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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성진 님의 서재입니다.

시퍼런 사과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현대판타지

완결

길성진
작품등록일 :
2018.09.06 19:30
최근연재일 :
2018.09.13 19:29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2,227
추천수 :
4
글자수 :
231,732

작성
18.09.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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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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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과는 맛없어(30화)

DUMMY


끝없이 긴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롱한 의식으로 스르륵 눈이 떠진다.

새하얀 빛 덩어리가 안개가 낀 듯한 흐릿한 시야로 스며들어 망막에 점점 선명하게 맺혀온다.

낮에도 환하게 빛나는 천장의 백열등이었다.

천장을 향해 손을 뻗자 환자복이 걸쳐진 내 팔이 보였고, 팔뚝엔 링거가 꽂혀있었다.

머리가 띵한것이 마치 하루의 절반 이상을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윽······."

상체를 일으키자 짤막하게나마 현기증이 일어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누워있던 침대를 포함해 두 개의 새하얀 침대가 놓여있었다.

민트색 커튼을 너머에는 높이가 다른 건물들과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비행기가 있었다.

도로에선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의 소리가 뒤섞인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

어째서인지 내 손엔 빨간 사과가 쥐여져있었다.



2020년 1월 16일.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내가 기적적으로 눈을 뜬 날짜였다.




그 뒤엔 상태를 체크하러온 간호사가 내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어디론가 급하게 뛰쳐나갔다.

담당의사가 찾아와 나에게 몇가지 테스트를 시행했다.

자신의 이름은 무엇인 지, 볼펜을 건네주며 이 물건의 사용방법을 알고있는 지, 자신이 누워있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 지, 걸을 수는 있는 지······.

대부분은 별 문제없이 대답할 수 있었고, 내가 어쩌다 뛰어내리게 되었는지까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실패'였다는 것도 막연하게 이해해버렸다.

"이 상태로 보면 금세 퇴원하실 수 있으실겁니다. 솔직히 말해 전문가의 의견으로는 회복은 불가능했던 상황이었거든요. 이렇게 일어나고, 거기에 더해 뇌손상이 거의 없다는 건 기적입니다.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을 수 있는 문제니까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기시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재방문을 하셔서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선 가족분들이 곧 오신다니까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뭐, 혹시 궁금하신 점 있으신가요?"

궁금한 것······. 의사의 말에 옆에 비어있는 침대를 흘겨보았다.

"······혹시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그러고보니 뛰어내리기 전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요?"

"······함께 뛰어내렸던 사람."

"······."

힘없는 내 말에 의사는 그 옆에 서있는 간호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겨 차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일시적인 기억혼란이 찾아오신 것 같은데······."

그가 가까이 오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론상 혼수상태에서도 꿈은 꿀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긴 시간 지속되면 기억에 혼란이 생길 수도 있어요. 뛰어내린 건 한세하씨 본인 혼자만 뛰어내리셨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부 기억손상은 있지만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무리하지말고 몸조리를 잘하라.

그것이 눈을 뜬 나에게 내려진 최종진단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사흘 후에 퇴원할 수 있었다.

난 생각해본다.

의사의 말대로 누군가와 함께 뛰어내렸다는 건 나의 기분탓이고, 그것은 내가 꾸었던 꿈과 착각한 것이 아닐까?라고······.

하지만 말하지 못할 확실한 무언가가, 내 안의 깊은 곳에 선명히 새겨져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잊게되는 꿈처럼. 떠오르지 않은 꿈의 흔적을 더이상 쫓아갈 수도 없었다.

잊어선 안될 소중한 무언가가 빠져나간 감각은 어떻게 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퇴원을 하자마자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제대로 살지도 못했던 나는 죽어버리기로 작정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안에서의 공기가 불편해 가급적이면 기존에 해왔던 것처럼 대화를 피해왔다.

어느덧 찾아온 1월의 마지막 날.

갈색의 야상을 걸쳐입고 거리로 향했다.

