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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불을 지피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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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5.1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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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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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아리아드 신화전 – 난입자

DUMMY


#1


“저길 뛰어들다니. 못 살아.”

“푸르릉!”


맞장구라도 치듯 조금 전까지 안장 위에 나인을 태우고 있던 세라프가 투레질을 했다. 나인과 달리 여전히 투아시의 등 위에 있던 세레나는 가방 안에서 벽돌처럼 투박한 책을 꺼냈다.


책을 들여다보던 세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저 멀리, 언덕 아래에 있는 군대의 깃발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한참이나 책과 깃발을 오가며 비교했다.


“역시 저건 마인의 군대야.”


지금 그녀가 펼친 페이지엔 군대의 깃발과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또박또박한 글씨로 적혀있었다. ‘카하브의 마인 여제 아퀴토날.’


그 책은 눈의 마녀 히리아의 배려로 손에 넣은 마녀의 책이었다. 북부에서 활동하는 마녀가 직접 써낸 책에는 북부의 여러 가지 정보를 담고 있었고, 특히 제3세력들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담겨있었다.


베헬로스 제국, 다커멜 하이디, 그리고 브라톤에서 얻었던 정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걸 세레나는 그 책을 손에 쥐고서야 깨달았다. 아리아드의 북부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세력과 부족, 역사가 있는 곳이었고 그만큼의 분쟁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저 마인의 군대였다. 새빨간 바탕에 검은 뿔이 그려진 깃발은 검은 뿔을 가진 마인 여제 아퀴토날의 상징이라고 책에는 쓰여있었다.


‘마인’이라는 단어는 낯설었지만 공교롭게도 저들 자체는 크게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본대륙에도 이곳의 마인과 비슷한 종족이 있기 때문이다.


‘마곡 사람들이랑 비슷한데.’


본대륙 서쪽 끝자락에 자리를 잡은 마곡 길레오드.

그곳에 사는 ‘마곡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처럼 말을 하고 두 다리로 걷는 털 짐승이 있는가 하면, 날개가 달린 인간과 용을 닮은 인간, 그리고 인류의 전쟁을 소꿉장난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거인족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런 마곡인들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저곳에 있는 마인 군대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양한 종족이 모여 마인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있고,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였으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아마 기원은 같은 것 같은데···.’


마곡인은 과거엔 ‘마족’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대도서관의 책에 있었다. 그리고 눈의 마녀 히리아의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고, 아리아드의 마인들은 상당히 폐쇄적이라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쓰여있었다.


‘그런데 저기 있잖아?’


하지만 그 폐쇄적이라는 마인들이 지금 저곳에 있었다. 지도를 거꾸로 든 게 아니라면 이곳은 켐헬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거대한 얼음 협곡의 요새는 마인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알 수 있는 건 한 가지. 전쟁의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지만, 그녀는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북부엔 남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북부의 전쟁에 뛰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당장에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만 같은 마인 군대와 켐헬의 요새 사이로 나인이 뛰어들었다는 건 분명 문제였다.

게다가 저 멀리 또 다른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 근처에 있다는 하얀 왕의 본대일 것이다. 느긋하게 고민할 정도로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지.”


투아시의 목을 쓰다듬던 세레나가 고삐를 쥐었다.



#2


“음.”


나인은 괜히 검을 몇 번이고 고쳐 쥐었다. 꽤나 어색한 상황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드가리스 요새를 목적지로 잡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곳이 전쟁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인이 이 자리에 불쑥 끼어든 건 그다지 큰 이유는 아니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단 말이지.’


멀리서 보는 광경으론 거대한 망령이 사람을 습격하고 있었다. 정의로운 기사라면 지나칠 수 없을 테고, 나인은 그 정의를 아주 충실하게 실행에 옮겼다.


다만, 앞뒤 생각도 없이 실행에 옮긴 탓에 놓친 것도 많았다. 하나는 이곳이 지금 전쟁 중이라는 것이고, 하나는 망령에게 습격당해 도망치던 이들이 하필이면 하얀 왕의 하수인이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나인은 경계를 곤두세웠다. 지난번에도 히리아를 습격했던 하얀 왕의 무리엔 지금 눈앞에 있는 황금의 마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보았던 마녀의 능력은 어지간한 유물 보유자 수준이었다.


오히려 유물 보유자보다 위험하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유물은 한 가지 마법을 쓰지만, 마녀는 온갖 마법을 부리기 때문이다.


“저 꼬맹이는···”

“누구더러 꼬맹이라는 것이냐. 에헴.”


