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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불을 지피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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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P
작품등록일 :
2023.05.10 12:56
최근연재일 :
2024.05.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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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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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핏줄(3)

DUMMY


#1


‘기사 아니엘 하스리터. 시르발트 도련님께 이 검을 바치겠습니다.’


그녀가 처음 자신의 기사가 된 날을 시르발트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나이도 자신보다 어려 보이던 소녀. 제대로 검을 쥐고 휘두를 수는 있는지조차 의구심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자신만의 기사가 생긴 시르발트는 개의치 않았다.


물론, 그녀는 굴란 백작이 시르발트를 아끼기에 내어준 기사가 아니었다. 그저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른 굴란 백작가의 남자가 휘하에 기사 하나 없이 다니는 걸 백작이 영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른바 형식적으로 주어진 가문의 기사였다.


시르발트도 처음엔 기분이 좋았지만, 그 ‘형식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곧 깨닫게 되었다. 아니엘은 시르발트의 곁에 붙어있기보단 여전히 굴란 백작의 명을 받아 자주 어디론가 임무를 떠나곤 했었다. 시르발트는 그녀가 자신의 기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거기에 항상 멍하고 무뚝뚝했던 아니엘은 여러모로 정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다가가기조차 힘든 분위기를 풍겼으니 여러 여인들을 품에 안고 놀던 게 일상이던 시르발트조차도 아니엘과는 제대로 대화할 자신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한 맹세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굴란 백작의 명령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엘은 시르발트가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왔으며 항상 그의 검이자 방패, 그리고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술에 취해 아무 곳에서나 나뒹굴던 시르발트를 챙기던 것도,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시르발트의 곁에 딱 붙어 있던 것도, 이따금 시비가 붙어 시르발트를 모욕하던 상대를 흠씬 두들겨 패준 것도 늘 아니엘이었다.


그렇게 어느 샌가부터 시르발트는 그녀를 늘 곁에 두게 되었다. 아니, 반대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시릅라트가 따라가는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냉담한 가주와 아버지의 시선을 받으며 혼자서 자라왔던 시르발트에게 유일하게 자신만을 위해 검을 뽑아드는 아니엘은 너무나 큰 존재가 되어있었다.


“아니엘, 아니엘···”


그랬던 자신의 기사는 이번에도 시르발트를 위해 스스로 불에 뛰어들었다.


주저앉은 시르발트는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 불꽃은 죽은 침식자들에게서 흘러나온 불씨가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람의 죽음이 피 웅덩이를 만들듯, 침식자들의 죽음은 불을 만들어냈다.


수십, 어쩌면 수백에 이르는 침식자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새까맣게 타고 말라 비틀어진 나무뿌리처럼 보이는 정령의 일부도 마구 뒤엉켜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머리 사냥꾼들과 아니엘이 있었다.


불씨병 감염에 가장 큰 요인은 그 불씨에 닿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니엘의 모습은 불씨를 뒤집어쓴 채였다. 침식자를 베었을 때 피를 대신해 튄 불씨들이 아니엘에게 들러붙고 있었다.


그녀는 신체의 감각이 고장 나 있었기에 자신의 몸이 뜨겁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덕에 침식자들의 불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불씨병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아니엘. 안 돼.”


중얼거리며 손을 뻗은 시르발트였지만, 그녀는 점점 멀어졌다. 고통을 느낄 순 없어도 그녀는 자신이 이미 불씨병에 걸렸고 그런 몸으로 시르발트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적진을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적어도 최대한 많은 적을 베어 넘기고, 가능하다면 원흉이 된 정령의 목을 베기 위해서. 만일 정령에게 닿진 못하더라도 자신이 침식자가 되기 전에 죽기 위해서였다. 그럼 적어도 침식자가 된 자신이 시르발트에게 검을 겨누는 일은 없을 테니까.


곧, 침식자들의 피워낸 불이 시르발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시르발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로 치솟는 불의 장벽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이윽고 모든 것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침식자들의 불꽃과, 한때 정령이라 불리던 괴물의 날개가 털어낸 불씨가 난폭하게 주변을 삼켰다.


“으아···!”


끔찍한 열기에 시르발트는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몰아치는 열풍은 아까 전 성문을 열었을 때와 같았다. 불에 직접 닿지 않더라도 근처의 열기만으로도 화상을 입고, 불이 옮겨붙을 정도였다. 곧, 큰 폭발이 일어났다.


