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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성칭 밑의 피와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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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23.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3.08.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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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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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DUMMY

베레 시는 에트루리아 왕국의 동쪽 방어를 책임지는 요충지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그저 낙후된 지역일 뿐이었다.

우로스 산맥 너머에는 우로스 산맥 전체 면적의 10%조차 되지 않는 초승달 형태의 미개척지가 있고, 그 미개척지 뒤와 위쪽은 우로스 산맥, 앞에는 지형탓인지 폭풍이 자주 몰아치는 바다 게라스해, 밑쪽은 필로테스 고원으로 막혀 있다.


필로테스 고원은 날아다니는 흉폭한 비행형 몬스터의 요람 그 자체인데다 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우로스 산맥은 사람이 맨손으로도 죽일 수 있는 보통 개구리부터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바위 거인까지 온갖 몬스터들의 천국이니 에트루리아 왕국을 해로를 타고 침공할 생각이 있는 국가가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이쪽으로 상륙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남쪽 길은 대도시인 토스카나 시가 아나비 왕국과의 교역로를 관리하는데다 아나비 왕국과 트러블이 있다면 그쪽에서 먼저 대처하고, 북쪽의 국경은 테살리아 백작이 관리하고 있다.


에트루리아 왕국이 이제 막 건국되었던 먼 옛날에는 지금과 달랐다.

그 당시 베레 시는 현재의 토스카나 지방과 아나비 왕국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에우리비아 족과 동쪽 우로스 산맥의 몬스터를 양면으로 막아내야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닌 요충지였다.

그렇기에 그 시절에 베레 시에 부임해오는 태수들은 하나 같이 이름 높은 명장들이며, 지위 역시 그에 걸맞게 동부군 사령관을 맡았다.

동부군 총사령관이 머무는 도시이니 당연히 동부군 사령부 역시 베레 시에 있었다.


그러나 몇 년에 걸친 전쟁 끝에 에우리비아 족이 아나비 왕국과 에트루리아 왕국의 협공으로 멸족당하고 베레 시의 운명은 달라져버렸다.

두 왕국이 멸족된 에우리비아 족의 땅을 나눠가지고 그 당시 베레 시의 태수이자 동부군의 사령관이었던 토스카나 장군이 포상으로 에우리비아 족의 땅을 할당받아 토스카나 백작령이 세워진 것이다.


동남쪽의 위협이 사라지고 아나비 왕국과의 교역로는 새로 만들어진 토스카나 백작령이 장악해버렸다.

동부군 사령부는 임시로 토스카나 백작령의 주도인 토스카나 시로 옮겨졌다가 동부군이 해체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령관의 거처, 동부군의 사령부, 최전선이라는 중대한 역할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베레 시에 남겨진 것은 군사도시로서의 특성과 성가신 몬스터 저지 임무 뿐.

그나마 특색이 있는 전리품을 남기는 몬스터가 있었다면 모를까 우로스 산맥의 몬스터들은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놈들 뿐이었다.


평화가 지속됨에 따라 쇠퇴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넘쳐나는 몬스터를 잡은 모험자들이 가져온 소재를 매입하고 팔아치우는 모험자 길드가 내는 세금은 상당했지만 국경초소의 유지 보수 비용과 몬스터의 위협으로 인해 개척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베레 시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몇 번째 태수의 임기 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범죄조직의 마수가 베레 시에 뻗쳐 왔다.

범죄조직들은 먼저 베레 시의 상층부와 지역유지들에게 아부하며 선물을 건넸다.

처음에는 작은 선물이었으나 나중에는 중앙 귀족들조차 눈이 휘둥그레 변할 재물이 전달되었고 순수한 호의라던 선물이 뇌물로 변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레 시의 수뇌부를 포섭한 범죄조직들은 마치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기생식물처럼 베레 시의 얼마 남지 않은 성장동력들을 빨아먹기 시작하였다.

모험자들을 회유해 몬스터에게서 나온 소재들을 빼돌려 모험자 길드의 수익성을 악화시키고, 베레 시 성문 밖의 땅의 권리들에 손을 댔다.

