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꽃집 주인은 친구에게 충고한다
헤이나르의 등장 이후 조용해진 바이올렛을 뒤로하고 헤이나르와 하쉬는 응접실로 향했다.
"바이올렛은 여전하네~ 요즘도 니 목소리가 안 들리면 너한테도 독설을 퍼붓거나하나?"
하쉬는 헤이나르를 따라 걸으며 뒤를 돌아보고 질린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이올렛과는 대화를 많이 하고 있다."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헤이나르를 보고 하쉬는 잠시 그리운 기분이 되었다. 헤이나르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지만, 어느새 마족을 대표하는 3 공작 중 한 사람이 된 헤이나르와는 달리 자신은 마족을 배반한 배신자일 뿐이었다.
인간들의 편에 서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내색하진 않지만 꽤나 걱정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쉬는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공작님 상냥하기도 하셔라. 아니지. 바이올렛의 경우엔 방치하면 정도가 더 심해지니 어쩔수 없는 것 뿐인가?"
"..."
"뭐 아무렴 어때. 그러고보니 너 얼마 전 서쪽 평원에서 인간들과 싸운 적이 있나?"
뜬금없는 하쉬의 질문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린 헤이나르는 하쉬의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먼저 공격해 온 건방진 벌레들을 밟아 죽인 적은 있다만?"
"하여간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네가 왜 강경파가 아니라 중립파. 그것도 수장인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러니까 온건파 녀석들이 너라면 치를 떠는거야. 뭐 아무튼 그 중에 유독 작고 강한 사람이 한 명 있지 않았어?"
하쉬의 말에 어렵지 않게 그리니언을 떠올린 헤이나르는 두 번이나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건방진 꼬마가 지금 생각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나는 녹색 머리 꼬마라면 본 적이 있지. 아는 사이인가?"
하쉬는 그리니언을 표현하는 헤이나르의 말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뭐, 신세를 좀 지고 있지. 너도 바보는 아니니 공작인 네가 루브린까지 쳐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앞으로는 그 사람을 마주치면 되도록 대화로 해결하는게 좋을거야."
하쉬의 말을 들은 헤이나르는 응접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잠시 후 헤이나르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호오? 협박인가?"
헤이나르의 기세를 본 하쉬는 헤이나르의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설마. 그저 오랜 벗에게 해주는 충고야. 그리고 나로서는 네놈의 그 무식한 전투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하쉬의 대답을 들은 헤이나르는 뿜어대던 투기를 거두고 여전히 태연한 표정의 하쉬를 보며 혀를 찼다.
"쳇. 인간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네 녀석이 그렇게까지 인간을 생각하는지는 몰랐군. 키우는 애완동물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소녀의 마음이냐?"
하쉬는 그런 헤이나르의 비아냥에 태연한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나는 충고라고 했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거지."
잠시 하쉬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헤이나르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듯 하쉬에게 물었다.
"그 인간을 꽤 높이 평가하는 듯 하다만, 이해가 안 가는군. 그 작은 녀석이 묘한 도구를 쓰긴 했지만 전투 능력은 잘쳐줘봐야 후작급이었다. 한 때 후작이었던 너라면 몰라도 공작인 내 상대는 못 돼."
"의외로 작위에 자부심이 있었던 모양이군. 하긴 마족의 작위라는 건 힘의 척도니까. 마왕님이 수여한다는 것도 겉치레일뿐 실상은 그냥 강한 순서로 나뉜 서열이지.
그나저나 '잘 쳐줘봐야 후작'인가... 상대에 대한 평가가 박한 네가 보기에도 그정도라니, 역시 어마어마한 괴물이구만. 마나에 제약이 걸려있는데도 그 정도라니."
하쉬의 말을 들은 헤이나르는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는 투로 물었다..
"제약이라고? 확실히 묘하게 마나의 움직임이 적은 녀석이라곤 생각했지만,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건가?"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 사람의 현재 전투방식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말그대로 막싸움이야. 그 상태와 싸우고 그 사람에게 후작급이라는 평가를 내린 너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건 이상하군. 우선 순수 근력만으로 내 칼을 받아낸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녀석 나와 싸우다 위험해졌을 때도 별다른 수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헤이나르는 그 녹색 꼬마가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듯한 하쉬의 태도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헤이나르를 보던 하쉬는 내심 괜히 자극한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어떻든 그리니언과 헤이나르가 싸우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사정을 설명하려 했다.
"뭐 그 사람도 일부러 힘을 숨기거나 한 건 아니었을 거야. 거기에는 조금 사정이..."
그리니언에 대한 것을 말하려던 하쉬는 갑자기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말을 끊었다.
"크흠, 이것저것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만, 묘하게 이런 건 잘 알아채는 양반이라 여기까지만 하는게 좋겠군. 어쨌든 되도록 그 사람과의 충돌만은 피해라."
헤이나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당부하는 하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 떄 동쪽을 책임지던 봄의 후작. 하쉬르단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상대의 실력은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 한 편에선 다시 마주치면 그 녀석의 진짜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작위를 내려놓고 떠날 땐 다시 마왕령에 발을 들일 것 같지않았는데 말이지. 고맙다고 해야하는건가."
"뭐, 이건 겸사겸사로 하는 이야기고, 본론은 지금부터다."
하쉬는 어꺠를 으쓱하며 웃고는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오? 방금 전보다 더 심각한 분위기군. 아끼는 인간의 신변보호라도 부탁할 셈인가?"
"마왕님이 돌아가신 걸 직접 확인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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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는 수도 주변의 공학품점을 모두 둘러본 뒤, 여관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문을 열었다.
'후우..생각했던 대로 주문제작을 하면 어렵지 않게 만들 만한 공학품이었지만, 문제는 어떤 가게도 그런 의뢰를 받았던 적은 없다는 거군.'
클린트는 가게 주인들에게 발주를 의뢰하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 본 경험자가 있다면 돈을 더 얹어 주겠다는 식의 협상을 시도했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던 가게의 주인들은 그 말에 눈빛이 변했다. 아마 클린트가 찾고 있는 잉크를 만든 사람과 연이 닿는다면 무조건 소개를 하려 들 것이었다.
'물론 돈을 노린 허위 정보도 많이 생기겠고, 수상함을 느낀 상대가 몸을 더 숨길 확률도 있지만, 정체되어 있는 현 상황을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법이지.'
클린트는 문득 4년 동안이나 대장장이로서 살아왔음에도 변하지 않은 자신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제국이 아닌 클린트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씁쓸한 기분을 달래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밤하늘을 바라보던 클린트는 유달리 환한 달을 바라봤다.
'어쩌면 너처럼 진작에 끝을 냈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지. 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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