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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거북이 님의 서재입니다.

BUTTERFLYDREAMS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고래거북이
작품등록일 :
2012.10.27 10:29
최근연재일 :
2015.07.08 01:38
연재수 :
78 회
조회수 :
41,936
추천수 :
3,367
글자수 :
579,403

작성
15.07.08 00:32
조회
168
추천
4
글자
66쪽

7-7

DUMMY

* 7-7 *


"잠깐.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멍청아!"


복도를 뛰고 있던 토니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도하를 들쳐 매고 옆에서 뛰고 있던 대장과 우영, 뒤를 따르던 안나와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토니에게 쏠렸다. 토니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지하에서 그딴 걸 터트리면......!"


동시에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면서 건물이 우르릉 흔들렸다. 토니가 죽어라 출구를 향해 뛰면서 소리쳤다.


"건물이 무너지잖아!"


* * *


"아저씨. 서 봐요."

"멈추라고요."

"......."

"비영!"


정신이 나간 채 무작정 뛰고 있던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놀라서가 아니다. 비류를 등 뒤에 두고 뛰면 뛸수록 심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영이 그제야 품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품에 안고 있던 도겸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려달라고요!"


약을 먹었을 텐데? 비영이 자신을 내려다보자 도겸이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보였다.


"그 정도 키스로 이딴 걸 삼킬 것 같아요?"


더 심한 키스도 많이 당해봤어. 게다가 그 인간-아수-이 언제 이상한 약을 먹일지 모르는데 입으로 들어오는 걸 넙죽 삼키겠냐고? 변태 중에서도 최상급 변태한테 2년이나 단련된 나를 우습게보지 마.


도겸의 작은 손바닥 위에 있는 알약을 보자 비영은 뒷골이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겸 때문이 아니라 품 안에 있는 사람이 기절해 있는지 기절한 척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던 제 자신이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딱딱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 있는 비영을 향해 도겸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놀랐어요. 내가 울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봤을 때도 입 뻥긋 안 했으면서."


이번만큼은! 이라고 기대했건만 비영은 여전히 표정변화가 없었다. 도겸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 아저씨의 얼굴근육은 도대체 언제 움직이는 거야. 도겸이 쀼루퉁하게 다시 한 번 내려달라고 말하자 그제야 비영이 도겸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하지만 도겸은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넘어질 뻔 했다. 재빨리 몸을 받쳐주는 비영의 부축을 받으며 도겸이 투덜거렸다.


"잠깐 물고 있었는데 그새 좀 녹았나보네. 하여간 선배, 주도면밀하다니까."


사실 잠깐 기절했던 것도 같다. 삼킨 척하고 기회를 보고 있긴 했지만 계속 물고 있었으면 잠들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 전에 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입술 부딪치기 무섭게 덤벼든 아수 덕분이었다. 도겸이 비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폭발소리 들었죠? 이제 통과할 수 있어요."


비영이 철저하게 훈련된 무감각한 눈으로 도겸을 쳐다보았다. 주인을 혼자 두고 뒤돌아 나오면서까지 실행해야 했던 그의 임무는 도겸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었다. 도겸이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는 비영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선배한테 데려가 줘요."


폭발의 여파로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면 건물 안에 있는 그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다. 비영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해진 도겸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한 번도 비영의 의중을 안 적 없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생각이 조금도 의문스럽지 않았다.


"당신의 임무는 날 보호하는 거잖아요. 내가 선배를 만날 때까지 옆에서 제대로 지키라고요. 알았어요?"


비영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이건 반역이 아니었다. 박사를 보호하라고 했지 박사의 행동을 막으라는 명령은 없었지 않은가. 도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비영과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한 기분이었다.


"가요!"


* * *


연구실 앞에서 아수를 기다리고 있던 비류가 복도 끝에서 뛰어오는 인영을 쳐다보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맘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군.


챙!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청명한 소리를 내며 아수의 단검과 비류의 검이 맞부딪쳤다. 대화를 하려고 칼날을 흘리지 않고 받았는데 검에 실린 힘이 예상 이상으로 묵직했다. 아까 맞붙었던 힘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몇 초 버티지 못하고 벽에 몰린 비류가 미간을 찡그렸다.


고릴라 같은 자식...!


"하나만 묻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대답해."


선수를 가로채인 비류가 불쾌한 표정으로 아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 아십니까?"


동시에 비류가 손을 놓았다.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검이 그대로 비류의 목에 날아들었다. 아수가 급히 손을 비틀자 아수의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비류의 목을 스치며 지나가 문에 박혔다. 날카로운 검신에 잘려나간 비류의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시간이 없으니-."


아수가 벽에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쥔 채 자신의 배에 들이대어져 있는 총을 내려다보았다.


"돌아가 주세요."


다시 시선을 든 아수가 비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장 죽일 생각은 없나 보지?"

"마찬가지 아닙니까?"


비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세 살배기 꼬마들의 칼싸움처럼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각오도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상대가 코앞에 있는데도 눈앞의 남자와 당당하게 겨룰 수 없는 제 자신이 꼴사나웠다. 비류가 쓴 침을 뱉듯이 내뱉었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나가려면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쪽에도 출구가 있다면서?"

"안타깝게도 이쪽 좌석은 하나뿐이라 서요."


얼어붙을 듯이 차갑게 대답하는 비류를 보며 아수가 피식 웃었다.


"이 몸으로 그 좌석에 앉을 수나 있겠어?"

"윽!"


아수의 주먹이 상처를 치자 비류가 옆구리를 감싸 쥐었다. 아수는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비류가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총을 빼앗은 아수가 비류의 상처에 총구를 들이밀고 다시 질문했다. 처음부터 아수가 알고 싶었던 건 오로지 이것뿐이었다.


"미카엘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큭......."


비류가 이를 악물며 침음했다. 정말 악마 같은 놈이 아닌가. 누구보다 정정당당 할 것 같은 얼굴로 비겁한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놈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누르며 비류가 억눌린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녀의 바램대로."


비류가 대답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작은 소리가 나며 두 명이 기대어 있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뒤로 물러선 비류가 들고 있던 검을 크게 휘둘렀다. 아수가 총신을 깔끔하게 자르며 쳐 올라오는 검의 궤도를 간신히 피하자마자 자세가 무너진 아수를 향해 무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 * *


바깥은 폭격을 피해 대피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대피할 이동수단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수십 대의 군용차량이 대기하고 있었고 군인들이 군중을 통제하고 있었다. 한과 합류한 토니가 경비대장과 함께 의식을 잃은 도하를 데리고 지프에 오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도하가 깨어났다.


"헉......!"

"형!"


도하가 깨어나자 토니가 반색했다. 하지만 도하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토니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안 돼."

"뭐라고?"


도하의 작은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해서 토니가 되물은 순간이었다. 도하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토니와 경비대장을 뿌리쳤다. 방금까지 의식을 잃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토니가 뒤늦게 흔들리고 있는 건물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도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형! 미쳤어? 형 배에 지금 구멍 뚫렸......!"


도하를 쫒으려고 소리치며 일어서던 토니가 갑자기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시야가 빙그르르 돌더니 머리에 둔탁한 충격이 왔다.


제, 제길. 하필 이럴 때......!


