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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13.11.07 00:20
최근연재일 :
2018.07.23 00:16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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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7
추천수 :
75
글자수 :
200,649

작성
13.11.1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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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
추천
24
글자
25쪽

#1. 겨울에 피어난 꽃

DUMMY

딸아.

기억하고 있니?

처음으로 네게 귀엽다고 말한 이가 누구인지.

처음으로 네게 예쁘다고 말한 이가 누구인지.

처음으로 네게 사랑한다고 말한 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딸아.

너는 알 수 있니?

마지막으로 네게 귀엽다고 말할 이가 누구인지.

마지막으로 네게 예쁘다고 말할 이가 누구인지.

마지막으로 네게 사랑한다고 말할 이가 누구인지를.


나는 늘 그 사람이 하나란다.

내 오늘의 시작과 끝도, 내일의 시작과 끝도 늘 그 사람이며.

내 사랑의 시작도, 끝이 있다면 끝마저도 늘 그 사람이란다.

그것은 내게

불현듯 다가온 계시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피하고 싶지 않은 행복이란다.


사랑하는 딸아.

너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언제나

언제쯤 그 사람에게 갈까를 생각한다.

네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때가 내게의 언제가 되겠지.


미안하지만

오늘도 나는 네게서 그 사람만 보고 있구나.


- 2149년 1월 1일. 엘레나에게 보내는 아빠의 편지.



***



키르센스 절대력 2130년 12월 마지막 주.

이스트번 시청 앞. 유난히 넓은 광장으로 칼바람이 들이쳤다.

엘린츠는 광장 앞에 서서 시청의 건물들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맞나······.”


7대마왕국 백성이자 이스트번 시민인 엘린츠에게 시청은 익숙한 곳이었지만, 칼바람을 타고 눈이 흩날리는 시청 앞 광장은 어쩐지 낯설었다.

그는 데스크 직원의 안내를 받아 행정국 부국장실로 들어갔다.


“오느라 고생 많았소. 먼저 부친의 명복을 비오이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부국장의 말투는 딱딱했다.


“서류와 신분증은 가져왔소?”

“여기 있습니다.”


엘린츠가 품속의 서류를 내밀자 부국장은 돋보기를 붙들고 서류를 꼼꼼히 확인했다.


“정확하구려. 금방 처리하겠소이다.”


부국장은 뚱뚱한 몸을 어기적거리며 사무실 안쪽의 밀실로 들어갔다.

엘린츠는 응접실에 앉아 재스민 차를 머금으며, 부국장이 말투만 딱딱할 뿐 좋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행정국 요인들이 재작년엔가 한 번 물갈이가 되었었지. 대마왕 전하께서 그런 점에는 가차 없으시니······.”


2년 전. 시청 행정국장 등 몇 사람이 비리에 연루되었다. 열흘간의 조사 후 연루자들은 작위를 박탈당한 후 다른 나라로 추방 조치를 당했다. 행정에 관심이 많은 엘린츠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윽고 부국장이 엘린츠에게 왔다.


“경. 이쪽으로 오시오.”

“예. 부국장님.”


엘린츠는 시청에 마련된 공소(신관이 없는 간이 종교시설)에 들어가 주신(主神) 키르센스에게 맹세를 올린 후 새로운 신분증과 문장을 받아 들었다.

엘린츠 폰 콜로세린.

가문의 후계자였던 엘린츠는 아버지 엘리노프의 타계(他界)에 따라 작위를 이어받고 남작에 올랐다.

작위 수여식이랄 수도 없는 약식의 절차는 겨우 몇 분이 소요되었을 뿐이었다.


엘린츠는 행정국 건물을 나와 텅 빈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단 한 시간 만에 칼바람은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눈 쌓인 오후의 관도(官道)는 사람 하나 없이 고즈넉했고, 바람이 불지 않아 춥지도 않았다.

엘린츠는 관도 옆으로 펼쳐진 개울을 바라보며 걸었다.