순전한 생존 본능에 시르발트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집어들었다. 폭염과 열풍이 방패째로 시르발트의 몸을 날려버렸다. 한참을 나뒹굴던 시르발트는 그을린 잔해에 부딪히며 겨우 멈췄다. 충격에 기침이 밀려 나왔다.


세상이 붉었다. 피가 눈앞을 가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시르발트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미지근한 피가 화상을 입은 손등에 닿으며 따끔거렸다.


‘너무 뜨거워!’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눈도 따가웠다. 그 와중에도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호흡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시르발트는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수통을 꺼내 머리 위에 들이부었다.


수통의 물은 뜨끈했지만 그래도 열을 식히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뿌린 물이 순식간에 수증기가 되어 시르발트를 감쌌다.


그렇게 고개를 든 시르발트의 앞에 펼쳐진 것은 휑하게 변해버린 도시의 중심부였다.


시르발트를 날려버린 폭발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일대의 그을린 건물들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땅을 움푹 패게 만들었다. 만약 풍압에 날아가지 않고 버텼다면 그대로 폭발에 직접 휘말려 지금쯤 새까만 시체가 되었을 터였다.


“아아······”


죽음의 공포가 시르발트를 떨게 했다. 하지만 시르발트는 방패를 세운 채 폭발로 쓸려나간 곳으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지만, 공포보다도 먼저 아니엘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니엘! 아니엘! 어디 갔어!?”


시르발트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휑한 도시에서 넓게 울려 퍼졌다.


“베를리히 경! 베를리히 경! 누구든 좋으니까 대답해!”


돌아오는 메아리와 타닥거리며 타는 불씨의 소음만이 이곳의 전부였다. 이따금 지면이 아닌 무언가를 밟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르발트는 차마 자신이 밟고 지나가던 것들을 내려다볼 용기가 없었다.


{ 나의 불씨. }


섬뜩한 목소리에 시르발트는 멈춰 섰다. 시르발트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은 병사도, 기사도 아니었다.


새까맣게 탄 고목이 자라나는 것처럼 정령의 몸집이 거대해졌다. 불을 머금은 날개가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요정의 가루가 아닌 불씨가 떨어졌다.


“···!”


숯덩이처럼 보이는 얼굴에선 연신 ‘불씨’라는 단어를 뱉고 있었다. 괴물이든, 정령이든, 뭐든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리고 저 괴물이 이 도시를 날려버린 원흉이란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아니엘을 돌려줘! 이 망할 괴물아!”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시르발트는 자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나친 공포에 정신이 나가버린 걸까. 아니면 아니엘을 향한 집념일까. 어쩌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걸지도 몰랐다.


{ 나의 불씨. }


“아니엘은 네 불씨가 아니야! 내 기사란 말이야! 아니엘을 돌려내!”


{ 내 불씨를 돌려줘. }


시르발트는 정령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겨누었다. 방패만큼이나 무겁게만 느껴지는 검이었다. 얼마 들고 있지도 않았는데 팔이 아팠다.


‘넌 항상 이런 검을 들고 있었던 거야?’


시르발트는 마음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드는 자들은 많이 봤지만, 그 검의 무게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멋으로, 폼내기 위해 검을 쥔 적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진심을 담아 검을 겨눈 적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 무게 또한 장난스럽게 휘두르던 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검에는 무게가 있다.


검 본연의 무게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것. 육체가 검 자체의 무게를 느낀다면, 마음은 검에 담긴 뜻의 무게를 느낀다.


그저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물건. 그리고 누군가를 지킬 수도 있는 물건. 그런 단순한 살육의 개념이 아니더라도 검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기사들에게 있어 검의 무게란 훨씬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시르발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검의 진정한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팔이 빠질 것처럼 무겁고, 두렵기까지 한 무게였다.


{ 내 불씨를 돌려줘. }


“······네 불씨가 뭔데?”


{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 }


일그러진 정령의 말에 시르발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령과 사랑은 어느 시대나 떨어지지 않는 단어였다. 정령들은 순수했고, 그 순수함에서 피어난 애정을 다른 것들에게 쏟아붓는 존재였다.


정령이 물을 사랑한다면, 그 지역의 물은 늘 깨끗하고 생명으로 넘쳐난다. 정령이 땅을 사랑한다면, 그 땅은 기름진 토지가 되어 늘 풍작을 맞이한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정령의 축복을 받는다.


기에르는 그 셋을 전부 가진 곳이었다. 이곳의 정령은 물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했으며, 기에르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리하여 기에르는 드라그 왕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 될 수 있던 것이다.