모험자 길드로부터 걷는 세금이 줄어들고, 개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개척된 땅들이 합법적으로 조직에게 넘어가는 것은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느긋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범죄조직들은 하나로 통합되어 겉으로는 베레-케나스 상인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베레 시에 들어오는 상인들을 통제하고, 베레 시의 주민들 대상으로는 평범한 은행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뒤로는 살인적인 금리의 고리대금업, 허가받을 수 없는 레벨의 잔혹한 불법투기장 운용, 불법적인 물품 거래 중개 등의 뒷세계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들이 본격적으로 엄니를 드러냈을 때는 이미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인 케나스 가문이 명실상부한 지방유지가 되어 베레 시의 공식적인 지배자인 태수, 범죄조직과는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는 모험자 길드의 길드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감히 어쩔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지난 수백년 동안 쌓아온 부를 이용하여 이들은 이제 비좁은 베레 시 밖으로 진출하여 에트루리아 왕국 곳곳에 칡넝쿨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얼음 계통 주문서를 파는 상인이 나타났다고?"



그 거대한 조직에 반쯤 발을 걸치고 있는 마법사 수잔은 모험자 길드의 의뢰는 끝마치고 저녁에 흔히 술집이라고 통용되는 퍼블릭 하우스에서 아는 모험자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 모험자 역시 수잔처럼 범죄조직과 모험자 길드 양쪽에 발을 걸친 이중등록자였고 수잔은 은화를 모험자 쪽으로 튕겼다.

모험자는 튕겨나간 은화를 손을 뻗어 잡고는 나머지 정보를 말했다.



"그렇다니까, 슬럼가의 암시장 있지? 거기서 처음 보는 상인이 사람들한테 주문서를 몇 개 팔아치웠는데 그 중 니가 원하던 얼음계통 주문들도 있었다나봐."



위저드, 매지션, 비전학자 등으로 불리는 마법사용자들은 제 나름대로 주문을 관리한다.

어떤 자는 자신만의 주문이 적힌 책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자는 아예 자신이 사용할 모든 주문과 발동조건을 외우고 다니며, 또 어떤 자는 도구에 주문을 깃들게 한 뒤 필요할 때 마법도구를 사용해 주문을 발동시킨다.


수잔은 이 중 자신만의 주문을 책을 기록했다가 필요한 주문만 그날그날 기억해서 사용하는 가장 흔한 타입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주문들은 어떤 것은 독학으로, 어떤 것은 두루마리를 찾아내, 한번은 버려진 도서관의 책에서 발견해 습득했다.

그러나 그녀가 필요로 하는 얼음계통 마법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습득할 기회가 없어서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오늘, 드디어 단서가 잡힌 것이다.



"그 상인 특징은? 외모는? 연령은? 주문서의 수준은?"


"글쎄, 거기까진 나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모르겠네. 하지만 서두르라고, 그렇게 귀한 물건을 털어가고 싶어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수잔은 자신이 마신 맥주 값을 계산하고 술집을 나왔다.

하지만 가는 곳은 모험자가 알려준 장소가 아닌,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방이었다.

잠시 후 여관에서 나온 그녀의 품속에는 당연히 그녀의 개인 마법서가 있었다.

그녀는 마법서를 들고 주기적으로 암시장이 열리는 베레 시 북쪽 거리의 5번 구역 슬럼가로 향했다.

이미 암시장 상인들이 모여 좌판을 열어놓은 5번 구역은 암시장이 열리는 날에는 꽤 깔끔하게 청소되기 때문에 크게 불쾌하지 않았고 그녀는 암시장 한복판에서 조용히 마법을 발동시켰다.



"마력 탐색"



대략 6파수스(8.88m)를 조금 넘는 범위 내의 마법의 존재들을 감지하는 탐지 마법이 발동되자 수많은 마력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잡다한 마법의 기운들을 넘기고 마법이 집중된 장소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마력탐을 몇 번 발동시킨 뒤 그녀는 현재 암시장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5번 구역 중앙 갈림길 구석에서 다수의 마법반응을 감지하였다.



"당신이 주문서를 파는 상인이야?"



내용물이 비어있는 상자 여러 개를 쌓아놓아 생긴 으슥한 그늘 아래에서 좌판을 깔고 있는 후드가 달린 회색 수도복을 입은 자가 수잔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늘진 곳이라 후드 밑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자릿세 수금인가? 낼 돈이 없으니 바로 비켜드리지."



