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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은 하셨나요?

고스티움(Ghostium)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완결

천세은
작품등록일 :
2023.11.16 17:13
최근연재일 :
2023.11.19 06:0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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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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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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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2화 <착각>

DUMMY

2화 <착각>



출발한 지 1시간이 조금 넘게 지났을까. 종철과 상혁을 태운 차량은 고속도로를 나와 한적한 교외로 진입했다. 이 여름이 끝나가는 게 아쉬운 듯, 차창 너머의 세상은 있는 힘껏 푸르름을 뽐내는 것만 같았다. 그 잎사귀들의 끝자락부터 서서히 물들어가는 가을. 그 끝과 시작이 뒤엉킨 이파리들 위에는 시간에 대한 저항과 순응의 흔적이 마치 경계선처럼 남아 있었다.

말없이 차창 밖만 바라보던 종철은, 이 여름을 괜스레 붙잡고 싶어졌다. 여름의 생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여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온몸에 땀띠가 나더라도 꼭 끌어안고 싶었다. 강렬한 햇빛에 두 눈을 잃더라도 바라보고만 싶었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그 여름을.

그렇게 단 하나의 간절함을 끌어안은 채로 다시 30여 분. 자동차의 바퀴는 지칠 줄 모르고 그 검은 몸뚱이를 쉴 새 없이 굴려댔다.


“경기도 한번 드럽게 넓네. 2시간을 운전했는데 아직도 도착을 못 하다니.”


운전대를 잡고 있던 상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종철이 운전하게 내버려 둘걸. 아침의 배려가 살짝 후회로 밀려들었다.


“운전 내가 할까?”

“아닙니다, 형님. 저는 오늘 지은 죄가 있기에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상혁은 구겨진 얼굴로 너스레를 떨며, 다시 한번 종철을 배려했다. 버릇이다. 그냥 버릇. 표독한 얼굴과는 다르게, 상대방만 생각할 줄 아는 이 남자의 안 좋은 버릇.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나서야 드디어 도착한 두 사람. 그들이 다다른 목적지는 경기도 외곽의 허름한 건물이었다. 주변에 상권도 하나 없는, 그저 허허벌판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 그 5층 정도의 건물은 이상하리만큼 칙칙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건물 근처에 차를 세운 상혁은, 차에서 내려 찌뿌둥한 몸을 활짝 펴봤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에서부터 발끝으로 퍼지는 음산한 느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는 그 느낌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왜 그래?”

“모르겠어요. 그냥 오한이...”


상혁은 이 정체 모를 불안감에,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이토록 무서웠던 적이 있었을까. 선선한 이 바람이 한겨울의 눈보라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져 왔다. 전신으로 뻗어있는 신경이 비명을 지르며 거부하는 듯했다. 당장 이 장소를 벗어나라는 듯이. 그런데,


“들어가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종철은 이 무서운 기운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건물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형님, 형님은 괜찮으세요?”

“뭐가?”

“여기 이상하잖아요. 나만 그런 거야?”


상혁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사명감으로 이겨가며 종철의 뒤를 따랐다. 종철은 이상하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상혁의 말대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이긴 하나, 이상한 점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가을이 조금 빨리 오고 있는 느낌이랄까. 건물 주변을 둘러싼 단풍나무의 붉은 잎이 지금까지의 그 어떤 단풍보다 붉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불꽃. 나뭇가지에 매달린 붉은 단풍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불꽃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점차 나무를 집어삼키며 타들어 가는 듯한 불꽃처럼.


“단풍이... 좀 붉네.”

“공포 게임 회사라 그런 거야, 뭐야. 분이기 왜 이래.”


상혁은 투덜거리며, 멈춰선 종철을 앞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상혁을 멀뚱히 바라본 종철의 눈에는, 비단 그의 뒷모습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거대한 어둠같이 느껴지는 건물의 입구. 입구 안으로 들어가는 상혁이, 마치 괴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 외관에서 불길한 기운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종철 역시 서둘러 건물 안으로 발길을 향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밖에서 받은 인상과 정반대되는 분위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붉은색 조명 밑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대리석. 그 검게 빛나는 대리석은 건물 안 전체를 둘러싼 채로 은은하고 그윽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단번에 불길함이 사라진 종철은, 안내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상혁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걸어가는 내내 발밑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향 내음. 이 달큰한 향기는 그에게 마치 천국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전반적으로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의 로비. 마치 따스한 벽난로 근처에서나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나른하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종철이 안내 데스크에 도착할 즈음, 로비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편안한 음색이 귓가를 살살 녹이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린 종철과 상혁. 그들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 아름다운 음성의 주인을 바라봤다. 긴 생머리의 단아한 외모에 과하지 않은 화장. 그리고 분홍의 투명한 입술이 머금고 있는 옅은 미소. 검은 정장에서 풍겨오는 교양미까지.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두 남자는 그녀가 그들 앞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비서실의 성은채입니다.”


은채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으로 시선을 주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종철은 명함을 받아 들고는 한동안 두 눈만 깜빡였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안내 데스크 앞으로 걸어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 중랑 경찰서의 김종철 경위입니다. 이쪽은...”