이렇게 된 이상 나인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마왕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기왕 북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으니, 이용할 만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잘은 몰라도 마왕이란 게 북부에서 꽤 먹히는 이름이란 건 이쯤 되면 나인도 이젠 슬슬 깨닫고 있었다.


황금의 마녀 아르미나와 사제 벨렛은 잠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곧, 벨렛은 나인을 향해 시커먼 총구를 들었다.


“어험. 감히 이 몸에게 총을 겨누다니.”

“그 어색한 연기는 그만하시죠. 당신은 마왕이 아니잖습니까.”


총을 겨눈 벨렛의 말에 나인은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검을 세웠다.


“북부인들은 이 몸을 마왕이라 부른다.”

“그야 그런 마법··· 아니, 유물을 쓴다면 마왕이 강림했다고 착각할 만도 하죠. 북부 역사에 기록된 마왕도 그림자 같은 칠흑을 휘둘렀으니.”

“······.”

“그리고 당신은 이게 ‘총’이라는 걸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북부엔 총이 없습니다. 북부인들은 총이 뭔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걸 알아봤다는 건 아리아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테고···.”


벨렛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인을 쏘아보았다.


“바다 건너에서 온 외부인이겠군요. 누가 보냈습니까? 왜 아리아드 북부에서 마왕 노릇을 하는 겁니까?”

“음···.”

“대답하기 곤란하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은 하얀 왕의 적입니까? 켐헬의 적입니까?”

“둘 다 아닌데요.”


마왕 연기는 관두기로 한 나인이었다. 벨렛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인을 훑어보다 말했다.


“제국의 기사는 아닌 것 같군요. 다커멜 하이디 쪽? 아니면 조사단?”

“그게···”

“그 검은 평범한 게 아니군요. 그림자도 그렇고. 지난번엔 일행이 있지 않았습니까? 눈의 마녀와는 무슨 관계?”

‘이거 위험한데.’


이러다간 저 사제에게 탈탈 털릴 것 같았다. 나인은 훌쩍 뛰어 거대한 망령 기사의 등에서 내려왔다.


“바빠서 이만···.”

“어딜 가! 이 꼬맹아! 구할 거면 제대로 구하고 가!”

“허.”


나인은 어이가 없었다. 기껏 구해줬더니 사제는 이것저것 캐내기 시작했고, 마녀는 제대로 하라며 닦달하고 있었다. 사람 구하는 게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적이잖아?’


켐헬은 몰라도 지금의 나인은 하얀 왕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하얀 왕의 수하인 사제와 마녀는 지금의 나인에겐 적인 셈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리할까? 하얀 왕의 병사도 없는 이곳이라면 마녀는 몰라도 사제 쪽은 확실히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이, 일어나잖아! 저거 마저 처리하라고!”


하지만 아르미나의 외침에 나인은 진짜 적이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일어나···?”


분명 목을 베었다. 하지만 축 늘어졌던 거대한 망령 기사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 !!!!!!! }


망령의 포효에 검을 고쳐쥔 나인이 그림자를 갑옷처럼 몸에 둘렀다. 망령은 찌그러진 투구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나인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거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검이 바닥을 쓸었다. 나인은 지면을 걷어차 훌쩍 뛰어올랐다. 새하얀 눈먼지가 망령이 휘두른 검에 뿌옇게 흩어졌다.


눈먼지를 파고든 새카만 그림자가 망령을 향해 창이나 화살처럼 쏟아졌다. 갑옷을 부수고, 살을 꿰뚫는 파육음이 들려왔지만, 망령은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둘러댔다.


‘검을 쓸 줄 아는 놈이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눈이 좋은 나인은 알 수 있었다. 이 망령은 명백히 단련된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고, 몸의 균형이 무너진 탓에 그 검술이 조금 비틀렸을 뿐이다.


위협적인 건 분명했다. 거대한 검을 막아낼 자신이 없던 나인은 피하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그때마다 망령의 검은 학습이라도 하듯 나인의 간격을 재며 더욱 위협적으로 검무를 펼치기 시작했다.


쾅!

몸집도 큰데다 검도 크다. 당연히 그렇게 휘두르던 검은 나인 하나만을 노리는 건 아니었다. 살벌하게 움직인 검이 벨렛과 아르미나가 있는 곳을 긁었다.


벨렛은 또다시 아르미나를 낚아채 눈밭을 굴렀다. 아르미나도 이젠 창백해진 얼굴로 불평하지 않았다.


