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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13.11.07 00:20
최근연재일 :
2018.07.23 00:16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6,604
추천수 :
75
글자수 :
200,649

작성
18.07.02 21:25
조회
114
추천
2
글자
21쪽

#11. 비 오는 밤

DUMMY

“오빠! 나 저거 사 줘요.”


학교에서 보르니온 영지까지 걷는 길에 튀김과 분식을 파는 천막이 있는데, 엘린츠와 레이네는 하루의 마지막 손님이 되었다.


“오빠 이거 든든히 먹고 가서 공부해요. 공부! 공부!”

“어휴.”


사실 엘린츠는 자작 가문의 영애에게 값싼 음식만 먹이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고, 레이몽드 자작이 이걸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싶었다.


“비싼 걸로 먹어도 되는데.”

“값이 싸서 먹자는 거 아니에요. 지금 시간에 어딜 가요?”

“······.”

“맛있는데 싸니까 더 좋죠.”

“아무래도 내가 달더줌마네 가자고 했던 게 실수였나 봐.”

“오빠가 얘기 안 했음 내가 가자고 했을 걸요? 샐리랑 수디아는 분식 안 좋아하니까? ······에이! 거긴 왜 문을 일찍 닫는 거야.”

“5, 6학년 애들이 거길 휩쓸면 재료가 남아나질 않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할 말이 더 많아지는 진리를 경험하고 있었다.


***


3월 17일은 햇볕이 따뜻한 토요일이었다.


“나 오늘은 멀리 가기 싫어요. 옆 영지에 조그만 공원이랑 찻집 있는데, 거기 가요.”


이날은 레이네가 돼지 앞다리살 샐러드로 도시락을 싸 왔다. 두 사람의 취향을 절묘하게 절충한 것이다.

둘은 공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아아! 맛있다.”

“돼지고기로는 처음 해 봤는데 괜찮아요?”

“응. ······이렇게 먹으니까 더 맛있네? 정말 고마워.”


엘린츠는 고기와 깻잎, 양배추를 한꺼번에 집고 드레싱을 찍어 가며 꼭꼭 씹어 먹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레이네의 마음도 편해졌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응. 그런데 나 때문에 레이네가 많이 못 먹었지?”

“으응! 나도 많이 먹었어요.”


레이네는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이해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물을 안 가져왔네?”

“잠깐만 있어. 내가 물 가져올게.”


엘린츠가 공원 앞 상점에서 물을 얻어 왔는데, 레이네는 도시락 통을 정리하다 말고 졸고 있었다.

엘린츠는 외투를 벗어 레이네에게 덮어 주고 어깨에 그녀를 기대게 한 후, 고개를 돌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볼을 맞대었다.

꽃향기를 맡는 그의 시선은 벤치 옆에 핀 봄꽃마리로 가 있었다.


***


한 시간 후 두 사람은 근처의 찻집 <함께하는 곳이 우리의 세상>에 들어갔다.

푹신한 소파가 있는 자리에 마주 앉자 레이네는 또 졸았다.


“미안해요. 어젯밤에 그림이 너무 잘 그려져서.”

“금요일에는 늦게 잘 수도 있지. 평일에만 안 그러면 돼. 쉬어.”

“오빠 심심한데······.”

“집에 보내기 싫어서 그래.”

“······.”

“자. 나는 좋으니까.”


엘린츠는 레이네를 소파에 눕히고 외투를 덮어 준 후 그녀를 토닥이며 재웠다.


아! 이거 정말 좋다. 눈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까 그냥 대놓고 봐도 되잖아! 그런데 자는 모습은 열 살배기 아이 같네? 내 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 내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 같은 사람의 연인이라고? 그러니 클라시오가 날더러 날강도라고 하지! 후후후후후후.


엘린츠는 막돼먹은 생각을 주워섬기며 레이네의 얼굴을 바라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레이네는 두 시간 만에 눈을 떴다.


“으으웅. 어? 오빠?”

“응. 잘 잤어?”


이때 레이네는 엘린츠의 말과 눈빛을 보며 다시없을 포근함을 느꼈다.

레이네는 해가 많이 기운 것을 보고 자리에서 와다닥 일어났다.


“나 너무 많이 잤네? 오빠 진짜 심심했겠다.”

“아니야. 나도 열심히 졸았어.”

“풉! 열심히 졸았다고요?”