딱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하고 중후한 목소리는 상대가 남자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인은 바닥에 깔아놓은 좌판을 주섬주섬 거두고 이동할 준비를 하였고 수잔은 급히 말을 이어갔다.



"아니, 난 손님이야. 뭘 팔고 있는지 보여줘."


"정말인가? 아까도 웬 깡패놈이 물건 좀 보자고 하다가 돈 이야기로 빠지던데?"



수잔은 비록 무감정한 목소리지만 그가 이곳에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저 무감정한 목소리도 하도 깡패들에게 시달려서 감정을 숨기기 위해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고 납득하면서 자신의 마법서를 앞으로 내밀고 펼쳐서 보여주었다.



"주문을 많이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제대로 된 마법사의 것이군."



그녀 같이 책에 주문을 기록하는 타입의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개인 마법서는 단순히 마법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주문 중 하나인 라이트(빛)에 대해 알고 있는가?

단순하게 마력을 빛으로 전환해 비추는 마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단순한 마법조차 마법사에 따라 그 발동 방식은 굉장히 다양하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주문들은 완벽하게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종족에 따라, 개인에 따라, 수련 방식에 따라 주문이 발동될 때 차이가 만들어진다.


같은 주문, 같은 형식, 같은 과정이라도 개개인의 마법사들의 성향에 따라 완전히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문을 마법서에 옮겨 쓴다는 건 단순한 기입 작업이 아니다.

각각의 마법사들은 해당 주문에 대해 기록한 마법사의 의도를 해석하고, 적혀있는 소리와 동작을 이해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자신의 마법서에 기록한다.

주문을 기초부터 다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자신이 사용하고 익힌 수십 개의 주문들을 완벽하게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 있는 자는 드물기에 개인 마법서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황금보다도 더 소중한 물건이었다.


상인은 단번에 수잔의 마법서의 상태를 파악하고는 좌판을 다시 깔아놓았다.

최소한 여기서 팔고 있는 주문이 뭔지 아는 마법사라면 제대로 거래를 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고 수잔은 벌써부터 스크롤 하나를 펼쳐서 제목을 보면서 물었다.



"잠깐 어떤 주문인지 제목 부분만 봐도 되겠지?"


"물론"



수잔은 앞에 있는 스크롤과 서적, 메모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고 그 중에서 원하던 것들을 발견하였다.



'휘몰아치는 얼음구체, 얼음폭풍, 냉기의 뿔!'



얼음계통 주문들이 적혀 있는 스크롤과 양장본들은 확실히 그녀가 찾고 있던 물건들이 맞았다.

그녀가 주문들에 정신이 팔렸을 때 상인은 구석에 있던 메모지를 내밀며 말했다.



"거미줄 생성 마법은 어떤가?"


"유용한 건 인정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야."



거미줄 생성은 2~4파수스(약3~6m) 거리에 끈적거리는 거미줄을 깔아 놓는 마법으로 보통 불에 약한 몬스터를 포박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포박용으로도 성능이 좋고 불이 잘 붙는 성질 때문에 여러 곳에 깔아 놓고 한꺼번에 불을 붙여 불의 벽 주문을 대신할 수도 있었다.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마법 중 하나지만 수잔은 눈앞의 얼음 마법들에 정신이 팔려서 상인의 권유를 가볍게 거절하였다.

다만 이런 효율적인 주문을 권하는 걸 보니 제대로 된 주문서 상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수잔은 앞으로 자주 애용해야겠다 생각했다.


수잔은 3개의 주문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자신의 수중의 돈과 주문서들이 거래되는 가격을 떠올리고는 끝내 냉기의 뿔 주문서는 내려놓고 나머지 2개를 상인에게 내밀었다.



"휘몰아치는 얼음구체에 얼음폭풍? 값은... 잠깐만, 얼음폭풍은 예약한 사람이 있었는데"


"뭐?"



예약한 손님이 있다는 말에 수잔이 당황한 사이 상인은 얼음폭풍 주문서를 품속에 넣고 대신 냉기의 뿔 주문서를 내밀며 말했다.



"대금이 약간 모자라서 돈을 가지러 간다고 방금 막 떠났지. 내가 값의 절반을 선금으로 받아버려서 그건 팔지 못하겠군. 아까 이 주문서를 보고 있던 것 같은데 대신 이걸 구입하면 어떤가? 미안하니 얼음폭풍 가격에 팔도록 하지."



