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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밖에 없는 정신병동

소녀, 소설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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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feel
작품등록일 :
2016.02.17 18:35
최근연재일 :
2016.12.29 12:05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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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1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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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20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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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4.9화 (side story)

DUMMY

아직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신입부원이었지만, 신미유는 분재부라는 공간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 그랬기에 미유는 공모전 투고가 끝났음에도 방과 후가 되면 언제나 성실하게 분재부실에 오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부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는 없고, 단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었으니까. 가기만 하면 곧장 연습을 시키려고 했던 피겨스케이팅 부와 비교하면 천국과도 같이 마음이 편안한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언니."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오늘도 성실히 소나무 분재에 물을 주고 있는 정달이. 이 귀엽고 똑똑한 아이와 이야기 하는 것도 어느새 미유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빠는 빌리고 싶은 책이 있다고 도서실로 갔고, 지미 오빠는...... 모르겠어요."

미유는 언제나 앉는 자리에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아 조금 쉬고 있자, 달이가 무언가를 가져다 주었다. 뜨거운 종이컵. 무언가 들어있다.


"뭐야 이거?"

"홍차에요."

미유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기껏 달이가 가져다 준 거긴 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기에 미유는 말했다.


"나 쓴 거 못 마시는데."

"괜찮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이니까요. 이건 각설탕 여덟 개를 넣은 특제 홍차에요."

미유의 얼굴에 금방 생기가 돌아왔다. 나이는 세 살 차이가 나고, 정신연령도 세 살 정도 차이가 나지만, 단 걸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같은 둘이었다.


"미유 언니 요즘은 어떤 글 쓰고 계세요?"

"팬픽."

"팬픽이요?"

달이가 되묻자, 미유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피며 말했다.


"태양이가 말 안 해줬어? [우주비행사 폴]의 팬픽. 그것도 원작자가 직접 써달라고 부탁한, 말하자면 작가 공인 팬픽이야!"

"오빠가 써달라고 했다고요?"

달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숨김 없이 놀란 표정을 보여주었다.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주욱 같이 있었던 동생, 즉 자신을 제외한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으니까. 특히 저런 종류의 무거운 부탁이라면 더더욱.


"오빠가 왜요?"

달이의 질문을 듣고 미유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안 물어본 거 같다.


"글쎄? 다음에 보면 물어 볼게."

이 약속은 결국 미유가 잊어먹어 지켜지지 않게 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달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래도 재밌을 거 같네요. 팬픽. 완성되면 저한테도 꼭 보여주세요."

이건 예의상 해둔 빈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한텐 그런 티를 안 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우주비행사 폴]의 열렬한 팬인 달이는 정말로 그 팬픽을 기대하고 있었다.


"응! 물론이지. 기다려. 원작을 뛰어넘는 명작을 만들어 보일 테니까."

"네, 미유 언니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에요."

이건 빈말이었다.


그렇게 달고 단 티타임을 즐기던 미유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계속 신경 쓰여서 오늘 달이를 만나면 바로 물어보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설탕의 세계에 빠져들어 까먹을 뻔 했다.


"달이야, 이번 주말에 우리 놀러 갔었잖아."

물론 달이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달이가 대답했다.


"라비 언니랑 소이 언니랑 네 명에서 갔을 때 말이죠?"

"응. 그때."

사실 달이는 지미의 이야기를 통해 예전부터 저 둘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미유라는 강력한 접착제가 나타나기 전까진 실제로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제대로 대화를 한 건 영화를 보러 간 저번 토요일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거 제목이 뭐였더라."

"[그대를 위한 카페]요?"

"아, 응 그거."

그 날은 라비가 배우로서 등장한 연극을 보러 갔었다. 연극배우를 꿈꾸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라비가 무대에 선 모습을 보는 건 물론 처음이었다. 지망생들끼리 모여서 만든 연극이었기에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그 연극을 지휘하는 사람이 라비였기에 작품의 질은 결코 낮지 않았다.


"재밌었지? 특히 결말이."

"지금까지 이런 걸 접한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신선한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로맨스를 테마로 삼은 연극이었기에, 아직 연애보다는 수식에 더 흥분하는 시기인 달이에게 있어선 그냥 무난하기만 작품이었다. 아마 오빠라면 이런 심정도 솔직하게 입에 담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달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요?"

"다 끝나고 네 명이서 이야기 했었잖아."

달이는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로맨스를 다룬 극을 봐서인가, 그쪽 방면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것들에는 별 생각 없었던 달이에게 있어선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기에 기억에 강렬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라비한테 물어본 것도 기억해?"

