” 테오가 목이 졸린 채로 힘겹게 말했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야.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건 우리 문제가 아니라 저들의 문제겠지. 히어로들이 널 돌봐 주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줄 거야.”


“저스틴! 크루세이더!” 테오는 목이 졸린 채로 비명을 질렀지만, 저스틴은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었다. “일부러 일으키려고 하면 안 될 거라고요!”


저스틴은 테오를 내버려 둔 채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사이의 틈은 날아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는 분신을 만든 뒤 자기 몸과 겹쳐서 분신의 비행능력을 이용해 날아올랐다.


케이든은 아직 지상에 있었다. 그녀는 울부짖는 아스터를 안고 옥상에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그가 말했다.


“테오는 어디 있어?”


“곧 올 거라고 말한다면 믿을래?”


알아차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표정이 바뀌는 것이 보였다. “설마.”


“그 설마야. 다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


“개소리하지 마. 그 애는 잭한테서 아스터를 구했어. 어쩌면 내 목숨도 살려줬을지도 몰라. 그 빚을 생각해서라도—”


“—방금 두고 온 게 그 빚을 갚은 거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어떻게 보면 우리 가족이긴 하지. 그건 알겠어. 하지만 우리 대의를 따를 녀석은 아니야.”


“대의.” 케이든은 욕설처럼 그 단어를 내뱉었다.


“세상을 정화하고, 썩은 부분을 잘라내고, 발전의 상징이 되는 것. 녀석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겠지.”


“내 양아들이야.”


“바로 그게 문제 아니겠어? 오늘 아침 기억나지? 자기가 능력을 못 얻으면 어떡하냐고 물었었잖아. 잭을 못 막으면 어떡하냐고. 그때 네가 어떻게 대답했지? 안심시켰잖아. 그 녀석이 못 싸우게 된다면 우리라도 싸우겠다고.”


케이든은 아플 정도로 밝은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때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그때도 못 싸웠는데, 2년 후라고 다르겠어?’라고. 테오는 그걸 대놓고 말했지. 보기보다 똑똑한 녀석이야. 하지만 그때 뭔가 깨달은 사실이 있어. 지금에서야 생각이 정리됐지.”


“그게 뭔데?”


“네가 안심시켜서는 안 돼. 위기가 있을 때마다 널 의지하고 있잖아. 촉발사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리는 거야. 한계 이상까지 몰리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곁에 있는 한 녀석은 거기까지 갈 일이 없어. 우리가 받쳐주고 있는 한.”


“그래서 그냥 버리고 가겠다고?”


“이미 버리고 왔어.” 크루세이더가 말했다. “경찰들이 9층까지 왔거든. 내 분신들이 그냥 통과시켰어. 지금 돌아가더라도 테오는 붙잡혀 있을 거고 우리가 들어갔다간 거품을 맞을 거야.”


“네 분신을 쓴다면 아무런 위험 없이 전부 무력화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겠어.”


케이든으로부터 빛이 터져 나왔고, 한순간이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빛줄기는 나오지 않았다.


저스틴은 한숨을 쉬었다. “분명 상처를 받고 화가 나 있겠지. 완전히 혼자일 거야. PRT에서는 우리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낱낱이 캐물을 테고, 내가 아는 그 녀석이라면 그것도 분명 고통스럽겠지. 그 녀석이 우리를 그리 좋아하진 않더라도, 가족이라고는 우리뿐이니까···”


케이든은 문을 힐끗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야.”


“엄마 노릇을 못 해줬어.” 케이든이 말했다.


“어쩌겠어. 이제는 너무 늦었는데.”


그녀는 옥상 가장자리까지 걸어가서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물 발사기는?”


“조준할 사람이 없어. 다들 내 분신이랑 싸우느라 바빠.”


빛이 한 번 번쩍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저 멀리 멀어져가는 티끌에 불과했다.


그는 문을 힐끗 본 뒤에 그녀를 따라 날아갔다.


이젠 네게 달렸다, 꼬마야. 오직 너 혼자한테만,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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