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조회수 :
83,285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58

작성
22.05.13 06:45
조회
1,382
추천
49
글자
20쪽

산(3) - 면접

DUMMY

#1


망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미치겠네..”


군인들은 어떻게든 따돌렸다. 하지만 항구에 군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이제 배 타고 나가는 건 글렀다는 얘기다.


식량과 옷, 비상약 외 기타 등등이 든 여행 케이스는 바다로 안녕했고 가진 거라곤 배낭 안의 식수와 에너지바 수준의 식량이 전부다.


게다가 아까보다 많은 군인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보니 진짜 심상치 않다. 이쯤 되면 갑자기 전차가 지나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다.


무작정 들어온 건물 벽에 기대며 주저앉았다.

그래도 군인은 군인인지, 용케 날 쫓아오길래 결국 속도를 좀 냈다. 덕분에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이 더럽게 찝찝하다.


일단 물을 마셨다. 혹시 모르니 병뚜껑에 담아서 세 번. 이 물마저도 아껴야 할지 모른다.


‘아니, 아낄 필요가 있나?’


당연히 아껴야 하는 건 맞는데, 이 동네에 널린 게 가정집이고 가게다.


여기서까지 도둑질을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이 시국에 버려두고 간 물이나 식량을 챙기는 건 생존이지 도둑질이 아니다. 그렇겠지?


“....”


바짝바짝 마르는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킨다.

생각을 정리하자.


우선 근처에서 식수랑 식량을 챙긴다.

바다로 나가는 건 꽝이니 하는 수 없이 안쪽으로 가야 한다.

외진 산이나 덜 마른 사막길로 요리조리 다니면 귀찮게 사람을 마추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맨몸으로 사막을 쏘다니는 게 자살 행위라는 것과, 탈것도 없이 이 땅덩어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훌륭한 자살 행위라는 거다.

이 골로 간 세상에서 사람 손이 잘 닿지 않은 곳엔 가끔 위험한 놈들이 있다.


‘무기는 챙겨야겠지.’


이 나라는 총기 개인 소지가 불법인 정말 평화롭디평화로운 나라다. 허가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구경조차 못 한다.

문득 일하던 횟집이 떠올랐다. 거기서 회칼이나 몇 개 구해서 다녀야겠다.


그 착해 빠진 사장은 잘 피하려나 모르겠네. ...잘 피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지금은 내 살 길부터 생각해야지.

회칼 다음은..


“너 뭐 하니?”

“어??”


얼빠진 소릴 내며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여자.. 아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산이 맞지?”

“누구..?”

“뭔 소리야. 매일 보는 사이면서.”

“어... 어어?”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다.

여성의 화장은 무죄라는 진부한 코드의 경직성을 치우고 본다면, 분명 화장은 마법의 영역이라고.


“헤이카?”


필라드 3번가의 56, 105호.

항상 후줄근한 후드티에, 부스스한 머리에, 졸린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여자.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쭉 뻗은 다리를 휘감은 스타킹. 단정하게 빚어내린 검은 머리.

마치 의사들이 입을 법한 가운은 어째선지 새까맣고 짙은 금색 자수가 새겨져 있다.

그 사이엔 검은 와이셔츠와 함께 금색 넥타이가 한 줄기.


그리고 묘하게 금색을 띠는 커다란 눈동자가 날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깊은 눈이었다.


와, 꾸미면 이렇게 사람이 바뀌는구나.


“너 여기서 뭐 해? 땀은 왜 그렇게 흘리고?”

“예? ...운동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운동이라니. 취향 참..”

“....”

“됐고. 왜 피난 안 했어?”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이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


‘동네 날아갈까 봐 바다로 튀려다 군인들 만나서 도망쳤다.’

‘군인들이 날 끌고 가진 않을까 싶었다.’


진짜 꼴사나운 대답이다.