달이는 머릿속을 검색해보았다. 그때 미유가 라비에게 무언가 질문을 한 건 총 네 번. 그 중에서 미유가 신경 쓸 만한 내용은 무엇일까.


"이상형이 누군지 물어본 거요?"

"응응. 그거. 라비는 그런 이야기 싫어하니까 일부러 물어봤는데."

달이는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대답을 피하셨죠."

미유는 그때의 일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검색을 마친 달이에게는 필요없는 작업이었다. 달이는 미유의 말을 들으며 그때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역시 이상형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 라비는 그 대신 이상형의 반대, 다시 말해 정말로 싫어하고 증오하는 스타일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라비 언니답다고 달이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런 라비가 알려준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뭐든지 귀찮아 하고, 조금만 피곤해지면 금방 자신의 일을 던져버리는 무책임한 사람.


이번엔 라비 언니치곤 평범한 대답이라 생각했었다. 그 다음엔 소이 언니가 나도 그런 사람은 싫다고 공감했었던 걸 기억한다. 그치만 그런 사람은 누구나 싫어하는 거 아닌가? 라고 달이는 자기 자신이 생각했던 것까지 기억해냈다. 그 다음이 미유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그거 완전히 태양이를 말하는 거 아니냐고."

잘 생각해보면, 아니 잘 생각해보지 않아도 실례되는 말이다. 처음엔 오빠가 없으니까 한 말인 줄 알았지만, 달이는 가까운 날 본인이 있든 없든 미유는 상관없이 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치만 라비 언니는 고개를 저었죠."

"응! 그거! 라비는 오히려 반대라고 말했잖아."

미유는 그 이유를 끈질기게 물었지만, 라비는 언제나처럼 기품 있게 어린애 같은 미유의 땡깡을 무시해주었다. 그러니 미유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미유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자기 입으로 언제나 말하고 있잖아. 애늙은이라고."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우리 오빠는 확실히 뭐든지 귀찮아하죠. 누가 무언가 부탁하면 듣기도 전에 일단 거절부터 하는 사람이니까요."

솔직히, 동생으로서 짜증났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오빠에게 무언가 부탁을 하려면 언제나 각오를 하고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한 계획을 짜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피곤하단 말은 거의 입버릇이지."

미유가 맞장구쳤다. 사실 만난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무슨 일만 있으면 피곤하다는 말부터 한다는 그의 습성은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실은 그건, 방어기제 같은 거에요."

달이가 말했다. 미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어기제......가 뭐야?"

달이는 잠깐 당황했다. 미유 언니는 무슨 의미로 물어온 것인가. 정말로 단어의 의미가 모르는 것인가. 그게 아니면 무언가 더 깊은 의미를 물어온 질문인 것인가.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진 달이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서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옛날의 오빠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어요."

"옛날?"

"네. 지금 제 나이였을 시절이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중학교 1학년생인 정태양. 잘 상상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미유는 더욱더 흥미를 느꼈다.


"그때까지의 오빠는 뭐든지 솔선수범해서 일을 맡는 모범생 같은 사람이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반장을 네 번이나 했고요. 그 외의 여러 귀찮은 일을 하게 되는 역할도 자진해서 나서곤 했어요."

"......에이."

"진짜라니까요!"

하나도 믿고 있지 않는 미유의 얼굴을 보고 달이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흥분해버렸다. 오빠를 변호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도 반장이랑 선도부원, 문화제 위원장을 동시에 맡아서 했어요. 거의 일중독 같은 상태였을 걸요?"

"정말로? 지금이랑은 그야말로 정반대잖아."

"그래서 말했잖아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고."

하지만 물론,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거기에 오빠한테는 자기가 맡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완성시키려고 하는, 강박증에 가까운 책임감이 있어서요. 그러니 주위 사람들도 오빠를 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으로 평가했어요."

"그때의 태양이는 초인 같은 사람이었던 거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오빠는 초인이 아니었다. 책임감이 과도하게 강한 것만 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응?"

"아마 한창 중학교의 문화제 준비 기간이었을 거에요."

상당히 오래된 일이었지만 그때의 일을 달이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곱씹어도 곱씹어도 쓴 맛밖에 안 나는 기억이었지만, 그랬기에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오빠에게 무언가 부탁을 해온 사람이 많았어요. 오빠랑은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이었지만 언제나처럼 부탁을 해온 거죠.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부탁을 해온 사람은 또래인 중학생도 있는가 하면, 선생님 같은 어른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태양은, 미련하게도 그 부탁을 전부 들었다.


"괜찮았던 거야? 한창 바쁜 시기 아니었어?"

