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23. 우리가 지나쳤던 가치들의 의미.
***
자신이 어느 틈에 여기까지 왔는지 알 길이 없다.
눈을 뜨자 흐릿해진 시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아직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포션의 싸늘한 향기와 따듯한 체온뿐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악을 쓰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말로 황제를 설득했는지, 또 그게 성공적이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았다.
‘결국 실패였나?’
그는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며 쓰게 웃었다. 아무리 흥분을 했었더라도 결코 이성을 잃어서는 안됐었다. 마지막 순간에 기억도 나지 않을 말을 지껄였는데, 그게 제대로 먹혔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생각 없이 말을 뱉은 적이 없었다.
항상 계산한대로 움직였고, 모든 도박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성공했고 자신의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됐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전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때의 그는 사기꾼도 아니었고, 도박사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외교관도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감정을 제어 못하는 맹수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이었을지 상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자 파티마에게 미안한 감정이 샘솟았다.
사실 자신은 이걸로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체면이 깎이고 말 것, 그 뿐이었다. 아직 자신의 임무는 남아있었고, 그걸 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파티마는?
어설프게 설치고 난 자신 때문에 어쩌면 그녀의 입지가 흔들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황제와 쉴레이만의 마음이 완전히 떠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일이다.
심지어 그 둘이 파티마를 지지한다고 해도 이쪽이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완전히 버린 패 취급을 받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로비안은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흐릿해진 눈을 완전히 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는 손에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방금 깬 사람도 다시 재울 수 있을 것 같은 따듯한 온기가.
한 방울, 두 방울.
자신의 손에 깨끗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익숙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는 손이 얼굴에 닿았다. 몇 번을 흔들리던 손이 힘없이 다시 굴러 떨어진다. 힘없는 웃음에 가슴이 아리다.
“왜 그런 짓을 했어요.”
“.......”
“누군가를 희생해서 전진하는건 의미가 없어요.”
체스.
아직도 파티마는 로비안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기사에 비유했고, 파티마를 폰에 비유했던 것을.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 그녀를 전진하게 만들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계속 그런 생각에 로비안을 간호하면서도 힘들었다.
누군가를 잃는 건 이제 더 이상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만약 로비안까지 자신을 떠난다면.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이미 로비안은 자신에게 너무 의미가 많은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녀의 시선이 창백해진 로비안의 손목에 머물렀다. 피가 묻은 팔찌가 힘없이 걸려있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까?
파티마는 그렇게 생각하다 로비안의 손을 꽉 쥐었다.
이젠 도망치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로비안이 목숨까지 걸며 해놓은 것을 내 팽개치고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보는 로비안은 흐릿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신의 얼굴이라도 비출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마르시온경은 최선을 다했어요.”
파티마의 말에 속이 쓰렸다. 그는 입을 열었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감히 그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말들을.
“처음부터 전 솔직하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했듯, 스스로를 굉장한 사람으로 포장했고 또 거짓말을 했죠. 아니, 어쩌면 그것도 제대로 못했군요. 차라리 끝까지 뻔뻔해 졌어야 했는데.”
로비안이 이를 꽉 물었다.
왜 자신은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불편했다. 그녀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또 마음에도 없는 말로 상대를 속이는 것이.
처음부터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은 끝까지 스스로를 포장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은 불편해졌고, 결국 스스로를 망쳤다.
지금은 스스로에게 또 한사람에게 만큼은 진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파티마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는 생각했다. 더 이상 이 사람에게만큼은 거짓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가면이 조금씩 깨지는 소리가.
“저는......”
신음하듯 짧은 말이 로비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동안 정말 많은 말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대부분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였고, 항상 성공했었죠. 그래서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이 할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처음으로 그가 말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이 사막투성이인 나라에 와서부터 절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많아졌어요. 그때부터 겁이 나더군요. 이러다 진짜 내가 까발려지는 게 아닐까하고.”
“......”
“여태껏 진짜를 보인다는 게 두려웠어요. 혹여 내가 거짓으로 이룬 모든 것이 무너질까봐. 또 내가 사기꾼이라는 걸 들키고 말까봐.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말하고 싶습니다.”
흐릿해진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보고 싶었던 얼굴이 다시 한 번 그려졌다. 그래, 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다. 황제 앞에서 무식하게 덤벼들었던 것도,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했던 것도 모두 여기서부터 시작됐던 거였다.
나는.
로비안 데 마르시온은.
이 사람만을 위한 기사가 되고 싶었던 거다.
그는 자신의 손을 힘껏 당겼다. 얇은 파티마의 손을 따라 그녀의 몸이 딸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있는 힘껏, 파티마를 안았다.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까지.
“좋아합니다. 공주님, 아니 파티마.”
작게 떨리던 두 사람의 몸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로비안의 고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을 하려던 입술을 다른 입술이 막았다. 마주잡은 두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확신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거라고. 그리고 그건, 반대쪽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작가의말
사실 전 로맨스에 대해 문외한입니다. 읽어본적도 없고 써 본적도 없어요. 그래서 솔직히 써놓고도 이게 잘 쓴건지, 아니면 못쓴건지 확실을 못하겠군요. 다만 가장 로비안스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합니다. 처음에 등장한 로비안은 장난스럽고 귀찮은걸 질색하는 오렌지족 같은 녀석이었지만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질 않는군요.) 카를과 로히다의 귀족을 만나면서 정치인이 되었고,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쏟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걸 어느정도 믿는 편입니다. ㅇㅂㅇ. 그렇기때문에 로비안이 이렇게 변하는게 어찌보면 필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독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글을 쓰고나서 이런 사족을 붙여 설명하는건 좀 없어보이기도 해서 (사실 글로 다 설명하지 못하면 무능하다는 말하고 다를게 없지요.) 이런류의 코멘은 잘 안하는 편인데 이번편만큼은 특별하게 첨언합니다. ㅇㅂㅇ. 그만큼 의미있는 화라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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