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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생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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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생인
작품등록일 :
2019.11.26 21:40
최근연재일 :
2022.10.23 22:16
연재수 :
1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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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85
글자수 :
529,736

작성
20.03.0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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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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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2. 정호기, 각성하라! (11)

DUMMY

루올이 오기 전까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왠지 뭐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아 가젠을 힐긋 훔쳐보니 가젠은 표정 없는 얼굴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조용히 앉아있다. 정호기는 가젠을 훔쳐보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이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직접 본 라야도 작은 여자아이였었지. 지금 라야의 몸이 그만큼 작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라야도 그렇게 크지는 않은 것 같아.’


라야는 확실히 나보다 작았다. 얼마나 작냐면, 원래의 내 몸이 그다지 큰 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라야의 몸으로는 가젠이 빌려 쓰고 있는 내 몸을 살짝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라야가 여자이기 때문에 작은 걸까? 서양인들은 대체로 여자든 남자든 더 크던데, 여기는 다른 세계라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니 라야는 몇 살일까. 전에 들은 말로는 라야도 용병을 한다는 것 같던데 용병 일을 할 정도면 어느 정도는 나이를 먹지 않았을까.


정호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라야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때 보았던 그 공간에서 쉬고 있을까.‘


그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라야!!!!”


“-!”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온 루올은 정호기를 보자마자 손에 든 것들을 전부 내던져버리고 정호기를 끌어안았다. 정호기는 깜짝 놀란 눈으로 자신을 끌어안은 루올을 바라보았다. 루올의 심장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라야? 괜찮은 거야? 응?”


루올은 몸을 물려 정호기의 어깨를 잡은 채로 꼼꼼히 살펴본다. 루올의 눈동자는 제 3자도 아, 저 사람은 분명 사랑에 빠져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만큼 애틋하고 절절하다. 루올은 정호기를, 그러니까 라야의 몸을 꼼꼼히 훑어 보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을까 살펴보는 모양이다.


’이거 기분 묘하네.‘


그 절절한 시선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정호기는 묘하게 기분이 거북해졌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루올을 속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라야의 몸을 빌려 쓰고는 있지만 라야는 아닌데. 내가 이렇게 계속 루올과 대화해도 괜찮을까?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이 루올에게는 라야의 말과 행동으로 비춰질 텐데. 이건 루올과 라야 둘에게 전부 실례되는 일이 아닐까.‘


“네. 괜찮아요.”


“다행이다. 정말 걱정했어. 네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루올은 알까. 루올의 눈동자에는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루올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가슴이 무거워졌다. 루올의 진심 어린 애정이 무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를 날카롭게 찔렀다. 나는 아주 가벼운 태도로 루올을 대하고 있었다. 나는 루올을 이용해 마을로 들어갈 생각만 하고 있었고, 루올을 스쳐지나가는 엑스트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연히 이곳은 이곳만의 질서와 법칙을 가지고 살아있는 하나의 고유한 세계였고, 루올은 그 세계의 살아있는 주민이었다.


“....죄송해요.”


“...어? 왜? 왜 사과해. 사과하지 마. 라야. 그냥 내가 제멋대로 걱정했을 뿐이야. 나야말로 미안해.”


머리가 복잡해졌다. 루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겁게 다가왔다. 정호기는 복잡한 눈으로 루올을 바라보았다. 아까 가젠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루올을 이용한다고 했었었지. 루올을 이용해서, 마을로 들어가자고. 그 계획은 취소였다.


’지금까지도 루올을 기만해왔는데 더는 그래서는 안 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윽


정호기는 루올을 살짝 밀어냈다.


“죄송해요. 조금 어지러워서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한 모양이에요. 저, 잠시만 바깥 공기 좀 마시다 올게요.”


“어? 어. 그래야지.”


루올은 우물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을까? 어, 나라도 좋으면 같이 갈까?”


“아니요. 괜찮아요. 가젠과 함께 나갔다 올게요. 나갔다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잠시 쉬고 계세요. 멀리 가지는 않을게요. 금방 돌아올게요.”


“아.. 그렇다면야.”


그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물러섰다. 그리고 흩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정호기는 가젠을 보았다. 가젠이 조용히 정호기를 따랐다. 정호기는 바깥에 나서기 전, 루올을 바라보았다.


“얼른 다녀와. 해가 지면 위험하니까.”


“...네.”


바깥으로 나온 정호기는 한참동안을 말없이 걸었다. 가젠도 말없이 정호기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사박. 사박.


“가젠.”


“왜 그러십니까.”


“아까 말했던 그 계획들 말이에요, 전부 취소에요.”


“그렇습니까.”


“...가젠.”


호기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가젠은 말이 없었다. 정호기는 어느새 멈춰선 채였다. 가젠도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정호기를 기다려주었다.