당시 반장 겸 선도부원 겸 문화제 위원장이었던 사람이 괜찮았을 리가 없었다.


"네. 괜찮지 않았던 거죠. 삼 일 정도 후에 오빠는 고열로 쓰러졌어요. 과로였던 거겠죠."

39도를 넘나드는 가족을 간병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달이에게 있어서 더 짜증났던 것은, 그때 오빠는 원래는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는 부탁들을 완수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일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전 오빠한테 말해줬어요. 오빠한테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책임은 없다고. 그러니 그걸 안 했다고 사람들이 오빠를 추궁하진 않을 거라고. 혹시나 오빠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 해도 사정을 말하면 다들 이해해줄 거라고."

"......잠깐. 그때 달이는 몇 살이지?"

"저요? 저는 4학년이었죠. 그건 왜요?"

"......아니. 암것도 아냐."

나한테도 저런 기특한 동생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미유는 잠깐 생각했다.


"아무튼 전 그렇게 간병을 계속 했어요. 이틀 정도 있으니까 열도 내려갔고요. 그리고 오빠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그 부탁들을 일단은 해결했어요."

당시의 달이의 눈에는 오빠가 정말로 마법사와도 같이 보였다.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 고열 속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건지 원초적인 호기심을 느꼈을 정도다.


"응? 그럼 다 잘 된 거잖아. 뭔가 문제라도 있었던 거야?"

"문제는, 그때 제가 했던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는 거죠."

"예측?"

달이는 숨을 깊게 한 번 내쉰 뒤, 말했다.


"사람들이, 그런 오빠를 이해해 줄 거라는 예측이 말이에요."

미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이를 바라보았다. 달이의 얼굴에는 분노라기보다는 허무에 가까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언제나 부탁을 하면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해결해왔던 오빠가, 갑자기 어딘가 대충대충 한 거 같은 결과물을 가져다 준 거에요. 노골적으로 표현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공통점은 오빠에게 실망했다는 거죠."

"......"

달이는 생각했다. 오빠가 평소부터 다른 사람처럼 남의 부탁은 적당한 범위에서 해결해주는 사람이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오빠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되었던 건지.


"그때부터에요. 오빠가 애늙은이라는 말을 자기한테 쓰게 된 건."

"자기가?"

"네.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건 지미 오빠긴 했지만, 사실상 그 캐릭터를 확립시킨 건 오빠 자신이에요. 뭐든지 귀찮아하고, 조금만 움직이면 피곤해지고. 그러니 남의 부탁은 웬만해선 들어주지 않는 캐릭터말이에요."

미유에게 있어선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달이가 여기서 갑자기 '실은 다 거짓말이에요! 깜빡 속았죠?'라고 말해준다면 오히려 마음이 상쾌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달이의 얼굴과 목소리는, 농담을 하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음...... 그래도, 그럼 역시 옛날과는 성격이 바뀌었단 거잖아. 지금은 역시 라비가 말한 타입에 가까워 진 거 아니야?"

"뭐든지 귀찮아하고, 피곤해지면 금방 일을 던져버리는 무책임한 사람이요?"

"......그렇게 되나?"

세뇌 효과는 무섭다고 달이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언제나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주입시키고 있으니 미유 언니마저 속아버린 것이다.


"이번 공모전 소설, 오빠가 도와주었다고 했죠?"

"아, 응."

"미유 언니는 오빠가 왜 그렇게까지 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물어봤다. 하지만 달이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었던 같은 기분도 들었기에 미유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닐까?"

그래서 미유는 애매모호하게 그렇게 대답해두었다. 달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야 제가 모르는 무언가 있긴 하겠죠. 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이기도 해요. 오빠가 처음엔 미유 언니 부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아시죠?"

"그랬었나?"

"그랬어요. 하지만 미유 언니가 언젠가, 책임은 전혀 묻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지적해달라 하셨잖아요."

생각 없이 욕 해달라고 했을 때이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 미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라는 이름의 함정에 빠져버린 오빠는 결국 미유 언니의 소설에 손을 대버리고 만 거죠."

"응. 그래도 그때는 도입부랑 맞춤법 같은 세세한 것만 고쳤었는데."

미유는 아직 달이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듯 했다. 그랬기에 달이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피곤한 점은, 한 번 손 댄 일은 끝까지 완성시켜야만 한다는 오빠의 책임감은 아직도 여전하다는 거에요."

상대가 기대를 하던 안 하던, 이미 자기가 한 번 손을 대버린 일을 그저 방치할 수 있는 오빠가 아니었다.


"아아!"