확실히 뿔처럼 뻗어나가는 냉기를 방출시키는 냉기의 뿔 주문은 얼음폭풍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수잔은 아직 그 마법을 사용할 만큼의 실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얼음폭풍도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얼음폭풍 쪽은 그나마 조금만 더 경험을 쌓으면 될 것 같아서 냉기의 뿔 주문서를 내려놓고 나머지 둘을 선택한 것이었다.


수잔은 순간 이 상인을 처리해버리고 주문서를 가져갈까 생각도 했지만 여긴 비좁은 골목길이 아니라 중앙 갈림길이었다.

이런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강도질을 저지르면 제 아무리 무법지대라고 할지라도 곤란하다.

수잔은 완전히 범죄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게 아니라 모험자 길드와 범죄조직을 왔다갔다하는 처지라 더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베레 시 같은 변방에서 제대로 정신박힌 주문서 상인을 만나는 건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었기에 수잔은 미래를 생각하고 강탈은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럼 내가 그 예약한 사람과 협상하면?"


"그럼 팔 수 있지."


"그 사람 어디에 있어?"


"베레 시 북쪽의 무슨 마을에 돈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하고 가버렸지. 방금 막 돈 가지고 온다고 떠났으니 지금쯤이면 북문을 통과했을텐데"


"그 사람 인상착의는?"


"검은색 후드를 눌러 쓰고 커다란 검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지."



그 말을 듣자마자 수잔은 일단 휘몰아치는 얼음구체 주문서의 값만 지불한 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쏜살같이 북문을 향해 뛰어갔다.

북문은 오늘도 게으르기 짝이 없는 경비병들은 앉아있다가 숨을 헉헉대고 있는 수잔을 발견하고는 주섬주섬 바닥에 널린 카드들을 정리하고 일어서서 말했다.



"신분증"


"여기"


"모험자 길드에 소속된 모험자로군. 나가는 목적은?"


"잠깐 북쪽의 토에 마을에 볼일이 있어"


"아직 한밤 중은 아니지만 날이 저물었는데?"


"급한 일이야."



수잔은 그러면서 경비병들의 소매로 슬쩍 뭔가를 찔러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동전이었고 경비병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받아챙기고 길을 열어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급히 달려가려던 수잔이 멈춰서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검은색 후드를 눌러쓰고 대검을 짊어진 모험자 한명이 여기로 나가지 않았어?"


"난 못 봤는데?"


"어... 혹시 아까 전에 나간 그 여자 말하는 거 아니야? 그 왜 검 들고 있던 여자있잖아."


"검은색 후드가 아니라 갈색 후드였잖아. 그 여자는 아니겠지."



경비병들은 대놓고 근무태만 중이었기에 상대방의 인상착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수잔이 됐다고 말하고 뛰어가자 소정의 수고료를 받아서 서비스하려는 건지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퍼졌다.



"조심하라고, 요즘 북쪽 길가에 우로스 산맥에서 도태된 늑대 무리가 진을 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니. 뭐, 당신네들이 더 잘 알겠지만"



병사들은 수잔이 저 멀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는 다시 북문 옆의 바닥에 앉아 카드를 치기 시작했다.


수잔은 계속 달렸다.

대략 10분 정도 달렸을까?

마침내 북쪽으로 통하는 가도 한복판에서 홀로 걸어가고 있는 후드를 쓴 사람의 형상이 하늘의 달빛에 비춰져 희미하게 보였고 수잔은 소리쳐서 그 사람을 부르려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여기서 저 녀석을 처리해버리고 저 녀석 물건 중 아무거나 가져가서 주문서 상인한테 협상 제대로 했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아까 경비병들이 말했듯이 이 북쪽 가도는 최근 늑대 무리가 여행자들을 습격했다는 이야기가 빈번하게 들려오는 장소였다.

슬그머니 처리해버리고 늑대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건 마법사인 그녀에게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이미 동료의 뒤통수를 쳐서 죽인 적도 있는 수잔에게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잔의 표적이 된 불우한 인물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가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수잔은 지팡이와 단검을 준비하고 천천히 뒤를 따라갔고 그러던 중 표적이 다리가 아팠는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서 고개를 숙이는 걸 보았다.