애초에 전쟁 났다고 끌려갈까 도망치는 게 칭찬받을 일은 아니니까.


“그쪽이야말로 왜 피난 안 가고 여기 있어요?”

“일 때문에 출장 왔어.”


자기 사는 동네로 출장? 전쟁 터졌는데?

무슨 일을 하는진 몰라도 참 별난 직장이네.


“그럼 서로 갈 길 가죠.”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고, 어차피 이제 볼 일도 없는 사이다.


나와 저 사람의 연이라곤 고작 우유, 신문 배달원과 고객.

전쟁이 터졌는데 우유랑 신문 배달을 계속할 리 없다. 그러니 이걸로 끝이다.


“도와줄까?”

“..뭘요?”

“이 동네 좋지 않아?”

“이딴 촌구석이 뭐가 좋다고..”

“그럼 싹 없어져도 상관없니?”


...그건 좀 내키지 않는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끝에 이 촌구석에 정착한 게 3년 쯤전이다. 겨우 엉덩이 붙일 곳을 찾았다 싶었는데, 그게 사라지는 건 당연히 싫다.


“그건 싫네요.”

“그렇구나. 솔직히 나도 그래. 그래서 일단 어떻게든 해보려고.”

“그쪽이 어떻게 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냥 얌전히 피난이나 하십쇼.”

“음.. 그 말은 내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당연한 소릴.”


헤이카는 이런 상황에서도 히죽히죽 웃더니 내 앞을 잠시 왔다갔다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몇 번 반복되던 끝에 헤이카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으면?”

“뭔 소리래.”

“곧 연방에서 필라드를 공격할지도 몰라. 이거 들어볼래?”


고개를 들어보니 헤이카는 웬 냉장고 같은 시커먼 무전기를 내밀고 있었다. 뭘 누르자 ‘삐빅’ 거리다가 목소리가 나온다.


[ 여기는 관측과 2팀. 북서 해안 적함 출현 확인. ]

[ 노톤 고속정 13척, 베스카급 전투 순양함 7척. 고속정은 전부 캘러네드 고속포로 무장하고 있다. ]

[ 움직일 수 있는 경계 부대는 즉시 이동 바람. 다시 한 번 알린다. 여기는 관측과.. ]


군 무선? 아무래도 실시간 정보인 것 같았다. 노톤이니 베스카급이니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고속정과 순양함의 의미는 대강 알고 있다.


그건 아까 도망치면서 본 연방의 함대를 말하는 걸 거다. 그 시커먼 주포를 떠올릴 때마다 영 기분이 그렇다.


“고속정에 캘러네드를 달았어? 어떻게 쏘려고 그러지? 하긴, 쏠 수 있으니까 달았겠지. 신기하네.”

“...그래서요? 어디서 군 무전기 주워다가 뭐 하려고요? 그거 눌러도 미사일 같은 거 안 나갑니다.”

“날 뭐로 보고. 이거 우리 회사 통신이야. 서부 수비대 채널에도 들어가 있어.”

“그러니까 그걸로 뭘.. 아니, 애초에 그거 어디서 주웠어요?”

“이거 내껀데?”


헤이카는 무전기를 내 앞에 팔락팔락 흔들어댔다. 무전기 꼬다리에 달린 글자를 보란 듯이 들이밀었는데,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Eclipse.’


이클립스 공업의 상표였다. 역시 대기업이다. 정부군조차 공업에서 만든 무전기를 쓰다니.


“...”

“일단 나가자. 바람 좀 쐬고 싶어.”


이 상황에 바람 쐬러 나가자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난 이미 헤이카의 손에 이끌려 함께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


화들짝 놀라 주변을 확인했다. 정부군에게 들켰다간 끌려갈지도 모르고 당장 머리 위에 포탄이 쏟아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정부군도, 포탄도 코빼기도 안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군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손 놔요. 애도 아니고.. 걸을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

“...”

“누나가 무서워서 그래. 잡고 있어줄래?”