종철은 은채에게 신분증을 내밀며, 상혁을 바라봤다.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던 상혁. 그는 완전히 동공이 풀려있는 채로 그저 은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오싹함을 느낀 종철은 재빨리 상혁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이쪽은 이상혁 경사입니다. 상혁아.”

“에...”


반쯤 풀려버린 상혁의 눈동자가 종철을 향했다. 그러자, 점점 눈빛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당황한 듯 이리저리 마구 움직였다.


“형님, 저... 방금...”

“아니야, 됐어.”

“아, 김종철 경위님과 이상혁 경사님.”


부드러운 은채의 말투에서 왠지 모를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진 옅은 미소. 그녀의 두 눈은 신경질이 난 듯 매섭게 두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확실히 엄청난 미인임은 분명했지만, 종철에게 있어서 그녀는 세상 그 누구보다 표독스럽게만 느껴졌다.


“이곳에서 만든 앱 때문에 왔습니다. 상혁아...”

“그건 개발팀장과 직접 이야기하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은채는 종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비 안쪽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태도. 또각또각 날카롭게 바닥을 때리는 그녀의 구두 소리로부터 분노와 짜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은채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두 사람. 그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4층에서 멈춰 섰다.


“내리시죠.”


딱딱하고 날카로운 은채의 목소리가,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려 퍼졌다. 여전히 정면만 바라본 채, 로비에서 이후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그녀. 그러나 상혁은 뭐에 단단히 홀린 모양인지 독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취한 듯 정신 못 차리며 넋을 놓은 그의 모습에, 종철은 상혁의 등을 두드리며 그를 걱정했지만, 종철의 목소리는 그대로 그의 탁한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모양인지, 상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은채의 안내를 받으며 4층에 진입한 종철과 상혁. 여전히 상혁은 홀린 듯 은채의 뒤를 따랐고, 종철은 도무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이 이상하고 나른한 분위기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발걸음을 이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 은채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금 올라오는 달큰한 향기. 종철도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완전히 풀려버린 동공.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저 아름다운 뒷모습을 따라가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잠식했다.


“비서실장님이 좀 매력이 넘치긴 하죠.”


순간,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게 된 종철과 상혁. 풀렸던 동공이 서서히 빛을 되찾았다.


“완벽한 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넘치는 건 사실이니까.”


담담하게 들려오는 젊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리게 된 종철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운 조명과 검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큰 회의실. 마치 그 모습은 중세 시대 성의 대연회실과 같은 분위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대한 괴물들의 스테츄가 벽면으로 즐비하게 서 있었고. 실제 피가 묻어 있는 듯한 무기와 갑옷들이 그 밑에 널려 있다는 것 정도.

주변을 둘러보던 종철은 남자의 뒤로 보이는 거대한 괴물과 그의 발등을 찍고 있는 큰 도끼에 시선을 빼앗겼다. 도끼를 감싼 핏줄기가 마치 사람의 손의 힘줄처럼 느껴졌다. 분명 괴기스러운 모습의 도끼지만, 그 모습에서 사람에게나나 느낄 생동감과 생명감이 힘껏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잘 만들었죠? 차기작의 메인 괴물입니다. 그리고 영웅의 타락한 도끼. 게임에 영웅이 빠지면 안 되죠. ”


회의실의 의장석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창백하지만 생기있는 피부.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목구비. 웨이브졌지만 찰랑이는 머릿결. 은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희는...”

“중랑경찰서 형사님들이시죠? 김종철 경위님, 그리고 이상혁 경사님.”


종철의 목 뒤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은채가 이야기했나. 그러고 보니 은채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온 기억은 있는데, 그 이후 기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려 보면, 혼미해진 정신을 깨워준 것도 이 목소리였다. 도대체 기억을 잃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건물 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종철은 자신을 야금야금 잠식하는 불안감을 떨쳐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 어두운 감정은 마치 거머리 마냥 그의 몸에 붙어서 결코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수진 경위? 그분께서 회사로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남자 형사 두 분이 오실 거라고.”


수진의 이름을 듣자, 살짝 안심하는 종철. 불안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했던 것은 상혁도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멍하시죠? 흔히 있는 일입니다. 처음 오신 분들은 이 회사의 분위기에 압도되시더라고요. 저희는 워낙 긴 시간 일해서 별 감흥이 없는데,”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그들의 앞에 선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둘에게 내밀었다.

검은색 명함에 적힌 글자, 「LUBEZ게임 개발팀장 인시우」. 종철은 그의 이름을 확인한 후, 이내 지갑에 끼워 바지 주머니 속으로 그의 명함을 집어넣었다. 상혁 역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기는 마찬가지. 둘은 그가 내민 명함에 큰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작은 명함 따위가 살인사건과 연관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여기서 만든 앱 때문에 왔습니다.”

“고스티움이요? 그건 아직 런칭하지는 않았는데.”


그러자, 상혁이 피 묻은 핸드폰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형석 씨 아십니까? 이 핸드폰의 주인인데.”


시우는 비닐봉투 속 핸드폰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더니,


“이형석 씨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핸드폰 주인은 누구인지 알겠네요.”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종철과 상혁 앞에 내밀었다. 그가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시우와 누군가가 찍힌 사진. 사진 속 남성은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철민 책임입니다. 고스티움 프로젝트를 함께 이끌던 사람이죠.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연락이 안 되긴 했는데. ”

“이철민이라고요. 상혁아, 수진이에게 연락해서 알아봐.”

