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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거북이 님의 서재입니다.

BUTTERFLYDREAMS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고래거북이
작품등록일 :
2012.10.27 10:29
최근연재일 :
2015.07.08 01:38
연재수 :
78 회
조회수 :
41,938
추천수 :
3,367
글자수 :
579,403

작성
12.03.1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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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7
추천
78
글자
21쪽

번외 6-6

DUMMY

* 6-6 *


도겸은 한껏 긴장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박스더미 뒤에서 심호흡을 했다. 여기까지 혼자 온 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도겸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 * *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도겸은 실망했다. 선배와 엇갈린 것이 분명했다. 밧줄을 살피는 남자 뒤에서 도겸이 혹시 갈아입을 옷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하나 없는 살풍경한 방과는 달리 화려한 방이니 뭔가 건질지도 모른다. 운동화라도 하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주변을 둘러보던 도겸이 벽에 걸려있는 신발을 보고 반색을 했다. 붉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중국식 전통 신발이었다. 도겸이 왜 신발이 벽에 걸려있는지 생각조차 않고 꽤 높이 걸려있는 신발을 잡기 위해 벽에 손을 짚었다.

쿵!

그리고 앞으로 휙 넘어져 정신을 차려보니 캄캄한 복도였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무식하게 넘어진 상태로 어둠속에서 눈만 껌벅였다. 손바닥과 무릎에 냉기와 함께 싸한 아픔이 느껴질 때쯤 도겸은 자신이 비밀통로를 통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일어나서 통과한 벽을 더듬었지만 물론 열리지 않았다. 두들겨 봐도 절대 반대쪽으로 전달될 것 같지 않은 느낌만 전해져 오자 도겸이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뒤돌아섰다. 집에 웬 비밀통로가....... 위아래도 모를 눈앞의 새까만 공간을 쳐다보며 도겸이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손에 쥐고 있는 신발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신발을 신고 도겸이 앞으로 더듬더듬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이 길은 좁은 외길이었다. 바닥이 꺼끌꺼끌한 돌바닥에서 매끈한 타일 바닥으로 바뀌자 복도 끝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문이 없는 출구가 보이자 도겸이 긴장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비밀장소라면 자신에게는 위험한 장소였다. 도겸이 옆으로 나풀거리는 드레스자락을 끌어 모아 한 움큼 묶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출구를 향해 걸었다.

나온 곳은 커다란 창고였다. 넓은 공간에 사람 몸만큼 커다란 나무박스가 가득 쌓여있었다. 묵직해 보이는 박스들 안에 뭐가 담긴 건지 궁금했지만 모두 밀봉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겸은 이곳이 자연회라는 것을 상기했다. 세계정부군과 대치하며 강화도를 점거하고 있는데다 언제 무력충돌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다. 온 힘을 다해 밀어도 꿈쩍 않을 정도로 무거운 박스의 내용물은 뻔했다.


하지만 너무 많지 않아?


창고는 굉장히 넓었다. 자연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정신수양을 하며 검소하게 생활하는, 그런 이미지였다. 가끔 TV에서 자연회에 대한 방송을 할 때도 사람들이 부락을 만들어 밭 갈고 논매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커다란 시스템 건물을 짓고 지하 창고에 무기를 산처럼 쌓아둔다? 수상했다. 자연회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엊그제 자연회 문제로 소집된 도하와 아수가 절로 떠올랐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싹 긴장한 도겸이 박스 뒤에 숨어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식이 한 시간 남았습니다. 슬슬 올라가셔야 합니다."


반갑게도, 찾아 헤매던 비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도겸은 곧 고민해야 했다.


둘 중에 누구지?


비류의 말을 들은 남자가 보고 있던 장부를 박스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초대 객들은 전부 참석했고?"

"인도 수상 사입 알리 칸님께서 불참하셨습니다. 지난주에 동인도와의 관계가 갑자기 악화됐다고 합니다."

"그 남자는 이 자리가 그럴수록 와야 하는 곳이라는 걸 아직 모르나."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인도 수상? 동인도와 서인도의 관계가 악화 돼? 대화를 듣고 있던 도겸은 귀를 의심해야 했다. 인도는 지난 세기 큰 내전을 겪고 2151년에 동, 서인도로 분단된 이후 지금까지 나라 안팍에 걸쳐 끊임없는 전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신세기(U.C.)가 시작된 후 세계정부의 중재로 평화적인 합병의 길을 걷고 있었고 뉴스에서도 인도의 통일이 멀지 않은 것처럼 매일 같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약 100년 전에 통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인도의 정치상황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아수와 도하 때문에 별로 바뀌는 것도 없는 정치뉴스를 매일 들으며 도겸은 어불성설이지만 인도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미카엘이 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인도 내전이 참혹했던 것이다.


