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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불을 지피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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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P
작품등록일 :
2023.05.1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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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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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 신화전 - 밤의 춤(2)

DUMMY


#1


‘이 냄새···’


정신없이 세라프의 고삐를 쥐고 달리던 나인은 코를 찌르는 악취에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뒤섞여 거대한 그림자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양옆으로 뻗은 날개. 길쭉한 몸과 주둥이. 그리고 말라붙은 걸로도 모자라 이젠 얼어붙기 시작한 피로 온몸을 적신 낯선 존재. 용의 눈동자를 가진 나인의 시야엔 어둠 속 그림자의 정체가 또렷하게 보였다.


‘용이다.’


낯선 용이 전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보기는 어려워도 본대륙과 달리 아리아드에선 용이 산다. 어쩌면 야생 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나인이지만, 용의 목을 휘감은 쇠사슬과 비늘에 박힌 말뚝을 발견하곤 고개를 저었다.


저 용은 인간의 손길이 닿은 용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브라톤이었으나, 브라톤의 사람들은 용을 자신의 동반자처럼 생각하는 자들이다. 저렇게 상처투성이인 용을 쇠사슬로 묶고 말뚝을 박아 거칠게 부리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느낌이 안 좋아.’


나인은 말을 달리며 그림자를 넓게 퍼뜨렸다. 밤의 어둠에 스며들어 더욱 넓게, 가지처럼 협곡 전역으로 뻗어 나가는 나인의 그림자가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블라가스와 아퀴토날의 격전.

진동하는 얼음 협곡.

하늘의 낯선 용.


그 속에서 소리를 죽이고 움직이는 밤의 기사들을 찾아낸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움직인다면 바로 이 혼란을 틈타 움직이리라 나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드라그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배우던 경험이 나인에겐 있었다.


혼란은 곧 기회다. 밤의 기사들은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움직인다면 지금이다. 아무리 모든 소리를 죽인 밤의 기사라 할지라도 지진으로 흔들리는 얼음 협곡에서 움직인다면 아주 작은 기척이라도 남길 것이다.


나인의 그림자는 그 작은 기척과 소리를 찾고 있었다.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인은 그 기척을 잡아냈다.


눈이 쌓인 얼음 협곡 위를 질주하는 자들이 있었다. 말을 탄 것도 아닌 두 다리로 흔들리는 협곡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움직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조용하고 은밀했다.


그런 과한 은밀함이야말로 그들이 밤의 기사라는 증거였다. 나인의 얼굴에선 화색이 돌았다.


“세레나! 베르손 기사단을 찾았···!”


달리던 나인은 앞서 가던 세레나의 속도가 줄고 있음을 깨달았다. 똑같이 속도를 줄이던 나인은 그녀와 똑같이 정면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나인. 저 기사는······”

“드라칼···?”


나인과 세레나의 앞을 가로막고 선 기사가 하나. 이 북부와 어울리는 새하얀 갑옷에 짙은 회색 망토를 두른 이가 천천히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드라칼의 강철검 오스모튼.

하얀 벼락을 두른 기사.


‘왜 알아차리지 못했지?’


다시 한 번 하늘을 나는 용을 올려다본 나인이 이를 악물었다. 저 피투성이 용이 뿜어내는 냄새와 기세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밤의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움직이는 건 밤의 기사들뿐만은 아니라는 걸.


“빌베드 형님.”


그러나 이젠 알 수 있었다. 저 용에게 사슬을 걸고 그 위에서 고삐를 쥔 자가 누구인지.


용의 고삐를 쥔 검은 기사.

새까만 갑옷을 입었지만, 투구로 가려지지 않은 얼굴에선 섬뜩한 녹색빛의 눈동자가 아래를 훑고 있었다.


빌베드 벤터와 드라칼이 이곳에 있다.


‘베르손 기사단은 드라칼을 잡으려고 여기 있던 건가?’


베르손 기사단은 백작의 명으로 드라칼을 잡기 위해 중앙 대륙으로 건너왔다. 뭐가 됐든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길 목적은 단 하나일 것이고, 그것은 드라칼이다.


