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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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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2.18 12:17
최근연재일 :
2020.04.14 12:41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2,696
추천수 :
7
글자수 :
127,591

작성
20.02.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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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함정

DUMMY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

특별히 큰 죄를 짓지 않고 나름 성실하고 나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었다.

적어도 세상에 해를 끼치며 살아온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도덕적 이거나 윤리적 이어서라는 뜻은 또 아니다.

평범하게,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집안이 부자도 아니었지만, 등록금은 그럭저럭 대 줄 정도였으며,

수도권 중위대학의 그저 그런 학과를 그저 그런 성적으로 졸업하여 대기업도 아닌 소기업에 그럭저럭 취업하여 박봉에 힘들지만, 그럭저럭 생활을 해왔다.

그럭저럭 나와 같은 비슷한 인생을 걸어온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고,

빚이 대부분 이긴 하지만 변두리 빌라를 분양받아 겉으로 보기에는 넉넉하지 못해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소시민.

취미나 여가 같은 건 즐길 시간도 돈도 없지만, 이따금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놀러 가고 휴가철에는 가까운 서해안 해수욕장 이나마 오가는 그런.

어찌 보면 회사가 위치한 디지털단지 일대 수만 명의 직장인 중 한 사람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인생을 살아온 그런 사람이 나다.

남들이 그렇듯 으레 다녀올 군대 입영 전날 술 취한 친구들과 단체로 총각 딱지를 떼었다거나,

젊은 시절 친구들과 더불어 음주·가무를 즐겼다곤 하나 그마저도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었고,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급여에 인생을 살아가는 보편적이고 재미없는 그런 삶.

그게 나였다.

이따금 회사에서 포스트잇을 가방에 넣어 오기도 하고,

사내용 볼펜을 나도 모르게 포켓에 넣고 나오기는 해도 의도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려 한 적도 없다.

도덕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뭔가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든 꼬투리를 잡힐 법한 그 무엇도 조심스러웠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뿐 아니라 대부분 내 세대의 동료들도 그러했다.

영악하지 않고, 머리가 아주 민활하지도 못하며,

남들처럼 영어 회화 학원에도 다녀 보았지만, 한계를 느끼고 하다 그만두는,

없는 돈에 운동기구를 사서 맹목적인 건강 가꾸기도 하다가 결국 쓰레기로 버리고 마는 그런.

보편적이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오늘 나는 누명을 쓰고 그대로 집에 들어갈 용기도 없고,

억울함을 풀어낼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억울함과 두려움과 분노들이 똘똘 뭉쳐진 상태에서 생전 처음으로 나 스스로에 대해 과감한 결심을 했고,

그 결과로 비루하게 살아온 사십여 년을 통째로 고층건물 옥상에서 던져 버렸다.

어쩌면 그저 그런대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억울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재취업이든 뭐든 하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로부터의 차가운 시선이 아예 무시하는 시선으로 바뀌고,

아내도 어느 고깃집 서빙을 나가야 할지도 몰랐고,

아이들의 알량한 과외도 끊어야 할지 모르지만, 다시 뭔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당하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자괴감은 충분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르긴 몰라도 더더욱 커질 자괴감이 있었다.

별로 나아질 것도 없어 보이는 비루한 삶을 비겁하게 이끌어 나갈 용기도 부족했다.

그래서 몸을 내던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성적 논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억울하고, 분하고, 모두가 등을 돌린 데 대한 증오 같은 것이 나를 떠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게다가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뭐가 어찌 된 걸까.

골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젠 어느 정도 나서서 걸어가도 취객 정도로 보일 것 같았다.

회사로부터 먼 거리가 아니었고,

이미 휴대전화의 행방은 불명하겠지만 한번은 가봐야 했다.

아직 할부금이 많이 남은 전화였으니 어떻게든 보상이든 재교환이든 될 것이었다.

바람이 스산하고 인적은 점점 드물어지는데 아무도 기웃대지도 않는 도시 한복판의 골목 언저리에서 더 시간을 기다리기가 싫었다.