“저런 데서 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개울에서 놀던 것은 10년 전, 즉 그가 일곱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행정이니 후계자니 작위니 하는 단어들을 알 리 없던 시절.

엘린츠는 작위밖에 남지 않은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형. 엘론. ······엄마.”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엘린츠의 코가 대번에 시큰해졌다.


“엄마. 엄마아······.”


8년 전, 어머니 메리사와 형 엘리에드, 동생 엘론이 타고 가던 마차가 길 옆 낭떠러지로 떨어져 세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열여덟 살을 코앞에 둔 엘린츠에게 메리사는 여전히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엘린츠는 개울가에서 살얼음이 만져지는 물을 움키며 세수를 했다.

그는 형과 엘론, 그리고 엄마를 되뇌다 마지막에는 아버지까지 불러 보았다.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엘린츠는 한 시간 반쯤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후우우.”


아무도 없는 집.

엘린츠는 먼저 안방에 들어갔다. 소박하지만 깨끗한 안방은 두 달 전까지 아버지가 썼던 방이었다.

아버지가 어둠의 세상으로 떠난 후에도 그는 이 방을 쓰기를 주저했다.


“아버님. 부족한 제가 오늘 아버님의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이 집의 주인도, 이 방의 주인도 접니다. 부디 굽어살펴 주세요.”


그는 손발을 깨끗이 씻은 후 안방에 들어가 아직도 아버지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방바닥을 조심조심 닦았다. 매일 청소하는 방이라 먼지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엘린츠 남작님. 계십니까?”

“······!”


작위를 받고 돌아온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남작이라 불렀다.


“누구세요?”

“영주님의 집사 틸로프입니다. 영주님 전갈을 전하러 왔습니다.”


엘린츠는 대문을 열었다.

집사가 엘린츠를 남작이라 부른 것은 시청 행정국에서 그가 사는 영지의 영주, 즉 트랄론 폰 도메르텐 남작에게 연락을 했기 때문이리라.


“어떤 전갈입니까?”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시간 날 때 저택에 들러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으음. 한 시간쯤 후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엘린츠는 집사를 보낸 후 자신의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한 시간이 되기 전에 트랄론 남작을 방문했다.


“엘린츠 경. 어서 오게. 앉게나.”

“예. 영주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물론이야. 먼저 남작이 된 것을 축하하네. 나와 작위가 같군. 허허허!”

“쌓은 학식이나 덕망은 영주님 서재의 책 한 권만 못합니다.”


엘린츠의 답변에는 약간의 가식이 묻어 있었다.

차가 들어오고서야 트랄론은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경은 요새도 개인 지도를 하나?”

“입시생들이라 모두 끝났습니다.”

“가르친 학생들은 어떻게, 성과가 잘 나왔나?”

“두 학생 중 한 학생은 황립대학 신학부, 한 학생은 왕립대학 법학부에 합격했습니다.”

“허어! 그렇군. 경에게 몇 명 더 소개해 줄 걸 그랬어. 경에게 미안하지만, 본인이 다른 선생들에게 하도 부탁을 많이 받아서 학생들을 소개시켜 줬는데, 그쪽은 성과가 좋지 않았다네.”

“······.”

“경도 내년에 왕립대학에 들어가면서 입학 동기들을 키워 낸 건가?”

“학생들이 많이 노력했습니다.”

“어쨌든 그렇고, 경에게 한 사람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하네만. 가능하겠는가?”


엘린츠의 답은 금방 나왔다.


“영주님의 부탁인데 거절할 수는 없지요.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좀 많아······.”


트랄론이 말을 흐리는 모습을 보며 엘린츠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다른 개인 지도 교사들에게 의사를 타진했는데 고개를 저었고, 둘째로 자신은 트랄론의 우선순위에서 맨 뒤에 있다는 점.


“말씀하십시오.”

“교습 시간이 오로지 주말 오후 2시에서 4시뿐이고, 1월 첫 주말부터 시작하여 7월 말까지만 하겠다더군. 과목도 하필이면 수학과 역사만이라네.”