용에 시선을 두던 나인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을 가로막고 선 하얀 기사를 보았다.


저 기사를 보는 건 세 번째였다. 지난 두 번은 어떻게든 떨쳐냈지만, 두 번의 패배에도 무너지지 않고 드라칼의 하얀 벼락은 다시금 그림자의 앞에 섰다.


“카르도 크라테.”


그리고 주저 없이 벼락의 이름을 불러 깨웠다.



***



우르릉!

북부의 하늘이 울었다.


그리고 하얀 벼락을 두른 강철검도 똑같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벼락을 두른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앞서 가는 기사였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먼저 뒤틀린 정의를 깨달은 남자는 이번에도 동포들의 선두에서 한발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딛고 섰다.


“나인 벤터.”


오스모튼의 투구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세레나가 움찔했다. 나인은 그런 그녀보다 앞으로 나와 세라프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날 없는 검을 뽑은 나인의 그림자가 갑옷처럼 몸을 감쌌다.


“세 번이나 치욕을 당할 생각은 없으니, 이번에도 네가 이긴다면 이 목을 가져가라.”


두 번의 패배에도 살아남은 기사는 그리 말했다. 그림자를 두른 소년은 대답 대신 검을 내밀었다.


“하지만 여기선 좀 다를 거다.”


그림자를 두른 것처럼 하얀 벼락을 온몸에 두른 오스모튼이 검을 비틀었다.


천둥의 발걸음이 나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한 호흡조차 되지 않는 시간. 눈을 깜빡이고, 들이켠 숨을 내뱉는 것보다 훨씬 짧은 그 찰나는 천둥이라는 이름의 심판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


나인은 자신의 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충격에 그대로 날아갔다.


“나인!”


눈밭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나인은 가까스로 날 없는 검을 눈 속 깊이 찔러넣어 멈췄다. 팔다리가 저릿거리고 하얀 눈 위로 뚝뚝 붉은 것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는 것조차 어려웠다. 나인이 본 거라곤 그저 하얀 벼락의 번쩍임뿐이었고, 깨닫고 보니 밀려났다는 것이다.


‘밀려···?’


숨을 삼킨 나인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벼락을 두른 오스모튼은 이미 세레나가 탄 말 옆에 있었다.


“세레나!”

“아직은 베지 않는다.”


오스모튼이 검을 털었다. 파직거리며 벼락이 튀었다.


“적어도 네 눈앞에서는.”


콰앙!

들이닥친 강철검이 벼락처럼 나인과 충돌했다. 이번에도 좀 전과 같았다. 오스모튼의 모습은 볼 수도 없었고, 나인은 강렬한 충격에 온몸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림자의 보호가 있음에도 쌓이는 벼락의 충격은 나인의 몸을 점점 마비시켰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검을 나인의 자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어코 짓누르는 백뢰의 검이 나인의 무릎을 무너뜨렸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고 따끔거렸다. 눈을 치켜뜬 나인은 그림자를 폭발시키듯 터뜨렸다.


그러나 새까만 그림자를 찢고 오스모튼의 손아귀가 나인의 멱살을 쥐었다.


“어중간하군.”


투구 속 오스모튼의 눈이 용의 눈동자처럼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말했다.


“용의 싸움법도, 인간의 싸움법도 아니다. 넌 어느 쪽이냐?”

“끄으···!”

“움브라 하퀴테가 없으면 그저 그림자를 흉내 내는 애송이에 불과했나?”


벼락은 한 번 붙잡은 그림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검을 휘둘러도, 그림자로 만든 가시를 뿜어대도 새하얀 벼락을 두른 오스모튼의 갑옷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라. 왕녀.”


그리고 오스모튼의 말에 살리우스 테인을 뽑으려던 세레나가 멈칫했다. 몸을 돌린 오스모튼은 여전히 나인의 멱살을 붙잡아 당긴 채 말했다.


“머리 위에 뭘 두고 있는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


여전히 상공에는 피투성이의 용이 같은 자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용이란 원시의 불꽃을 폭포처럼 토해낼 수 있는 생물이었다. 그녀가 검을 뽑는다면 용의 주둥이는 살리우스 테인에 버금가는 불을 토해낼 터였다.