미유는 드디어 마음 속이 상쾌해졌다. 태양이가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자신을 도왔던 건지, 그때 본인의 대답만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제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달이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러브레터 이야기는 저번에 소이 언니한테 들으셨죠?"

"아, 라비한테 보내는 편지를 태양이가 썼다는 그거?"

"네. 그때도 참 대단했지요."

이 부분은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추억이었기에 달이는 아까보다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미 오빠가 쓴 문장이 너무 심각해서 동정심에 오빠가 조금 손을 대고 만 거죠. 소이 언니는 그 초안에 이미 만족하셨다고 했지만, 오빠는 역시 거기서 만족하지 못했던 거죠.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고 고쳤어요."

버전 한 개가 완성될 때마다 태양은 달이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처음엔 흥미진진한 태도를 보였던 달이도, 아무리 그래도 열 세 번째의 도전에는 질려서 짜증을 냈었다.


"그렇게 의뢰자인 소이 언니랑도 몇 번이나 이야기해가면서, 총 일주일이 걸려서 그 라비 언니가 감동할 정도의 러브레터를 완성시킨 거에요. 그때 오빠는 이미 변성기도 끝난 남자였는데 말이에요."

열심히 러브레터의 문장을 생각하고 있는 그때의 오빠는 언제 떠올려도 삼 일은 웃을 수 있는 소재라고 달이는 생각했다. 미유도 열심히 웃고 있었다.


"그 태양이가? 진짜 상상이 안 가는데."

"아, 이거 오빠한텐 말하지 마세요. 지금까지도 이때 일을 엄청나게 부끄러워 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화낼지도 몰라요."

이렇게 오빠를 소재로 웃고 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면 무슨 말을 들을지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달이는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평소에 오빠에게 쌓인 울분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문집 때도 그래요. 라비 언니가 오빠한테 소설을 쓰라고 했을 때, 진짜 정말로 엄청나게 싫어했어요. 그래도 끈질기게 시키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쓰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결과물은, 설명 안 하셔도 알죠?"

그렇게 달이 자신이 울어버리고 만 [우주비행사 폴]이 탄생한 것이다.


"그럼 결국, 태양이는 책임감이 엄청 강하다는 거야?"

"병적으로요. 그리고 오빠는 그걸 실은 잘 자각하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무언가의 책임을 진다는 거에 대해 공포에 가까운 걸 느끼게 된 거에요. 그래서 애늙은이란 캐릭터를 책임 회피의 도구로서 활용하고 있는 거고요."

뭔가 적당히 짜맞춘듯한 이야기처럼도 들렸지만 동시에 그럴듯하게도 들렸다. 다음부터 태양이를 볼 때는 이런 시점으로 한 번 관찰해볼까, 하고 미유는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다.


"그럼 말야, 결국 라비의 이상형은 태양이라는 건가?"

"네?"

"라비가 말했잖아. 이상형의 반대를 말해주겠다고. 그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면, 이상형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란 말이잖아."

달이는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조금 비약이 들어가긴 했지만 말이 안 되진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미유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반응했다.


"오오! 그럼 역시 라비는 태양이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거야?"

라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야 물론 달이도 모른다. 하지만 달이는 말하고 싶었기에 입을 열었다.


"제가 이렇게 오빠의 깊은 부분까지 잘 알고 있는 건 언제나 옆에 있는 동생이라서일 거에요. 저희 둘은 다른 남매들이랑 비교하면 사이가 좋은 편이란 것도 있고요."

"응. 그런데?"

"그치만 라비 언니는 대단해요. 오빠랑 그렇게까지 오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이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저와 비슷할 정도로 오빠를 꿰뚫어 보고 있어요."

달이가 말하는 거니 그냥 단순한 기분탓은 아닌 거겠지. 라비는 어딘가 비범한 구석이 있는 아이라고 미유도 언제나 생각해오긴 했지만, 어쩌면 조금 더 대단한 걸지도 모른다.


"아마 라비 언니가 우리 오빠를 좋아하는 건 맞을 거에요. 그치만 아마 그건 미유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랑은 조금 다를 걸요."

"그럼...... 뭔데?"

달이는 잠깐 단어를 골랐다. 하지만 역시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가장 처음에 떠오른,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선택하기로 했다.


"자기가 완전히 목줄을 쥐고 있는 애완견을 귀여워하는 마음, 이랑 비슷한 거 아닐까요?"

"......하기야."

그 라비니까 말이야. 미유와 달이는 동시에 웃었다.


작가의말

전반부가 끝난 거 같은 느낌이니

일주일 정도 준비+휴식 기간을 가진 뒤

후반부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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