쓰러진 토니의 앞으로 낯익은 하이힐이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곧이어 자신을 들어 올리며 괜찮냐고 소리치는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보면 몰라?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조차 왜 그렇게 뻔한 걸 물어보는 거야?


순간 짜증이 치밀었지만 화낼 틈도 없이 토니의 정신은 이미 몸을 반쯤 떠나 있었다. 몸을 빠져나간 토니의 의식이 순식간에 땅 밑 어두운 전선으로 스며들었다.


* * *


캉!


코앞에서 손목시계와 부딪친 무언가가 불꽃을 튕겼다. 젠장, 이제 못 구하는 건데! 간신히 공격을 막아낸 아수가 아끼던 시계를 박살내고 바닥으로 튕겨나간 물건을 노려보았다. 어둠에 녹아들도록 광택 없게 처리 된 검은색 수리검이었다. 어느 새 뒤돌아 뛰고 있는 비류를 노려보며 아수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손님 대접하곤.


비류는 연구실 안쪽에 있는 금속 문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아수가 도발해도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았던 비류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가 나 보일 정도로 거친 발걸음이었다. 누가 보든 상관없다는 듯이 비밀번호조차 거침없이 누른 비류가 곧 열린 문 뒤로 사라졌다.


저기에 미카엘이 있는 거군.


몸을 일으킨 아수가 문에 박혀있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날아오는 두 개의 수리검을 가볍게 쳐낸 아수가 연구실 안을 둘러보았다. 연구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까지 오니 확실히 알겠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은 없어.


아수에겐 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적보다 비류가 들어간 문 뒤에서 일어날 일이 훨씬 중요했다. 이 방 안에 있는 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불길한 기운이 안쪽 방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아수가 양 팔을 내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캄캄해지자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이 날카롭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작은 숨소리, 미세한 열기, 손끝을 스치는 공기의 움직임, 솜털을 곤두세우는 살기.


와라. 내 몸에 닿는 순간 끝장을 내 줄 테니.


어둠속에서 적의 중검이 아수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목덜미에 날 선 칼날이 닿는 순간 검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움직여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아수가 그대로 적의 팔을 붙잡았다. 적이 저항했지만 아수가 제압하며 곧장 팔을 꺾었다. 속도와 힘 모두 공격한 자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만약 적이 아수보다 빠르고 강했다면 경동맥이 잘렸을 것이다. 아수가 붙잡은 팔을 당장에라도 부러트릴 것처럼 조이며 협박했다.


"두 번이나 목을 내놓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대로 슈트를 벗어 주실까?"


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제 팔이 부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팔이 꺾인 반대쪽으로 움직이며 아수의 어깨를 수리검으로 찍었다. 아수가 부러진 적의 팔을 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 때문이 아닌 불쾌함 때문이었다. 붙잡혔을 때 확실히 적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방법이 낯익었다.


이것은, 그녀의.......


아수를 향해 돌아선 적은 멈칫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수가 정확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그는 아수에게 붙잡혔던 팔 부분의 슈트가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붙잡히자마자 반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수가 한 발 더 빨랐던 것이다. 적이 멈춰 선 것을 본 아수가 그제야 어깨의 상처를 감싸 쥐며 투덜거렸다. 여자한테 친절한 남자는 이래서 손해라니까.


"마지막 경고다. 슈트 벗어."


적은 두 명의 비귀 중 하나였다. 가루라의 명령은 아수를 3분 동안 저지하는 것. 하지만 지난 시간은 겨우 1분 정도였다. 지금의 싸움으로 미루어봤을 때 아수를 슈트 없이 2분이나 더 막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경고한지 겨우 5초 남짓한데 비귀를 쏘아보고 있는 아수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아수의 손이 감싸 쥐고 있던 어깨에서 떨어진 순간 챙강하는 맑은 소리가 났다. 광학 처리된 비귀의 중검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무기를 놓은 비귀가 아수의 앞에서 천천히 눈 부분의 지퍼를 열기 시작했다.


* * *


한편, 문이 열리는 순간 비류의 관심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눈앞의 아수도, 무너지는 건물도, 미카엘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뛰다시피 연구실로 들어온 비류에게 누군가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중령을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비류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또 한 명의 비류, 가루라였다. 가루라는 연구실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원통형의 거대한 수조 위에 앉아 있었다. 비류가 수조 안을 비추고 있는 엷은 조명 위로 보이는 가루라의 검은 실루엣을 노려보았다. 비류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가루라의 목소리가 한층 더 명랑해졌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던 것 치곤 박사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킥킥. 가루라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비류는 전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이 수조에 흘러드는 독소를 끊은지 대략 한 시간. 수조 안의 '괴물'은 곧 풀려날 것이다.


"이곳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라고 했잖아."


비류의 목소리는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끓어올라 온 것 같았다.


"깔고 앉으니 그게 우습나?"

"설마."


화내니까 무서운데. 가루라가 싱긋 웃었다. 수조 안에는 마치 수십 명의 인간을 마구잡이로 찢어서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것같은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내장이나 팔, 다리, 눈동자나 코 같은 신체의 일부들이 제멋대로 연결되어 괴물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은 마치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세차게 고동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되레 그 반대지."


가루라가 높은 수조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디 있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가루라가 수조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순간 살덩어리 사이사이에 박혀있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가루라의 손이 닿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루라가 수조를 쓰다듬으며 앞으로 걸어 나오자 핏발 선 붉은 눈동자들이 가루라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자극하지 마."


어느 새 다가 온 비류가 수조에서 가루라의 손을 떼어냈다. 이어진 말이 가루라의 신경을 긁었다.


"죽고 싶은 거냐?"

"귀!"


가루라가 소리치자 가루라의 팔목을 잡고 있는 비류의 손을 향해 수리검이 날아들었다. 비류가 수리검을 피하기 위해 가루라의 팔목을 놓자마자 가루라가 허리에 차고 있던 두개의 중검을 뽑아 x자 모양으로 그었다.


"크읏!"


가루라의 갑작스런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비류가 가슴을 감싸 쥐었다.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비류의 하얀 예복을 붉게 적셨다. 비류와 순식간에 간격을 벌린 가루라가 한 손의 검을 들어 검끝을 비류에게 향했다. 가루라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죽고 싶냐고? 그래. 아까 널 죽이지 못했던 나를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어. 난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널 죽이고 아버님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내 손으로 망쳐버렸다고."


가루라의 말을 들은 비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살아있으면 기회는 언제든 다시 와."

"헛소리 하지 마!"


가루라가 소리쳤다.


"내가 아버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내 손으로 널 죽이는 것뿐이야! 네가 죽으면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

"그래서."


비류의 음습한 목소리가 가루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날 죽이겠다고?"


가루라의 뒤로 보이는 거대한 수조안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꿈틀거리고 있는 괴물의 눈동자들이 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떨리는 벽면을 따라 합성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강화유리의 표면이 위태하게 뒤틀렸다. 수조가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비류가 창백한 얼굴로 검을 들고 있는 손을 들어 수조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가루라를 향해 또박또박 덧붙였다.


"그리고 저것의 분노를 네가 받겠다?"


가루라가 떨려오는 몸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1시간 전 6층 복도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


"준비 많이 했다고 했잖아?"