“네가 기에르의 정령이지?”


기에르에는 그런 정령이 산다. 노인들이 떠드는 미신을 젊은이들은 믿지 않았고, 시르발트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명백히 인간이 아니었다.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서 기적을 행하는 신화시대의 존재, 베를리히의 말대로 정령이 분명했다.


기에르를 사랑했던 정령.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정령.


{ 돌려줘. 내 불씨. 잃어버렸어. }


침식자들은 괴물이 아니다.


그들은 한때 인간이었으나, 불씨에 감염되어 죽지 못한 채 불에 타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정령이라고 다를까? 저 정령 또한 저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불씨병이 퍼지기 시작한 기에르가 불타자 모습을 드러냈고, 똑같이 불씨병에 감염되었다.


뚝뚝 정령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굵은 불씨는 눈물이었다. 지독한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령은 하염없이 손을 뻗어 자신이 사랑했던 기에르를 붙잡으려 했고, 날개를 흔들어 기에르의 불을 끄고자 했다.


비록 불씨병에 감염된 정령의 모든 행위가 기에르를 더욱 그을리게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


공기는 끔찍하게 뜨겁고 시르발트의 머릿속은 차가워지고 있었다. 저릿거리는 팔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겁쟁이야.”


시르발트는 정령을 향해 겨누고 있던 검을 내렸다. 아니, 팔을 떨어뜨렸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축 늘어진 검 끝이 메마른 바닥에 닿았다.


“아니엘이랑 모두를 되찾고 싶은데, 내겐 널 죽일 자신도 없어.”


{ 불씨를··· 내 불씨를 돌려줘······. }


고개를 떨군 시르발트는 이젠 자신이 밟고 선 땅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엔 까맣게 타버린 채, 애처로운 손을 뻗고 비명을 지르던 모습 그대로 무수한 시체가 가득했다.


이 도시의 원래 주민들, 마지막까지 기에르를 지키려던 병사들, 그리고 기에르를 되찾기 위해 함께 와주었던 기에르 탈환군까지.


어쩌면 머리 사냥꾼들과 아니엘도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주위를 살피던 시르발트는 비틀비틀 걸어가 지면에 박혀 있던 검을 쥐었다.


‘시르발트 도련님께 이 검을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맹세하며 내보였던 아니엘의 검이었다. 검을 쥔 손이 아팠다. 검이 뜨거운 건지, 화상을 입은 손바닥이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들어올리자 느껴진 검의 무게는 훨씬 무거웠다. 그 무게감과 동시에 시르발트는 눈물로 앞이 흐려졌다.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너도, 나도 다 잃어버린 거구나.”


검을 털어내자 잔뜩 묻어 있던 불씨가 튀어 시르발트의 몸에 달라붙었다. 갑옷과 망토, 머리칼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불씨의 열기가 느껴졌다.


“나도 너처럼 불씨를 쫓겠지?”


{ ······. }


정령은 침묵했고, 신기하게도 시르발트의 공포는 사라졌다. 이미 모든 걸 놓아버렸기 때문일까. 시르발트는 아니엘의 검을 쥔 채 깊은숨을 내쉬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불의 향기가 가득했다. 마냥 뜨겁게 느껴지던 공기도 어째선지 포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르발트는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어쩌면 이게 불씨병의 증상이겠지.”


시르발트는 침식자가 된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아마 저 정령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아니엘을 불씨로 여겨 쫓을 것이다. 참으로 비극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방탕하게 살아온 자신을 벌하는 것이라면 이런 끝도 그럴 수 있는 건가? 굴란 백작은 속이 시원하다고 웃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여동생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르발트는 자신의 몸에 붙었던 불씨가 타닥거리며 타고만 있을 뿐, 전혀 뜨겁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내가 진짜 미친 건가? 아니엘처럼 감각이 고장 난 거라면······”


{ 아아! }


그때, 침묵을 지키던 정령이 소리를 냈다. 시르발트는 정령을 올려다보았다. 마주 본 정령은 기묘한 몸짓을 하며 마치 기도라도 하듯 두 손을 모았다.


{ 용이시여···! }


“용?”


{ 불씨를. 제 불씨를 돌려주세요. }


“난 그럴 능력이 없어.”


{ 제발! 용이시여! }


시르발트는 정령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정령을 향해 바로 서자 시르발트의 몸에 붙어 있던 불씨가 후두두 떨어져 나갔다.