“왜 안 쓰러져!?”


회피와 동시에 그림자를 틈틈이 쏟아냈다. 그림자는 아까부터 망령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망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이나 심장, 배나 다리를 찔러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망령은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움직일 터였다.


까가각!!

나인은 재빠르게 뛰어 망령의 팔을 내리쳤다. 검을 쥔 팔을 잘라낼 생각이었다.


“윽!”


하지만 검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감각에 움찔했다. 거대한 바위를 내려친 듯한 감각이었다. 날 없는 검은 분명 시퍼런 칼날을 드러내고 있건만, 망령의 팔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 ! }


망령이 몸을 크게 뒤틀었다. 검이 튕겨 나간 나인은 코앞까지 들이닥친 주먹을 보곤 재빠르게 그림자를 두른 방패를 세웠다.


쩌엉─!


“···!”


망령의 괴력은 방패째로 나인을 눈바닥에 짓이겼다. 갑옷처럼 두른 그림자도, 두 다리를 지탱하던 그림자도 망령의 무식한 괴력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머리 위로 올린 방패가 눌리며 팔과 무릎이 구부러졌다. 숨 막히는 압박감이 그대로 나인을 압사시킬 기세로 짓눌러왔다.


‘더 이상은···!’


{ !!! }


그때, 큰 충돌음과 동시에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방패를 걷어낸 나인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망령의 육중한 몸이 기우뚱 쓰러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나인의 앞에 누군가가 내려왔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 위엔 삐죽삐죽 날이 선 검은 왕관. 검은 갑주와 털 망토. 그리고 오른손엔 사람 머리통보다도 몇 배는 큰 살벌한 철퇴를 쥔 사내.


얼어붙은 피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철퇴와 사내에게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나인처럼 후각이 민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눈살을 찌푸릴만한 그런 악취였다.


불쾌한 죽음의 냄새를 품고 있는 사내는 놀라울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가졌지만, 새하얀 얼굴 위에 쭉 찢어진 미소는 그렇기에 더더욱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오? 근성 있는 놈이구나!”


철퇴에 얻어맞은 망령은 기울어지던 몸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사내는 그런 망령을 보며 씨익 웃더니 살벌한 눈동자를 나인에게 돌렸다.


“네놈도 아주 잘 싸웠다. 간만에 이 몸의 투지를 끓게 했어. 나도 모르게 뛰어들었지 뭐야.”

“누구···”

“이 용안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느냐. 그래도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아 한 번은 용서하마.”


나인의 모든 감각이 부르르 떨며 외쳐대고 있었다.


“짐은 북부의 제왕.”


이 사내는 위험하다고.


“블라가스다.”


눈벌레의 왕.

하이 마운트에서 시작해 북부를 집어삼킬 기세로 일으킨 이 전쟁의 중심에 있는 북부 전쟁 최대의 위험인물.


“전하!”


사제 벨렛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벨렛과 함께 이리저리 눈밭 위를 나뒹굴던 황금의 마녀 아르미나는 이젠 자포자기한 얼굴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본 블라가스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 콧대 높으신 황금의 마녀가 처량하게 눈밭 위를 굴러다니다니. 이거 귀한 걸 봤는데?”

“닥쳐. 블라가스. 저거나 빨리 정리해!”


마녀의 날이 선 말투에도 블라가스는 웃을 뿐이었다. 앞뒤로 적을 두게 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건만, 그는 이 상황 자체가 즐거운 듯했다.


“아퀴토날. 그 계집이 움직일 줄이야. 하긴, 움직인다면 지금이 적기지. 이대로면 드가리스 요새를 이 몸에게 빼앗길 테니까. 나라도 드가리스 요새를 그냥 넘겨주진 않겠어.”

“전하···.”

“벨렛. 잘 해줬다. 그 정도면 충분한 증명이 되는군.”


뿌우우─

긴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두리번거리던 나인은 저 멀리, 새하얀 군대가 깃발을 높이 치켜든 채 진군하고 있었다. 하얀 왕의 군대였다.


“이름이 뭐지? 어린 마왕.”


그의 군을 바라보던 나인은 흠칫했다. 블라가스의 어린아이처럼 장난기로 가득한 눈이 나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저요?”

“그래. 멀리서부터 보고 있었다. 네가 최근 북부에서 마왕이라 불리는 녀석이겠지. 그림자를 쓰는 마법은 흔치 않으니.”

“······.”

“역시 말하지 못하는가. 그래. 마왕의 이름을 훔친다면 입은 무거워야지. 훌륭한 판단이다.”


