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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성진 님의 서재입니다.

시퍼런 사과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현대판타지

완결

길성진
작품등록일 :
2018.09.06 19:30
최근연재일 :
2018.09.13 19:29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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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
글자수 :
231,732

작성
18.09.09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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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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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5화)

DUMMY

저녁에 여자가 돌아왔다.

난 곧바로 거실로 나가 여자를 노려보았다.

크게 구겨진 내 표정을 보더니 흠칫 놀란다.

"뭐, 뭐야?"

"제 방에 있던 봉투, 돌려주세요."

강압적인 말투로 말했다.

"이, 이 년이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내가 니 물건을 가져갔다 이런 소릴 하고 싶은거냐?"

"내 돈 가져간 거 다 아니까 내놓으라고요."

"뭐라고? 허, 참. 이런 미친년을 다봤나. 감히 나를 도둑년으로 몰아?"

집에 도둑이 들었을리가 없으니 여자가 범인인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인간으로서 어쩜 저리 뻔뻔할 수 있는걸까.

"빨리······ 돌려달라고요······."

"그 돈을 가지고 니가 뭘 할건데? 애새끼면 애새끼다운 돈을 써. 벌써부터 그렇게 큰 돈 만지면 버릇이 나빠지니까 내가 관리해주는거야!! 하여간 은혜도 모르는 년 같으니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여자는 지갑에서 오천 원 한 장을 꺼내 휘릭 날렸다.

팔랑거리며 내 발 밑에 떨어진다.

봉투에 들어있었던 것보다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눈물이 눈 앞을 가린다.

주먹을 꽉쥐고, 나는 눈을 부릅뜨며 여자를 죽일듯이 노려본다.

"내놓으라고······."

여자는 한순간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눈빛만으로는 사람도 죽이겠다? 응? 이런 싸가지없는 년이."

직후, 큰소리가 나며 내 시야가 흔들렸다.

고여있던 눈물이 허공에 튕겨나간다. 뺨이 얼얼했다.

그럼에도 난 끝까지 여자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쓰레기같은 년······."

"뭐······라고?"

여자가 멈칫했다.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반응을 하더니, 곧 인상이 급격하게 구겨진다.

난 여자에게 머리채를 강하게 잡혔다.

여자는 그대로 날 부엌으로 질질 끌고가더니, 주방용 가위를 들었다.

싹둑─.

이상한 소리가 났다. 순간 숨이 멈췄다.

잘린 머리카락이 눈 앞에서 사르르 떨어져내린다.

"무슨 짓이야!!"

난 소리치며 여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단단히 잡혀있었다.

크게 저항할수록 여자는 쥐는 힘을 더욱 실었다.

싹둑싹둑싹둑.

앞으로 세 번 더 내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난 비명을 지르며 여자를 밀쳐내려했고, 또 한 번의 가위질에 내 시야 한 쪽이 허전해진다.

눈썹을 가리던 앞머리가 크게 잘려나간 것이다.

즉시 난 여자의 목을 있는 힘껏 졸랐다.

"컥······!"

가위를 손에서 놓은 여자가 기침을 토해내며 주저앉는다.

곧바로 손을 떼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세면대의 거울 앞을 본 순간 가슴이 철컹 가라앉았다.

형태는 단발이지만 곳곳이 삐쳐나와있고, 중요한 앞머리는 보폭이 큰 계단마냥 한 쪽 이마가 훤히 드러난다.

허탈했다.

무릎이 아파올 정도로 화장실 타일에 주저앉았다.

떨어지는 눈물이 타일위로 방울진다.

즉시 난 여자의 방으로 들어가, 날 때리다 부러진 당구 큐대를 들었다.

목을 잡고있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그 다음, 나는 온 힘을 다해 여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애매한 소리를 지르며 팔을 들어 막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저 팔마저 개박살내버리면 그만이다.

난 있는 힘껏 소리지르며 여자를 내리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동안 모아뒀던 돈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머리도 잘려나가 엉망이 되었다.

차라리 돈만 없어진 것이라면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라도 할텐데, 이런 꼴로는 도저히 세하를 만날 수가 없었다.

우울해진 난 계속 내 방에 틀어박혔다.

어째서 난 항상 이런 꼴이 되어야만 하는걸까.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그 말밖에 나오질 않았다.