무섭다는 사람이 왜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는 건지.

분명 무섭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쪽으로 가면 해안입니다. 바닷길도 이미 막혔어요.”

“알아. 그냥 바다 보고 싶어서.”


한술 더 떠서 이 상황에 바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다.


그렇게 헤이카의 손에 끌려 도착한 곳은 해안선 근처에 있던 1층짜리 건물 옥상이었다.


한눈에 전부 들어오는 바다는 아직도 노을에 그슬려 새빨갛다.

비릿한 바닷바람. 살짝 섞인 짠내. 아직도 연방의 군함이 떡하니 보이는데도 의외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역시 바닷가 공기가 제일 좋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이래서 바다가 좋아.”

“그래서 이런 촌구석에 사는 거예요?”

“직업상 매일 모래랑 풀만 보거든. 사는 곳이라도 바닷가 근처로 하고 싶어서 여기에 자리를 잡았지.”

“흐음.”

“이제 손 놔도 안 도망치겠지?”


역시 도망칠까 봐 잡고 있던 거였다. 애 취급받았다는 생각에 손을 확 뿌리쳤다.


“안 도망칩니다.”

“남자랑 손잡아본 것도 오랜만이라 좀 들떴네. 어땠어?”

“별생각 없네요. 전쟁 터졌고.”

“그게 제일 중요해?”

“당연히 지금은 그게 제일 중요하죠. 다 망했어요. 겨우 정착해서 익숙해졌나 싶었는데.”


피식, 하며 웃는 소리가 났다. 홱 돌아보니 헤이카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가 웃겨요?”

“아니야. 원래 다른 데 살았나 보네?”

“사정이 있어서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여기 정착하고 올해로 3년 째인데, 갑자기 이러잖아요.”

“여기 사는 건 어땠어?”

“나쁘진 않았죠. 바다 보이고, 조용하고, 머리 식히며 살긴 딱 좋은 것 같네요.”

“나도 동감.”


그러고보니 지금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는 건가.

저 앞에 보이는 건 연방 함대고, 저 시커먼 함포들은 이쪽을 보고 있는데?


뭔가 잘못 돼가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이 여자한테 너무 휘둘려서 도망친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그럼 전 먼저 갑니다. 살아서 봅시다.”

“잠깐만. 산아. 같이 있어줘.”

“오글거리게 뭔 소립니까. 여기 있다가 죽고 싶어요?”

“안 죽으니까 있어봐.”


이 여자는 대체 무슨 근거로 저런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가 이상해졌나?

평소에도 약간 아리까리한 여자였는데, 이 기회에 제대로 정신이 나간 걸지도 모른다.


“저게 쏘기 시작하면 이 동네 폭삭 주저앉습니다. 대피소고 뭐고 싸그리 죽어요. 그러니 전 갈랍니다.”

“에이, 있어보라니까. 칼밥 먹던 애가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칼밥 먹었어도 죽는 건...”


뭐지? 잘못 들었나?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음.. 왜 이렇게 겁이 많아?”

“그 전에.”

“칼밥 먹던 애?”

“당신 뭐야?”


슬그머니 옥상 구석에 놓인 끊어진 쇠파이프를 쥐었다.


쇠파이프가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에 헤이카가 몸을 돌려 이쪽을 보았다.

노을을 등지고 저런 눈동자라니. 참 한 폭의 그림이다.


“알면 안 되는 거였어?”

“....당신 뭐냐고.”

“무서워라. 네 고향에선 사람을 회 치듯 살을 얇게 저민다는데, 진짜야?”

“그건 좀 과장이고... 아이씨. 당신 누구냐니까.”

“뭘 물어. 맨날 보는 사이면서. 105호 우유.”


삐비빅.

그때, 헤이카가 쥔 무전기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잠깐만. 산아. 나 때리려면 이거 끝나고 해.”

“...”