“응. 함께 있을 때는 최대한 편하게 있고 싶어서.”

“열심히 편했다는 거죠?”

“응.”

“이상하잖아요.”

“그런가?”


엘린츠는 페퍼민트 차를 추가 주문했다.


“오빠가 사 준 것보다는 향이 약하네?”

“그래?”

“네. 그거 우리 식구들이 되게 좋아해요. 나는 많이 못 마셨는데. 치이.”

“잘했어. 가족들이 좋아했으면 더 좋은 거지. 또 사 줄게.”

“으응! 딴 사람 몰래 꿍쳐 놓은 거 아직 많아요.”

“후후후. 그래? 그건 더 잘했어. 아무도 주지 마.”


엘린츠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꼭 좋은 장소에 갈 필요가 없구나.”

“네.”

“장소가 아니라 만나는 게 좋으니까.”

“그렇죠?”


이날 두 사람은 귀가하기 전까지 이 찻집에 머물렀다.


***


엘린츠와 레이네의 만남에 장애물이 나타났다.

4월의 첫 주와 둘째 주 주말 내내 비가 내렸고, 이제 둘째 주가 끝나는 일요일 밤이다.


“어휴. 하늘에 구멍은 왜 주말만 나는 건데?”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비를 맞으며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4월의 주말 중 하루도 만나지 못한 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엘린츠는 세 시간 동안 공부한 후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몸을 펴며 그림에 시선을 던졌다.

3월에 받은 자화상의 제목은 <생각할수록 기쁜 일>이었다. 이 그림에는 자신의 치맛단을 뜯어 길이를 늘이는 레이네의 짙은 미소가 담겼다.

그림은 그것 말고도 두 점이 더 걸렸다.

하나는 <고뇌를 상상하다>로, 엘린츠가 책상에 앉아 펜과 머리를 동시에 붙들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과 구겨진 종이 몇 장이 묘사된 그림이었다.

엘린츠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걸 대체 어떻게 알아냈지? 어쨌든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내 속에 들어앉아 있다니까.”


다른 하나는 <게르네카에서>로, 3월 17일 공원의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겼다. 레이네는 꼭 좋은 장소에 갈 필요가 없다는 엘린츠의 말을 듣고 공원 벤치를 ‘게르네카’, 즉 이상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레이네는 눈뜬 후에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레이네의 머리에 볼을 갖다 댄 엘린츠의 모습과 땅을 보며 배시시 웃는 자신의 얼굴까지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네 어린 애인은 아주 친절하구나? 뭐 했는지 안 물어봐도 다 알려 주네? 젠장.”


클라시오는 그림을 보며 한동안 툴툴거렸다.


“레이네. 고마워. 내 삶에 이렇게 깊이, 기쁘게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엘린츠는 2월의 자화상 <봄꽃마리 세 송이>의 레이네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똑똑.


빗소리에 묻힌 노크 소리가 엘린츠의 귀에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웠다.


똑똑.


현관으로 나가보았다.


똑똑똑똑.


노크 소리가 선명했다.


“누구세요?”


엘린츠의 말에 노크가 멈추었다.


“누구 오셨습니까?”

“······오빠.”

“······!”


듣고 싶었지만 오늘은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목소리.

엘린츠는 깜짝 놀라 마당을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오빠.”

“레이네!”


레이네는 비에 젖은 채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고, 눈이 부어 있었다.


“여, 여긴 어떻게······. 아니. 어서 들어와!”


엘린츠는 레이네를 안방 안쪽의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바닥 다 젖는데······.”

“먼저 씻어. 춥지?”


그는 벽난로의 온수 전부를 욕조에 부어 넣고 찬물을 섞었다.


“이 정도면 따뜻하겠어?”


레이네는 손도 담가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몸부터 녹여. 수건은 많으니까 물기 없이 닦고, 욕실 앞에 가운을 두 벌 놔둘 테니까 둘 다 입고 나 불러. 나는 옆방에 있을게.”

“······네.”


엘린츠는 레이네를 욕실에 두고 나왔고, 욕실 문이 안에서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는 방바닥에 흥건한 물기를 꼼꼼히 닦아낸 후 가운을 꺼내 욕실 앞에 놓고 주방에 들어갔다.


저녁 10시. 두 사람이 만났대도 헤어진 후일 시각.

