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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라프 님의 서재입니다.

악당의 오빠가 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글먹이J
작품등록일 :
2022.10.30 21:41
최근연재일 :
2022.11.05 21: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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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72

작성
22.11.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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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화

DUMMY

딸아이가 하던 게임의 스토리는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게임 전체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게임 구석구석에 개발자의 편의주의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언어.


대륙 공용어 - 한글

고대 제국어 - 영어


이 몸의 기억이 없는데도 소통에 불편함이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게임 속 다른 언어들 또한 지구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럴듯한 꼬부랑글씨를 차용한 많은 게임과 궤를 달리한 것이다.


한때는 참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더랬다. 지금은 생각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엉뚱한 부분에서 발목을 잡혔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보니 하늘이 도와주는 꼴이 아닌가.


알렌은 책을 돌려주는 대신 제안했다.


“사제님. 아들인 제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장식해도 되겠습니까?”


도미니코는 기겁했다.


‘장례식이라고 잠잠하나 했더니!’


저도 어려운 고대 제국어를 농땡이만 부렸던 알렌이 대신한다는 말에, 도미니코는 알렌의 망나니짓이 도졌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알렌은 예전과 달리 명분을 챙겼다.


“부탁드립니다.”

“허어··· 전 분명 말렸습니다.”


도미니코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이제 장원을 책임질 영주가 될 사람 아닌가? 크게 망신을 당하면 망나니 버릇이 고쳐질지도 몰랐다.


‘또한 내 고대 제국어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는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테고···!’


도미니코는 자화자찬했다. 공공의 이익과 사적 이익 모두를 만족하는 훌륭한 노림수라고.


물론 그 노림수가 통하는 일은 없었다.


관 앞에 선 알렌은 옆 단상에는 책을, 관 위에는 공간을 두고 두 손을 올렸다. 정면을 향한 시선엔 눈살을 찌푸리는 영지민들이 잡혔다.


‘또 무슨 망나니짓을 하려고···?’


이래저래 많이 당해온 영지민들은 도미니코 사제와 생각이 같았다. 그 생각이 달라진 건 알렌의 입에 열렸을 때였다.


“주님. 오늘 저희는 불쌍한 영혼을 당신 앞에 보냅니다. 부디 그의 신실함을 눈여겨보시어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소서.”


알렌의 고대 제국어는 혀에 버터를 바른 듯 매끄러웠다. 뜻을 알지 못해도 알렌의 실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알 만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며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도미니코의 반응이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했다.


본래 맨날 말썽을 피우다 한 번 착한 일한 아이는 크게 칭찬을 받는 법. 망나니란 선입견 덕분에 알렌의 변화는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때마침 떠오른 태양의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넘어 알렌의 뒤에 후광을 만들어냈다.


“또한 심판 날에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씻어 주시고, 부활하실 때 당신 옆에 서서 함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거기다 묵직한 중저음이 교회를 울리자, 잠깐이나마 전설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알렌이 망나니라는 꼬리표를 떼고, 차기 영주임을 각인시키는 한편, 종교적 권위까지 덤으로 얻는 순간이었다.


알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고용인들이 관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알렌의 발걸음이 도달하기 전 양옆으로 갈라진 영지민들이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오, 주여-”

“돌아가신 영주님께 자비를! 새로운 영주님께는 축복을!”


본래 알렌의 자리에 있어야 할 도미니코 사제가 멍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붙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소피아와 롤랑이 당도한 것은 교회의 공동묘지에 관을 묻고 흙을 반쯤 덮었을 때였다.


거친 호흡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등장한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만! 어찌 부인인 날 제외하고 남편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인부의 삽을 빼앗으며 노발대발하는 소피아. 그녀의 분노는 정당했다. 그러나 장례식에 어울리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남편 장례식에 늦어 놓고 이런 행패라니?”

“난 마님이 없는지도 몰랐다니까.”

“것 참, 한 명이 정신을 차리니, 다른 한 명이 망나니짓하는구먼.”


