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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팀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산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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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팀
작품등록일 :
2022.05.11 22:48
최근연재일 :
2022.08.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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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4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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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얼음산의 주인 5화

DUMMY

“이게 무슨 짓이냐!”

눈밭에 떨어진 율켄의 몸이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았다.

받은 것은 돌려준다. 그것이 은혜든, 원한이든. 이게 크리스의 철칙이었다. 율켄은 그저 그의 철칙에 의거하여 그대로 돌려받았을 뿐이다.

크리스는 밑에서 악을 써대는 율켄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토끼 눈을 한 루제르트를 향해 상큼하게 뒤돌았다.

“아이고! 저런!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실수로 왕자님의 일행분을 밀어버렸군요. 꺼내드리고 싶지만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왕자님을 믿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풋∙∙∙. 아하하∙∙∙! 하하하하!”

크리스가 말을 하는 중간에 루제르트가 폭소했다.

크리스는 동료가 밑에 떨어졌는데 웃는 사람은 어떤 인간일까 싶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루제르트는 아예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었다.

“흑∙∙∙. 하하하.”

루제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죠.”

“네?”

루제르트가 눈 범벅이 된 바지를 툭툭 털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크리스는 그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루제르트가 진짜 떠날 것처럼 앞장서자 오히려 크리스가 당황해서 그를 붙잡았다.

“아니, 왕자님∙∙∙? 율켄경 안 구해 줘도 되나요?”

“네. 율켄경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소매에 온갖 도구들을 숨겨놨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율켄이 배신감에 이를 갈았다.

“루제르트님, 그냥 가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율켄 경, 아니 율켄 숙부님. 저는 물의 수호자를 찾기 전까진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제가 반드시 수호자님을 모셔오겠다고 형님에게 전해주세요.”

말을 마친 루제르트는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가요, 형.”

크리스는 어버버 거리면서도 루제르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남은 절벽을 마저 올랐다. 루제르트는 조금 전 일이 많이 웃겼는지 산에서 내려가는 내내 키득거렸다.

“형 진짜 멋지네요! 율켄경이 저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봐요. 쌤통이다!”

크리스는 고귀하신 왕자님의 뒷담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크리스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루제르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참! 그리고 저를 왕자님이 아닌 루제르트라고 불러주세요.”

“네, 왕자님.”

“∙∙∙? 정말이에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네, 편하게 부르겠습니다.”

“∙∙∙.”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루제르트의 얼굴을 외면하며 제발 그가 자신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크리스의 표정을 보고 루제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황실에 영영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젠 평범한 제국민인거죠.”

“아, 네. ∙∙∙네?”

크리스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다 황급히 말꼬리를 올렸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근엄한 어투와 진지한 표정, 누가 봐도 왕자 같은 사람이 평범한 제국민을 입에 담으니 여러모로 황당했다. 크리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제르트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일단 의뢰비부터.”

거두절미하고 크리스가 돈 달라는 뜻으로 루제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맞다.”

정신없이 산에서 내려가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까먹고 있었다. 가방을 뒤적거린 루제르트는 가죽 주머니를 꺼내 크리스에게 내밀었다. 크리스는 의뢰비를 받는 즉시 주머니를 열어 액수까지 야무지게 확인한 다음에야 품속에 넣어 갈무리했다.

그가 몇 년은 일 해야 겨우 모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잘 부탁할 게 있어? 의뢰는 끝난 거 같은데.”

루제르트는 기가 막혔다. 크리스는 이미 평민이 된 왕자에게 적응을 끝낸 것 같았다. 역시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와, 형. 그럼 나처럼 어린아이를 혼자 여행하게 둘 생각이었어?”

크리스는 갑자기 꼬마 행세하는 루제르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진짜 영악한 애다. 이 애는 자신이 어리다는 점을 적재적소에 잘 써먹을 줄 알았다.

“어린아이보다 다 큰 어른이 더 위험하게 생긴 판에 무슨. 너 아까 칼 휘두르는 거 다 봤어.”

“그럼 내가 형을 지켜줄게. 나랑 같이 가자.”

루제르트가 생각보다 끈질겨서 그만 말하고 싶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얘는 대체 내가 왜 좋지?

크리스는 묵묵히 눈을 지르밟았다.

“일단은 이 산을 벗어나자. 좀 불안해서.”

“날씨 말이지?”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뒤쫓아올 율켄도 그렇고.’

그 무례한 인간과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혼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루제르트가 말했다.

“형, 내 짐작이 맞는다면∙∙∙ 우린 이 산을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

“왜?”

“우리 아까 산에 올라갈 때도 날씨가 괜찮았잖아. 그때 마법사들도 이 산을 오르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들이 눈보라를 잠깐 멈춰놓은 거지.”

그러나 크리스는 루제르트의 추측에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이상한 힘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사람이 날씨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할까?

결론을 내리기 전에 힐 산의 끝이 보였다. 바닥에 새하얗게 깔린 눈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푸른 숲이 우거졌다. 드디어 다른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난 것이다.

“어!”

안도감에 두 사람이 걸음을 떼려는데 하늘에서 눈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루제르트는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생겼다. 지금쯤 로테도 힐 산을 벗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눈보라를 막아놓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한번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힐 산에서 살아남았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슬슬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크리스와 루제르트는 노숙을 위해 서둘러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불을 피우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사이좋게 손에 물집만 가득 잡힌 그들은 포기하고 붙어 앉아 육포를 씹었다. 어둠에 점점 눈이 익숙해져 아예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육포를 질겅질겅 씹던 크리스가 말했다.