양 손으로 두 명의 여인을 소개하며 가루라가 싱긋 웃었다.


"눈에는 눈. 클론에는 클론이지."


클론에는 클론이라. 피가 흥건한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비류가 쓴웃음을 지었다. 클론이 어느 쪽인지 누구도 모르는 만큼, 자신이 클론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지울 방법은 없다. 그런 제 마음속의 의심을 숨기기 위해 더더욱 당당하게 말한다. 아니, 말하려고 한다.


그것이 저 녀석의 귀엽다면 귀여운 점이지.


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마주하며 떠오른 생각 때문에 순간 머리로 피가 쏠렸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비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망가.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여기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큰 상처였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승리하는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든 결정타는 직접 먹이고 싶었든 이유야 어쨌든 간에 다행이었다. 가루라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비류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내가 왜?"


호흡을 조절하며 상처를 누르고 있던 비류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곳은 무너진다. 곧 세계정부의 폭격이 시작 될 거야."

"하!"


가루라가 자기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기쁨의 웃음 따위가 아니었다. 반대로 가루라의 기분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가루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아버님이 그렇게 되도록 놔둘 리 없어."

"모르는 건 너야."


비류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오래 시간을 끌기에는 상처가 깊었다.


"아버님께 이 장소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

"중요하지!"


가루라가 버럭 소리쳤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내내 갈망하던 이 환희의 순간을 가릉빈가가 지금 터무니없는 말로 망쳐놓고 있었다.


"여기엔 그가 제 몸으로 점찍어 둔 육체가 있어! 그리고 그 몸 때문에 '비류'를 박사와 결혼까지 시키려고 하고 있지! 도대체 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아버님은 프로젝트를 포기했어. 세계정부의 폭격을 막지 않을 거다."


비류의 말을 들은 가루라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가루라가 악문 잇새로 내뱉었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그 남자가 이기고 지는 싸움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


가루라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의미가 단숨에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루라는 동시에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님의 행동들까지 제가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카웨이 찌엔. 그는 싸움의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만큼의 균형이다. 하지만 그 철학은 도리어 모든 게임에서 그가 승리하게 만든다. 이기든 지든 결과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미 결론 난 싸움을 상대가 마치 제 의지대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그 남자의 가장 무서운 점이 아니었던가.

분명히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비류가 도겸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갑작스럽게 결정된 결혼식이. 그 남자의 방식답지 않다고.

하지만 과연 이 결혼이 갑작스러웠던가? 바꿔 생각하면 결혼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 아무도 몰랐을 뿐, 결혼식에 필요한 준비는 다 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대 객들도 다과회를 빙자한 무기담합회의에 이미 초대되어 있었고 하다못해 축가를 부를 안나까지 초대되어 있었다.

가릉빈가가 도겸을 직접 강화도로 데려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가릉빈가가 데려오지 않았더라도 박사를 여기로 데려올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님은.......


그 괴물이 풀려나면 이곳에 있는 그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는 실패한 프로젝트를 폐기하는 일조차 유용하게 사용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새 시대를 시작하려고 하는 지구를 더럽히는 쓰레기들을 청소할 계획을. 알고 있지 않았나. 아버님이 평소에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가루라의 안색이 핏기가 빠진 듯 하얗게 바랬다. 그것을 확인한 비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수조가 부서지면 그것의 첫 타깃은 '비류'야."


그는 비류를 증오하니까.


"믿을 수 없어!"


비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루라가 강하게 반박했다. 머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 마음은 제가 깨달은 사실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난 아버님께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너는 아버님에게 '비류'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거야? 이곳을 부수면 우리 둘 다......."


흥분해서 '우리'라고 말한 가루라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비류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비류'는 다시 만들면 돼."

"......!"


비류를 노려보는 가루라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괴물 같은 자식. 네가 나와 하나의 세포였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동감이야."


내 어디에 너 같이 여린 부분이 있어서 네가 여전히 그를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거든.


"하지만 네가 여기서 날 죽인 걸로 하고 미카엘로부터 살아남는다면 아버님께 진짜 '비류'로 인정받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이 모든 것을 내게 말한 이유가 뭐야. 너 혼자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비류는 순간 망설였다. 진실을 말해야 할까 거짓을 말해야 할까. 여기서 가루라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이제껏 준비한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비류가 대답했다.


"미카엘을 처분하겠다고 박사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헛소리 하지 마!"


가루라의 검이 목 끝에 닿았다. 내뱉는 가루라의 목소리가 혼란과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그 따위 말장난이 통할 거라 생각해? 한 번 만 더 그딴 소릴 지껄이면 그냥 죽여 버리겠어."


비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루라가 시선을 부딪쳐오는 비류의 눈동자를 파르르 타오르는 눈으로 마주보았다.


*


떠오른 기억에 가루라가 이를 갈았다. 그 때의 그 눈동자가 뻔뻔스럽게 다시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미련한 놈.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제 자신을 믿지 못해서 또 한 번 확인을 하는 구나.


가루라가 비류를 향해 씹어 뱉듯 말했다.


"개자식. 그래. 인정할게. 넌 정말 아버님을 쏙 빼닮았어. 남에게 원하는 걸 던져주는 척하면서 네가 원하는 걸 얻는 그 방식이 말이야."


순간 비류의 턱근육이 꿈틀했다. 가루라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님에 비하면 넌 아직 한참 수준이 떨어져. 너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짚지 못했어. 그래서야 거래가 안 되지."


가루라의 뒤에 있는 수조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경직된 비류의 표정을 음미하며 가루라가 싸늘한 비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비류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께 인정받고 유일한 '비류'가 되는 것이 너의 가장 큰 소망이 아니었나?"

"내 소원은 널 내 손으로 죽이는 거야."


가루라가 비웃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 말하는 눈빛에는 더 이상 웃음이 없었다.


"일단 여기서 둘 다 살아남은 후에 말이야."


* * *


우르릉!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지하 공간이 크게 흔들렸다. 빠른 손놀림으로 기계를 조작하고 있던 남자가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평범한 폭발이 아니었다. 둘러보니 건물이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둘러 조작을 마친 남자가 양 옆에 놓아둔 금속으로 된 은색 가방을 집어 들었다.


"멈춰!"


작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린 목소리에 남자가 자리에 멈춰 섰다. 이대로 셔틀에 타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끝난다는 것을 아는데도 작은 목소리는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남자가 감탄했다.


과연 나와 대화할 자격은 있는 자로군.


남자가 존경과 호의를 담은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용건은 간단히 끝내 주세요. 도하 군."


도하는 입구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찌엔이 있는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극렬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곳에서 혼자 청아하게 빛나고 있는 빛을 쫒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백호의 문 뒤로 이어지는 찌엔 밖에 통과하지 못 할 관문들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도하를 뒤쫓아 온 토니 덕분이었지만 도하는 그조차 모르고 있었다. 도하는 단지 찌엔이 있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을 뿐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도하가 입을 열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도하가 헐떡이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게요."

"풋!"


터져 나오는 웃음을 미처 막지 못한 찌엔이 서둘러 변명했다.


"아, 실례. 너무도 의외의 말이라."