“인사과에 연락해서 인적사항을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시우는 두 사람을 밖으로 배웅하려는 듯 앞장섰지만, 종철은 아직 이야기를 끝낼 마음이 없었다.


“그럼 그 앱은 이형석이 아니라 이철민 씨가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평가와 개발을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죠. 하지만 저희는 결코, 함부로 개발 외부의 인물에게 앱을 배포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앱에 녹음기능이 있던데, 복원 가능할까요?”


상혁은 다시금 시우를 향해 핸드폰이 담긴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흔쾌히 핸드폰을 받은 시우였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복원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런데요?”

“고장이 났네요. 배터리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시우는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상혁에게 돌려줬다. 핸드폰을 받아든 상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핸드폰의 전원을 넣으려고 했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핸드폰에 전원이 들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건 저희 회사가 아니라 국과수에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의 말에, 종철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랬다. 이 핸드폰은 이곳 게임회사가 아닌 국립 과학 수사연구원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런데 왜 지금 이곳에 와서 핸드폰을 내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무슨 단서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 단서라는 게 있긴 할까.


“그러긴 한데...”


상혁은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곧바로 종철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상황을 전부 이해하게 된 종철. 자신이 없던 사건 현장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속인 사람들도 문제지만, 속은 자신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제일 기초적 상황 판단이었다. 왜 게임 개발 회사에 가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어야만 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를 했습니다.”

“아니요, 그럴 수 있습니다. 큰 사건인데 도와드려야죠.”


싱긋 미소 짓는 시우는 그들을 이끌고 회의실을 나섰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사무실의 풍경이 종철의 눈으로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로, 무언가에 홀린 듯, 컴퓨터 화면만 보는 사람들. 그들의 손은 쉴 줄 모르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외부인이 지나가면 한 번쯤 눈이 마주칠 법도 했지만, 그들은 모니터로부터 눈을 떼는 일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은채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도 넋을 놓고 모니터만 바라봤다.

그렇게 시우의 안내를 받으며 로비로 내려온 종철과 상혁은, 배웅해준 그에게 짤막하게 인사하고 곧장 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 그때,


“잠시만 두 분.”


그런 둘의 발걸음을 붙잡는 시우. 그는 매우 고민에 찬 표정으로 두 형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이철민 씨에 대해서 뭐 해주실 말씀이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철은 방향을 바꿔 시우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다지 종철이 마음에 들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 아닌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부탁이라는 말에, 궁금증이 생긴 상혁 역시 걸음을 돌려 시우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핸드폰 줘보시죠.”


상혁에게 핸드폰을 요구한 그는, 한참 동안 상혁의 핸드폰을 만졌다. 그렇게 수 분이 지나고. 시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상혁에게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고스티움 최신 버전입니다. 이대로 런칭해도 무방한.”

“네?”


황급히 핸드폰을 받아든 상혁의 눈에는 정말 그의 말대로 고스티움이라는 새로운 앱이 떡하니 화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 임시 계정으로 로그인해 놨습니다. 지금은 사용 불가능하지만 두세 시간 안에 허가가 떨어질 거고요.”

“이걸 왜 저에게...”


상혁은 시우의 당혹스러운 행동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시우. 그 미소에 상혁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담력 좋은 형사님들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요. 용감하신 형사님들이 저희 앱을 이용해보고 무서움을 느끼셨다면, 그거야말로 저희의 예상대로 앱이 만들어졌다는 증거니까요.”

“아... 그렇긴 하네요.”


그의 말에 동참하듯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우는 이번엔 종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저는 됐습니다.”


짧게 거절하는 종철. 큰 관심이 없던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 그 순간, 그의 팔을 낚아채는 두툼한 손.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상혁이었다.


“형님, 그러지 말고 받아봐요. 재미있잖아.”

“그런 거 할 시간 없어.”

“에이 형님. 이거 아무나 안 준다고요. 그쵸?”


말을 마친 상혁은, 종철이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핸드폰을 뺏어서 시우에게 건넸다. 그를 막으려고 시우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종철에게 남은 방법은 단 하나, 핸드폰을 돌려받자마자 앱을 지우는 것뿐이었다.


“형님, 지울 생각하지 마세요. 팀장님이 애써 깔아줬는데.”

“야...”


마음을 읽힌 종철은 인상을 쓰며 상혁을 노려봤다. 애당초 이런 곳에서 시간을 뺏긴 게 누구 때문인데 그런 철없는 말을 하는 걸까. 종철은 마음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지우셔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한번 써 봐주세요.”

“...알겠습니다.”


미안한 듯 바라보는 시우의 모습에 죄책감이 피어난 종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럼 사용해보시고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 주세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빨리 갑시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향하는 상혁. 종철은 마음 한편이 영 내키지 않는 듯 핸드폰을 바라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 분명 대낮에 들어간 기억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건물 밖 세상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와 도대체 얼마나 여기에 있었던 거야?”