“살리우스 테인의 주인이라면 용의 불을 견딜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애송이는 버티지 못할 거다.”

“······.”

“고작 이런 것들에게 기대를 걸다니···.”


탄식하는 오스모튼과 함께 다시금 하늘이 천둥으로 번쩍이며 울었다.


이어서 내리친 오스모튼의 검자루가 나인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2


여왕룡의 단두대, 죄인의 머리를 쪼아먹는 까마귀.

그 머리는 늘 그렇듯 가슴이 아리도록 그리워하던 얼굴이다.


“······.”


나인은 이번에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질리도록 꾼 악몽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젠 흘릴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 아마 둘 다라고 나인은 생각했다.


최근엔 습관적으로 주변에 훑는 나인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앞에 있었고 그 너머에선 익숙한 얼굴이 지푸라기를 던져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몽을 꾸던데.”

“······.”

“뭐, 말하기 싫으면 됐다. 그리고 그림자는 쓰지 않는 게 좋아. 위치가 들키거든.”


꿈틀거리는 나인의 그림자를 보지도 않고 모닥불 너머의 빌베드 벤터가 말했다. 흑단빛의 머리칼, 그리고 짙은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천천히 나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누구한테 들킨다는 거야?”

“누구든지. 넌 그림자를 다루는 실력은 제법이지만 마력을 너무 드러내.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마법에 지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네 그림자를 단번에 눈치챌 거다.”

“베르손 기사단에게 들키면 곤란하단 말이겠지?”

“베르손 기사단? 불러봐.”


나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에 빌베드는 태연한 표정으로 부러뜨린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세레나는 어디 있어?”

“왕녀 전하를 그렇게 편하게 부를 정도면 엄청 친해졌나 보구나.”

“어디 있어?”

“네 뒤에.”


고개를 돌린 나인은 동굴 구석에 마련된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발견했다. 무식하게 큰 그 얼음은 사람 크기였는데, 그녀는 그 안에 잠자듯 갇혀있었다.


“살아있으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마라. 그냥 가둬두는 마법이야. 생명에 지장은 없다.”

“···전에는 그냥 죽이려고 했잖아?”

“사정이 생겨서. 당장은 죽이지 않아.”


빌베드는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전에 보았던 무자비한 반역자라기엔 확실히 달랐다.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일 터였다.


과거 벤터 집안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때, 그저 매일 검 단련에 몰두하던 그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물론, 그런 분위기에 나인은 무뎌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피비린내가 나는 남자였고, 페요르 알데베른을 죽인 남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벤터 가문이 몰락한 상황에서 피를 나눈 형제라는 건 이제 와서 나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얼려두는 게 좋았을 텐데. 아니면 묶어두기라도 하던가.”


나인은 그림자를 끌어모으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빌베드에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이 아직 켐헬의 얼음 대협곡이라면 베르손 기사단이 있을 것이다.


“나인. 그건 관두는 게 좋을 거다. 베르손 기사단은 네가 생각하는 놈들이 아니야.”

“이젠 이간질까지 하려고?”

“그런 건 입으로 싸우는 놈들 방식이야. 내가 말하는 건 진심이다. 하우스 벨트를 믿지 마라.”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빌베드였다.


“···날 죽이려 했던 건 형님이었어. 그리고 페요르 경도 형님이 죽였고···!”

“페요르 알데베른은 나약한 남자였지. 그래서 죽었다. 검을 쥔 이상 나약한 놈이 죽는 건 당연한 거다. 그걸 모를 정도로 어리진 않을 텐데. 나인.”

“페요르 경은 벤터 가의 기사였어! 누나의 기사였다고!”

“그리고 도망자였지. 여왕의 폭정에 맞설 생각조차 않고 고개를 돌리던 겁쟁이였다.”


이를 갈며 노려보는 나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빌베드는 무표정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렇게 재회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럼 놓아주지그래!?”