도대체 저 사람들 정체가 뭐야?


인도 수상을 한 수 아래에 두고 왈가왈부하는 대화를 들을 도겸이 더더욱 긴장하여 숨죽였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밀통로를 통과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의 뒤를 따르며 비류인지 아닌지 모를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정말 그 녀석을 식에 내보내실 겁니까? 가릉빈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중요한 자리에서 허튼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떡합니까."


식이라는 말에 도겸이 귀를 쫑긋 기울였다. 결혼식을 말하는 것이리라. 말투를 듣자하니 저 남자는 선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저 남자가 아까 선배 흉내를 내면서 오늘 너랑 내가 결혼한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였던 놈이군. 도겸이 분해서 이를 부득 갈았다. 어쨌든 식에 나오는 사람이 선배인 것이 분명해졌다. 도겸은 최악의 경우 끝까지 비류를 찾지 못하면 결혼식장에서 비류의 손을 붙잡고 뛰겠다고 생각했다.


"가루라, 너는 내 말을 못 들은 모양이구나."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가루라가 의문을 띈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듣자 안색이 새파래졌다.


"너와 가릉빈가는 다르지 않다."


가릉빈가? 가루라? 도겸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화로 미루어보아 '가루라'가 저 남자, '가릉빈가'가 선배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 이름으로 부르면 될 걸 왜 저런 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 거지?

가루라와 가릉빈가는 둘 다 너무 유명한 존재라 도겸도 잘 알고 있었다. 모두 불교신화에 나오는 반신 같은 존재들이었다. 가릉빈가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죽어도 불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전설의 새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불법을 노래해서 사람들을 교화시켜 극락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가릉빈가가 자애로운 여왕의 이미지라면 반대로 가루라는 새들의 위에 군림하는 강력한 왕이었다. 찬란한 금빛 날개를 가졌으며 날개를 펼치면 그 길이가 360리에 달해 한 번 날갯짓을 하면 바다가 갈라진다고 한다. 복수를 위해 용을 잡아먹을 정도로 난폭한 일면도 있었다. 작명 센스는 구리지만 두 명을 모두 겪어 본 도겸은 나름 각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은연중에 인정하고 말았다.


비류선배가 여왕이라.


그 와중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여왕이란 단어에 무심코 떠오른 드레스를 입은 비류가 의외로, 너무 잘 어울렸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을 만한 화려한 드레스에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서 있는 비류. 과연 다시 생각해도 잘 어울렸다. 도겸이 저도 모르게 여장비류의 망상에 빠져있는 동안 도겸이 숨어있는 박스 바로 옆까지 걸어 온 남자가 도겸과 박스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럼, 박사님도 함께 가실까요?"


혼자 히죽거리고 있던 도겸이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었다. 망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안 건지 모르지만 남자는 누군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가 누구인지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겸이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굳어 있는데 태연하게 건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식이 곧 인데 신부가 여기에 있어서는 곤란하지요."


하! 도겸이 어처구니없는 탄성을 터트렸다. 누가 결혼하겠대? 하지만 분노를 어떻게 표출할 수 없어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도겸이 고민했다. 도망칠까? 냅다 뛰면 저 사람들이 모양 빠지게 쫒아올 것 같지는 않은데.


"아, 자기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자연회의 수장 진카웨이 찌엔 이라고 합니다."

"!"


생각치도 못한 말에 도겸이 숨을 헉 몰아쉬었다. 자연회의 수장! 등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바로 무력으로 강화도를 점거하고 있는 장본인이자 이 모든 사건들의 원흉이었다. 도겸은 이제 뒤로 돌아 저 사람에게 화를 내야 할지 이대로 도망쳐야 할지 헷갈렸다.


"그리고 비류의 아버지이기도 하지요."


뭐라고.......


연달아 날아온 말이 도겸의 뒤통수를 쳤다. 자연회와 비류의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저 사람이 선배가 ‘무섭다’고 말한 바로 그 사람.......


"그나저나 박사님이 여기 있다는 건 비영이 문을 열었다는 거로군요."


비영. 비류가 붙여준 남자의 이름이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불안함이 턱까지 차오르며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그저 혼잣말하듯 말했을 뿐인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섭다. 비류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언제든지 상대를 웃으며 짓밟을 수 있는 잔인함이 자연스럽게 배어있었다.


"꼭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박사님은 아무래도 나올 마음이 없으신 것 같으니 여기서 그냥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목소리가 달라졌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서늘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도겸은 아까 도망쳐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한다고 경고하는 본능보다 더 강한 힘이 무의식적으로 도겸의 발걸음을 땅에 내리누르고 있었다. 도겸이 격렬하게 갈등하며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 도겸의 귀에 가차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오늘 결혼식은 저희에게도 중요한 자리라 가능하면 박사님이 협조적으로 응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지금 상황이 박사님께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이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웃기에는 도겸은 지금 너무나 긴장해 있었다. 그가 할 '제안'이 절대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특별한 예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등 뒤의 남자는 그만큼 음습하고 오싹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제게 미카엘의 몸이 있습니다."