{ 크르르르···!! }


일어선 망령이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블라가스는 여전히 나인에게 시선을 둔 채, 망령에게선 등을 돌리고 있었다.


“뒤, 뒤에···”

“어땠지? 마왕의 이름으로 많은 이들을 무릎 꿇린 기분이?”


{ ─ !!! }


단두대처럼 내려오는 망령의 검.


그리고 블라가스는 빈 왼손을 머리 위로 들어 그 칼날을 막아냈다.


{ ······! }


“뭐···”


나인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철퇴도, 방패도 아닌 맨손으로 저 괴력이 실린 검을 애들 장난처럼 막아낸 것이다.


“자, 대답해 보아라. 어린 마왕. 잠시나마 ‘왕’이라 불리던 건, 어떤 기분이었느냐?”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감각에 나인은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위험하다. 이 사내는 지금까지 만난 무엇보다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괴물이다.


머금고 있는 피비린내가 그리 말하고 있었고, 뿜어내는 분위기가 그런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거절도, 반항도 허락하지 않는 블라가스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힘까지 느껴졌다.


“누가 물러나는 걸 허락했지?”


뒷걸음질치던 나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싸늘한 표정이 되었다.


“짐이 두려우냐?”

“그, 그게···”

“이해한다. 다들 그러니까.”


망령의 검을 잡은 블라가스의 손에 핏대가 섰다. 그대로 팔을 당기자, 검째로 끌려온 망령이 눈밭 위에 나동그라졌다.


저 거구를 한 손으로 내팽개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블라가스는 가차 없이 철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철퇴가 망령과 충돌할 때마다 망령의 갑옷이 으스러지고 찢겨나갔다.


쾅! 쾅! 쾅!

무서운 기세로 움직이던 철퇴가 멈춘 건 망령의 머리를 짓이겨 터뜨렸을 때였다. 그제야 망령은 완전히 축 늘어져 부르르 떨었다.


블라가스는 으스러진 머리를 짓밟았다. 그의 검은 갑옷과 망토에 피가 튀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겐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먹어치워라.”


철퇴를 허공에 털어낸 블라가스가 말했다. 후두둑 뿌려진 망령의 피가 눈밭을 붉게 적시자, 갑자기 눈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쓰러진 망령의 몸을 수천 마리의 눈벌레들이 덮쳤다. 눈밭 위에 발이 푹 들어가 있던 나인은 놀란 숨을 삼키며 아래를 보았다.


“걱정할 거 없다. 이놈들도 가려 먹을 줄은 아니까.”

“······.”

“마침 저쪽에서도 나오는군.”


블라가스는 철퇴를 한쪽 어깨에 걸치며 드가리스 요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구멍 뚫린 요새의 성벽을 넘어 망령의 잘린 머리를 쥔 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베르드 코렉.”

“······블라가스.”

‘이 사람이 켐헬의 기사장···.’


녹슨 기사왕이라 불리는 켐헬 수호자들의 우두머리.

그가 쥔 서리꽃을 머금은 검은 아름다웠으나, 그 외의 모습은 녹슬고 낡아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약함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나인은 그에게서도 블라가스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 이자 또한 상당한 강자일 터였다.


이제와선 한참이나 늦은 후회지만, 이곳에 뛰어든 건 역시 좋지 못했다고 나인은 인정했다. 북부 전쟁엔 깊게 관여하지 않기로 세레나와 약속했건만, 절대 직접 마주치지 말라는 조언까지 받았던 하얀 왕을 만나버렸고, 이젠 켐헬의 수호자와 블라가스의 사이에 끼어버렸다.


베르드 코렉은 눈벌레에 뜯어먹히는 거대한 망령의 시체를 보다 심기 불편한 숨소리를 냈다.


“역시 망령은 네놈이 보낸 게 아니었군.”

“공교롭게도 망령을 부리는 마법은 알지 못해서.”


블라가스가 자신의 뒤쪽을 눈짓했다. 베르드 코렉은 그곳에 있는 붉은 깃발을 보았다.


“아퀴토날의 군대.”

“그래. 성벽엔 구멍이 뚫렸고 지금 이곳엔 짐과 아퀴토날의 군대가 있다. 베르드 코렉. 순순히 성문을 열어주는 게 현명하다고 보지 않나?”

“마치 아퀴토날과 손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하는군. 그럴 린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블라가스가 피식 웃었다.


“쯧. 이젠 먹이 하나를 두고 늑대 두 마리가 서로 으르렁거려야 하는 꼴이라니.”