웃어버린 건 정말 실수인 듯 찌엔이 금세 웃음을 수습했다. 하지만 도하를 쳐다보며 말하는 찌엔의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제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균형뿐입니다. 그건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지요."


도하는 피를 많이 흘려서 이미 한 번 정신을 잃었었다. 그런 도하를 깨워서 여기까지 뛰어오게 만든 것은 오로지 그가 가진 힘이었다. 마치 토니를 구했던 그 날처럼 거대한 힘이 도하를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은 힘이 도하의 창백한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균형에 맞지 않고, 조화롭지 못한 존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찌엔의 입가에서 찰나 미소가 사라졌다.


"균형을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 말입니다."


죽음을 부르는 도하의 공허한 눈동자가 찌엔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문 찌엔이 음산한 눈빛으로 도하를 노려보았다. 숨통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한참동안 말없이 도하를 노려보던 찌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상대를 찢어발길 것 같은 분노가 서려있었다.


"대단하시군요. 저와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저의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를 보신 건가요."


도하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찌엔이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시리도록 차가운 찌엔의 목소리가 깊게 잠들어 있던 도하의 정신을 깨웠다.


"당신이 들어줄 수 있는 소망이 단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안 그래도 창백했던 도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며 안색이 새하얘졌다. 도하는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절대 들으면 안 된 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찌엔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은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는 것이죠. 당신은 마치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 수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만, 사실 극에 달한 감정은 모두 '죽음'을 원한다. 틀립니까?"


도하는 귀를 막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서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찌엔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신은 오늘 홀 안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의 감정을 손쉽게 농락했습니다. 심안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고 하니 당신이 계속 강해진다면 언젠가는 인류 전체의 감정을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도하의 머릿속에서 항상 보고 있었지만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던 거대한 용이 떠올랐다. 지구를 휘감을 만큼 거대한 회색빛 용. 그것은 인류 전체의 감정의 흐름이었고 도하는 오늘 용의 고삐를 보았다.


"당신은 아까 제게 비정하다고 했지만 저는 오늘 좀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인류를 생존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힘이 미치는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이 당신의 능력이라면 진정한 악마는 제가 아니고 당신이 아닙니까?"


자신의 능력이 파멸과 죽음을 부르는 능력이라는 것은 이 힘이 무슨 힘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저 남자의 말에 동요할 필요가 없는데도 도하는 동요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악마라고? 절대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헛소리를 부정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변명하는 도하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저는 당신처럼 아무에게나 힘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휘둘리지요."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싸움을 즐기거나 누군가를 이기려드는 성격이 아닌 도하가 찌엔과 말싸움을 벌여 이길 수도 없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찌엔의 말은 사실이었다. 인류를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자신의 의지로 컨트롤 한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가능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뭔가. 자신은 인류에게 죽음을 내리기 위해 신에게 선택된 제물일 뿐이고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휘둘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악마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거스를 수 없는 절망이 도하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제어하지 못한 감정은 도하에게 자신을 잃게 만들었다. 도하가 찌엔의 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당신 역시 인간이야. 죽음을 원하는 본능을 거부할 수 없어."

"하지만 인간이기에 동시에 삶을 원하지요. 그조차 부정하실 겁니까?"


찌엔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도하는 그제야 자신이 힘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하가 찌엔을 한마디 말로 죽이려 했듯이 찌엔도 도하를 한 마디 말로 무력화 시킨 것이다.

울고 싶지 않은데, 저 남자 앞에서만은 절대 울고 싶지 않은데 의지와 상관없이 또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의 의지는 항상 겨우 이 정도였다.

자신의 의지가 세상의 거대한 흐름과 일치되는 것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힘의 본질을 한순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만이었다. 자신은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제 눈에 차오르는 눈물조차 막을 수 없었다. 나란 존재는 도대체 왜, 누구의 안배로 이 자리에 있는 건가. 이토록 쓸모없는데. 이토록 보잘 것 없는데! 원망스러웠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토록 무력한 자신이 미치도록 절망스러웠다.

찌엔이 말했다.


"지금부터 저는 당신과 완전히 반대쪽에 서려고 합니다. 당신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 '감정'을 조종한다면 저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이성'을 조종하겠다고나 할까요? 아,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무슨 신이라도 된 것 같네요. 하하."


찌엔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여유로워져 있었다. 도하에게서 느껴지던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하의 능력은 생각했던 대로 강한만큼 불안정한 능력이었다. 찌엔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저와 조화를 이룰 상대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만 한편으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죠. 과연 그런 자가 정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요.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스스로 죽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살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물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제가 현실에 이렇게 존재하니 제가 저의 반대 것도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지요. 저는 계속 신념과 현실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찌엔의 말은 마치 고해성사처럼 들렸다. 부스러기 같이 자신을 괴롭혔던 마지막 죄마저 털어내고 완전해지려는 듯이.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군요. 당신을 만나서 저는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감사드려야겠군요."


찌엔의 입가에 포식자의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저를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도하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도하는 육식동물에게 목덜미를 물려 죽어가고 있는 초식동물과 다름없었다. 처절할 정도로 완벽한 패배였다. 몸을 움츠린 도하가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당신은 조화를 이룰 상대를 다시 잃게 되요."

"또 나타나겠지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이번에는 당신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찌엔이 들고 있던 가방을 슬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큰 것을 잃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때 우르릉, 건물이 한 차례 흔들렸다. 이제 건물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지는 것을 본 찌엔이 말했다.


"아쉽지만 이제 정말 가야 할 것 같군요."


가벼운 목례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찌엔이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순간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즐거운 시간은 지금부터에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찌엔이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그 잘난 척 하는 면상에 송곳니를 박아 줄 테니까."


또박또박. 안나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홀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15센티 힐에도 한 치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였다. 오늘 자신에게 가장 큰 데미지를 준 거대한 야수도 함께였다. 노려보는 찌엔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곧장 도하를 향해 걸어 온 안나가 다짜고짜 도하의 뺨을 힘껏 날렸다.

짝!

소나기가 빈 양철통 위를 휩쓸고 가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음이 홀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헉......."


갑작스런 안나의 등장에 너무 놀라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던 도하가 그제야 잊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얼얼한 뺨을 감싸 쥐자 정신이 맑아지며 상황을 깨달았다.


"미......."


절로 고함이 나왔다. 도하가 안나를 향해 소리쳤다.


"미쳤어요? 당신이 여길 왜 와!"

"미친 건 너지. 난 널 따라온 거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한 안나가 새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죽어버리면 어떡해. 난 너한테 하늘이 무너져도 알아내야 할 게 있단 말이야."

"무슨 말이야. 상황을 몰라? 여기 있으면 죽어요!"


급한 마음에 허락도 없이 안나의 팔을 덥석 붙잡은 도하가 안나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하자 안나가 도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어느 새 안나의 표정이 살벌해져 있었다. 안나가 도하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이 괴물에 대해서."


괴물이란 말에 도하가 반사적으로 안나 옆에 있는 짐승을 쳐다보았다. 외향은 퓨마를 닮았지만 덩치는 호랑이만큼 큰 짐승이었다. 무엇보다 블랙홀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검은 몸체에 눈과 실루엣만 금색으로 빛나고 있어 누가 보아도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도하의 시선을 확인한 안나가 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보이나 보네. 근데 너 빼면 내 눈에만 보이는 거 같더라?"