뒤늦게 그녀가 장례식 내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문객들이 수군거렸다. 알렌에게 붙어 있던 망나니란 꼬리표가 주인을 바꿨다.


평소의 소피아라면 눈을 부라리며 헛된 소릴 내뱉은 자들을 엄벌에 처했을 테지만, 현재 그녀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기반은 영주의 아내란 위치였다. 이대로 알렌이 영주로 등극하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 말리라.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그녀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절박함이 기발한 발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숨을 고르는 사이 알렌이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장례의 주관은 후계자의 역할입니다.”

“후계자? 누구 멋대로 후계자라 자칭하는 겁니까? 부군께선 떠나기 전 내게 약속하셨습니다. 후계자를 바꾸겠다고요.”


알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선이 한편에서 여전히 눈물을 삼키고 있는 애냐에게 향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막심 토발츠의 딸 사랑은 일개 농노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


그러나 정작 소피아의 입에서 나온 새로운 후계자는 애냐가 아니었다.


“바로 내 아이에게 작위와 영지를 물려주기로 약속하셨지요. 내 자식이 진짜 후계자입니다···!”


소피아가 양손으로 제 배를 감쌌다. 동작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녀는 막심 토발츠의 자식을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영지민들이 술렁일 때였다.


“믿을 수 없다! 막심 경의 두 자녀는 물론이고 마지막을 함께했던 나도 못 들은 얘기다!”


제프리가 반발함과 거의 동시에, 롤랑이 소피아 앞에 섰다. 한 손을 검 손잡이에 올리고 제프리를 마주한 그는 소피아를 보호하는 모양새였다.


“그대, 언행을 삼가시오! 나 롤랑은 마님을 향한 모욕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롤랑 경! 명예를 지키시오! 어떤 전조나 암시도 없었거늘. 대관절 어찌 그게 사실이라고 보는가!”

“허나, 그게 진실입니다.”

“경-!”


롤랑 입장에선 최선의 수였다. 일단 알렌이 영주로 등극하는 걸 막아야 그다음이란 걸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니까.


임신이야 계속 노력하고 있으니 어떻게 되지 않겠는가. 정 안 되면 아이를 사는 방법도 있고. 미리 상의하지 않은 걸 보면 소피아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저지른 일은 아닌 것 같지만.


‘황소 뒷걸음에 쥐 잡힌 꼴이군.’


여하튼, 빈약하나마 명분을 얻었다. 막심 토발츠는 죽었고, 상대는 고작해야 망나니와 구박받던 딸, 그리고 종자였다.


롤랑은 그들을 이겨내고 영지를 먹을 자신이 있었다. 본래 계획보다 더 나은 결과였다.


“그만. 모두 닥쳐라.”


알렌이 나선 건 제프리와 롤랑의 논쟁이 칼싸움으로 번지기 직전이었다. 영주로 등극하기 직전인 알렌의 말엔 힘이 있었다.


제프리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물러났고, 롤랑은 여전히 소피아를 보호하듯 그 앞에 섰다.


알렌은 롤랑 너머의 소피아를 응시했다.


‘발악하는군.’


막심 토발츠가 떠난 건 삼 개월 전. 그때 임신했다 치더라도 소피아의 배는 너무 홀쭉했다. 물론 티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지만,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지 아니한가.


더욱이 롤랑에게 향하는 그녀의 뜨거운 시선을 보면, 설령 임신이 사실이더라도 씨의 주인이 막심은 아니리라.


“알렌 님도 제프리 님과 같은 생각이십니까?”


롤랑의 눈빛이 형형했다.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여기서 별 볼 일 없는 상대와 드잡이질 하는 건 하책이었다. 오히려 상대를 부각해 경쟁자임을 각인시키는 꼴이 될 수도 있음이니.


“그 전에, 한 가지 해명하겠다. 난 어머니를 찾아오라 계속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다들 찾을 수 없다고 하더군. 어디 계셨습니까, 어머니?”