“아퀴토날은 모조리 집어삼킬 거다. 네놈도 말이지.”

“그래서? 이제 와서 손을 잡고 아퀴토날을 몰아내자고 할 셈은 아니겠지? 짐이 드가리스 요새를 마인으로부터 지키라고?”

“협상은 없다.”


베르드 코렉은 망령의 머리를 눈벌레 밭에 휙 내던졌다. 그리곤 얼빠진 얼굴로 있던 벨렛과 아르미나를 향해 커다란 열쇠를 던져주었다.


“흑석과 마법으로 단조한 열쇠다. 흑석 구속구는 그걸로 풀 수 있다. 그대들은 전령의 신분이었으니, 돌아갈 땐 그 구속구를 풀어주는 게 맞겠지.”

“······.”

“용건은 그것뿐이다.”


검에 맺힌 서리꽃이 녹아 사라질 때쯤, 베르드 코렉은 몸을 돌렸다.


“블라가스. 아퀴토날과 손을 잡고 싶다면 그리하라. 하지만 드가리스 요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네놈의 어린 수호자들이 눈벌레에 갉아 먹혀도?”

“우리 모두가 죽어도.”


베르드 코렉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뚜벅뚜벅 다시 요새를 향해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블라가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어린 마왕아. 넌 어디에 서겠느냐?”

“···당신 편에 서진 않을 거예요.”


긴장과 공포로 잔뜩 몸이 굳어졌지만, 그래도 나인은 그리 말했다.


어쩌면 블라가스의 철퇴가 움직일지도 모르지만, 이 피비린내 나는 괴물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나인은 브류드 하커로부터 들었던 블라가스의 악행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 판단이 깔끔하군. 어중간하게 있는 놈보다 훨씬 나아. 물러가 보거라.”

“놓아주는 건가요?”

“북부에는 늑대와 사슴이라는 놀이가 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하지. 늑대는 사슴을 쫓는 역할이고, 사슴은 잡히면 죽는 역할이야.”


블라가스의 입꼬리가 찢어지듯 올라갔다.


“놀이를 시작하려면 일단은 사슴을 놓아줘야겠지.”

“······!”

“그러니 지금은 가게 두마. 하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들었다. 어린 마왕. 언젠가 찾아가지. 그때까지 내 눈이 틀리지 않았길 바란다.”


허락은 떨어졌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던 나인은 그림자를 날개처럼 뻗어 단번에 튀어 올랐다.


“용의 마법과 닮았군.”


쏜살같이 멀어지는 소년을 보며 블라가스는 중얼거렸다. 곧, 철퇴를 어깨에서 땐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붉은 깃발의 군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블라가스의 본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머릿수의 대군. 하지만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로 이루어진 저 마인들의 군대는 확실히 성가신 상대였다.


“벨렛. 아르미나를 데리고 돌아가 아길 장군에게 전해라. 베그레스의 목줄을 풀라고.”

“···전하. 아퀴토날과도 전쟁을 할 생각이십니까?”


마인의 군대를 노려보는 하얀 왕의 눈동자에 심상치 않은 빛이 맴돌았다.


“우두머리를 못 알아보는 늑대는 목을 꺾어야지.”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차주부턴 연재 일정이 조금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들 주말 편히 보내세요! :)


* 24.01.20 01:09 오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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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아리아드 신화전 - 예언 24.02.03 14 0 18쪽
149 아리아드 신화전 - 요새의 방문자 24.01.27 21 0 18쪽
» 아리아드 신화전 – 난입자 24.01.19 22 0 20쪽
147 아리아드 신화전 – 망령 기사 24.01.17 16 0 18쪽
146 아리아드 신화전 – 드가리스 요새 24.01.15 14 0 16쪽
145 아리아드 신화전 – 마녀의 눈물 24.01.12 14 0 24쪽
144 미래의 약속 24.01.10 17 0 20쪽
143 죄악감 24.01.08 20 0 21쪽
142 깊은 밤의 소란 24.01.05 15 0 22쪽
141 마녀와 기사 24.01.03 17 0 21쪽
140 두 기사 24.01.01 22 0 22쪽
139 마왕 강림 23.12.29 23 0 20쪽
138 드래곤 아이즈(5) - 다음 여정 23.12.27 22 0 17쪽
137 드래곤 아이즈(4) - 준비하는 자들 23.12.25 20 0 20쪽
136 드래곤 아이즈(3) - 그저 구하기만을 위해 23.12.22 22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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