“알겠습니다. 주소를 알려 주시면 찾아가겠습니다.”

“로즈테인 영주의 딸이야.”

“딸이요?”


엘린츠는 지금까지 여학생에게 개인 지도를 한 적이 없다.


“흐음. 하긴. 그게 가장 골치 아픈 조건이겠군.”

“아닙니다.”

“애가 이상하진 않고, 이제 7학년 들어가니 부담은 덜하겠지. 그런데 경. 정말로 할 수 있겠는가?”

“예. 하겠습니다.”


엘린츠는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트랄론이 미리 말해 두었다는 1골드의 교습비는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그만큼 부담스럽기도 했다.

1월 첫 주말은 아흐레 남았다.



***



키르센스 절대력 2131년 1월 6일.

새해의 첫 주말이 왔다.


“샐리 로즈테인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여학생이 활짝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엘린츠에게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은 뺍니다.#


“악수하기 싫으세요?”

“으음. 악수였구나.”


엘린츠는 샐리의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샐리의 손으로부터 따뜻한 느낌이 전해졌다.

애가 이상하지 않다는 트랄론의 말이 엘린츠의 뇌리를 지나갔다.


“샐리라고 부르면 되겠어?”

“네.”

“이름이 부르기 편하네? 반가워.”

“네!”

“이제 앉자. 수업해야지. 수학이든 역사든, 어서 하자.”

“네? 벌써요?”

“시간이 간다. 너와 내게 다시 못 올 시간이다.”

“선생님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네 실력과 열정이 궁금하다.”

“저는 선생님한테 궁금한 거 많은데요?”

“정 그러면 쉬는 시간에 물어. 15분은 쉴 테니까.”

“선생님 진짜 왕립대학에 차석 합격했어요?”

“뭐부터 할래?”

“그럼 돈도 안 내고 대학 다니겠네요?”

“역사부터 하자.”


엘린츠는 역사책 두 권을 꺼내어 새것을 샐리의 앞에 놓았다.


“우와! 선생님 좋겠다. 백성들 세금으로 공짜로 대학 다니고.”

“맞는 말이지만 좋지는 않아.”


엘린츠가 평행선 같던 대화를 연결시켰다.


“작년 입시에서 4등을 해서 반액 장학생이 됐는데, 그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1년을 꿇었어.”

“······!”

“이 나라 백성들이 내 은인이요, 백성들께 나는 죄인이다.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거야.”


사실 엘린츠에게는 4년 치의 등록금보다 훨씬 많은 재산이 있다. 그렇지만 그 돈에 손댈 수 없기에 죄인인 것이다.

물론 그런 얘기를 샐리에게 말할 필요는 없기에 그는 입을 닫았다.

1분가량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금 수업을 하지 않으면 나는 너에게도 죄인이 된다.”

“죄송해요.”

“죄송한 일은 아니야.”


엘린츠는 죄인 될 일이 없는 샐리가 부러웠다.

왕립대학의 신입 고학생, 혼자뿐인 남작가의 가주.

엘린츠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신화시대 얘기부터 할까?”

“역사 재미없어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 알지?”

“아! 파지티온 각하께서 하신 말씀이죠? 그거?”

“그래. 중요한 말씀이야. 꼭 새겨 두고 책 보자.”

“······.”

“대황 폐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떤 법을 만들고 어떻게 백성들을 보듬으셨는지 알아야지.”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역사는 재미없어요.”

“그러면 수학 하자.”

“수학은 더 싫어요.”

“역사.”

“재미없어요.”

“수학.”

“싫어요.”


또 평행선.


“역사와 수학 하자고#이 부분은 이대로 해 주세요.# 들었어.”

“그건 엄마가 얘기한 거예요. 나는 역사랑 수학이 제일 싫다고요.”

“재미없고 싫어도 해야 할 공부가 있다.”

“선생님 진짜 열여덟 맞아요? 어떻게 아빠랑 똑같이 얘기하세요?”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학문의 목표니까.”

“이이이이!”