“∙∙∙이래서 내가 따로 가잔 거야.”

“몇 번 해보면 익숙해지거든?”

“너라면 얼마든지 좋은 용병을 구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약해빠진 나랑 같이 갈 이유가 있어?”

“형은 똑똑하니까!”

어렴풋이 루제르트의 고개가 격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음? 그럴 이유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걸.”

“형, 사실 율켄이 어떤 식으로든 형을 헤치려고 하는 거 짐작하고 있었지? 절벽에서 밀려 떨어졌는데도 무사했잖아. 골렘도 형이 잡은 거고.”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어.”

크리스는 남몰래 한숨 쉬었다. 그는 정말로, 목숨만 위험하지 않으면 길 안내 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그동안 경험한 바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눈에 튀는 행동을 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나랑 율켄은 못 했지.”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한 크리스가 침묵하면서 그들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루제르트는 희미하게 보이는 크리스의 얼굴에 집중했다.

루제르트는, 그냥 크리스가 좋았다. 말을 걸면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친절함이 좋았고, 그의 정체를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대해주려고 하는 배려가 좋았다.

‘아, 맞아.’

크리스는 그가 평소 상상해 온 형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사실 루제르트에게는 크세르트라는 형이 있었지만, 힐 제국의 황제는 이상적인 형이 되어줄 수 없는 위치라는 것을 지금의 그도 안다. 루제르트는 평범한 다른 형제들이 부러웠다.

‘크리스가 내 형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크리스의 실루엣이 어둠에 자꾸 지워지자 조바심이 나서 괜히 말을 걸었다.

“형, 잘 거야?”

“응. 루제, 너도 자.”

‘루제’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았다.

“잘 자. 형.”

“그래.”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누워 잠을 청했다. 루제르트는 어떻게든 크리스를 끌어들일 방법을, 크리스는 어떻게든 루제르트를 떨어트려 놓을 방법을 생각하다 잠들었다.



날이 밝고, 크리스와 루제르트는 다시 산행에 나섰다.

크리스는 묵묵히 걸으며 어젯밤에 열심히 정리한 말을 꺼낼 타이밍을 노렸다. 미안해서 말하기 어려웠지만, 계속 생각만 하다 다음 마을에 도착할 것 같아서 결국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 나는 여기서 너와 헤어지고 싶어. 내가 아무리 임기응변으로 버틴다고 해도 위험한 상황에서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너까지 날 지키다가 위험해질 수 있어. 그리고 너와 함께 가면 마법사들을 계속 마주칠 것 같은데 나는 마법사가 무서워.”

루제를 배려하면서 말하면 하나도 안 먹힐 것 같아서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그는 속으로 ‘제발 통해라∙∙∙ 통해라∙∙∙’라고 빌었다.

루제르트는 크리스의 굳은 표정을 보고 망설이며 대답을 할 듯 말 듯 입을 여닫기를 반복했다.

‘통한다∙∙∙ 통한다!’

“저어∙∙∙. 모험가님들.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앗∙∙∙ 네!”

이때다 싶었던 루제르트가 도움을 청하는 청년을 향해 도망쳤다.

‘젠장.’

거의 다 되었건만∙∙∙.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던 크리스도 루제르트를 따라 갔다.

“무슨 일이시죠?”

“저희 수레가 구덩이에 빠져 버려서··· 저희만으로는 힘이 부족한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크리스는 곧장 눈앞의 여성을 살폈다. 여자는 마르고 아담한 체형이었다. 크리스가 그녀를 탐색하는 사이 루제르트가 물었다.

“수레는요?”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앞장서는 여자를 따라 샛길로 조금 내려가니 노인과 수레가 보였다. 수레는 한쪽 바퀴가 구덩이에 빠져 크게 기울어 있었다.

“촌장님, 제가 도와줄 분들을 모셔왔어요!”

“오오, 마리∙∙∙.”

촌장은 그들을 보고 반색했다.

“고맙소∙∙∙ 보다시피 늙은이와 이 가녀린 친구뿐이라 이도 저도 못 하고 계속 묶여있었다오.”

“네, 곧 빼 드리겠습니다.”

노인과 여성이 기대한 것은 어린 루제르트가 아니라 그 옆의 건강한 청년인 크리스겠지만 가장 먼저 두 팔을 걷고 나선 건 루제르트였다. 의욕 넘치는 이 애늙은이 친구가 웃겨서 크리스가 남몰래 웃으며 거들었다.

루제르트가 워낙에 힘이 좋아 수레를 금방 빼낼 수 있었다. 크리스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시간을 더 끌고 싶었던 루제르트가 먼저 선수 쳤다.

“마을이 어디에요? 같이 끌어 드릴게요.”

“아니∙∙∙ 괜찮겠니? 저희가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 것이 아닌지∙∙∙.”

이제는 촌장님도 루제르트를 아이로 대해야 할지 모험가로 대해야 할지 헷갈리는 듯했다. 졸지에 같이 마을에 가게 된 것과는 별개로, 아까부터 루제르트를 보고 있자니 너무 웃겨서 크리스는 폭소를 참느라 괴로울 지경이 되었다. 그가 부들부들 떨자 옆에서 마리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웃으면 이 어린 왕자님. 아니 제국민님이 상처받겠지?’

크리스의 마음도 모르고 이 나라의 씩씩한 제국민, 루제르트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 그럼 부탁하오.”


작가의말

오늘도 좋은 밤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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