{ 여기는 필라드 수비대 노던 중령입니다. 박사. 아직 있습니까? }


삑. 삐비빅.


“네. 여기 있습니다. 현재 위치.. 산아. 여기 1층 가게 이름이 뭐더라?”

“...누더기 전당포.”

“필라드 누더기 전당포.. 음, 바다 보이는 곳이에요.”


삑. 삐비빅.


{ 당장 그곳에서 나오십시오. 연방에서 선제공격 의사를 밝혔습니다. 15분 후 포격입니다. }


삑. 삐비빅.


“확인했습니다. 이쪽에서 처리할게요.”


{ 실례지만 머스칼이나 전차라도 몰고 오셨습니까? }


“중령님! 농담도. 마침 필라드에 쓸만한 레일이 깔려 있길래 그걸 썼어요.”


{ 크흠. 정말 대응할 수 있는 겁니까? }


“못 미더우시겠죠. 우리는 공업사지 PMC(민간 군사 기업)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금방 담글 수 있습니다. 슬슬 보고가 들어올 텐데요.”


{ ...혹시 지금 저쪽 레일 위에 있는 거 공업에서 온 겁니까?? }


“네. 마운틴 클리너입니다. 이제 맡겨주실래요?”


{ 확인했습니다! 대응은 그쪽에 맡기겠습니다. 이상! }


“성격 시원한 아저씨라 좋네.”


의도치않게 무전 내용을 다 들었는데, 솔직히 반도 이해 못 했다.


그리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헤이카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준비 끝났어?”


{ 예. 대표님. }


“얼른 쏴.”


정적.

헤이카가 말한 ‘쏴’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다. 아주 잘.


쏜다는 건 뭔가를 갈겨댄다는 의미다.

그게 총알이든, 대포든, 오줌이든.


그러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무심하게 울어대는 갈매기 울음소리에 슬슬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한다.

묘한 초조함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


시계를 보았다.

나름 멋 낸다고 차고 다니던 오토매틱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틱.

틱.

틱.


파도 소리보다도 크게 느껴지는 초침의 재촉에 결국 난 한계가 왔다.


그렇게 헤이카를 향해 고개를 들었더니 금색 눈동자가 날 마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아! 귀 막아!”

“예?”



그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다.



“!!!?”


정말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혔다는 기분이었다.


깨닫고 보니 난 중심을 잃고 옥상에 나자빠져 있었다.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의 충격이라니. 포격이 시작됐나?


귀가 먹먹했다. 삐- 하는 짜릿한 이명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내 두 눈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던 밤바다에 꽂힌 채 움직이지 못했다.


포격? 폭발? 그런데 왜 필라드가 아니라 바다에서 터지지?

아니, 폭발이라엔 너무 큰데?


만화 속에나 나오던 바닷속 거대 괴수가 나타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괴수는 시커먼 물보라와 새빨간 불꽃을 뿜어대며 연방의 전함이라는 강철의 사신들을 집어삼킨다.


번쩍, 번쩍하며 빛이 발광했고 거대한 군함들이 붕 떠오른 광경은 마치 꿈만 같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감각은 진작에 아득히 멀어졌다.


‘사실 나 꿈꾸던 건가?’


전쟁이 터진 것도, 군함이 날아다니는 것도 전부 꿈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눈을 뜨니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평범한 일상이라면..


하지만 멀어지는 이명 속에서 들려오는 헤이카의 목소리는 날 현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 괜찮.. 산아?”

“뭐라고요?”

“괜찮아? 미안해. 귀 막으라는 거 잊고 있었어. 혹시 후유증 남으면 말해. 아는 의사가 있어.”

“후유증?”

“귀 안 아파?”


귀도 머리도 끔찍하게 아프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군함이 하늘을 날고 바다가 뒤집히고 있는데 저렇게 태연하게 딴소리를 하는 헤이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거 어쩌면 이 사람이 정상이고 내가 이상해진 건가?