샐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어요! 그럼 역사부터 해요. 절대력 원년부터 가르쳐 주세요.”

“좋아. 지금부터 두 시간이다.”

“네? 선생님. 벌써 15분 지났는데요?”

“수업했던 건 아니었다.”

“이 수업 4시까지잖아요.”

“그걸 알면 나 들어오자마자 절대력 원년부터 하자고 했어야지?”

“이이이이!”


결국 수업은 15분 늦게 끝났고, 로즈테인 영주의 집사가 엘린츠를 찾아왔다.

엘린츠는 관도를 걸으며 방금 했던 수업과 샐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샐리는 수업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자신의 조그만 칭찬에도 밝게 웃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샐리에 대해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



엘린츠는 다음 날도 샐리에게 개인 지도를 했다.


사실 샐리는 개인 지도 교사를 고르는 데 꽤 까다로운 편이다. 만약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트랄론 남작을 통해 오지 말라는 전갈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전갈은 오지 않았고, 엘린츠는 제시간에 맞춰 샐리를 찾아갔다.


“선생님! 오늘부터는 제 방에서 해요.”

“안 돼.”

“저는 여기보다 제 방이 편해요.”

“나는 여기보다 네 방이 불편하다.”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네 방이라서 불편한 거야. 수학책 꺼내.”

“누워서 하셔도 돼요. 그러다 피곤하면 주무셔도 되고요.”

“신발 벗음 발 냄새 난다. 나 좀 심해.”


평행선은 없었고, 엘린츠는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해 내고야 말았다.


“너 수학은 많이 했구나.”

“피잇! 기본은 알아요.”

“이건 7학년 과정인데. 혹시 너 방정식도 풀어?”

“방정식은 많이 풀어 봤어요. 세모랑 동그라미를 못 해서 그렇지.”

“7학년이 세모, 동그라미가 뭐냐?”

“그리고 대체 왜 수학 천재들은 이름이 전부 다 ‘스’자로 끝나고, 무슨 공식마다 사람 이름이 붙어 있어요?”

“공식을 발견하거나 증명한 사람 이름이야. 너도 멋진 공식 만들면 ‘샐리의 공식’이 돼.”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잘 알고 있네.”

“아 선생님! 제자한테 희망을 줘야지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네가 지금 희망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의 수업은 절반은 수업이요 절반은 말싸움이었다.


“어휴. 내가 해야 할 수업은 안 하고 학생하고 입씨름이나 했네.”


엘린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으로 향했다.



***



같은 시각. 샐리는 레이네의 집에 왔다.

샐리가 4시까지밖에 수업을 못 하는 이유는 친구들을 만나기 때문이었다.


“얘! 나 새로 온 선생님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

“······?”

“멋진 수학 공식 만들어 내면 샐리의 공식이 될 거라면서, 나는 그런 거 못 한다네?”


뒷말은 분명히 자신의 입으로 한 소리였다.


“내 질문엔 대답도 안 하고, 맨날 수업 얘기만 해, 재미없게. 그리고 딴 얘기 한 시간만큼 수업을 꼭 더 하더라? 세모, 동그라미라고 했다고 뭐라고 하질 않나.”

“뭐 물어봤는데?”

“수학 천재들 이름은 왜 전부 다 ‘스’자로 끝나냐고.”

“대답 안 할 만한데?”

“뭐어? 야! 너 너무하는 거 아냐?”

“어? 아니? 너무하는 거 아닌데?”

“이이이이!”


레이네는 샐리가 개인 지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그녀가 부러웠다.

두 사람은 보통학교에서도 4년간 짝꿍으로 지냈고, 학급이 갈라진 후에도 늘 함께했다.


샐리가 입을 비죽거리자 레이네는 재빨리 자신의 캔버스 앞에 앉았다.


“너, 그 표정 그대로 있어 볼래?”

“싫어!”

“그럼 넌 공부해. 나는 그림 그릴게.”

“싫어!”

“그럼 내가 공부하고 네가 그림 그릴래?”

“야!”