세하와 만나기로 약속한 8월 2일 날에도 난 방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손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보다가 침대 구석에 던져놓는다.

이런 모습,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민망한데 세하에게 보여줄 수 있을리 없다.

담요를 덮고 무릎을 끌어안는다.

먼저 만나자고 약속한 주제에 이런 꼬락서니다.

세하는 계속해서 날 기다리고 있을텐데.

만나러 가고 싶어도 이런 꼴로는 절대 만나러 갈 수 없다.

여자도 날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집에는 유선 전화기의 선이 끊어져있었다.

외출이 빈번하던 여자도 내 머리가 잘린 이후에는 계속 집을 지키고 있다.

앞머리가 이상하게 잘려나간 걸로, 다른 사람들에게 '학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신경쓰고 있는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여자의 직접적인 간섭은 사라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여자에게 봉투를 발견당한 것부터일까.

아니면 내가 그와 이어지고 싶다고 바란 순간부터일까.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만약, 방해따위 하나도 없는 세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도, 나를 어설프게 도와주지도 못하는 세계다.

그래. 분명 그런 세계가 있다면 아무도 없을 것이다.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 세계에 범해지는 기분이 든다.

분명 나는 태어난 것을, 그리고 살아가는 것을 좋게 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점점 늙어가는 건 싫었다.

나의 '방해 없는 세계'에서는 수명이 영원하다.

그 세계에서는 늙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까지나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물론 그건 마음을 먹는다면의 이야기이고, 하지만 실제로는 언젠가 사는것이 지겨워져 죽고 싶어질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아, 이건 어떨까.

두 번째 삶에서는 확실하게 죽을 수 있도록 딱 한 번의 기회가 있는 거다.

그때의 나는 더 살아갈 지 말 지 신중하게 고려하는 것이다.

나의 망설임이 '지루하지만 조금만 더 살아보자'에 가까우면 살아가는 것이고, '아니. 이제 끝내고 싶다'에 가까우면 끝나는 거다.

좋다.

그렇게 한 번의 기회를 부여하면, 혹여나 첫 번째 삶에서 실수로 죽게된다 하더라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보험도 된다.

물론 병때문에 죽는 일은 없다.

다쳐서 상처를 입어도, 병을 앓게 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전부 낫는다.

기존에 이용해왔던 시설들을 문제없이 이용할 수도 있다.

궁극적인 자유에 허덕이는 나의 방해 없는 세계.

그 세계에서 내게 필요한 존재는 단 한 명이면 된다.

난 그런 세계를 상상하며 하염없이 천장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하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고, 난 결국 그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한참흘러 여름이 떠나갔다.

그토록 무성했던 파란 잎은 바짝 말라 타들어가 늙어버려있었고, 그 마른 잎들도 얼마가지 않아 전부 땅에 떨어져내렸다.

가지만 남게 된 쓸쓸한 나무는 겨울철이 되자 내리는 눈으로 겉옷을 걸쳤다.

중학교의 졸업식에는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저마다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사진을 찍어댔다.

혼자서 교문을 빠져나갈 때 문득 생각한다.

세하도 나처럼 홀로 졸업식을 맞이했을까?

그 뒤로 세하를 만나러 간 적은 없다.

기다리느라 지치고 끝내는 나에게 커다란 실망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은 이미 나같은 건 신경안쓰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나갔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지망한 고등학교가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해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운이 좋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성적도 비슷하니 기대를 걸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와 세하는 서로 다른 학교를 지망하게 되었나보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나서 몇 달이 지나도 복도에서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에서의 나날도 중학교때와 마찬가지로 고립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결국 놀이터에 찾아가보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흘러도 마음 한 구석에선 세하를 잊지 못한 것이다.

9월의 중순에 하교를 하고, 오랜만에 외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놀이터에 발을 들이는 건 1년이 조금 넘게 지난 셈이다.

그 사이에 오가는 길의 풍경은 꽤 변해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공터에는 물류창고가 세워져있었고, 좁았던 이차선 도로도 확장되어있었다.

언젠가 세하가 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따라나선 적이 있다.

거리가 멀어 근처의 사거리까지만 데려다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세하는 저 공터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 저 풍경을 좋아해."하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변화를 싫어하는 그 아이였기에.

변해버린 저 모습을 바라볼때면 쓸쓸한 눈을 하고 있었겠지.