알렌은 관객들에게 다 들으라는 듯 말하다가, 소피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알렌과 행동을 같이했다.


임신 주장과 막심의 유언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소피아는 이를 격장지계(激將之計)로 받아들이곤 호흡을 골랐다.


“괜히 기분이 울적하고 답답하여 숲을 거닐었다. 이제 보니 부군의 전사를 직감한 게지.”


솔직하게 롤랑과 별관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장원을 샅샅이 수색했을 고용인의 시선을 피할 만한 곳은 정해진 사냥꾼을 제외하면 출입이 금지된 숲뿐.


변명을 들은 알렌의 미소가 짙어졌다. 소피아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으나 한번 뱉은 말을 도로 주워 삼킬 수는 없는 법.


“롤랑 경과 단둘이서 말이지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소피아와 롤랑뿐. 둘은 장례식에 어울리는 복장도 아니었다.


고용인 없이 영주의 아내와 고용된 기사가 단둘이 한적한 숲을 거닐었다? 불쾌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훌륭한 소재였다.


하물며 부군인 막심 토발츠가 삼 개월째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임신 소식을 알렸다. 여기 모인 이들이 어떤 상상을 할지 뻔했다.


그 점을 뒤늦게 깨달은 소피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쏠리자,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나, 난 혼자였다!”


하지 않으니만 못한 변명이었다. 뒤늦게 그녀의 입을 막으려던 롤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위험한 숲을 혼자서요? 성인 남자도 그러지는 않을 터인데···”


숲은 맹수나 괴물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그런 곳을 혼자 거닐 수 있는 여자는 단 한 종류뿐.


“마녀-?”


누군가 중얼거린 말이 소란을 일으켰다.


“설마, 영주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게···?”

“저주! 마녀의 저주다! 계실 적엔 도적놈들이 얼씬도 못 하게 만든 강력한 기사였던 그분이 이리 허무하게 돌아가신 건 그 때문이야!”


뜬금없이 불붙은 마녀 논쟁에, 소란은 점점 커졌다. 일련의 사태를 진정시켜야 할 사제 도미니코는 한술 더 떴다.


“이건 주님의 뜻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는 듯 롤랑이 외쳤다. 그러나 도미니코는 이미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럼 공부에 일절 관심이 없던 알렌님이 고대 제국어를 술술 해석하는 건 말이 되나! 또한 예전의 망나니 같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분의 안배밖에 없을지니!”

“망나니가 그분의 사도라도 된다는 말이오!?”


움찔한 도미니코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영주 부인을 처단할 자격이 있는 건 오직 후계자인 알렌 님이시니 그런 게 아니겠는가!”


도미니코가 생각하기엔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추리에 경도되어 외쳤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녀를 목매달리라!”


본래 군중은 몇 마디 단순한 선동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하물며 선동가가 신이 신분을 보장한 사제였으니, 긴가민가하던 영지민들이 확신에 차 성호를 그었다.


“아멘-!”


그들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소피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이 의혹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지민들의 기세가 한층 험악해지자, 롤랑이 소피아의 손을 붙잡았다.


“소피. 일단 피합시다.”


무장이 빈약한 농노 따윈 혼자서 수십을 베어버릴 수 있는 롤랑이지만, 그랬다간 영지를 얻는 일은 물거품이 될 터였다.


한편 알렌은 한 발 떨어져서 소피아와 롤랑이 저택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앞장서 군중을 이끄는 도미니코를 막아섰다.


“사제님. 소피아가 설령 마녀라 한들, 아랫것들의 손에 명운을 맡길 순 없습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부인 아니겠습니까? 당신께서 말한 것처럼, 저한테 맡겨 주시지요.”

“아아,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멘-”


이 모든 게 그분의 안배라 여기는 도미니코는 기꺼이 소피아의 최후를 양보했다. 알렌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아직 그들에겐 남은 역할이 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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