이것뿐만이 아니야. 내 눈에 이상한 것들이 보여. 이 괴물을 만난 뒤부터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고. 난 죽는 한이 있어도 알아야겠어. 이것들이 다 뭔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알아야겠다고!


암흑 속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했더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이 사태의 원흉이 분명한 도하는 총에 맞아 생사를 헤매고 있었고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대기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오만가지 의문으로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때를 기다리며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도하가 무너지는 건물 안으로 혼자 뛰어 들어가는 것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따라 들어와 보니 상황은 제 생각보다 더 위험했다. 복도를 뛰고 있는데 바로 옆에 거대한 돌덩이가 내리꽂힌 적도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실감이 났다. 제가 이런 위험에 처한 게 전부 도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열이 받다 못해 치가 떨렸다. 따귀 한 대 로는 분이 요만큼도 안 풀리지만 나머지 분풀이는 일단 미뤄두기로 한 안나가 울며 겨자 먹기로 찌엔을 향해 돌아섰다.


"어쨌든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


일단은 여기서 탈출하는 게 먼저였다. 안나가 찌엔의 뒤에 있는 셔틀을 노려보며 들으란 듯이 말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저 셔틀을 타는 수밖에 없겠지?"

"셔틀은 2인승입니다만 개인용이라 제 음성으로만 작동합니다."


어느 새 냉정을 되찾은 찌엔이 대답했다. 안나의 생각과 달리 찌엔에게도 짐승이 보였다. 찌엔을 겁박하고 싶은 안나의 바램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유야 어쨌든 안나와 도하에게는 다행이었다. 이미 홀에서 제 목덜미를 물어뜯으려하는 짐승의 힘을 경험한 바 있는 찌엔에게 짐승은 훌륭한 위협이었다. 찌엔이 털을 곤두세우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으르렁대고 있는 짐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팔을 들어 안나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원하신다면 당신은 셔틀에 태워드리겠습니다. 안나양이 오늘 이 곳에 초대된 건 제 의도가 아니었던 터라 저도 안타깝군요."

"시끄러워."


낭랑한 목소리가 찌엔의 말을 잘랐다.


"이깟 애랑 말싸움해서 이겼다고 잘난 척 하지 마. 난 아무한테나 질질 끌려 다니는 바보가 아니니까."


안나의 품위 없는 말을 듣고 찌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멋대로에 감정적이고 뒷일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안나 같은 사람이 찌엔에게는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었다.


"하지만 제 목소리가 필요하실 텐데요."

"그거야 붙잡아서 말하게 하면 그만이지."


도하는 감탄했다. 한 사람이 뿜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도 높고 풍부한 에너지였다.

초능력자는 아니지만 일반인 중에서도 초능력을 잠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잠재능력자라고 부른다. 잠재능력자들은 초능력을 직접적으로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잠재되어 있는 힘이 크면 클수록 능력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되어 힘의 종류에 따라 정치,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보인다. 안나가 잠재능력자라는 건 본인만 모를 뿐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안나는 도하의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제 안에 잠재되어 있던 힘을 발현한 것이다. 도하가 안나를 지키고 있는 검은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짐승은 도하의 눈에 보이는 시각화 된 감정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감정을 시각화해서 보는 것은 도하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 뿐 실제로 구현되는 게 아니고 남이 볼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도하는 암흑 속에서 안나가 겪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안나 옆에 있는 검은 짐승이 안나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감정들의 집합체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안나는 도하가 만든 어둠에서 스스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던 스스로의 어두운 감정을 제어해서 자신을 보호하게 만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현실에까지 구현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안나에게 그런 종류의 초능력이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도하는 어느 새 자신의 혼란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안나 덕분이었다. 뒤에서 도하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안나가 짐승에게 명령했다.


"잡아!"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금속 바닥이 파도치듯 울렁거리며 세 명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꺄악!"


찌엔에게 달려들려던 짐승이 방향을 바꾸어 안나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파편을 쳐냈다. 순간 마찬가지로 파편을 보고 안나를 감쌌던 도하가 무서운 속도로 이곳으로 뻗어 나오는 기운을 느끼고 신음했다. 잊고 있었다. 자신이 찌엔을 죽이려고 했던 진짜 이유를.


"...온다!"


* * *


"꺄악!"


거대한 파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던 도겸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비영은 정수리에도 눈이 달렸는지 떨어지는 파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피하면서 도겸을 품에 안은 채 날듯이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바닥이 솟아오르고 파도치면 칠수록 도리어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복도를 돌아 멀리 미카엘이 있는 연구실의 문이 보인 순간 정체불명의 붉은 덩어리가 문이 있는 벽을 부수고 나오며 비영과 도겸을 향해 뻗어 나왔다.


* * *


찌이이이.......


비귀가 입고 있는 광학 슈트의 지퍼가 열리며 비귀의 한 쪽 눈이 드러났다. 흔히 볼 수 있는 푸른 눈동자였다. 하지만 비귀의 한 쪽 눈을 본 아수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무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너......."


아수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비류가 들어간 문 너머로 강철로 된 벽 전체가 풍선처럼 부풀더니 단번에 깨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살덩어리가 튀어나왔다. 0.1초 상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경악한 아수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공격해오는 촉수 같은 것을 가까스로 피하며 소리쳤다.


"뭐야!"


벽 가까이에 서 있던 비귀가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해 등을 맞고 쓰러졌다. 아수가 그대로 살덩어리에 깔리려고 하는 비귀의 팔을 엉겁결에 잡았다. 잡아당기면서 비귀의 팔이 부러졌다는 걸 깨달았지만 상황이 급했다. 이를 악물고 일어선 비귀가 간신히 다음 공격을 피했다.

아수는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나 몸을 구분할 수조차 없이 온갖 신체부위가 뒤섞여 괴물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살덩어리가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을 잠식하며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몸뚱이 중간 중간에 박힌 수십, 수백 개의 붉은 눈동자들이 광기에 물들어 번뜩였다. 아수가 정체불명의 괴물과 함께 방 밖으로 밀려나온 가루라와 비류를 향해 달려갔다. 둘은 이 와중에도 자기들끼리 검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가!"

"시끄러워, 이 마당에! 너야말로 방법을 말해! 죽으려고 여기 남은 건 아닐 거 아냐!"

"이게 뭐야?"


어느 새 다가온 아수가 비류의 멱살을 잡았다. 무너지고 있는 7층 건물 밑바닥에서 버티고 있는 건 도리어 공간을 뒤덮고 있는 괴물 덕분이었지만 그 괴물이 자신들을 집어 삼키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미 가구들은 박살나서 괴물의 몸체에 흡수된 지 오래고 아수들이 밟고 서 있는 바닥이나 천장도 붉은 살덩어리들로 뒤덮여 마치 괴물의 뱃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천장에서 끈적끈적한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에서 아수가 비류의 멱살을 흔들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이게 뭐냐니까?"


비류가 아수의 손을 뿌리치며 대답했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못 믿겠으니까 물어보지!"


예상대로의 대답을 들은 아수가 역정을 냈다. 설마 했지만 이딴 걸 미카엘이라고 불렀다니. 아수가 마구잡이로 사방을 공격하고 있는 촉수들을 피하며 소리쳤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지능도 없어 보이는데!"