“...그쪽은 괜찮아요?”

“나야 귀마개도 있고 익숙해서.”


헤이카는 얇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귀를 내보였다.

검은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핑크색 이어 플러그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근데 뭘 쏜 겁니까?”

“음?”


가까스로 물을 수 있었다.

슬슬 내 모든 감각이 외쳐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현실이야.’ 라고.


세상엔 바닷속 거대 괴수도 없고, 아무 이유 없이 바다가 뒤집히는 일도 없다.


그리고 방금 헤이카의 ‘쏴’라는 한 마디에 연방 함대가 종이배처럼 날고 있으니 저 무시무시한 풍경이 모두 이 여자 짓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마운틴 클리너’ 라는 우리 장비야.”

“산 청소기?”

“열차포.”

“열차포??”

“원래는 산을 치울 용도로 개발한 거라 이런 일에 써보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이펙트가 크네. 바다가 뒤집어지는 줄 알았어.”


내가 뭘 들은 거지. 열차포? 열차는 내가 아는 열차겠지? 아까 ‘레일’이란 단어도 있었으니 분명 칙칙폭폭의 그 열차다.

그런데 포는 내가 아는 포인가? 그 두 개가 합쳐질 수 있는 거던가?


산을 치우려고 개발한 무언가가 연방 함대를 쓸어버렸다는 비현실적인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무기가 세상에 실존한다고? 아까 PMC니 뭐니 했는데, 애초에 어떤 용병도 연방 함대를 한 방에 쓸어버리진 못할 것 같은데.


“당신 대체 누굽니까?”


다시 돌아온 질문.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전쟁이 터지고, 적국 함대가 나타나고, 이 동네가 폭삭 주저앉게 생긴 마당에 태연하게 내게 말을 걸어온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포탄이 머리 위에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제 발로 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는 소리 아닌가?


피난을 못 해서? 헤이카의 태도를 보면 애초부터 피난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서부 전선.. 뭐시기 수비대 군인이랑 무전까지 했다.


이 사람은 군 관계자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름은 이미 알잖아. 주소도 알고.”

“장난 그만 치고요. 누구시냐고요.”

“알았어. 여기 내 명함.”


건네준 블랙카드 같은 고급진 명함을 받아 확인한다.


헤이카 미켈런.

이클립스 공업 CEO.


CEO?? 대표? 회장? 사장님?


그러고보니 공업 대표의 이름이 뭐였지? 분명 ‘헬렌’ 이란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 명함은..

자세히 보니 이름 밑에 ‘헬렌’ 이라는 두 번째 이름까지 작게 쓰여있다.


“와. 아니, 이런 미친..”

“마지막으로 포부. 산, 꿈이 뭐야?”


포부라니.. 무슨 소릴..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우유나 하나씩 더 달라던 그 여자가 아니다.


대기업 회장. 이클립스 공업의 CEO.

전 세계를 주무르는 기술력의 주인이다.


이건 기회 아닌가?


“이거 면접입니까?”

“맞아. 지금 난 그쪽을 채용할까 고민 중이야.”


이 여자는 아마 처음부터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옛날 모습도.


“고백 하나 합시다.”

“어머.”


시계를 풀었다. 그리고 헤이카를 향해 손목 안쪽을 내보였다.


익숙한 문신. 그리고 이 세상에선 공포의 대상으로 통용되는 상징.


지우려고 했건만, 이걸 볼 때마다 업소에서 기겁하며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숨기고 다니던 비밀.

어젯밤의 쥐잡이처럼 이 문신을 아는 놈들은 다들 기겁하며 머리부터 박고 본다.


하지만 헤이카는 달랐다.

오히려 눈에 빛을 내며 남들은 함부로 쳐다도 못 보는 내 문신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안 무서워요?”

“그렇게 무섭진 않네. 문신이 사람 잡는 것도 아니고.”