“이게 뭐야?”


지금껏 본 불씨병의 불씨는 마치 꽃가루나 민들레 씨처럼 사람에게 딱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놈들이었다. 그렇게 불씨가 갑옷과 몸을 파고들어 사람의 몸에 불씨병을 옮겼다. 고작 조금 움직이는 정도로 떨어져 나갈 것들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을 크게 움직인 시르발트는 불씨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다 못해 주변 땅에 있던 불씨마저 전부 시르발트로부터 멀어지는 걸 보았다.


“대체 무슨······?”


손을 움직이는 대로 불씨들이 날렸고, 시르발트의 숨결에 또 불씨가 날렸다. 다만, 그 어떤 불씨도 시르발트에게 달라붙지 못했다.


불씨와 불꽃. 그 모든 게 오히려 시르발트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 문득 시르발트는 아니엘의 검에 비친 자신의 눈을 보게 되었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내 눈이 왜 이래···?”


시르발트에겐 용처럼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2


“핏줄을 깨우셨군요. 굴란 백작님.”


불청객인가 귀한 손님인가. 아마 둘 중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굴란 백작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상대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까지 알 수 있는 건가?”

“민감하거든요.”


어두운 금발의 젊은 청년은 금속으로 된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딘가의 제복처럼 보이는 검은 차림새와 그런 옷 위로 걸린 금속 장식품들은 그를 꽤 고귀한 핏줄처럼 보이게 했지만 굴란 백작이 아는 한, 이 청년은 그런 핏줄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겉으로 고귀해 보일지언정, 핏줄에 담긴 탁한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제게 말씀하셨다면 진작 도와드렸을 텐데.”

“우리 가문의 일에 나이트로드의 손은 빌리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을 텐데.”

“백작님께선 어지간히도 제 가문이 싫으신 모양입니다. 지금 전 나이트로드가 아니라 키르하라는 백작님의 친구로서 이곳에 앉아있는 건데 말이죠.”

“나이트로드의 이름이 없었다면 내 앞에 앉을 자격도 없었을 거다. 애송아.”


키르하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뿐인 눈동자가 묘한 빛을 흘렸다. 보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것인지, 이따금 푸른색이 되기도 하고, 짙은 보라색이 되기도 했다가, 금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솔직히 놀랐습니다. 정말 핏줄에 잠든 용을 깨우실 줄이야. 아드님인가요? 아니면···”

“못난 손자놈이지. 기에르로 보내놨다.”

“정령의 사랑을 받는 땅······ 백작께선 정말 잔인하신 분입니다. 같은 피가 섞인 손주를 사지로 몰아넣다니. 핏줄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분명 죽었을 겁니다.”

“용이든, 새든, 스스로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니 그놈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용의 알을 깨우기 위해선 불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용의 알이라 불리는 온갖 희귀한 돌덩이를 불구덩이에 놓고 기대하던 바보들을 생각하면 우습지만, 지금은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굴란의 핏줄은 용의 핏줄이다.’ 제가 알려 드린 건 이 정도가 전부였는데, 여기까지 오시다니. 사실 백작님께서 절 미치광이로 취급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는 소리였다면 광인의 헛소리라 여겼겠지.”

“굴란의 핏줄이 용의 혈통이라는 걸 이전부터 알고 계셨단 겁니까?”

“흠.”


백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짐을 진 그의 시선이 벽에 걸린 문양을 향했다. 드라그 왕가에서 하사받은 용의 문양이었다.


“저 문양은 여왕룡으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돌려받은 것이지.”

“돌려받다니요?”

“브라드바니아 왕가의 즉위 이후 드라그의 가문들은 모두 왕가의 규칙에 따라야만 했다. 용을 가문의 상징으로 삼을 수도 없게 되었지. 그래서 빼앗겼고, 내가 다시 되찾아온 문양이다.”


키르하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본래부터 굴란의 문양이 용이었다는 건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가문이다. 그리고 가문을 묶는 것은 이름과 핏줄이며, 쓰러져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선 가장 먼저 내 가문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다는 말씀이군요.”

“마법은 사라졌고 용은 멸종했다. 그런 세상에서 용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그다지 힘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이곳은 드라그 왕국이지. 자신이 용의 혈통이라 주장하는 브라드바니아 왕가가 지배하는 땅에서 또 다른 용의 혈통을 내세웠다간 곱게 끝나진 않을 게 뻔하고.”