종철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있었던 것일까. 느낌으로는 30분도 채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은 그들에게 5시간 이상 건물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무지 기억이 안 나네. 형님은 어때요?”

“운전이나 해.”

“내가? 또?”


반항하듯 치켜세우는 말투에, 종철은 날카로운 그의 눈매를 더욱 세우며 상혁을 바라봤다.


“그래, 난 오늘 지은 죄가 있지.”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전석에 앉은 상혁. 그렇게 상혁이 운전하는 차는 종철을 데리고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점점 더 검어지는 하늘. 어두워진 풍경은 빛뿐만 아니라 계절의 정취마저 집어삼킨 듯 온 세상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검은 세계를 보고 있자니, 순간, 게임회사 안에서 느꼈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었다. 도대체 그곳에서 느꼈었던 이상한 느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떠올리기만 해도 닭살이 돋을 정도로 끔찍하고 섬뜩한 경험이었다. 그래, 상식적인 단어들로 표현할 수 없고,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경험. 오감을 빼앗긴 듯한 그 경험에, 종철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은 상혁도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긴장한 듯한 그의 얼굴.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도 살짝이 떨리고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공포의 씨앗이 남아 있는 종철과 상혁은 게임회사와 멀어져도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을 안은 채, 서울로 방향을 잡았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속의 씨앗이 무슨 결과를 싹틔울지.


***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던 차는 이윽고 서울로 진입했다. 오는 내내 말이 없던 두 사람. 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오로지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신내동으로 들어서는 차량. 익숙한 길을 만났다는 반가운 마음은 곧바로 상혁의 얼굴에 나타났다.


“형님, 회사로 같이 가실 건가요?”


한껏 편안함이 묻어나오는 상혁의 목소리. 그 목소리 덕분인지, 종철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살짝 가셨다.


“아니, 집으로.”


상혁은 그의 대답에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하루였다. 최악의 살인 현장에 혼을 쏙 빼놓는 게임회사. 이 두 사건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종철은 오죽할까. 상혁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그저 차를 몰았다. 이게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태운 차량은 노원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아파트 단지를 누비는 상혁은, 이내 한 아파트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형님, 제가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갈게. 너도 힘들잖아.”

“지은 죄가 있는데...”

“들어가, 수고했다.”


종철은 상혁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종철의 뒷모습. 어쩌면 줄곧 종철의 마음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었을 뿐.


그렇게 상혁을 보내고 집에 들어온 종철은, 컴컴한 거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져도 아무런 답장이 없는 집 안. 종철은 그 반응이 익숙한 모양인지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고 그대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편안하지 않다. 분명 자신의 집이지만 편안하지 않다. 뭔가 잊은 듯한 느낌이 그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무엇일까. 무엇을 잊은 것일까. 분명 중요한 일이란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뭐지... 뭘...”


끝내 입 밖으로 나와버린 그의 속마음. 그는 갖은 인상을 쓰며 정신을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


“아, 하나! 하나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종철은 집 안쪽의 작은 방으로 걸음을 내달렸다. 헐레벌떡, 마치 미친 사람처럼 작은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선 종철. 그는 작은방 안에 잘 정리된 인형들과 침대, 그리고 책상이며 장난감 상자들까지 연신 방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하나가... 하나가 왜...”


게임회사에서의 일 때문일까. 머릿속이 멍해진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종철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뜻대로 쉽지는 않았다. 하나를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뭘 잊은 것일까.

끝내 머리를 쥐어 싸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종철. 그런데 그 순간, 땅을 향한 그의 눈에 작은 물체가 맺혔다. 바로, 붉은색 작은 알약. 종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알약을 집어 들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떠오른다. 침대에 앉아 약을 먹던 하나. 수많은 약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던 하나. 그리고 다 먹고 나선 배시시 웃어주던 하나. 그 찰나, 잊고 있던 그의 기억이 또렷하게 피어났다.


“하나야! 내가 지금...”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자리에서 일어선 종철. 그의 혼 빠진 얼굴에서 영겁의 자책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빨리 가야 해... 빨리!”


종철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나갔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그의 표정. 흡사 오전에 은채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와 비슷한 그의 모습은 맹목적이고 집요했다. 설마 오늘 겪은 그 이상한 일들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것일까. 아니면 죄책감이 그를 짓뭉개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그는 하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밖으로 내달려 나갔다.


***


한편, 경찰서에 도착한 상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향했다. 지쳤다고 해도, 몸이 지친 건 아니었다. 운전 좀 한다고 해서 경찰이, 그것도 강력반 형사가 그리 쉽게 체력이 고갈될 리는 없었다. 단지, 자꾸만 정신이, 아니, 머리가 자꾸만 멍해지는 느낌이 지속 되었다. 그래, 기가 빨렸다는 표현이 어쩌면 이 상황에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자, 다녀왔습니다.”


자리에 앉아있는 팀장을 향해 너스레를 떨며 다가갔다. 진이 빠져 있는 건 팀장도 팀원들도 마찬가지. 하긴, 오늘 그 엄청난 장면을 보고 정신을 제대로 차렸던 사람은 종철 한 사람뿐이었다.


“바람 좀 쐬고 왔냐?”

“바람이 아니라 큰 거 하나 물어왔습니다. 이수진 경위가 말 안 했어요?”