“가젠은 예전에 그렇게 말했죠. 겉껍데기야 어떻든 간에, 그 안에 든 게 중요하다고요. 제가 전 계약자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저는 정호기라고요.”


“그렇습니다. 정호기.”


“하지만 그건 누구에게나 그렇지는 않아요. 가젠은 신의 사도로서 불가해한 일을 수없이 경험해왔기에 그렇게 확답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라요. 한 사람의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깃든다니,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잖아요. 라야와 가젠을 제외하고서는 전부 다 저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로, 저를 라야로 봐요.”


정호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젠이 의미 모를 시선으로 가만히 마주본다.


“루올에게 저는 라야로 비춰지겠죠. 루올과 함께 같은 시간을 공유한 라야로, 루올이 사랑하는 라야로 비춰질 거에요. 그렇다면 가젠, 저를 라야로 알고 있는 루올 앞에서, 라야 흉내를 낸다면 루올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정호기.”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루올 앞에서 도망쳐버려야 하는 건지. 루올에게 내가 라야가 아니라고 밝혀야 하는 건지. 계속 제가 정호기인 것을 숨기고 라야로 있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해요. 자꾸만 루올에게 죄책감이 들어요.”


정호기는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누구한테도 상처주고 싶지 않았는데. 저는 또, 저 때문에...”


정호기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의 낯빛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가젠은 정호기의 어깨를 붙들었다.


“괜찮습니까? 정호기.”


“.......”


정호기는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꾸욱 억눌렀다. 나는 괜찮았다. 지금은 그 지옥 같았던 곳에서 도망쳤다. 그러니 나는 괜찮아.


“....네.”


“아까의 대답입니다. 정호기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네?”


“어느 정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계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수많은 공간을 헤매며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이뤄 주며, 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저 조차도.”


“..예?”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 하나뿐입니다. 저는 당신과 계약했고, 당신께서는 이후에 저의 사명을 이어받아 사도가 될 몸입니다. 저는 전 사도로서 당신께서 제 전철을 밟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서 항상 오롯이 당신만의 선택을 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당신의 의지대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십시오.”


무슨 소리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젠의 말은 내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루올의 말에는 감출 수 없는 감정과 마음이 가득 담겨 내게 울림을 남겼다. 가젠의 말도 그랬다. 가젠의 말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가젠의 감정과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알겠어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것은 가젠 나름대로의 위로와 조언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호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결정할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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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 아이우드로! (1) 20.06.14 23 1 5쪽
32 2. 정호기, 각성하라! (26) 完 20.06.07 37 1 14쪽
31 2. 정호기, 각성하라! (25) 20.06.07 36 1 10쪽
30 2. 정호기, 각성하라! (24) 20.05.30 23 1 10쪽
29 2. 정호기, 각성하라! (23) 20.05.23 38 1 10쪽
28 짧은 외전 - 불완전한 꿈(가젠) + 그림 有 20.05.20 31 1 10쪽
27 2. 정호기, 각성하라! (22) + 그림 有 20.05.17 32 1 10쪽
26 2. 정호기, 각성하라! (21) 20.05.10 24 1 10쪽
25 2. 정호기, 각성하라! (20) 20.05.03 41 1 10쪽
24 2. 정호기, 각성하라! (19) 20.04.26 26 1 10쪽
23 2. 정호기, 각성하라! (18) + 짧은 외전 +1 20.04.19 34 1 14쪽
22 2. 정호기, 각성하라! (17) 20.04.12 31 1 11쪽
21 2. 정호기, 각성하라! (16) 20.04.05 29 1 9쪽
20 2. 정호기, 각성하라! (15) 20.03.28 32 1 9쪽
19 2. 정호기, 각성하라! (14) 20.03.22 29 1 9쪽
18 2. 정호기, 각성하라! (13) 20.03.15 32 1 10쪽
17 2. 정호기, 각성하라! (12) 20.03.08 29 1 10쪽
» 2. 정호기, 각성하라! (11) 20.03.01 31 1 9쪽
15 2. 정호기, 각성하라! (10) 20.02.23 35 1 9쪽
14 2. 정호기, 각성하라! (9) 20.02.16 37 1 14쪽
13 2. 정호기, 각성하라! (8) 20.02.08 42 2 11쪽
12 2. 정호기, 각성하라! (7) 20.02.01 41 1 13쪽
11 2. 정호기, 각성하라! (6) 20.01.26 42 1 7쪽
10 2. 정호기, 각성하라! (5) +1 20.01.19 51 1 6쪽
9 2. 정호기, 각성하라! (4) 20.01.12 51 1 11쪽
8 2. 정호기, 각성하라! (3) 20.01.05 56 1 10쪽
7 2. 정호기, 각성하라! (2) 19.12.29 75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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