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의 군사: 북방의 유랑자- 76화
淸風 之 軍師
청풍의 군사: 북방의 유랑자
76화
동이 트기 무섭게 사람들은 회풍성의 남문으로 향했다.
남녀노소 저마다 자신들의 짐을 지고,
온전한 자가 불편한 자를 도우며 질서정연하게 이동했다.
회풍성과 적호군의 병사들은 행렬의 가장자리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가 있으면 도왔다.
공시와 맹찬도 다른 병사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짐을 들어주거나,
수레를 밀어주며 자신들의 몫을 했다.
한편, 남문 쪽에는 원창과 적호군의 장수들이 모여 있었다.
새벽부터 미리 남문에 나와 있던 원창과 정연을
찾아 적호군의 장수들과 가향이 찾아온 것이었다.
조환은 원창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 것이었고,
염충은 원창은 뜻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문진과 가향은 조환의 독촉에 못 이겨 따라온 것이었다.
“제 뜻을 꺾으러 오신 거면
걸음을 돌리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원창이 조환과 염충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은근히 으름장을 놓았다.
“성주님. 지금 당장이야 출성하면 무사하겠지만,
훗날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 안 백성 모두를 죄인으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조환이 앞으로 나서며 원창에게 말했다.
이에 원창은 콧방귀를 뀌었다.
“당장 죽으면 벌을 받을 훗날도 없습니다.
그리 어리석은 소리할 거면 돌아들 가십시오.”
원창의 말에 조환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 염충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환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수달을 불렀다.
“옥사에 가서 금군들도 서둘러 출성하라 이르게.”
“예.”
수달은 군례를 올린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남문 앞으로 사람들의 행렬이 도착했다.
행렬 앞쪽의 사람들은 원창을 알아보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저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앞다투어 전했다.
원창은 머쓱해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인사를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옆에 있던 정연이 원창에게 말했다.
“그러면 네가 대신 받든가.
너도 나와 같은 뜻이었잖아.”
“사양하겠습니다.”
정연은 정색하며 자리를 떠났다.
원창은 수문장에게 명을 내려 문을 열게 했다.
성곽 아래로 붉은 칠이 된 문짝 두 개가 양쪽으로 벌어졌고,
그 사이로 한대성까지 이어지는 널찍한 도로의 모습이 보였다.
원창은 출성하는 사람들의 인솔을 격의 조장인, 여서에게 맡겼다.
회풍성 인근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주변 지리에 밝았다.
원창은 당장은 항명했느니, 어쨌느니 해도 전투가 끝나면
위궐에서도 출성한 사람들을 가엽게 여길 거라 믿었다.
그래서 여서에게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한 터였다.
“데려다 주는대로 곧바로 오겠습니다.”
“오지 않아도 돼.”
원창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원창과 함께한 여서는
원창의 농에 익숙했다.
“전속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니, 정말로 오지 않아도 돼.”
“예?”
여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격 중에 하나는 살아야 내 검술도
후세에 남기고 할 거 아니야.”
“그냥 돌아올게요.
전 창피해서 성주님 검술을 못 남기겠어요.”
“야, 내 검술이 어때서?”
원창이 발끈하여 여서에게 소리쳤고,
여서는 황급히 자리에서 달아났다.
“정 부관이나, 격장이나 하나 같이 글렀다니까.”
원창은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서를 선두로 사람들이 성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성문 밖으로 펼쳐진 도로는 수레를 놓고
내달려도 될 정도로 바닥이 평평했다.
그리고 이런 도로 양 옆에는 겨울을 앞두고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백 보 정도 앞으로 나아갔을 무렵,
선두에 서 있던 여서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성주님!”
성곽 위에서 행렬을 살피던 정연이 원창을 불렀다.
원창은 비적을 사용한 것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성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정연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갑옷과 장창, 검으로 무장한 정규 부대가
회풍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세운 깃발을 보니 중부군의 깃발이었다.
“지원군일까요?”
정연이 원창에게 물었다.
“아니. 지원군 규모치곤 너무 적어.”
재빠르게 병력을 헤아린 원창이 딱 잘라 말했다.
“아무래도 출성을 막으려고 온 것 같은데······.
저것들도 우장군이 손 쓴 거요?”
원창이 조환을 향해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이에 조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성주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정 부관!”
원창이 조환의 말을 자르며 정연을 불렀다.
“예.”
“격 3개 조를 데리고 따라 와라.”
“명 받들겠습니다.”
“적호군은 이번에 나서지 마십시오.”
원창은 적호군의 장수들에게 말한 뒤 성곽을 내려갔다.
그리고 정연과 격들을 대동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
원창은 사람들을 지나 행렬의 앞으로 나아갔다.
행렬 앞의 여서가 원창에게 군례를 올렸다.
원창은 고개를 끄덕인 뒤 눈 앞의 부대를 살폈다.
100여 명 정도로 이루어진 중부군의 부대는 병사 전원이
은으로 복륜된 감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장전검(裝塡劍: 검의 손잡이 부분에
잠금 장치가 있어 검집에 넣었을 때 잠글 수 있게 만든 양날검)을
차고 있었고, 등에는 날이 잘 갈린 장창을 메고 있었다.
또 이들의 맨 앞에 말을 탄 지휘관은
화려한 문양의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공작 깃털로 만든 술을 단 투구를 쓰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그럴듯한 위용을 갖춘 모습이었지만,
원창의 눈에는 적에서 표적이 되기 쉽상인 광대 같은
차림으로 보였다.
“중부군 우장군 화웅이다!
대장군의 명을 전하러 왔으니 성주님을 불러오라!”
중부군의 지휘관이 원창과 격들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내가 회풍성의 성주, 원창이오!”
화웅은 생각했던 것보다 젊은 원창의 모습에
놀란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대가 회풍성의 성주요?”
“그렇소. 전할 말이 뭐요?”
원창이 묻자, 화웅이 말에서 내렸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말에서 내리는 몸놀림이 가벼웠다.
“일전에 회풍성에 내린 출성금지령을 들으셨소?”
“들었습니다.”
“그 명을 꼭 따르라는 명을 전하러 왔소.”
“그렇습니까?
말 한 마디 전하러 저 많은 군병을 데리고 오신 겁니까?”
원창이 화웅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을 흘끗 보며 물었다.
“저들은 명을 따르는지 감시하기 위해 데리고 온 자들이오.”
“감시요?”
원창이 화웅의 얼굴에 대고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막으러 온 것이 아니고요?”
화웅은 미간을 좁히며 원창을 노려보았다.
“그대가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저들이 역할이 그리 바뀔테지.”
“지금 겁박하시는 겁니까?”
원창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화웅에게 물었다.
이에 화웅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병사들에게 외쳤다.
“중부군!”
“예!”
병사들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부터 저자들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병사들이 일제히 장전검의 걸쇠를 풀고, 검을 뽑아 들었다.
백 명의 군병이 검을 뽑아든 위협적인 모습에
아낙과 아이들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고,
나이 든 노인들 중 몇몇은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에 원창은 눈을 부릅 뜨며 화웅에게 외쳤다.
“같은 태한 사람에게 검을 겨누다니!
대체 무엇 하는 짓인가!”
“저들은 그냥 태한 사람이 아니오.
항명을 한 죄인이오.”
화웅이 싸늘한 얼굴로 원창에게 말했다.
“무고하게 죽으라는 명을 어기고
살려는 것이 어찌 항명인가?”
원창이 폭발하여 화웅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에 화웅은 원창과 대조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때로는 죽음도 명이 될 수 있는 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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