"오랫동안 너무 좁은 곳에 가둬둬서 폭주하고 있는 겁니다. 충분히 불어나면 안정될 거예요."

"약점은?"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처분했겠죠."

"폭격이 얼마 안 남았어. 그걸로 죽일 수 있나?"


비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답은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2년 전에 미카엘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가 죽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괴물이 미카엘에게서 의지만을 뺀 무언가라면 이것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미카엘은 그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가루라가 비류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정말 방법이 없어? 모든 상황을 다 알면서 네가 아무 대비도 없이 이곳에 남았다는 거야?"


그럴 리 없었다. 절대 가릉빈가는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가루라가 이곳에 남을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믿음 때문이었다.

가릉빈가가 도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미카엘을 없애려 한다고 대답했을 때 그 말을 믿었던 것은 미카엘이 곧 풀려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져서 냉정한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성을 되찾으니 자신의 멍청함에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가릉빈가가 그깟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건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가릉빈가는 찌엔이 자신을 포함한 이곳에 있는 사람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기회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깨닫고 나니 모든 행동이 일목요연했다. 가릉빈가는 죽음을 가장하여 찌엔에게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속았다는 것을 분해할 겨를도 없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가루라는 가릉빈가가 살아남을 수단이 전혀 없이 이곳에 무작정 뛰어들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류가 답답한 듯이 소리쳤다.


"너까지 기적과도 같은 확률에 기댈 필요는 없어!"

"시끄러! 내가 너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게 놔 둘 줄 알아?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젠장!"


이제 거의 억지를 부리고 있는 가루라를 보며 비류가 평생 말해 본 적 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비류 역시 공들인 계획이었다. 아버님이 가루라에게 웨딩드레스를 만들라고 했을 때, 그 때부터! 왜 웨딩드레스가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그 결혼식이 왜 필요하겠는가! 찌엔의 사고패턴에 따라 이유와 결과를 유추하는 건 쉬웠다. 문제는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였다.

비류가 강화도에 도겸을 데리고 온 것은 우연이었지만 진실로 우연이었기에 그것은 비류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찌엔은 적절한 시일이 지났는데도 하나만 남지 못하고 있는 비류들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둘 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분 목록에 비류들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비류가 도겸을 데리고 온 일로 찌엔은 비류에게 흥미를 느꼈고 둘의 싸움을 허락하는 것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이 기회는 우연과 필연이 합쳐져 얻어낸 기적과도 같은 기회였다. 자신은 죽음을 각오한 싸움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마지막 기회에서 살아남은 가루라는 온전한 '비류'가 되어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완벽한가! 하지만 소망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계획에 포함된 인물 중에서 제 뜻대로 움직여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루라의 비난이 뼈저렸다. 주제도 모르고 아버님의 흉내를 낸 것이 제 발목을 잡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손바닥 위에서 입맛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류는 자신의 무능함에 답답하고 열이 받아서 제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 때였다.

쿵!

커다란 심장소리였다. 신체 안을 공명하듯 울리며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날뛰던 촉수들도 어느 새 조용해져 있었다.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소리가 조금씩 규칙적으로 안정되어 가면서 곳곳에 박혀있는 붉은 눈동자가 가운데 뭉쳐있는 다섯 명에게 하나씩 집중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비귀가 가루라의 양 옆을 감쌌고 아수가 비류에게 등을 기대왔다. 아수의 등 근육이 바싹 긴장해 있었다.


"저 녀석 말대로 뭔가 있으면 지금이 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데."

"그건 이 녀석과 대화가 가능할 때 쓸 수 있는 겁니다."


비류의 대답을 들은 아수와 가루라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루라가 말했다.


"이 놈은 이성이 없어. 그냥 괴물이라고."

"아니, 있어. 분노와 광기로 잃어버렸을 뿐이야."


답 없는 대답을 들은 가루라가 역정을 냈다.


"미치겠네!"

"이 광기를 어떻게 가라앉힐 건데?"


아수의 질문에 비류가 일순 망설였다. 곧 비류의 입에서 자신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일단 제가 반죽음이 되면 저쪽에서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수와 가루라의 벙 진 표정을 보며 비류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제가 자신을 저렇게 쳐다보는 사람들 앞에서 제 계획을 변명같이 늘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된 건지. 비류가 마지못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카엘은 우리를 증오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의식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의지도 있습니다. 세포수준에서는 일목요연하게 세포자살로 이어지는 진화를 스스로 선택했고 지능이 생긴 후에는 우리를 죽이는 쪽으로 바뀌었죠. 세포수준에서 보여준 그의 진화속도로 보았을 때 그의 지능은 이미 충분히 높으며 능력 역시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붕괴시키면서 오랜 시간 고통을 감내하며 기다린 것은 오로지 저와 가루라, 그리고 아버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빠르게 말하던 비류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미카엘에게는 가학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가 저를 단번에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능한 오랫동안 괴롭히며 죽일 거라고."

"예상이 빗나가면 어쩔 거지?"


아수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묻자 비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수는 제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저 괴물을 만들어낸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 추궁한 것이다.


"제 심장이 멈추면 제 심장박동과 연결된 폭탄이 터집니다. 강화도가 함께 날아가겠지만 어느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수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순간에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뿐이다.


"그 전에 빠져나갈지 모르겠군."

"비영에게 맡겼으니 5분이면 섬을 빠져나갈 겁니다."

"그럼 딱 5분만 지켜줄게."


태평한 대화를 듣고 있던 가루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랄하네."


가루라가 내뱉듯이 말한 순간이었다. 바닥에서 조용히 솟아오른 촉수 하나가 누구 하나 반응할 새도 없이 가루라의 배를 꿰뚫었다.


"큭!"


가루라가 촉수와 함께 공중으로 들어 올려 져 천장에 박혔다. 비귀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중검으로 촉수를 내리쳤지만 반쯤 잘린 촉수가 순식간에 재생하며 비귀의 몸을 휘감았다. 휘감아진 살이 엄청난 압력으로 팔과 몸을 조이자 비귀가 신음소리를 내며 검을 놓쳤다.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느새 사방에서 솟아오른 촉수 때문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다. 지능을 겸비하여 누군가를 노리고 들어오는 촉수들은 이성 없이 날뛰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수가 비귀가 놓친 중검을 주워들어 촉수 하나를 세로로 가르면서 외쳤다.


"재생 중인 끝부분이 무르니 몸체에 손대지 말고 끝을 노려!"


채찍처럼 쳐내려오는 촉수를 피한 비류가 아수의 말을 무시하고 가루라를 천장에 꽂고 있는 촉수를 토막 내며 말했다.


"세로로 가르면 더 얇은 촉수 2개가 됩니다만."

"젠장!"


아수가 가루라를 쳐다보니 가루라가 이미 들고 있던 두 개의 검 중 하나를 던진 후였다. 날아 온 검을 받아들은 아수가 비귀를 조이고 있는 촉수를 단칼에 끊어냈다. 탐이 날 지경으로 명검이었다. 그럴 때가 아닌데도 웃음이 비져나왔다.


"크, 옛날 생각나네!"