상혁은 당당하게 수진을 바라보며 으스댔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완전 다르게 흘러가는 사무실 분위기. 팀장을 포함한 팀원 전원이 미친 사람 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 경위, 제가 전화했잖아요. 루베즈 게임의 이철민 책임.”

“아니요, 안 하셨어요...”


상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분명 종철이 시킨 대로 수진에게 연락을 줬을 텐데. 아닌가, 연락하지 않았나. 기억이 흐릿해 당최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연락 안 했어요? 정말?”

“네. 정말이요.”


상혁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통화 이력을 확인했다. 그런데 없다. 수진과 통화한 이력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 것일까. 분명 종철의 말대로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자신의 행동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럼 루베즈 게임 인사팀에서 연락 온 건 없어요?”

“조금 전에 메일이 하나 오긴 했는데...”


상혁은 수진의 자리로 다가가. 함께 이메일을 확인했다. 루베즈 게임 인사팀으로부터 날아온 이철민의 입사 지원서. 소소한 인적사항이 적인 한 장 분량의 서류였다. 순간, 상혁은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개 속에 가려진 것처럼 불확실했던 기억이 이 이메일로 인해 윤곽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여기 이 사람이 핸드폰 주인이랍니다.”


핸드폰 주인이라는 말에, 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수진의 자리로 걸어왔다.


“게임사 팀장이 말해주더라고요. 앱을 가져간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여기 이 사람이라고.”


상혁은 팀장을 향해 확신의 미소를 짓더니, 이내 아침에 들고 갔던 피 묻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턱 올려놓았다. 상혁의 당찬 행동에 일제히 시선이 핸드폰으로 쏠리고. 피 묻은 핸드폰을 본 몇 명은 아침의 그 참혹한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는지, 입을 막고 황급히 사무실을 달려나갔다.


“진짜 강력반 형사라는 놈들이 피 좀 봤다고... 어우, 수진아 좀 치워라.”


호기롭게 핸드폰을 바라봤던 팀장도, 이내 고개를 돌렸다. 팀장의 말이 들리긴 했지만, 수진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 그녀는 책상 위의 핸드폰을 바라보기는커녕 두 눈을 질끈 감고 책상 밑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온종일 들고 다닌 사람도 있는데. 거 참.”


한심하다는 듯 그들을 바라본 상혁은, 다시 핸드폰을 집어서 자신의 책상 속에 깊숙이 넣었다. 핸드폰이 사라지자, 그제야 평정심을 찾은 사람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인지, 몇몇 인원은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상혁아, 네가 국과수에 가져다줘.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어휴~ 쫄보. 팀장님도 쫄보, 수진 씨도 쫄보.”

“이상혁 경사님도 토하셨잖아요.”

“지금은 안 토하잖아요.”


의기양양한 상혁을 향한 수진이 가냘픈 반격을 날렸지만, 상혁은 가소롭다는 듯 여유 있는 미소로 수진에게 답했다. 독사 같은 얼굴에 피어난 자신만만한 미소. 마치 비열한 악당이 비웃음을 머금은 듯한 그 표정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비단 수진뿐만은 아니었다.


“야, 빨리 가! 헛소리 말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쫄보~ 쫄보!”


주변 팀원들에게 사랑의 총알을 날리면서, 동시에 실컷 약을 올린 상혁은 수진과 팀장뿐만 아니라 옆 팀 사람들에게까지 장난을 치며 사무실을 등졌다.


“어휴, 저거 언제 사람이 되냐. 수진이는 그 이메일에서 쓸만한 거 찾아보고. 다른 애들은...”


팀장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저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구역질 소리. 팀장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수진아, 오늘은 이만 가자. 지금 조금 더 파고들다간 쟤네 속 창자까지 다 토하겠다.”

“넵!”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가방을 집어 든 수진은 곧장 사무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달려나가는 그녀의 등 뒤로 들려오는 구역질 소리. 그녀 역시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복도를 뛰쳐나갔다. 엉망진창이다. 팀장은 골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쓰며, 살며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런데, 그 손이 서서히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이마를 거처, 눈. 눈을 감쌌던 손은 이제 코를 지나 입으로 향했다. 이내 입에 멈춰선 그의 두툼한 손. 그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았다. 아니, 막아야만 했다.

쿵쿵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사무실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그의 동공. 새파랗게 질린 그의 두꺼비 같은 얼굴. 입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지난 점심의 엑기스가 손등을 타고 한 방울 두 방울 바닥에, 그의 옷에 흘러내렸다. 더욱 다급해진 그의 발걸음. 그렇게 그 역시 있는 힘껏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의 여느 팀원들처럼.


***


그 시각 종철은 혜화동의 대학병원 안, 어린이 병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상기된 표정 위로 잔뜩 화가 난 듯한 그의 눈빛. 그 눈동자는 주변을 향해 거침없이 독기와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으로 살기를 뿜어내며 병동 로비에 도착한 종철. 그가 막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툭 건드렸다.


“설마, 하나 아버님?”


말끔한 복장의 중년 여성. 하나라는 말에, 종철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해 그녀를 바라봤다.


“하나 아버님 맞으시죠?”

“실례지만...”