목적지는 딱히 없다. 좀처럼 아르바이트가 구해지질 않아 침울해하던 참이었다.

바깥으로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기분이었다.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내 방면으로 가는 마을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자리에 앉아 턱을 괴며 바라본 풍경이 휙 지나간다.

시내에 도착해 내린 뒤,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검은색 모자를 쓴 남자는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카운터 안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해있었다.

보온 진열대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골랐다.

카운터 위에 올려두자 그제서야 게임을 잠시 멈추며 일어섰다.

"천 원입니다~."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려던 찰나, 그의 뒤로 담배 진열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기 던힐 프로스트도 한 갑 주세요."

4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탓인지 민증검사를 하지 않았다.

집에서 거울을 봐도 나이를 먹은 만큼 늙었다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교복을 입어도 이제는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에 서운함을 느끼며 편의점을 나왔을 때.

뒤늦게 위화감을 느꼈다. 손에 쥔 담배각을 바라보았다.

······내가 던힐 프로스트를 피웠던가?

담배를 살 때 무심코 특정한 종류를 말해버렸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느낌으로 말이다.

"······상관 없겠지."

끝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아우터 포켓에 집어넣었다.

카라멜 마끼아또의 달콤함을 머금고 좌우로 스쳐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눈 위로 타인의 발자국들이 서로의 것에 덮고 덮힌다.

귀엽게 생긴 사복차림의 중학생 소녀들이 꺄르르 웃으며 멀어져간다.

비슷한 또래의 남자는 버스에서 내린 여자친구를 반기며 어디론가 걸어간다.

정장 위로 코트를 걸쳐입은 탈모의 남성은 딸과 통화를 하고있다.

저 멀리선 돗자리를 깔고 바구니에서 나물을 팔고있는 노인이 보인다.

방금 막 피시방에서 나온건지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게임용어를 내뱉는 고등학생 무리가 스쳐지나간다.

거리의 '당연함'에 이만큼씩이나 멀어진 거리감을 느끼는 건 어째서일까.

나 홀로 세계에서 동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한참을 우두커니 선 채로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슬슬 지루해질즈음에서야 발을 뗐다.

적당히 익숙한 방향으로 걸으며 시내 광장으로 향했다.

익숙했던 상점가의 모습은 살짝 변해있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정하질 않았다.

허공에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무작정 걷는다.

잠깐 담배를 피우며 어디를 가볼 지 고민해봐야겠다.

전봇대에 기대며 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배를 꺼냈다.

비닐을 벗기고 한 개비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이려던 찰나,

"아······."

주머니엔 지갑과 스마트폰이 전부였다.

라이터도 함께 사야했다는 것을 깜빡했다. 입에 물던 것을 다시 담배각안에 넣었다.

편의점은 흔해서 적당히 걷다보면 나올테지. 조금 구석진 곳으로 걸어볼 생각이다.

느릿하게 떨어지는 눈에 젖으며 다시 거리를 걷는 그때.

어떤 가게를 막 지나쳐가던 찰나,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몇걸음 되돌아 유리창에 가까이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안쪽의 고풍스러운 매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창 안쪽엔 A4용지가 붙어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문장 밑엔 학력무관에 성별무관, 나이는 20세 이상에 주 5일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입구에 세워진 선간판에는 수제빵을 만든다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마침 일자리를 구해야했다. 잘 된일이 아닐까.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역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두렵다.

청량한 방울소리가 울린다. 결국 문을 열어버렸다.

화려하지 않은 내부의 모습은 진열대라든가 벽과 가구의 색조합이 친환경적인 이미지로 소박해보여 마음에 들었다.

고소한 빵냄새가 매장에 가득 퍼져있었다.

"어서오세요~."

카운터 너머로 주방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긴 생머리의 여성.

유니폼을 입고있는 그녀는 상당한 미모였다. 그녀가 살포시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기······. 바깥에 붙여진 아르바이트 모집공고를 보고 들어왔는데······. 혹시 지금도 자리 있나요?"