"-!"


지금부터 그가 하는 말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겸은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럴 리, 그럴 리 없어.


분명히 거짓말이다. 미카엘의 시신은 자신이 직접 태웠다. 본인일 리가 없다. 게다가 처음 미카엘을 발견했을 때 미카엘과 이지스의 생존을 숨긴 것도 바로 자신들이다. 도하와 토니가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만큼 그들의 생존이 그 장소에서 새어나갔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겸은 저 남자의 말이 아마 사실일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저 남자가 어떻게 미카엘의 존재 뿐 아니라 이름까지 알겠는가!


"그들은 수명이 상당히 길다지요? 그들의 지도자는 1,000년 이상을 살았다고 하더군요. 박사님의 개발하신 수퍼셀에 대한 연구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그 연구가 불로불사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는 시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요. 역사에 남을 박사님의 연구를 돕고 싶어서 각별히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지하의 연구동은 보셨습니까?"


불로불사.......!


날 납치한 이유가 이거였단 말인가. 도겸의 무릎이 휘청였다. 자신의 신약연구는 이런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연구동에서 느꼈던 위화감은 이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최고의 권력자라면 누구든 한 번씩은 꿈꾼다는 불로불사라는 미친 욕망을 위해 준비된 것들이었던 것이다.


"모두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박사님이 기밀로 연구하고 있던 자료와 샘플들까지 다 있습니다. 데이터를 빼내려고 비류가 일 년 동안 꽤나 고생했지요."


말이 비수가 되어 귀에 꽂혔다. 머리가 아찔했다. 도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박스 뒤에서 나왔다. 뒤돌아 본 남자의 얼굴이 너무 젊어서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조차 잊어버렸다. 꼭대기까지 화가 난 도겸이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비류 선배 지금 어디 있어요?"

"제 뒤에 있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도 못 알아봐요? 저 사람 말고요!"


소리치는 도겸의 목소리에 남자가 조금 놀란 듯 한쪽 눈을 치켜떴다.


"둘을 구분하십니까?"


남자가 도리어 질문하자 도겸이 어이가 없어서 허, 숨을 내쉬었다. 당신 아들이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설사 열 쌍둥이라 해도 부모는 다 구분한다고요.


"말투부터 다르거든요. 아버지가 이러니까 아들들이 다 삐뚤어졌지!"


화가 나서 내뿜은 도겸의 독설을 들은 남자가 잠시 숨을 멈췄다. 입을 헤 벌리고 눈을 둥그렇게 뜬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제껏 고수하던 무표정이 와장창 깨지며 남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핫!"


남자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도겸은 깜짝 놀랐다. 이 아저씨가 미쳤나? 황당하게 남자를 쳐다보는데 뒤에 서 있는 가루라의 표정이 더 가관이었다. 가루라는 경악한 표정으로 배를 잡고 웃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하핫, 하, 그렇습니까."


시원하게 웃어재낀 남자가 찔끔 나온 눈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말하는 중에도 참지 못한 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웃음이 가식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겸은 냉정하게 남자를 관찰하려고 했다. 저 남자는 불로불사라는 헛된 꿈 때문에 사람을 납치해 엉터리 결혼식을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비류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어둠의 원인이기도 했다. 도겸이 조금 전 들은 대화를 상기했다.


[비류 선배 어디 있어요?]

[제 뒤에 있지 않습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흠뻑 젖은 옷을 억지로 껴입는 듯 석연찮은 기분이 온 몸을 질척하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등 뒤에 서 있는 남자를 '가루라'라고 불렀다. 그럼 '가릉빈가'가 비류인 셈이다. 그런데 저 남자는 가루라를 비류라고 했다.


[너와 가릉빈가는 다르지 않다.]


순간 척추를 바늘처럼 찌르는 섬뜩한 감각에 등이 곧추섰다. 이제야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저 남자는 두 사람을 한 명의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름은 비류, 단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자기도 모르게 숨이 가빠졌다.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중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전후 사정은 몰라도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창백하게 질린 도겸이 남자의 등 뒤에 서 있는 가루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느 새 가루라도 남자에게서 눈을 떼고 도겸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루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처음 만났을 때 누구냐고 묻자마자 분노로 새파랗게 타오르던 가루라의 눈빛이 떠올랐다.


[내가 비류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지?]


이제야 그 의미를 알았다. 비류선배의 어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비류든 뭐든, 그딴 건 중요하지 않잖아. 당신은 그냥 당신이야."