키르하도 동의했다. 특히 모든 가문으로부터 악착같이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여왕룡의 행보를 생각하면, 당장 여왕의 기사단이 쳐들어와 목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드라그 왕가는 없고,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굴란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불씨병과 침식자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럼··· 손주 분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키르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벽에 걸린 문양을 보던 백작의 시선이 키르하를 향했다. 용의 눈은 아니지만, 용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서운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무슨 뜻이지?”

“진정한 용으로서 드라그의 왕좌에 오르는 건 백작님의 몫입니다. 하지만 백작님보다도 먼저 못난 손자가 핏줄을 깨워버렸군요. 그가 용이 되어 돌아오면 백작님이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위험해져? 내가?”


굴란 백작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더니 코웃음 쳤다. 진심으로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핏줄을 깨워도 못난 놈은 못난 놈이다. 오히려 제 핏줄에 대해 깨닫고 되려 겁을 집어먹는 게 시르발트라는 놈이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위험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싹을 도려내는 게···”

“나를 네놈의 혀로 꼬드긴 다른 멍청이들과 똑같이 보았다간 이번엔 그 혀를 잃을 거다. 썩을 애송아.”


늙은 용의 살벌한 경고에 키르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조용히 방 한구석에 서 있던 흑기사 엘하운의 손은 이미 검자루에 올라가 있었다.


“그저 백작님이 걱정되었을 뿐입니다만, 제 실수였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키르하는 찻잔을 내려놓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키르하를 내려다보던 굴란 백작은 다시 벽에 걸린 문양을 향해 돌아섰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왜 날 찾아왔나?”

“그냥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백작님의 계획이 잘 풀릴수록 저도 득 보는 게 많으니까요. 그런데 상황이 썩 좋지는 않군요. 백작님의 기사가 왕녀의 머리를 베어오지 못했다죠?”


굴란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키르하는 차가운 얼굴로 테이블의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찻잔 속에는 피처럼 붉은빛을 가진 차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역사는 피로 쓰인다. 모든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죠. 시답잖은 감정으로 후환을 남겨두는 건 가장 멍청한 짓입니다. 백작님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브라드바니아 왕녀는 죽었다.”


백작은 키르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어째서 확신하십니까?”

“중앙 대륙 북부의 전쟁터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나타났다는 목격 보고가 있었다. 그건 왕녀가 지니고 다니던 살리우스 테인의 불이 틀림없겠지. 마검이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했다는 건 주인을 잃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왕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죠.”

“과거 재해의 기사가 뿜어내던 불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재해의 기사. 봉인을 깨고 10여 년 전 다시 나타나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재해급 아우터의 힘은 지금도 생생하게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괴물이 휘두르던 검이었으니 백작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키르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걸친 채 말했다.


“그래서 왕녀가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이상하네요.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아직 베르손 기사단이 중앙 대륙에서 왕녀를 쫓고 있다던데요. 심지어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라면 마구잡이로 잡아 죽인다는 소문까지 있었습니다.”

“······.”

“그들은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백작님. 전부 백작님의 지시인 거겠죠?”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정 곤란한 상황이라면 제게 맡겨주시죠. 이러다 왕녀가 드라그로 돌아오기라도 하는 날엔···”

“밤이 늦었군. 키르하 공자.”


키르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델보그이며, 굴란 백작의 저택이다. 드라그 전체를 놓고 보자면 몰라도 적어도 지금 이곳의 주인이자 왕은 굴란 백작이었다.


그로부터 축객령이 떨어졌으니, 외부인인 키르하는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 실례했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백작님.”

“델보그엔 얼마나 머물 계획이지?”

“곧바로 메리드로 올라갑니다. 최근 대공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죠.”


굴란 백작이 끄덕였다. 키르하는 백작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하나만 말해두지.”


방을 나서려는 키르하는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물씬 들이치는 창가를 등진 채, 굴란 백작이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난 대의를 위해 네놈과 함께하고 있을 뿐, 꼭두각시가 아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백작님을 그리 여긴 적은 단연코 없습니다.”

“입 발린 소리는 그만둬라. 어쨌든 기왕이니 말해두마. 대공을 건드리진 마라.”

“절 걱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놈의 혀를 걱정하는 거지.”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동맹은 때론 가장 큰 허점이 되곤 한다. 같은 방법으로 수도 없이 자신의 적을 무너뜨려 왔던 굴란 백작이기에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일 대공에게 붙잡히면 그 혀부터 자르도록 해라.”

“명심하죠.”


키르하는 웃는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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