놀이터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왠지 그가 올 것 같이도 느껴졌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세시간정도를 기다려보자며 난 나무 벤치에 앉았다.

도중, 뭐라도 마실 겸 놀이터를 크게 둘러본다.

자판기가 사라져있었다.

세하가 자판기에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뽑는 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계속 그 곳을 바라보며, 그 아이가 오기를 기다려본다.

하지만 난 그 날,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 날 이후에도 종종 만나고픈 충동이 들때가 있다.

곧, 놀이터를 찾아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된다.

그럴때마다 난 놀이터에서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하고, 혼자 책을 읽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다.

원래부터 허름한 곳이지만 자판기가 없으니 더욱 초라해보인다.

아무것도 없고, 빛바래있고,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도 지금은 사라져버려 비참하고······.

생각해보면 놀이터는 어딘가 나와 닮은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그 아이는, 이런 놀이터가 아니라 조금 더 세련되고 평범한 곳에, 다른 사람과 발을 들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가 언제까지나 이 놀이터를 사랑하고, 커피는 항상 카라멜 마끼아또만 마시고, 태생적인 퇴폐미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그 아이는 변화를 싫어한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 아이 못지않게 변화를 싫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난 굉장히 못된 여자인 듯 하다.

지금의 나처럼.

지금의 그 아이가 기댈 곳이 없는 외톨이였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고등학생 2학년의 여름, 구체적으로는 7월 8일이라는 특별한 날짜에 나는 또 한 번 놀이터로 향했다.

서서히 죽어가는 황혼빛으로 영롱하게 물든 저녁노을.

벤치에 앉아 홀로 쓸쓸한 그곳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그토록 찾던 세하였다.

눈을 마주치자 세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굉장히 긴 시간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눈빛으로 무언가를 전하는건가 싶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우리들은 순수하게 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시선을 마주치다가, 세하는 같은 벤치에 두 걸음정도 떨어져 옆에 앉았다.

영영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그 아이가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그 안에 든 편지봉투를 조심스레 쥐었다.

놀이터에 찾아올 때마다 세하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한 통의 편지를 썼었다.

그 날, 내가 약속한 날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이유와 그 시절,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적은 내용이었다.

그 중에선 아직까지 연심을 품고 있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되면 꼭 전해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 꺼낼 수가 없었다.

이 편지를 건네주었다가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대답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난 편지를 꼬깃하게 쥐며 고개를 땅에 떨궜다.

그러다 가끔은 옆을 바라보고, 꼬리가 길어 시선이 마주치면 서로 시선을 거두었다.

'오랜만이네.'

'요즘은 잘 지내?'

'여기, 자판기 없어져버렸네.'

어떠한 말부터 꺼내야할 지 몰랐고, 어떠한 말들도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2년 전, 그를 기다리게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그가 오늘 이 곳으로 찾아온 것에 대한 기쁨, 여전히 외로워하는 눈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우리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뒤섞이자 그만 울고 싶어졌다.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벌어진 높이차만큼 날 올려다본다.

주머니속의 손이 떨렸다.

가까스로,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간 다음, 조금 구겨진 편지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잠시 가만히 있던 그 아이는 잠자코 내 편지를 받아주었다.

난 작별인사도 없이 바로 자리를 떠났고, 결국 그 아이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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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과는 맛없어(28화) 18.09.12 4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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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행복하신가요?(26화) 18.09.10 62 0 16쪽
26 행복하신가요?(25화) 18.09.10 52 0 19쪽
25 행복하신가요?(24화) 18.09.10 45 0 9쪽
24 행복하신가요?(23화) 18.09.10 45 0 12쪽
23 행복하신가요?(22화) 18.09.10 44 0 23쪽
22 행복하신가요?(21화) 18.09.10 49 0 17쪽
21 행복하신가요?(20화) 18.09.10 34 0 11쪽
20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9화) 18.09.09 53 0 17쪽
19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8화) 18.09.09 44 0 11쪽
18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7화) 18.09.09 54 0 13쪽
17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6화) 18.09.09 62 0 16쪽
»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5화) 18.09.09 44 0 13쪽
15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4화) 18.09.09 46 0 11쪽
14 7월 8일의 카라멜 마끼아또(13화) 18.09.09 51 1 14쪽
13 시퍼런 사과(12화) 18.09.08 204 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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