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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13.11.07 00:20
최근연재일 :
2018.07.23 00:16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6,605
추천수 :
75
글자수 :
200,649

작성
18.07.23 00:15
조회
80
추천
2
글자
10쪽

#23. 꽃은 져도 또 핀다

DUMMY

레이네의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


“오빠. 나,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 어요.”


언어 감각이 둔해지고, 억지로나마 삼킨 죽과 물이 배설되지 않는 증상.

소화와 흡수 기능이 멎은 것이다.

엘린츠는 엘레나를 아예 케로딘에게 맡겨 놓고 레이네의 곁에 머물렀다.


“엄마는 내가 웃지 않아서 늘 걱정이셨어. 학교에서 우등상을 받아 와도, 형과 엘론이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도, 심지어 삼형제가 싸우다가 아버님께 혼날 때도 무표정이었으니까······.”


엘린츠는 레이네를 자신의 무릎에 눕히고 눈을 마주치며 이것저것 이야기했고, 레이네는 그저 듣기만 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갔다.


“레이네. 많이 두렵지?”


레이네의 눈썹이 흔들렸다.


“솔직히 이제는 나도 두려워. 지금 레이네가 얼마나 많이 아플까. 가늠이 되질 않아.”


네! 그래요. 나 하나도 안 아파서, 느낌이 없어서, 아니, 오빠랑 함께 느낄 수 없어서 무서워요. 차라리 내일 이 눈이 안 뜨였음 하는 거, 오빠도 알죠? 그래도 오빠. 지금처럼, 잘 견딜 수 있죠?


레이네의 눈에는 눈물조차 고이지 못했다.

그녀가 아픈 곳은 마음뿐이었고, 부부는 그게 두려웠다.


“내가 레이네와 함께하고 싶은 게 있어. 해도 되겠어?”


네! 뭐든지요. 다 받을게요!


레이네는 바람 앞 촛불 같은 힘을 내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할게.”


엘린츠는 침대 아래의 넓은 공간에 두툼한 요를 깔고 그 위에 레이네를 눕혔다.

레이네의 목과 등에 베개를 받치고 세숫대야 두 개에 따뜻한 물을 뜬 후, 와인빛 머리카락을 감기고 얼굴을 씻어내고 영양크림까지 얇게 발랐다.


“하여튼 내 아내, 얼굴은 타고났어. 색조 화장 같은 거 안 해도 어쩜 이렇게 귀엽고 예쁜지.”


레이네는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나 씻고 올게.”


엘린츠는 레이네를 침대에 눕히고 욕실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세숫대야의 물을 갈아들고 나온 다음 등불을 하나만 남기고 모두 껐다.


‘······!’


레이네가 놀란 것은 엘린츠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침대에 올라와서였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있는 건 부끄러워. 그렇지만 우리는 동등하지? 레이네는 부끄러우면 눈 감아.”


엘린츠는 레이네의 옷을 모두 벗겼다.

근육이 모두 사라진 다리와 팔의 살가죽이 눌어 붙듯이 침대에 달라붙었다.

엘린츠는 따뜻한 물을 수건에 적셔 내어 레이네의 온몸을 닦아 낸 후, 그녀가 좋아하던 향수를 여기저기에 묻혔다.

그리고 설마 하던 생각을 증명해 주었다.


“저기. 레이네? 나는 오늘 밤에 꼭 하고 싶어.”


엘린츠의 이 말에 레이네는 자신의 두려움을 집어던질 수 있었다.

마지막이 분명한 두 사람의 부부 관계는 꽤 길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입맞춤이 서서히 올라왔다.

레이네의 등과 가슴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감각을 빼앗지 않은 키르센스 신에게 감사할 수 있었다.

기나긴 입맞춤과 포옹 속에서 엘린츠는 오랫동안 절정을 토해 냈고, 레이네는 그의 몸짓에서 행복을 느꼈다.


“우리, 오늘은 엘레나랑 함께 자자.”


엘린츠는 레이네에게 엘레나를 안겨 주었고, 자신은 두 사람 모두를 끌어안은 후 레이네와 이마를 맞대었다.


“고마워, 레이네. 힘들지 않아?”


아니에요! 오빠. 너무 고마워요. 나는 좋아요.


레이네의 의지가 흐릿해졌다.


“참 행복해. 그리고 레이네. 사랑해.”


네. 나, 나도 사랑해요······.