어쨌든 레이네는 오늘도 샐리의 특이한 모습을 그리는 데 실패했다.



***



1월 17일.

엘린츠는 왕국 수도인 미들번 시에 오랜만에 들렀다.

작년에 그는 미들번 동부의 보통학교에서 행정 심화 과정 학생들의 조교를 맡았다. 학교에서는 그에게 재계약을 요청했고, 그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

학교의 교장은 그에게 격려금을 주었다.


“노고 많았어.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하네.”

“감사합니다.”

“달포 후부터 또 엘린츠 군, 아니 경의 힘을 빌리겠네. 그동안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마음도 좀 추스르게나.”


엘린츠는 격려금을 가슴 속에 고이 품고 학교를 나왔다.

꼬르륵, 배 속 시계가 식사 시간을 알렸다.


“좋은 것 먹고 힘이나 내 볼까?”


엘린츠는 시내에 나올 때면 값싼 분식이나 튀김 등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남작의 문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좋은 것’을 먹으러 갔다.


“여기, 삶은 잡고기랑 귀리술 한 잔이요!”


엘린츠는 미들번 중앙시장 구석에 위치한 푸줏간에 앉았다.

사실 그는 고기를 매우 좋아한다. 다만 형편이 되지 않아 자주 먹지 않는 것뿐이다.


“오늘은 운이 좋네. 등심살까지 얻어걸리고.”


잡고기는 부위별로 잘라 낸 고기 중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고기만을 한데 모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푸줏간에서 파는 고기 중에서 삶은 잡고기가 가장 싸다.

엘린츠는 고기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부인 듯한 텁석부리 아저씨와 통통한 아줌마가 고기를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자신의 옆 테이블에 있던 젊은 커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제가 먹어도 됩니까?”

“그러세요.”


점원 아줌마는 커플이 먹던 고기를 엘린츠의 식탁에 놓아 주었다.

커플은 안심살 양념 찜을 2인분이나 시켜 놓고 절반 정도를 남기고 갔다.


“연인이 있으면 이런 거 안 먹어도 배부르나?”


엘린츠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든든히 배를 채우고 술잔까지 비운 후 역마차 정거장으로 갔다.

포만감에서 비롯된 기쁨도 잠시.

마차가 움직이니 얼마 전까지 이 마차를 매일 탔던 기억이 떠올랐고, 누워 있던 아버지의 깡마른 모습도 떠올랐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형, 동생으로 옮겨 갔다.

다섯 식구 중 남은 사람은 이제 열여덟 살인 자신 혼자뿐.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엘린츠의 표정은 한동안 굳어 있었다.



***



햇살이 청명한 오후.

엘린츠는 이스트번 시내에 들어섰다.

평상시에는 곧바로 집에 가서 공부했겠지만, 오늘따라 그는 시내 주변을 걷고 싶었다.

시내 중심의 번화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엘린츠는 시내 거리를 걷다가 ‘소원의 연못’ 앞에 멈추었다.

연못 안에는 시민들이 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이 가득했다.


“내가 빌 만한 소원이 있을까?”


엘린츠에게는 안녕을 기원할 사람이 없었고, 자기 자신을 위해 비는 것은 민망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이 연못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한곳에 멈추었다.


“어?”


뭔가가 보였다.

그래서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꽃인가?”


엘린츠는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꽃이 필 시기가 아니다. 그런데 조그만 꽃송이가 연못의 이끼 낀 돌 틈을 비집고 피어나와 있었다.

상아빛 다섯 개의 꽃잎 사이에 조그맣게 보이는 빨간 암술.

보라색인 것도 같고 와인색인 것도 같은 영롱한 빛이 내비치는 꽃받침.

미처 다 피지 못한 이것은 분명한 꽃이었다.

엘린츠는 아예 차디찬 땅바닥에 주저앉아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얕은 바람이 불자 꽃이 사뿐사뿐 흔들리며 은은한 향기를 내뿜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이 꽃······. 꽃이, 참 예쁘다. 귀엽기도 하고.”


