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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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창과 창이 부딪쳐 하늘로 올라가고 칼과 칼이 쇳소리를 만들었다.
이혼은 침을 삼키며 화톳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전투를 지켜보았는데 피가 비처럼 내리고 비명과 고함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육박전을 벌이느라 뒤엉켜 있었지만 구분은 쉬웠다.
왜군은 옷 위에 가슴이나, 어깨를 가리는 부분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등 뒤에 군기를 부착해 왜군임을 알아보기 쉬웠다.
반면, 아군의 옷차림은 제각각이었다.
승려와 유생, 저고리를 입은 농부가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으아아악!”
눈에 익은 아군 병사 한 명이 배를 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급히 상처를 막아보았으나 피와 내장이 같이 쏟아졌다.
그를 쓰러트린 왜군이 왜도(倭刀)를 두 손으로 잡아 목에 내리쳤다.
끔찍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긴장한 기색으로 전장을 주시하는 허준의 모습이 보였다.
이혼은 허준의 모습을 보며 반성했다.
‘그래, 저들은 내가 내린 명령으로 죽어가는 중이다. 그런 사람들의 최후를 내가 봐주지 않으면 누가 봐주겠는가. 외면하지 말자.’
이를 악문 이혼은 다시 전장을 주시했다.
악몽과 끔찍한 현실을 오가는 듯한 전투가 계속 되었다.
30여 분의 전투가 끝난 후, 왜군은 5, 6십 명이 살아남았다.
한데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전투력이 훨씬 강했다.
아군의 창보다 훨씬 더 긴 창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공격해왔다.
왜군의 강력한 기세에 아군이 오히려 물러서기 시작했다.
“화살을 쏴라!”
이호의의 명에 뒤에서 다시 무수한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파파팟!
화살에 맞은 왜군이 우후죽순으로 쓰러졌다.
창이 아무리 강해도 화살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거나 먹어라!”
1대대장 최자립은 죽폭에 불을 붙여 힘껏 투척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최자립이 전력을 다해 던진 죽폭은 하늘을 한 줄기 유성처럼 가르며 날아가 왜군 위에서 터졌다.
퍼엉!
죽폭은 공중에서 점화되었는지 땅에 닿기도 전에 폭발했다.
촤아악!
죽폭이 폭발하며 비산한 쇳조각이 남은 왜군을 마저 쓰러트렸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전투가 끝났다.
이혼은 손바닥이 아픈 느낌을 받고 고개를 내려 보았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얼른 옷에 닦은 이혼은 심호흡을 하였다.
작전참모 이호의가 달려와 주먹을 가슴에 붙인 채 무릎을 꿇었다.
절도 있는 군례였다.
“저하, 기뻐하시옵소서. 대승이옵니다!”
“모두들 고생하였네.”
“적은 전멸했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 열 둘, 부상 서른 한 명입니다.”
이호의는 사상자가 적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혼에게는 수십 개의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린 이혼은 팔다리에 힘이 쭉 빠져 서있을 힘이 없었다.
그저 희미한 목소리로 마지막 명을 내릴 뿐이었다.
“정리는 알, 알아서 해주게.”
“알겠습니다.”
이호의는 바로 움직였다.
먼저 범골을 수색해 살아있는 백성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였다.
다행히 곳곳에 몸을 감춘 백성들이 많아 이번 전투의 의미를 더해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전사자와 백성들의 시신을 땅에 안장했다. 또, 부상자는 회령으로 운송할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왜군 시신을 한데 모아 태워버렸으며 그들이 소지한 화약과 조총, 창, 칼, 갑옷 등은 근위연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다음 날 새벽까지 전장을 정리한 이호의가 돌아와 보고했다.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한 이혼은 조금 생기가 도는 얼굴로 물었다.
“전리품은 얼마나 되는가?”
“화약은 10관(貫), 조총은 50자루, 칼과 창은 각각 3백 자루가 넘습니다. 그리고 군마 30마리를 추가로 얻었으며 갑옷도 상당합니다.”
이혼은 누구보다 명석한 머리를 가져 바로 지시를 내렸다.
“갑옷은 착용하지 말고 수레에 싣도록 하게. 괜히 입었다가 아군에게 왜적으로 오인 받으면 아군끼리 싸우는 사태가 발생할 걸세.”
이호의는 식은땀을 흘렸다.
“소장이 큰 실수 할 뻔했군요.”
이호의는 근위연대 무장이 형편없어 왜군 갑옷을 나누어줄 생각이었는데 이혼의 말을 들어 보니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던 것이다.
“갑옷은 녹여서 사용 가능하니 버리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휴식했다가 아침을 지어먹고 출발하세.”
난리 통에 도망쳤다가 소문을 듣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백성들을 위로한 근위연대는 마을 입구에 솥을 걸어 아침을 지어먹었다.
아직도 피 냄새가 나며 핏자국이 널려 있는 곳에서 밥을 먹는 게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하였지만 배고픔은 그런 상황을 초월했다.
이혼은 평생 끼니로 인해 곤란을 겪은 일이 없었다.
넉넉하게 먹지는 않더라도 끼니를 거르는 경우는 없었다.
한데 이곳에 온 이후에는 하루에 두 끼, 그것도 찬이 거의 없는 잡곡밥을 물에 말아 먹다보니 항상 배가 고파 몸에 힘이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이혼의 아침을 챙겨온 허준이 고개를 숙였다.
전시라곤 해도 일국의 세자가 먹는 음식치고는 너무 형편없었다.
조와 수수를 섞은 잡곡밥에 된장 반 숟가락이 전부였다.
“어의가 송구할 일이 아니니 그런 필요 없소.”
이혼은 잡곡밥에 물을 받아 마시듯 후루룩 들이켰다.
그때, 마을 노인 몇 명이 양과 닭 몇 마리를 가져왔다.
노인들이 사투리로 뭐라 말을 하자 허준이 듣고 있다가 통역했다.
“저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내년 이맘 때 제사지내줄 사람마저 없었다고 하며 얼마 안 되는 가축이지만 그 답례라 하는군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이혼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그들의 선물을 받았다.
배고픈 병사들에게 고기국물을 먹일 수 있을 거 같아 기뻤던 것이다.
범골을 출발한 근위연대는 회령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가토의 군대가 근처에 있다면 회령도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제발 늦지 않아야하는데.’
이혼의 기도가 통했는지 회령을 지키는 군대는 조선의 관군이었다.
***
“지금 이걸 나에게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냐?”
소리를 지른 임해군은 벌떡 일어나 시녀가 가져온 밥상을 걷어찼다.
쌀밥에 고깃국으로 차린 밥상이 바닥에 엎어졌다.
성 안을 뒤져 어렵사리 구해온 쌀밥과 고깃국이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모습에 시녀는 밥과 국을 뒤집어 쓴 채 눈물을 흘렸다.
굶는 사람이 태반이어서 군마마저 잡아먹는 실정이었는데 왕자라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진수성찬이 올라오길 바라는 모양이다.
임해군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왜 우는 거냐? 감히 왕자인 나에게 반항을 하는 거냐?”
“아, 아니옵니다.”
“그럼 재수 없게 왜 우는 거냐? 나라라도 망했느냐? 아니면 네 부모가 뒈지기라도 했느냐? 이 년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군.”
제 풀에 화가 난 임해군은 벽에 걸려 있는 채찍을 집었다.
“오늘 네 년에게 지엄한 법도가 있음을 알려주마!”
소리친 임해군은 미친 듯이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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