도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화가 나서 목소리가 낮았다. 뭔가 화내고 싶은데 분이 말로 표현되지 않아 답답했다. 말재주가 없다는 게 한스럽긴 처음이었다. 도겸이 답답한 마음에 손을 들어 올려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가루라에게 손가락을 향했다.


"비류라는 이름 빈정상해서 못 쓰겠어. 이제부터 선배는 선배라고 부를 거고, 당신은 아저씨라고 부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가루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기가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세상 끝난 것 같은 심각한 표정으로 기껏 한다는 말이 저 말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가락질을 당한 무례를 탓하기도 전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조악한 명명에 자기도 모르게 불평했다.


"비류는 선배고 나는 왜 아저씨지?"


도겸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놓고 본인의 작명센스에 좌절하고 있던 참이었다. 가루라의 불만이 익히 공감됐다. 하지만 대놓고 인정할 마음이 들지 않아 도겸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싫으면 아가씨랑 도련님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골라 봐요!"

"푸핫."


웃음을 터트린 것은 앞에 서 있던 남자였다. 한차례 더 웃어재낀 남자가 여전히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습을 보였다는 걸 결혼식에 응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미카엘의 몸이라는 게 무슨 뜻이죠?"


곧바로 자신에게 날아드는 서슬 퍼런 질문에도 남자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결혼식이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름은 어떻게 알았죠?"


미카엘의 이름은 멤버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문서조차 일절 남기지 않았으므로 비류가 정말 스파이였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몄다.


"그들 전체는 강하지만, 구성원 하나하나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니까요."


외계인을 생포했단 말이리라. 불로불사를 꿈꾸는 미친놈들에게 생포된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틀어 쥔 주먹이 벌벌 떨렸다. 도겸이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당신이 말하는 '미카엘의 몸'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도겸이 얕보이지 않기 위해 더욱 독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몸을 인질로 내게 결혼을 강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남자가 난처한 듯 웃었다.


"이런, 오해 마십시오. 당신을 협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는 처음 말씀드린 대로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고요."

"그게 저한테 무슨 제안이 된다는 거죠?"


남자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는 어린 아이를 보는 눈빛으로 도겸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다 알면서 굳이 확인하려하지 말자는 따분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협박은 무료한 만큼 간결했다.


"당신이 그의 일부를 취했다는 것을 숨긴 이유까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신약연구와 그 이전의 세기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되는 모든 연구들이 외계기술이 집약된 그 세포를 독점해서 얻어진 결과라는 것까지 부정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 사실이 공표된다면 당신은 국제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고 어쩌면 당신의 백신까지 불신 받을 지도 모릅니다."

".......!"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선택에 따라 그 비밀이 소수에게만 간직될 수는 있겠지요."


생각치도 못한 말이었다. 제 머리로 저런 악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진심으로 그런 뜻이 없었으므로 상상도 못한 말을 들은 도겸이 충격을 받아 멍하니 섰다. 미카엘의 존재를 숨긴 것은 그의 소망 때문이지 저 남자의 말처럼 외계 기술을 남몰래 독점하여 명예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기술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에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겸은 남자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진심이 어쨌든 간에 아직 사람들에게 외계인의 존재는 그 자체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깨닫지 못했지만 확실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강도 높은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지금도 무기나 공학, 기초학에서는 그들의 이론이나 기술들이 은근히 도입되고 있었지만 제약에 그들의 세포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연구 자체가 비난받고 매장될 가능성이 높았다. 도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협상은 성사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도겸이 입술을 깨물었다. 기술이 매장되는 것이나 국제적인 비난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아니, 물론 그것도 두렵다. 두렵지만 도겸이 남자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다른 이유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미카엘의 줄기세포였다. 하지만 저 남자가 굳이 '미카엘의 세포'가 아닌 '미카엘의 몸'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을 터다. 도겸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이유가 어쨌든 세포 한 조각조차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던 미카엘에게 그의 일부를 남겨 달라고 부탁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에겐 그 몸의 일부를 자신 외에는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다. 떠오르는 것은 마지막에 '고맙다.'고 말했던 이지스의 얼굴.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독하게 말했고, 남자는 도겸의 책임감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협박은 성공이었다. 백지장마냥 창백한 얼굴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도겸을 측은한 듯이 보며 남자가 가루라에게 말했다.


"박사님을 모셔가."

"네."


딱딱하게 대답하고 곧장 걸어 온 가루라가 자신의 손목을 잡자 도겸이 이를 갈아 붙이며 내뱉었다.


"거짓말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신의는 중요합니다. 저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웃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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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번외 6-1 12.02.16 1,071 156 16쪽
55 번외 5-2 12.02.11 601 106 9쪽
54 번외 5-1 12.02.09 792 122 5쪽
53 번외 4-3 12.02.06 681 101 19쪽
52 번외 4-2 12.02.02 758 115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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