레이네의 입 모양이 그것을 말했다.


“잘 자.”


레이네는 작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엘린츠도 눈을 감았다.


***


얼마나 지났을까.


“으애앵!”


엘레나의 울음소리에 엘린츠가 눈을 떴다.

그는 엘레나를 안아 든 후 레이네의 얼굴을 보았다.


“레이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과 약간 헝클어진 와인빛 머리카락.

깊은 잠에 빠져든 듯 고통 없는 표정.


얼굴을 만졌다.

차갑다.

체온이, 없다.

가슴을 만졌다.

잔잔하다.

박동이, 없다.


“으애애앵!”


엘레나가 끝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레이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늘 고마워. 앞으로도······.”


엘린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날은 2135년 10월 28일.

엘린츠의 아버지인 엘리노프 남작의 기일과 같은 날이었다.


「내 삶의 유일한 사랑.

나의 영원한 짝 엘린츠 오빠에게.

머지않아 내 겉모습이 사라져요.

아픔 없는 비정상의 육신이 정신을 갉아먹고,

끝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이 끔찍한 병 속에서.

힘들어하던 나를 지켜 주어 고마워요.

함께했던 시간 중 단 한 순간도 나는.

혼자 아파했던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아무런 후회 없이 믿을 수 있어요.

나의 그대, 내 유일한 남자인.

우리 오빠의 삶에서 내가.

바로 이 레이네가.

단 한 명의 귀엽고 예쁜 여인임을.

그리고 나 역시 늘 그랬음을.

손이 서서히 무뎌지니.

이제 여섯 달도 남지 않았을 거예요.

그 시간 동안에도 오빠는 내게 늘 한결같음을 믿어요.

그래서 오빠에게만 내 마음을 남기니.

내 영혼을 대신하여 오빠가 이 마음을 전해 주세요.

내 육신이 땅에 묻혀도.

내 영혼은 오빠의 곁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 내 소중한 사람들.

우리 아빠와 엄마,

어머님과 레이먼 오빠, 레이첼 언니,

샐리와 수디아에게.

늘 감사했음을 전해 주세요.

그리고 잘 알겠지만.

오빠와의 약속.

매달 하나씩 자화상을 그려 주겠다던 그 약속은.

오빠가 마흔 살이 되는 해.

2153년까지만 지킬게요.

그 전에 궁금해도 꺼내지 않을 것도 역시 믿을게요.

오빠의 현명함과 나의 아름다움을 닮은

우리의 딸 엘레나.

오빠는 잘 키울 거예요.

이 편지를 쓰면서도 걱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오빠.

어느 순간 오빠의 주위에.

봄꽃마리를 닮은 모습이 보이거나.

그 꽃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느껴진다면.

그건 내가 오빠의 곁에 있다는 뜻이에요.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늘 내가,

이 레이네가.

보이지 않는대도 가까이에 있음을 잊지 말아요.

그래서 나는 기쁠 거예요.

움직이지도 못하는 육신에 묶인 영혼이

집에만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오빠의 걸음걸이를 따라.

영지 주민들의 집과 경비대,

왕립대학과 시장 거리, 사랑의 분수,

오빠의 열정을 다할 일터를 누비며

엘레나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나는 지금만큼, 아니.

지금보다 더 행복할 거예요.

비록 내가.

못다 한 일을 많이 남긴 채.

우리의 만남보다 긴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있겠지만,

오빠가 나와 함께.

주어진 일을 모두 해낼 것을 믿기에,

아프지 않아 더 아픈 병.

조용히 내 육신을 조여 오는 무서운 손길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후회 없이 오빠의 곁에 머물 것을 다짐할 수 있어요.

오빠가 늘 나를 잊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나를 생각하고 그리워할 것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믿어요.

짧지만 깊었던 오빠와 나, 우리의 사랑.

늘 잊지 않고 감사할게요.


2135년 4월 28일, 레이네 콜로세린 씀」


***


엘린츠는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큰절을 올렸다.

레이몽드 자작은 생모의 운명을 따른 딸이 가여워 안방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레이네의 육신은 귀인의 안식처의 12대 정실부인의 자리에 묻혔고, 그녀의 묘지에는 엘린츠가 직접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엘린츠는 레이네의 옆자리에 섰다.


“이 자리는 내가 묻힐 자리야.”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이었지만, 아빌런과 샐리 부부도, 수디아도, 클라시오도 고개만 끄덕였다.