그는 혼잣말을 하다가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예쁘다, 귀엽다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었던 단어들이어서였다.


‘완전한 정오각형의 모양을 이루며······.’


아니다.

자와 캠퍼스만 있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정오각형 따위와 이 꽃을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같은 듯 같지 않은 듯 오묘한 곡선이 에두른 다섯 개의 꽃잎과, 귀여움을 감추려는 듯 꽃잎 사이로 숨어든 암술.

절묘한 곡선이 조화롭게 어울리며, 단정함을 드러내면서도 수줍어한다!


엘린츠는 그 꽃을 만지고 싶어졌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흔들림을 멈춘 꽃을 향했다.

그런데 그의 손이 꽃잎 근처까지 가서 멈추어졌다.

혹시나 만졌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쪽 주머니를 뒤졌다.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동전 한 닢.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 꽃을 지켜야 한다!

다른 이가 보더라도 만지거나 꺾지 않고, 지금 모습 그대로, 예쁜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키르센스여. 제 간절한 바람을 굽어살피어 이 꽃을 지켜 주시옵소서······.”


소원은 어떻게 빌어야 하는지, 동전을 넣기 전에 빌어야 하는지 넣은 후에 빌어야 하는지, 손을 어떻게 모아야 하는지 등등.

엘린츠는 아무것도 모른 채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말한 후 연못을 향해 동전을 던져 넣었다.


“후우우.”


짧은 기도를 끝낸 그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눈이 아까의 그 꽃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


없다.

엘린츠는 자신의 눈을 한 번 더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래도 없다.

그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주변의 돌 틈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런데도 없었다.


“이게 뭐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지금은 1월 중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꽃이 필 시기가 아니었다.


“휴우. 내가 헛것을 봤던 건가?”


엘린츠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손조차 대지 않았는데 나타났다 사라진 꽃이라니!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아니야. 키르센스께서 나에게만 그 꽃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 주신 거야. 그렇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속에서 지켜진다는 뜻인가? 아니! 내가 지켜야 한다는 뜻이겠지?”


꽃의 자태와 향기는 그의 머리와 가슴에 뚜렷이 기억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엘린츠의 마음은 편해지다 못해 들떠지기까지 했다.


“꿈속에서 보면 마음껏 만지고, 입도 맞춰 볼 수 있겠지? 아니. 언제든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열여덟 해 동안 꺼내 본 적 없는 말들이어서였을까. 엘린츠의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그는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선생님?”


아는 목소리.


“어? 진짜 엘린츠 선생님 맞네요?”

“샐리?”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분명히 샐리였다.

그리고 함께 다가오는 한 소녀가 있었다.


“선생님! 날도 추운데 무슨 소원을 비셨어요?”


생각해 보니 자신이 빈 소원은 결국 ‘꽃을 지켜 달라’였다.

우습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마음에 엘린츠는 대꾸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안 물어볼게요. 으음······. 아!”


샐리는 옆에 섰던 소녀를 잡아끌었다.


“선생님. 얘는 제 친구예요.”

“레이네라고#풀네임 쓰면 안 됩니다. 3화에서 엘린츠는 레이네가 사는 곳이 보르니온 영지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동창 ‘레이먼 폰 보르니온’을 떠올린 후, 레이네가 레이먼의 여동생이라고 추론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설정상 중간성은 가문의 주인과 후계자에게만 붙어요.# 해요.”

“으음.”


샐리의 친구가 엘린츠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존댓말을 쓸까, 반말을 쓸까.

샐리의 친구라면 귀족일 텐데.

그러고 보니 나도 귀족은 귀족이네.

‘으음’이라는 단어 사이로 세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나는 엘린츠라고 해. 반가워······.”


엘린츠와 레이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엘린츠의 눈이 흔들렸다.

상아빛의 잡티 없는 얼굴.

은은하고 편안한 어둠과 맑고 밝은 별빛을 한데 모아 담아낸 눈.