“그쪽 말대로 저 뒤가 좀 구린 놈입니다.”

“알아.”

“그런데 머리에 털 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절머리나서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여기 정착했죠. 제대로 살아보려고.”


그래. 이게 나다.

‘산’ 이라는 인간의 추악한 과거다.


“예전엔 사람도 죽여봤고 더러운 돈도 많이 써봤습니다.”

“그렇겠지. 네 고향에선 걸음마랑 같이 칼 쓰는 법을 배운다니까.”

“...한 마디로 전 그쪽 같은 깨끗한 회사에 안 어울려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헤이카는 갑자기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눈은 이미 잔뜩 웃고 있다.


“크흠. 네 눈엔 공업이 깨끗해 보이는구나.”

“....”

“걱정하지 마. 우리가 연방이나 자할의 양아치들처럼 구정물에서 노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올드 아일랜드의 기사들처럼 정의로운 단체도 아니고.”


헤이카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것 같다.

그리고 내 머릿속은 요동쳤다.


저 손을 잡으면 많은 게 바뀔 것 같은 느낌이 온다.


“마침 새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솜씨 좋은 나쁜 놈이 필요해.”

“저 착하게 살려고 나왔는데요.”

“그런 사람이 어젯밤에 사람을 죽였어요?”

“....”


역시 얕볼 수 없다. 이 여자는 보통이 아니다.


“마냥 나쁜 일 하려는 건 아니야. 좋은 사업에 나쁜 사람이 필요한 거지.”

“뭔 소립니까?”

“한 마디로 착한 일 하는 나쁜 놈이 필요해.”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왜 웃음이 나오려는지 모르겠네.


“자, 다시 시작하자. 포부가 뭐야?”


솔직히 연습해본 적 있다. 대기업 면접.


이런 촌동네에 살면서도 미래는 확실히 그리고 있었으니까. 깨끗한 돈을 원 없이 만지려면 대기업뿐이니까.


그래서 정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몇 번 거울 보고 중얼거려봤다.

포부? 당연히 준비했다. 그건...


‘뭐였지.’


유감스럽게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으며 내 머릿속은 백지가 됐다.


이건 망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다 죽는 겁니다.”

“오..”


헤이카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악수라긴 뭐하지만, 일단은 악수인 것 같다.


“...이게 마음에 들어요?”

“내일부터 출근하자?”

“얼마 줍니까?”


헤이카가 손가락을 폈다. 그리고 조그만 입술을 움직여서 숫자를 말하는데..


인생 진짜 재밌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욕망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 공조 수사(4) - 혼란의 도시 +1 22.05.26 569 22 15쪽
14 공조 수사(3) - 테러 +3 22.05.25 621 26 18쪽
13 공조 수사(2) - 분쟁의 씨앗 +2 22.05.24 580 28 13쪽
12 공조 수사(1) - 만남은 사건 현장에서 +2 22.05.23 637 28 18쪽
11 욕망 시대의 에이전트 +4 22.05.20 683 27 15쪽
10 첫 업무(4) - 처형인 +2 22.05.20 649 30 16쪽
9 첫 업무(3) - 폴른 레인저(Fallen Ranger) +2 22.05.19 720 25 18쪽
8 첫 업무(2) - 파스트라스 +2 22.05.18 731 29 15쪽
7 첫 업무(1) - 미켈로 +3 22.05.17 848 30 15쪽
6 노페이스(No-Face) +4 22.05.16 1,029 35 17쪽
5 이클립스 공업 +3 22.05.13 1,297 42 19쪽
» 산(3) - 면접 +2 22.05.13 1,383 49 20쪽
3 산(2) - 최악의 하루 +2 22.05.12 1,703 50 17쪽
2 산(1) - 욕망 시대의 일꾼 +4 22.05.11 2,763 70 23쪽
1 프롤로그 +6 22.05.11 4,350 80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