“저 어린이 병동 수간호사요.”


간호사라는 그녀의 소개에, 종철은 반가운 표정으로 답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지어지지 않는 미소.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려 해도 도무지 올라가지 않았다.


“왜 여기에 이렇게 계세요? 안색도 안 좋아 보이시는데.”

“아, 그게 하나를 만나러...”


하나? 하나를 만난다고? 하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왔다고? 이상하다. 뭔가 빠진 느낌이 든다. 뭔가 큰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 분명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고민은 이내 그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났다.


“하나요? 아버님 정말 괜찮으세요?”


마치 종철에게서 전염이 된 듯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여성의 표정. 그때까지도 그는 왜 그녀가 이렇게 걱정하듯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지 못했다.


“오늘 좀 일이 많아서... 일이...”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무슨 일이 많았던 걸까. 살인사건? 게임회사?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의문이 종철의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녔지만, 마치 연기가 찬 듯 뿌연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일이요? 설마 일까지 나가셨어요? 아침에 힘드셨을 텐데.”

“아침이요?”


아침이라는 말에 종철은, 순간 눈빛이 돌아왔다. 그래, 아침. 분명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다. 탁했던 그의 정신이 점차 맑아져 왔다. 이렇게 온몸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세상에서 제일 중요했던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떠한 기억도 여전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혹시, 아침에 제가 뭘 했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둘러싼 의문의 해답이 아침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엔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철은 혹시 그녀라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그녀에게 되물었다.


“제가 아침에...”

“하나 발인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철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발인? 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는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눈앞의 여자를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발인이요? 하나의 발인?”

“하나 아버님 무섭게 왜 이러세요?”

“지금 이상한 말을 하셨잖아요! 하나의 발인이라니, 하나가 죽어요? 하나가 죽었다고요?! 그런데 내가 지금 그걸 모른다고?! 전혀 모른다고?!”


종철은 당장이라도 여성을 잡아먹을 듯 매섭게 노려봤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한껏 겁을 먹은 여성은 주변을 바라보며 다급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로비에서 겁박을 지르는 종철을 확인한 것일까. 로비 입구에 서 있던 경비원이 긴장한 얼굴로 종철을 향해 걸어왔다.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아니, 지금 이 사람이 내 애가 죽었다잖아요! 오늘 내 아이 발인이라고! 내 아이 발인인데 내가 모른다고?! 내가 발인인데....”


그때, 뿌옇게 가려졌던 기억이 돌아왔다. 화장터에서의 기억. 영구차를 바라보던 자신과 그 안에서 꿈틀거린 죄책감. 그리고 상혁의 전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뚜렷하고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자세히 재생되었다.


“내가... 도망쳤어요...”


그대로 주저앉는 종철. 갑자기 쓰러지는 그의 모습에, 경비원이 놀라 황급히 다가왔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축 처진 종철의 상태. 경비원은 서둘러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내가 도망쳤다고요... 내 아이 발인인데...”


세상 모든 것을 잃은 표정으로 로비 바닥을 바라보는 종철은 그대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그렇게 못난 자신을 비난하면서.


***


한편, 자신의 집에 돌아온 상혁은, 지친 몸을 겨우 끌고 들어가 드디어 소파에 눕혔다. 무겁게 내려앉는 머리가 소파 머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아, 진짜 미치겠네. 자꾸 왜 이러지.”


계속해서 게임회사에서 느꼈었던 멍해짐이 그를 찾아왔다.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상혁은 도저히 정신을 온전히 차릴 수 없었다.


“어제까지 쉬었는데 쉰 것 같지가 않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모양인지, 상혁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선 탓일까, 핑하고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휘청휘청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은 채 화장실로 걸어간 그는, 몸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천천히 차오르는 물을 보고 있자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조금 뒤 저 뜨뜻한 물에 들어갈 걸 생각하니, 그를 집어삼켰던 피로가 조금은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렇지, 형님.”


머릿속이 조금 맑아진 느낌이 들자, 상혁은 곧바로 종철을 걱정했다. 오늘 누구보다도 많은 사건을 겪었던 그가 과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을까. 행여나 나쁜 생각을 품은 건 아닐까. 상혁은 내심 걱정이 됐었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손끝에 닿는 익숙한 물건. 바로 핸드폰이었다. 상혁은 주저하지도 않고 화장실을 걸어 나왔다. 물론 핸드폰을 꽉 쥔 채로.


-지금은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걱정이 되었던 탓에, 연거푸 전화를 걸어보는 상혁. 그러나 종철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뭐 하시느라고 전화를 안 받아. 사람 걱정되게.”


살짝이 화가 올라왔다. 답답함이 가슴에 눌러앉았다. 하지만 그 두 감정보다 더 깊은 종철을 향한 걱정. 상혁은 내려놨던 핸드폰을 다시금 들어서 화면을 바라봤다.


“고스티움? 뭐지?”


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건 핸드폰 연락처가 아닌, 화면 구석에 깔린 앱. 시우가 깔아준 그 앱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그 앱은,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신비롭고 이상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전화를...”


핸드폰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다시금 멍해졌다. 점점 핸드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때,


[띠리링~ 띠리링~]


갑자기 걸려온 전화. 종철이었다.