가뜩이나 저런 미인이 상대라면 조금 긴장하게 된다.

"아, 그러시구나! 잘 됐다! 마침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아 걱정했는데."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다행히도 일자리는 비어있었다.

"혹시 시간 있으시면 지금 안 쪽에서 면접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 쪽으로 들어와주시겠어요?"

가까이 다가가자 고소한 빵냄새엔 꽃향기같은 달콤한 향이 섞여들었다.

안 쪽의 주방엔 여러개의 거대한 오븐과 냉장고가 있었다.

곳곳엔 종이박스가 쌓여있고 밀가루나 빵가루같은 포대들이 들어있었다.

방금 만들었는 지 오븐안엔 빵이 구워지며 부풀고 있다.

테이블엔 밀가루와 반죽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모습을 통해 뒤늦게 자신이 실수해버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력서에도 그럴싸하게 쓸 것이 하나없는 안타까운 녀석이다.

따로 제과제빵에 관한 자격증이라든가 요리에 대한 실력이 요구되면 조금 곤란하다.

하지만 앞서 안쪽으로 걷던 그녀는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 지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처음엔 만드는 게 아니라 간단한 접대와 매장관리에요."

"아하, 그렇군요."

다행인 소식이었다.

주방의 좀 더 안쪽의 테이블에서 그녀가 A4용지와 볼펜을 챙겨 설명해주었다.

근무 요일과 근무 시간, 그리고 매장이 바쁜 시간대와 주로 내가 해야할 것들에 대해서였다.

그 다음엔 시급과 수당을 설명해주었다.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기본적으로 높은 시급에, 퇴직금이라든가 주휴수당, 휴가같은 것들까지 따라와 조금 놀랐다.

직원보험도 제대로 들어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녀가 설명해준 것들은 요즘 한국 사회의 아르바이트에서 보기드문 대우였다.

"일은 처음엔 힘드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어렵다는게 아니라 익숙치가 않은 거라서 제가 차근차근 알려드릴게요. 실수는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상냥하게 웃으며 듬직한 말을 해준다.

대화를 한 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가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혹시 일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나요?"

"언제부터 시작하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빠를수록 좋아요. 내일부터라도 가능합니다."

"다행이다! 그럼 내일 오전 일곱시쯤에 방문해주실 수 있으세요?"

"네, 가능합니다."

친근하게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이런 미소는 잘 지어본 적이 없는데도 그녀의 친절함에 가볍게 피어나버린다.

"이력서도 매장용 양식이 따로 있으니까 준비하실 필요는 없어요."

미리 준비하는 모습이 착실한 가게라고 생각했다.

왠지 이 곳에서 지금까지의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출발이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내일 봬요. 세하씨."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운이 좋게도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

그렇게 기분좋게 인사를 마치고 뒤돌아 나가려던 그때.

순간 멈칫한 나는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나이는 커녕 이름을 알려준 적도 없다.

명함도 없고 이름이 적힌 무언가도 보여주지도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의 이름을 확실하게 불렀다.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날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는 가느다랗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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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과는 맛없어(28화) 18.09.12 49 0 11쪽
28 행복하신가요?(27화) 18.09.10 46 0 3쪽
27 행복하신가요?(26화) 18.09.10 62 0 16쪽
26 행복하신가요?(25화) 18.09.10 52 0 19쪽
25 행복하신가요?(24화) 18.09.10 45 0 9쪽
24 행복하신가요?(23화) 18.09.10 45 0 12쪽
23 행복하신가요?(22화) 18.09.10 44 0 23쪽
22 행복하신가요?(21화) 18.09.10 49 0 17쪽
21 행복하신가요?(20화) 18.09.10 3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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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7화) 18.09.09 54 0 13쪽
17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6화) 18.09.09 62 0 16쪽
16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5화) 18.09.09 43 0 13쪽
15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4화) 18.09.09 4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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