새하얀 헝겊 머리띠에 가려진 보라색인 것도 같고 와인색인 것도 같은 머리카락.

얼굴 사이로 숨고 싶어 하는 듯하게 수줍게 붉은 입술.

그리고 방금 전 느꼈던 향기.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린츠는 자신도 모르게 레이네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열여덟 해의 삶 중 처음으로 그의 입이 이성(理性)을 배반했다.


“레이네, 라고 했지?”

“네.”

“저, 정말 귀엽고 예쁘구나. ······이름도.”

“······!”


레이네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샐리의 눈이 확 커졌다.


“와! 선생님 밖에 나오니까 사람이 완전 다르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어? 으음.”


샐리의 목소리에 엘린츠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서 주말에 나랑 수업하면 또 딱딱하게 하실 거죠?”

“나는 원래 딱딱한 사람이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엘린츠의 말에 샐리가 피, 하고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시내에 볼일 있어 나왔어.”

“그래요? 우리는 이제 나오는 길이었는데.”

“그렇구나.”

“선생님. 저희 갈게요. 봐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어, 그래.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

“쳇. 또 아빠같이 말씀하시네. 갈게요! ······레이네? 가자.”

“응. ······안녕히 계세요.”

“어? 으응.”


레이네가 엘린츠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샐리가 그녀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두 사람이 엘린츠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후우우.”


엘린츠는 엉거주춤하니 서서 멀어져 가는 두 사람, 아니 그중 한 사람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런데.


‘앗!’


그 사람이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보았다.

엘린츠와 레이네의 눈이 또 한번 마주쳤다.

엘린츠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조심스레 흔들며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여읜 후 처음으로 지어낸 미소였다.

그 미소가 레이네의 입가로 옮겨간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에도 뭔가가 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레이네의 고개가 다시 샐리 쪽으로 돌아갔다.

레이네와 샐리가 길을 돌아 사라진 후에야 엘린츠는 흔들던 손을 내렸다.


“후우우우.”


뭔가 모를 마음에 그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는 자신의 뺨을 두어 번 철썩거리며 때린 후, 아까 꽃을 보았던 돌 틈을 다시 보았다.

돌 틈의 꽃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엘린츠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꽃이,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진사로입니다.

2018년 6월 24일부터 <봄꽃마리>를 재연재합니다.

출판 관련 작업이 진행되다 취소되면서 다시 공개로 돌려놓게 되었습니다.


큰 틀의 내용은 그대로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더 강화되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공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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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 하나 되어 세상의 끝을 향해 나아가다 18.07.15 141 2 22쪽
17 #17. 상처의 운명을 속사화와 시처럼 살다 18.07.14 109 2 24쪽
16 #16.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아픔 18.07.12 90 2 21쪽
15 #15.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며 18.07.11 127 2 24쪽
14 #14. 그들만의 거대한 도전 18.07.06 119 2 19쪽
13 #13. 간절한 마음이 끝에 닿은 날 18.07.04 111 2 22쪽
12 #12. 텅 빈 무대에서도 외롭지 않은 이들의 춤 18.07.03 120 2 21쪽
11 #11. 비 오는 밤 18.07.02 115 2 21쪽
10 #10. 세상을 다 갖다가, 속상하다가 18.07.01 162 2 17쪽
9 #9. 마음이 편해지는 이야기 18.06.29 129 2 21쪽
8 #8. 행복을 품은 그림 18.06.28 100 2 19쪽
7 #7.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18.06.27 117 2 20쪽
6 #6. 가로수길에서의 고해(告解) 18.06.26 106 2 19쪽
5 #5. 예쁘고 귀여워서 더 무서운 소녀 18.06.26 139 2 21쪽
4 #4. 페퍼민트 향기에 씻겨 내려가다 18.06.26 110 3 13쪽
3 #3. 감사의 선물 18.06.25 99 3 17쪽
2 #2. 꿈속에서, 그리고 꿈 밖에서 16.05.16 615 3 19쪽
» #1. 겨울에 피어난 꽃 13.11.10 1,431 2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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