"내 것은 내 것. 니 것도 내 것!"을 외치며 한 단어를 외칠 때마다 주변의 촉수를 마구잡이로 칼질하는 아수를 보고 비류가 등을 돌렸다. 이렇게까지 품위가 없으면 심미안이 있는 비류에게는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다.

기세 좋게 촉수들을 토막 내고 있는 일행 가운데서 꾸득꾸득 거리는 불쾌한 소리를 내며 살덩어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바닥에서 솟아오른 살덩어리가 인간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모여든 뼈와 장기 위를 근육이 덮고 그 위를 눈처럼 깨끗한 피부가 덮는 일련의 과정을 지나 눈부신 붉은빛의 머리카락이 몸을 뒤덮었다.

마침내 완전한 형상을 갖춘 남자가 바닥과 연결되어 있던 발을 들어올렸다. 남자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공기로 자아낸 것 같은 반투명한 천이 공중에서 만들어져 남자의 새하얀 피부를 감쌌다. 붉은 기가 약하게 도는 하얀 피부는 영혼을 빨아들인 것처럼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으며 어깨 너머로 출렁이는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빛났다. 마치 신화 속의 신의 탄생을 목격한 듯 한 광경이었다.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압도적인 형상의 남자. 아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엘."


감고 있던 눈꺼풀이 떨어지며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수를 향한 빨간 눈동자가 예쁘게 휘었다.


"아프잖아."


미카엘의 첫마디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서 솟아오른 촉수들이 채찍처럼 공기를 가르며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좁은 공간 안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람 몸통만한 촉수에 맞은 비류와 가루라들이 전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수가 쓰러지지 않은 건 오로지 미카엘이 아수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홀로 서 있는 아수 앞으로 걸어온 미카엘이 아수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아수는 더 이상 긴장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마치 천사의 노랫소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날 알고 있어?"


하지만 자신에 대해 묻는 미카엘의 얼굴에 감정이라곤 없었다. 완전히 세탁되어 마치 갓 태어난 짐승마냥 무감각한 눈동자를 마주보며 아수가 대답했다.


"내가 기억이 안 나나 보군."


비류에게 주인공이 등장했으니 뭐든 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카엘에게서 1초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깜박이는 정도로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일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 아수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비류가 침음을 냈다.


"이지스, 그도 기억이 안 나나?"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솟아오른 촉수 하나가 비류의 목을 조르며 들어올렸다. 비류가 촉수를 양 손으로 붙잡은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어느 새 비류 앞으로 이동한 미카엘이 비류를 노려보았다. 치켜뜬 붉은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넌 입 다물어. 금방 산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개에게 먹여 줄 테니."


하지만 미카엘이 곧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기다릴 이유는 뭐지?"


미카엘이 뻗은 손가락이 매달려 있는 비류의 배를 꿰뚫었다. 그대로 뱃가죽을 찢으려고 팔을 들어 올린 미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 새 달려온 아수가 미카엘의 팔을 잘라버린 것이다. 아수를 쳐다본 미카엘이 어깨만 남은 팔을 내리며 잔혹하게 웃었다.


"아프다고 했는데."


미카엘의 잘린 팔에서 꾸득거리며 재생된 팔이 아수의 목을 움켜잡았다.


"난 아픈 게 싫어. 저 수조 안에 들어 있을 때 얼마나 아팠다고. 당장이라도 온 몸을 녹여버릴 것 같은 독극물에 사람을 담가놓고 그걸로 부족해서 고압전류를 24시간 흘리지......."


아수가 아직 정확한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촉수처럼 제 목을 휘감고 있는 미카엘이 팔을 붙잡았다. 한 손으로 움켜잡았을 뿐인데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내가 저들을 죽이는 건 정당한 거야. 너한텐 원한이 없지만 한 번 만 더 방해하면 너도 죽일 거야."

"크...윽."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미카엘의 팔이 목을 조여오자 아수가 신음했다. 비류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 챈 아수가 공중에 매달린 채로 말했다.


"이지스는 네게 소중한 사람이었어."

"소중?"


미카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수를 들어 올린 채로 잠시 생각하던 미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겠어. 사실 미카엘이고 이지스고 다 귀찮아. 이제 와 과거가 무슨 소용이야?"


미카엘이 혼잣말하며 아수를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아수가 마른기침을 토했다. 미카엘은 아수에게 이미 관심이 사라진 듯 했다.


"지금 엄청 피곤해. 몸도 무겁고 생각하는 것도 머리아파. 난 예전부터 그냥 쉬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런 나를 너희들이 억지로 깨웠지....... 억지로......."


중얼거리는 미카엘의 표정이 돌연 살벌해졌다. 미카엘이 비류를 쳐다보자 비류의 배에 꽂혀있던 미카엘의 팔이 촉수로 변했다. 촉수로 변한 팔이 뱃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요동치자 비류의 입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아팠어."


미카엘이 계속 중얼거리며 가루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엄청 아팠다고."


가루라를 노려보는 미카엘의 눈빛에 광기가 어렸다.


"죽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미카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명의 비귀가 가루라를 몸으로 감쌌다. 순식간에 몸에 대여섯 개의 구멍이 뚫리며 한 명의 비귀가 산산조각이 났다.


"큭......."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마찬가지로 가루라를 감쌌던 나머지 비귀가 자신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아수를 올려다보았다. 가루라와 비류조차 놀란 나머지 굳어 있었다. 순식간에 난도질 된 촉수들의 잔해 위에서 아수가 제 가슴을 꿰뚫은 마지막 촉수를 잘라냈다. 미카엘이 환하게 웃으며 박수쳤다.


"훌륭해. 5개를 한 번에!"


그리고 매혹적으로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미카엘의 주변에 새로운 촉수들이 솟아올랐다.


"10개는 어떨까?"


다음 공격이 마지막이군. 아수가 한쪽만 드러나 있는 비귀의 파란 눈동자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내가... 미쳤지."


그 때였다.


"아수야!"


낯익은 목소리였다. 절대, 절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수와 비류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정체불명의 막과 체액으로 뒤덮인 곳을 뚫고 괴물의 뱃속으로 기어들어온 낯익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아수를 보고 하얗게 질렸다.


"이, 멍청, 쿨럭!"


소리치며 도겸 쪽으로 달려오던 아수가 피를 토해내며 휘청했다. 도겸도 버리고 달려와 제가 매달려 있던 촉수를 잘라내고 있는 비영을 노려보는 비류의 얼굴이 너무 화가 나서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그 사이 아수에게로 뛰어온 도겸이 아수의 상처를 살폈다. 팔을 끼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가슴 한가운데에 뻥하니 뚫려있었다. 손 쓸 수조차 없는 치명상이었다. 도겸을 바라보는 아수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제발 한 번만 말 좀 들어라."


도겸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실감하지 못했다. 아수의 죽음을. 누가 실감할 수 있겠는가! 지구가 망해도 아수는 살아남을 것 같았다. 죽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마음속 한 구석에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아수가 죽을 리가 없다고. 그래서 아무 두려움 없이 이곳까지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수의 낯빛은 창백했다.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데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아수가 자꾸만 품으로 파고드는 도겸을 밀어냈다.


"제발, 부탁이니까, 가."


화를 내야 하는데 큰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발."