어둠이 점점 거리를 뒤덮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막다른 골목을 서둘러 뛰쳐나왔다. 어쩐지 그렇게라도 서둘러야 그나마 부서진 휴대전화라도 주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꽝!’

순간 눈이 부신 빛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매우 큰 소리를 내며 뭔가가 내 몸뚱이를 덮쳤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두운 밤하늘과 거리의 불 밝힌 간판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보았다.

잠시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음과 동시에 나는 차도 위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뭔가 시커먼 덩어리가 두어 번 내 가슴과 다리를 무겁게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게 자동차 바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서슬에 나는 아스팔트 차도를 데굴데굴 굴렀다.

어디선가 우지직하는 소리.

그리곤 급제동하는 소리.

묘하게도 아무런 통증은 없었다.

분명 차바퀴가 가슴과 갈비뼈를 누르며 타고 넘어갔는데 무겁다거나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어쩌면 이미 몸의 감각이나 신경이 마비되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러기에는 다른 감각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진 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차량이 내 몸뚱어리를 밟고 스쳐 지날 때 차량의 배기관으로부터 뿜어나온 매연의 냄새.

타이어의 우둘투둘한 질감.

심지어 땅바닥에 깔린 잔돌들의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모든 오감이 멀쩡하지만,

그것들로 인한 통증이나 역겨움 같은 게 없는 상태라고 할까.

분명 추워야 마땅할 상태인데도 춥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루라는 시간에 해고와 투신자살, 자동차 사고를 동시에 겪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지 않을까.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투신자살에서 모든 것이 끝이 나야 했을 거다.

하지만 그 과감한 시도에도 나는 기적처럼 멀쩡하게 살아났다.

그리고 원한 게 아니지만, 다시금 어처구니없이 차 사고를 당했다.

그것도 보통의 차 사고처럼 튕겨나 끝난 게 아니라,

퉁겨진 후 다시 2차로 차에 깔리는 정말 운 나쁜 상황에 해당했다.

이 정도면 이미 죽었어도 한참 죽어야 하지 않았을까.

대체 왜 나는 죽지 않을까.

살아오면서 다양한 지식을 가져보진 못했지만 나 같은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굳이 비슷한 경우를 따져본다면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했던 영화 중에.

그 어떤 사고에서도, 이를테면 항공기 추락사고에서도 혼자 살아남는 주인공을 다룬 영화가 희미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그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살아남는 것은 선천적인 몸뚱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아슬아슬하게 운 좋게 치명적인 상태를 피해 가는 운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내 상태처럼 맨 땅 위에 떨어지고 차에 치이고 그런 게 아니었었다.


그동안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삶을 돌아보았다.

선천적으로 체구가 좋지도, 운동신경이 민활하지도 않아서 특별히 운동을 잘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체육 시간에 편을 가르게 되면 나는 항상 다들 꺼리는 사람에 속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무엇에서도 크게 아픔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예방접종을 위해 어린애들이 꺼리는 주사를 맞을 때도 아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양호선생이 참을성이 참 좋다 하고 칭찬할 정도였으니까.

그 이후로도 크게 아파본 적도 다쳐본 적도 없었다.

연필을 깎다 칼에 피가 흐를 정도로 베여본 일도 없고,

이따금 서투른 망치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때려도 아파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들이 유난히 과장해서 아픔을 호소한다거나,

혹은 내가 통증을 잘 못 느끼는 체질인가 정도로 생각했을 뿐.

그렇다곤 해도, 이런 식으로 당연히 즉사해야 마땅할 상황에서 왜 난 멀쩡한 것일까.

훗날 나는 그날에 대해 생각을 했었다.아마도 그날이 바로 나도 모르게 어렴풋하게 나에 대한 각성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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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Unbreakable 20.02.29 100 1 9쪽
9 재수 없는 놈 20.02.27 113 0 9쪽
8 슈퍼맨이 되었다 20.02.26 113 0 9쪽
7 부활 20.02.25 115 0 8쪽
6 부활 20.02.24 121 0 8쪽
» 함정 20.02.21 127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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