핸드폰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상혁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니, 형님. 이제 연락하시면...”

-전화했었냐?-


그와는 상반되게 조금 잠겨있는 듯한 종철의 음성.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슬펐을 것이다. 세상 무너진 듯 괴로웠을 것이다.


“내일 모시러 간다고 말씀드리려고요.”

-... 알아.-


잠시 흐른 정적이 전달해 준 그의 상태. 상혁은 아직도 종철이 슬픔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혁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고통을 모르는데 어떻게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그저 미안한 마음만 들 뿐이었다.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형님, 내일을 위해 약주 조금만 하세요.”

-...... 응.-


상혁의 최선이었다. 상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 그렇게 종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상혁은 답답한 마음을 콱 움켜쥔 채로 소파에 앉았다.

미안한 가득한 그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침에 저지른 결례. 미안함과 죄책감. 착잡함 등등.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그러던 도중 이상한 생각이 구석 한편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혹시나 곁에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닐까. 정말 끔찍한 생각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쳤다. 전화를 받았던 그의 상태로 볼 때, 완전히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말려야 한다는 외침이 자꾸만 이어졌다. 그렇게 그는 다시금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고스티움. 한시가 급하다고 머릿속에서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오로지 그 앱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해져 왔다. 머릿속이 그리고 눈동자가. 둔하게 느껴져 왔다. 사방이 그리고 시간이.

마치 자신을 만져달라는 듯 이상야릇한 시선을 보내온다. 사람도 아닌 것이. 형태도 없는 것이. 자꾸만 유혹이란 걸 한다. 자신의 위로 손가락을 올리라고. 핸드폰을 잡은 손 곁에서 놀고 있는 그 손가락을 올리라고.


[콸콸콸~]


그 순간, 그의 귀를 때리는 시끄러운 물소리. 아차, 욕조의 물이 넘친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린 상혁은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지고 재빠르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들려왔던 소리대로 욕조는 물이 사정없이 넘쳐, 사방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양손으로 황급히 수도꼭지를 잠근 그는 한동안 찰랑거리는 욕조 안을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그는 살짝이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그런 그 마음에 더욱 찬바람을 불러일으킬 무언가가 그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자신의 왼손에 곱게 쥐어져 있는 그의 핸드폰. 분명 소파 위로 던졌을 텐데.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거실로 달려나갔다. 그렇지만 당연히 소파 위에 핸드폰 없었다. 착각이었나. 아니다. 착각일 리 없다. 분명 집어 던졌다. 아직도 던졌을 때의 감촉이 그의 손에 남아 있는 듯했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뭔가에 홀린 것일까.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과 상상이 꽃봉오리 피듯 피어올랐다.


“피곤해서 그런 거야. 그래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애써 경험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진정시킨 상혁은, 핸드폰을 살며시 소파 위로 내려놓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손을, 그리고 소파 위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또다시 같은 일을 겪는다면, 이번엔 자신을 진정시킬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은 그는, 그대로 몸을 화장실 쪽을 향해 틀었다.

그런 그때, 불길한 듯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는 상혁. 분명 핸드폰은 소파 위에 있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그게 아닌 듯했다. 그의 온몸에 정체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의 팔과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었다. 무엇일까. 무엇이 이토록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일까. 그는 솟구치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른 공포감은 이내 그를 완전히 잠식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불안감에 두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그런 그때, 그의 코끝에 스며드는 감미로운 향기. 곧 터질 것만 같던 심장이 언제 그랬었냐는 듯 안정을 되찾았다. 부들부들 떨리던 팔과 다리도, 공포감이 가득 찼던 그의 눈동자도 평온함을 맞이했다.

분명 어디에선가 맡아본 것만 같은 향기. 막상 머릿속에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은 알고 있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다.

상혁은 그 향기를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감미롭고 향긋한 그 냄새. 마치 자신을 감싸 안아 주는 듯한 느낌은 안정감이 아닌 황홀감마저 가져다주었다. 온몸에 그 달콤함이 촉촉하게 배어들었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살결같이 보드랍게 느껴지는 그 향기. 그렇게 그 형체 없는 쾌락은 피부를 통해 그의 안쪽까지 점점 번져 나갔다.

이윽고 쾌락을 만끽하며 향기의 근원에 도착한 상혁. 그의 눈앞에는 소파 위로 던졌던 그 핸드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핸드폰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쾌락. 육체에 가득 찬 황홀감이 더욱 심하게 요동을 쳤다. 누군가가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듯한 그 감미로운 느낌에, 상혁은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야 말았다.

이내 그가 핸드폰을 손에 쥐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쾌락이 그를 덮쳤다. 하염없이 입 밖으로 침이 흐르고, 두 눈동자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뒤집혀 졌다.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 그의 바짓가랑이도 축축하게 젖어갔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한 그의 모습. 그런데 그때, 핸드폰을 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얼굴을 향해 올라오는 손. 그의 손이, 아니 핸드폰이 그의 얼굴에 다다르자, 핸드폰은 저절로 화면을 켜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핸드폰을 향하자, 이내 저절로 열리는 핸드폰 화면. 그와 동시에 비교적 자유롭던 엄지손가락이 핸드폰 화면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상혁의 눈동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엄청난 속도로 엄지손가락은 핸드폰 화면을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 손가락은 한 앱 위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엄지손가락은 슬그머니 그 앱 위로 자신을 올렸다.