***


11월 2일 자정 직전.

레이네의 장례에 대한 모든 절차가 끝났다.


“고마웠어. 은혜 잊지 않을게.”


엘린츠는 미소까지 지으며 절친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만질 수만 없을 뿐이야. 고통스런 육신의 속박에서 해방됐으니 기쁜 일이지.”


엘린츠가 미소 짓는 이유를 알기에 절친들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빌런의 마차에 여섯 사람이 탔다.

레이네는 없지만 엘레나가 있어서였다.


“너, 앞으로 어떡할 거냐?”

“성직자 시험이 한 달쯤 남았어. 내년부터는 개인 지도도 다시 하고, 이제 틈틈이 공부도 해야지.”


엘린츠는 엘레나를 안고 미소 지으며 답했다.


***


2136년 2월 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 엄숙한 혼례의 의식은 키르센스 신의 작품이요 의지입니다. 신랑 구드멜 군과 신부 초피나 양은 서로의 영혼이 서로의 신앙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키르센스 신과 프리스트(priest) 엘린츠의 마음입니다.”

“우와아아!”


엘린츠는 시험에 합격하고 서품 연수 과정을 수료하여 성직자가 되었다.

이날의 의식은 성직자로서 그가 집전한 아홉 번째 의식이었다.

새로운 부부에게 꽃과 꽃잎이 뿌려졌고, 엘린츠는 건강하게 잘 살라는 덕담을 부부에게 남기고 자신의 저택에 지은 공소를 나왔다.

식장의 하객들이 그에게 깊이 목례했다.

엘린츠는 이제 평일 오후에는 개인 지도를, 주말에는 성직자로서 의식 집전을 하고 있다.

왕립대학 복학은 올해 8월에 할 예정이다.


“레이네. 우리 이날 뭐했는지 알지?”


엘린츠의 혼잣말은 결국 영혼의 아내와 나누는 대화였다.


“그대의 영혼이 내 곁에 머문 지 백 일이야. 고마워.”


엘린츠는 안방에 들어가 옷을 정장으로 갈아입은 후 역마차를 타고 미들번 시를 나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보르니온 영지였다.


열다섯 살의 레이네와 추억을 쌓았던 영지 입구의 연못.

엘린츠의 눈이 커지며 미소가 지어졌다.


“레이네. 봄꽃마리야. 올해도 봄꽃마리가 피었어.”


언제나 한 송이만 피었던 자리에 올해는 두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것은 지금 레이네가 엘린츠의 곁에 있다는 증거이리라.


“고마워, 레이네. 정말 고마워.”


엘린츠는 몸을 낮춰 앉아 코를 내밀었다.

은은하고 따뜻한 봄꽃마리 향기가 그의 안으로 들어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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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꽃은 져도 또 핀다 18.07.23 81 2 10쪽
22 #22. 영혼이 머무를 준비 18.07.20 63 2 14쪽
21 #21. 하루를 한 달처럼 18.07.19 116 2 13쪽
20 #20. 조금만 더 천천히, 조금만 더 오래 18.07.18 150 2 15쪽
19 #19. 함께 있지 않을 때도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어 행복하다 18.07.17 109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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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아픔 18.07.12 90 2 21쪽
15 #15.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며 18.07.11 127 2 24쪽
14 #14. 그들만의 거대한 도전 18.07.06 119 2 19쪽
13 #13. 간절한 마음이 끝에 닿은 날 18.07.04 111 2 22쪽
12 #12. 텅 빈 무대에서도 외롭지 않은 이들의 춤 18.07.03 120 2 21쪽
11 #11. 비 오는 밤 18.07.02 115 2 21쪽
10 #10. 세상을 다 갖다가, 속상하다가 18.07.01 162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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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18.06.27 117 2 20쪽
6 #6. 가로수길에서의 고해(告解) 18.06.26 106 2 19쪽
5 #5. 예쁘고 귀여워서 더 무서운 소녀 18.06.26 139 2 21쪽
4 #4. 페퍼민트 향기에 씻겨 내려가다 18.06.26 110 3 13쪽
3 #3. 감사의 선물 18.06.25 99 3 17쪽
2 #2. 꿈속에서, 그리고 꿈 밖에서 16.05.16 615 3 19쪽
1 #1. 겨울에 피어난 꽃 13.11.10 1,430 2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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