도겸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너무 슬퍼서, 감정을 조금도 추스를 수 없어서 울고 있는데, 정신없이 울고 있는데 반대로 머리는 점점 냉정해졌다. 분명히 눈물 때문에 보이지 않을 아수의 상처가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아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가슴으로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도 아수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식됐다. 아수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도겸이 단호한 눈으로 아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 필사적으로 이쪽으로 오면서도 내가 왜 가고 있는지 제대로 몰랐거든."


아수의 어두운 눈동자가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깨달았어."


도겸은 미카엘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도겸이 아수를 품에 안고 아수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사랑해."


순간 아수의 숨이 멈춘 듯 했다. 굳어있는 아수의 귀에 도겸이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작지만 힘 있는 울림이었다.


"사랑해. 그 말이 하고 싶었어."


멋지게 고백하려고 했던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떤 미사여구도, 덧붙일 말도 무엇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오로지 사랑한다는 말 뿐이었다. 도겸이 아수를 마주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


그 때였다. 비류의 품 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비류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품 안에서 혼자 굴러 나온 것 같았다. 주먹보다 약간 작은 그것이 바닥에서 작은 소리를 내며 윙-하고 움직였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사랑한다는 말이 키워드였나 봐. 나를 완전하게 만드는 열쇠.]


무의식 적으로 다가간 미카엘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미카엘이 들어 올린 물건을 보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도겸과 아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열쇠가 역시 너에게 있었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이지스......."


* * *


격납고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은 이 세상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형상에 못 박혀 있었다. 그가 나타남과 동시에 무너지고 있던 모든 것이 멈췄다. 떨어지고 있는 파편조차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공중에 멈춰 있었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붉은 머리의 남자가 파편에 깔려있는 도하를 발견하고 밝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미카엘."


도하가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안나는 미카엘을 보고 아예 말문이 막힌 듯 했다. 미카엘이 손을 휘두르자 안나를 감싸다가 미처 피하지 못한 파편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뒤이어 파편에 깔렸던 다리와 이전에 총을 맞았던 배에서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도하가 뒤늦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미카엘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죽은 사람은 못 살리거든."


도하는 아직도 정신이 멍한 것 같았다. 도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증오 때문에. 찌엔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를 죽일 때까지 닥치는 대로 죽일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저 사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이 아니라서 난.......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죽이겠다고.......


"어떻게?"


도하의 짧은 질문에 미카엘이 지긋이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도하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이지스의 심장.......


이지스의 기계 몸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옛 모선 지하에 갖다 놓았다. 녹여버리지 않았으므로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지스의 심장은 분명 완전히 멈췄었다. 하지만 지금 미카엘이 쥐고 있는 이지스의 심장은 마치 새것처럼 점멸하며 구동하고 있었다. 도하의 궁금증을 더 이상 풀어주지 않고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위로 보내줄게. 천천히 재회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거 생각보다 힘들거든."


미카엘이 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변을 손가락으로 빙글 가리켰다. 동시에 도하와 안나의 주변에 둥근 구체가 생겼다. 미카엘이 찌엔의 앞에 서서 도하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


검은 짐승의 도움으로 큰 위험은 간신히 피하고 있던 안나와 도하와는 달리 찌엔은 무너진 발사대와 건물의 잔해에 완전히 깔려있었다. 몸을 기계로 개조한 덕분에 아직 살아있었지만 버려두고 떠난다면 하나뿐인 뇌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도하가 찌엔을 음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찌엔의 시선은 미카엘이 나타난 이후 줄곧 그에게 못 박혀 있었다. 찌엔이 미카엘에게 말했다.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군요."


말 뜻 외에 어떤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 찬사였다. 찌엔의 진심어린 찬사를 들은 미카엘이 깔깔 웃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지."


미카엘은 과거의 증오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 했다. 미카엘이 찌엔이 쥐고 있는 은색 가방을 보며 말했다.


"일단 가방은 회수할게."


어느 새 미카엘의 손 위로 옮겨진 가방이 바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찌엔이 음울한 눈으로 타서 없어지고 있는 가방을 쳐다보았다. 가방 안에는 도겸이 처음 추출했던 미카엘의 줄기세포를 복제한 원세포가 들어있었다. 이내 가방이 흔적조차 없어지자 찌엔이 말했다.


"아쉽네요."

"조화로운 걸 좋아하잖아? 이건 네게 과분한 거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찌엔이 순순히 대답했다. 미카엘이 피식 웃으면서 찌엔 위에 쌓여있던 엄청난 양의 돌무더기 안에서 찌엔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도하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려고 했는데 그냥 같이 올려줄래. 이 녀석 마음에 들거든."

"뭐? 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 지르는 안나의 입을 막으며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카엘을 향해 물었다.


"다시 만날 수 있어?"


미카엘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 * *


"형!"


순간이동의 영향인지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토할 것 같은데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흔들어 댔다. 짜증이 치민 도하가 인상을 찡그리며 겨우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가만히......."


하지만 도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토니가 엉엉 울고 있었다.


"괜찮아? 형!"

"어, 괜찮아. 괜찮아."


당황한 도하가 무작정 말했다. 도하가 대충 대답하자 토니가 버럭 화를 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거길 왜 혼자 뛰어 들어가? 죽고 싶어 환장했어?"

"미, 미안해. 걱정 많이 했어?"


도하가 사과하자 토니가 언제 화냈냐는 듯 다시 울먹였다. 마치 조울증 환자처럼 자기가 어떤 상탠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토니가 울먹이느라 말을 더듬으면서 다시 물었다.


"그, 그래서. 괜찮아? 응? 진짜 괜찮아?"

"그래. 괜찮아. 보면 알잖아."


대답하는데 웃음이 터졌다. 작전이 시작됐을 때부터 동의하에 동료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도하는 토니가 오늘 하루 종일 자신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짜증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익숙한 목소리들이 그제야 들려왔다. 찌엔을 제외한 도하와 안나, 그리고 아수와 도겸 일행이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 옆으로 한 번에 옮겨진 모양이었다. 찌엔이 어디로 옮겨졌는지 궁금했지만 도하는 이내 생각을 접어버렸다. 어디에 있든지 분명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이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멀리서 일행을 지휘하고 있는 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원 다 확인됐으면 출발해! 폭격이 3분 남았어. 서둘러!"


하늘이 맑았다. 엔진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이대로 쉬고 싶었다. 도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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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아수 외전 1 12.05.03 537 30 28쪽
65 토니 외전 12.04.12 526 33 16쪽
64 도겸 외전 12.04.05 598 100 21쪽
63 번외 6-8 12.03.29 820 48 20쪽
62 번외 6-7 12.03.22 665 106 12쪽
61 번외 6-6 12.03.15 977 78 21쪽
60 번외 6-5 12.03.08 445 28 13쪽
59 번외 6-4 12.03.03 828 56 8쪽
58 번외 6-3 12.03.01 383 10 12쪽
57 번외 6-2 12.02.23 573 157 9쪽
56 번외 6-1 12.02.16 1,071 156 16쪽
55 번외 5-2 12.02.11 601 106 9쪽
54 번외 5-1 12.02.09 792 122 5쪽
53 번외 4-3 12.02.06 681 101 19쪽
52 번외 4-2 12.02.02 758 115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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