“아... 도대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혁은 침 범벅이 된 자신을 발견했다. 게다가 침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바짓가랑이. 그는 자신의 상태를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얼굴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그를 감싸는 섬뜩한 기운. 그는 마른 침을 삼켜가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건 루베즈 게임의 메인 로고. 그랬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고스티움을 작동시킨 것이 분명했다.

상혁은 몸서리치며 서둘러 앱을 종료했다. 아니, 핸드폰 자체의 전원을 끄고서 소파 위로 휙 던져버렸다. 그러고 나니까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생각. 이름 모를 안도감이 입 밖으로 절로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오줌을... 뭐야, 이거 오줌 아니야?!”


바지를 확인하던 상혁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망하고 창피한 상황에 얼굴마저 붉어진 상혁. 무척이나 신기한 경험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는 말 못 할 만큼 민망한 건 사실이었다.

찝찝함에 서둘러 옷을 벗어 빨래통에 던진 상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조를 향해 그 알몸을 던졌다. 그의 몸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살며시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온몸을 감싼 온수가 따스한 손길같이 느껴졌다. 그 순간, 조금 전 자신이 맛봤던 쾌락이 다시금 느껴지는 듯했다. 점점 상기되는 그의 얼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입 밖으로 내며, 완전히 풀려버린 동공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머리 위를 빙빙 돌기 시작하는 파리 한 마리. 욕조 위 가득 찬 수증기 뒤로 아름다운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수면 위로 펴져 있는 긴 생머리. 그리고 단아한 얼굴. 아름답고 고운 분홍의 입술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수증기가 빚어낸 환상일까. 아니면 외로움이 만들어낸 허상. 그것도 아니면 그저 욕정이 불러낸 상상인 걸까. 아무렴 상관없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천국을 느끼게 해줄 만큼의 쾌락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그는 그 욕망에 취해 잡힐 리 없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살포시 안기는 작은 얼굴. 미소를 머금은 그 얼굴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이 다가올수록 파리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하나, 둘 점점 파리의 숫자가 늘어나고, 어느새 파리는 욕조 위 천장을 뒤덮을 정도로 많아지고야 말았다.

또다시 달콤한 향기가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자신을 매혹하듯 어루만지는 그 달콤한 향기. 동공이 풀리고 침이 흘러나왔다. 다시금 쾌락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그녀가 다가갈수록 수면 밑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점점 검붉게 번져 나갔다. 이윽고 완전히 상혁의 온몸을 둘러싸고만 그녀의 머리칼. 마치 욕조와 하나가 된 듯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상혁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 것처럼, 그녀의 손도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하얗고 자그마한 그녀의 손.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린 그녀의 손은 이윽고 상혁의 얼굴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를 향하는 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수면 밑에서 작은 손들이 하나둘씩 그의 얼굴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상혁은 여전히 그 아름다운 얼굴에만 집중했다. 그는 천천히 그 미소 머금은 입술을 향해 욕정에 푹 절인 그의 혓바닥을 세차게 날름거렸다. 그러자 화답하듯 입술을 벌리는 그 아름다운 얼굴. 그런데, 그 입술에서 마중을 나온 것은 분홍빛의 혀가 아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미의 가늘고 기다란 발이었다.


“응? 으악!”


순간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밀쳤지만, 그 머리는 포기하지 않고 상혁의 얼굴을 향해 돌진했다. 그 돌진과 동시에 일제히 상혁의 몸을 뜯기 시작하는 손들. 머리카락 때문에 검게 보였던 욕조가 이제는 상혁의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열광하듯 파리 떼는 일제히 욕조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물과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둘러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미 수면 밑 몸과 다리는 괴물 같은 손과 머리카락에 의해 찢긴 지 오래. 남은 것은 오직 욕조 밖의 머리와 두 팔 뿐이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열어 봤지만, 거미 다리 가득한 그 얼굴이 입술 같은 그 몸통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타고 점차 그의 머릿속으로 녹아드는 거미의 다리. 이윽고 그 다리들과 함께 코와 귀로 피범벅인 뇌수가 흘러나왔다. 반항하던 그의 양팔도 이내 축 늘어지고. 쾌락에 빠졌었던 그의 눈알은 두부처럼 으깨진 뇌수와 함께 핏물 위로 둥둥 떠다녔다.


그렇게 큰 저항은커녕 소리 한 번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상혁은 갈가리, 비참하고 잔혹하게 뜯겨 나갔다. 온전히 남은 것이라고는 욕조 밖에 나와 있던 그의 오른팔뿐. 그리고 그 팔은 어느샌가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 소파 위에 있어야 할, 전원이 완전히 꺼진 그 핸드폰 말이다.

주인이 이미 죽었음에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상혁의 손가락은 이윽고 핸드폰의 전원을 넣었다. 이어서 전원이 돌아온 핸드폰은 자연스럽게 핏물이 고인 화장실 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마치 다이빙을 하듯, 음식 위로 뛰어드는 한 마리 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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