수잔은 천천히 상대의 등짝을 응시한 채 접근하였다.

비록 로그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발소리를 죽여가며 표적의 등을 노리고 접근하였다.


9파수스, 상대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8파수스, 상대가 후드 위로 머리를 긁고있는데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7파수스, 상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6파수스, 수잔이 여기까지 접근할 때까지 상대는 등 뒤에 누군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5파수스, 수잔은 상대를 마법으로 처리할지 검으로 처리할지 고민했다.

4파수스, 수잔은 마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자신이 있는 라이트닝 볼트가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수잔은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였다.



"...! ....? ??? ...!!!!"



그러나 수잔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주변에 조금씩 들리던 바람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표적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뒤를 돌아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표적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방금 막 주문을 발동시킨 찢어진 스크롤 하나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수잔은 급히 뒤로 몸을 날렸고 그제야 모든 소리가 다시 썰물처럼 되돌아왔다.



'말도 안돼! 마법사용자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스크롤로... 아니지 잠깐? 저거 혹시 최신 유행한다는 누구나 쓸 수 있는 일회용 스크롤인가? 침묵 주문을 일회용 스크롤로 발동한 게 분명해!'



침묵 마법, 일정범위를 무음지대로 만드는 마법으로 처음 개발되었던 당시에는 입으로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을 죽이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 주문이었다.

이후 침묵 마법에 대응하는 마법과 저항이 가능한 아이템들이 보급되면서 사용 빈도가 많이 줄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걸려온다면 여전히 치명적이었다.



'언제 들킨거지? 8파수스(약 12m) 쯤에서 저 녀석이 머리를 긁은 건 내 접근을 알아차려서 그랬던 건가?'



순식간에 수잔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수잔보다 훨씬 빨랐다.

주문을 외울 시간도 없이 쇄도한 상대는 수잔의 다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고 수잔은 단검과 지팡이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지팡이와 함께 왼쪽 다리가 잘려나갔다.



"큭! 라이트닝..."



다리가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수잔은 상대가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는 점을 이용해서 주문을 외워보려고 했지만 상대는 대검을 놔버리고 그대로 육탄전에 돌입해 수잔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그대로 집중이 깨져서 마법 시전이 취소되었고 수잔은 뒤로 넘어져 땅에 뒹굴었지만 그대로 마운트 자세로 위에 올라타 자신을 난타하려는 적을 향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찔렀다.

단검은 그대로 마주보고 있는 상대의 왼손바닥을 관통했으나 무자비한 파운딩이 시작되었다.



'안 빠져!'



수잔은 어떻게든 단검을 상대의 왼손에서 빼내 배에 찌르려고 했지만 상대는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왼손에 박힌 단검을 오히려 꽉 쥐면서 떼어놓지 않으려고 하였다.

계속되는 무자비한 파운딩에 수잔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어갔으나 수잔은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려고 하였다.



"내가 말했지 수잔? 넌 근접전은 젬병이니까 혼자 다니지 말라고"



후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잔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고 수잔 위에 올라탄 괴한은 후드를 벗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레비롱!!? 대체 무..."



수잔이 놀랄 틈도 없이 레비롱은 오른손으로 수잔의 오른손목을 쳐서 단검을 놓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왼손에 박힌 단검을 빼내 수잔의 어깨에 그대로 박아버렸고 수잔은 다리가 잘리고도 참아낸 정신력으로 비명을 지르는 대신 마법을 시전하였다.



"매직미사일!"



수잔의 손가락 끝에서 2발의 매직미사일이 날아가 레비롱의 옆구리와 충돌해 터져나갔다.



"좀 따끔하네!"



하지만 레비롱은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수잔의 어깨를 찌른 단검을 빼내 수잔의 손목, 배, 목을 순서대로 찔러댔다.

수잔은 목에 피가 고여서 이젠 주문을 외우지도 못하게 되었고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수잔을 내려다보면서 레비롱은 말했다.



"시세로는 처리했고, 너도 이제 끝장이네. 걱정마, 외롭지 않게 토니우스도 오늘 밤에 보내줄 테니까"



수잔은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레비롱은 단검을 들어올리고는 수잔의 이마를 향해 내리쳤고 두개골을 연이어 뚫어버리는 감각과 함께 아래에 깔린 수잔의 몸이 축 늘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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