“미안하지만 술래잡기도 여기까지다. 다만 당장 브라드바니아 왕녀의 목을 벨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말했다시피 계획이 바뀌었거든.”

“무슨 계획? 여왕룡 폐하를 시해하고, 그 핏줄을 싹 잘라내려는 게 드라칼의 목표였잖아?”

“목표? 오해를 하고 있구나. 나인.”


뚝. 부러뜨린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빌베드가 말을 이었다.


“우리 목표는 드라그의 왕좌를 진정한 용에게 돌려주려고 하는 거야. 이전의 왕가를 무너뜨린 건 그 과정일 뿐이고. 용의 후손이라는 뻔뻔한 거짓말을 하면서 만인의 위에서 폭정을 일삼는 게 정의라고 볼 순 없지.”

“진정한 용에게 왕좌를 돌려주면 뭐가 바뀌는데? 드라그를 그 꼴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왕좌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왕위 계승자의 정당성. 그리고 드라그 왕국의 미래가 바뀌겠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애국심이 그렇게 깊진 않지만.”


부러뜨린 나뭇가지가 나인의 어깨너머를 향했다. 여전히 커다란 얼음 속에 잠들어 있는 세레나를 가리킨 빌베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는 명예로 죽고 사는 기사들이다. 그저 이 명예를 바칠 진정한 주인을 찾아 헤매는 거지. 일단 저 계집애의 혈통은 아니었다.”

“···정신 나간 소리야.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드라그에 병을 퍼뜨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거잖아.”

“피가 흐르지 않는 혁명은 없다. 그건 모든 역사가 증명하지. 너도 언젠간 이해하게 될 거다. 나인.”

“아니. 영원히 이해 못 할 거야. 하고 싶지도 않아.”

“그게 네 뜻이라면 존중하마.”


모닥불에 남은 나뭇가지를 던져넣은 빌베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 밖은 여전히 밤의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고 유난히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었다. 전장의 소리였다. 블라가스와 아퀴토날의 군대의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슬슬 시간이군.”


빌베드는 성큼성큼 얼어붙은 세레나를 향해 다가갔다. 벌떡 일어난 나인이 날 없는 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

“오스모튼의 벼락에 당했으니까. 당분간은 제대로 못 움직이겠지.”


빌베드의 손짓에 세레나를 가둔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그대로 빌베드는 세레나를 어깨에 둘러업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라.”

“어디···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나인. 넌 할 만큼 했다. 왕녀에 대한 건 그만 잊어.”


그림자를 뿜어내려던 나인의 앞으로 빌베드가 손바닥을 내보였다. 눈앞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더니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졸음에 나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흠.”


그런 나인을 바라보던 빌베드는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섰다. 그렇게 동굴을 나선 그는 꽤 오래 걸었다. 동굴이 산의 중턱에 있었기 때문이다.


밤의 어둠이 짙게 깔린 산길을 고작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해 걷던 빌베드는 산 아래의 어느 숲을 앞에 두고서야 마침내 멈춰 섰다.


어두운 겨울 숲을 등지고 빌베드를 기다리던 건 검은 망토와 후드로 모습을 감춘 자들이었다.


빌베드와 그들 사이엔 살기 어린 눈빛이 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누구도 검을 뽑는 이는 없었고 빌베드는 어깨에 들쳐멨던 세레나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를 넘겨받고 후드를 쓴 누군가가 빌베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빌베드도 말없이 마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검은 망토의 그들이 어두운 숲 속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이 밤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스며드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샌가 기척조차 사라진 그들을 뒤로하고 빌베드는 돌아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피비린내 섞인 공기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딜 가나 전쟁이군.”


머리를 쓸어넘기며 다시 걸음을 내딛던 빌베드는 거대하게 울리는 굉음에 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은 나인을 남겨두고 왔던 산 위의 동굴을 향했다.


하늘 높이 치솟는 기둥은 밤의 어둠보다도 짙은 그림자였다. 빌베드는 조용히 검을 뽑았다.


“···부디 틀린 선택은 하지 마라. 나인.”


산을 기어 내려오는 그림자를 보던 빌베드의 검이 조금씩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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