페퍼민트 차와 크림치즈쿠키를 소반에 올리는 그의 손이 떨렸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왜? 비를 쫄딱 맞았어. 마차를 타고 온 게 아니야. 일요일 밤에 비까지 왔으니 역마차도 들쭉날쭉할 게 뻔해. 그럼 걸어왔다는 건데. 레이네는 우리 집의 정확한 위치도 몰랐어. 도메르텐 영지라는 것만 알고 와서, 어디 들어가 물어보고 온 거잖아! 그리고 눈이 빨갛게 부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아니다. 이유를 묻는 게 중요하진 않아. 좋은 일일 리가 없는데 이유 물었다가 마음만 더 아플 수도 있어. 지금 몸을 따뜻하게 하지 않으면 크게 앓을 거야. 중요한 건 그거야. 잘해 줘야 돼. 레이네는 나를 믿고 여기에 왔어!


엘린츠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오빠.”

“다 입었어?”

“네. 들어와요.”

“응.”


레이네는 가운을 입고 벽난로 앞에 서서 자신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세세히 살펴보다 새삼스런 기분이 들었다.


하나하나 액자에 넣어서 걸어놨네? 이렇게 보니까 내 그림이 전시회에 걸린 것 같아. 그래! 그림의 소유자는 이따금 전시회를 열고, 저 그림들은 오빠 것이니까.


“앉아.”


레이네가 벽난로 옆 흔들의자에 앉았고, 엘린츠는 레이네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레이네는 크림치즈쿠키를 입에 넣었다.


“이거 부드럽고 맛있어요. 오빠가 구웠어요?”

“아니. 클라시오가 줬어.”


말이 잠깐 끊어졌다.


“저기. 레이네?”

“네. 오빠.”

“와 줘서 정말 고마워.”

“······!”


레이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엘린츠는 그녀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잡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많이, 보고 싶었어.”

“······!”


만난 지 두 달이 넘어서야 처음 한 말.

레이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려 하자, 엘린츠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껴안았다.


“흡!”

“많이 아팠어?”


여기서 아픈 곳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리라.

레이네는 대답도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것도 서녀라서 그런 걸까?


엘린츠는 그것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한동안 레이네의 등을 토닥였다.

이윽고 그의 품 안에서 레이네가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어머니가······.”

“어머니가?”

“나보고 빨리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린츠는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내가 저녁 먹다가 빵 조각 흘렸는데 칠칠치 못한 년이라고······. 빈털터리 남작이랑 아주 끼리끼리 잘 만났다고.”

“······.”

“나한테 딱 맞는 사람 만난 거 축하한다고, 꼴 보기 싫으니까 영지 하나 던져 줄 테니 빨리 시집이나 가래요.”


엘린츠는 한숨을 쉬었다.


레이몽드 자작의 정실부인이 검술의 명가 태생이라 했던가? 아무리 서녀라지만 자기 딸에게 검보다 무서운 말을 휘두르다니! 빈털터리 남작은 맞네. 그런데 영지를 던져 준다······. 어떤 가문은 영지가 목표인데. 후작가 출신의 부인에게 그럴싸한 표현까지 기대하는 게 무리인가?


엘린츠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그릇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며 레이네를 조금 더 꼭 안아 주었다.

레이네의 들썩임이 잦아진 후에도 엘린츠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레이네?”

“네.”

“많이 아팠지?”

“······.”

“내 처지가 이래서 더 아······.”

“아니에요!”

“나는 레이네를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끼리끼리라고, 딱 맞는다고 말씀해 주셔서 그분께 감사해.”


엘린츠는 여전히 레이네를 놓아 주지 않았고, 레이네 역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차디찬 비에 젖어서일까.

레이네의 마음을 어루만지던 엘린츠는 이제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처음 안은 여인의 몸.

따뜻한 기운이 깃든 향기가 그의 코를 거쳐 온몸에 쏟아지듯 들어왔다.

오감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움에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레이네에게도 그 느낌이 가감 없이 전해졌다.

자신을 이 세상 유일한 여인으로 보는 이가 자신을 안고 있다.

그래서 전해진다.

그리움과 안타까움, 기쁨, 행복.

그리고 욕망과 인내까지.


얼마나 지났을까.

엘린츠는 레이네를 떼어 내고 몸을 낮추었다.

젖은 눈과 떨리는 눈이 같은 높이에서 마주쳤다.


“괜찮아?”


레이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린츠의 손을 잡았다.


“집에 갈 수 있겠어? 내가 데려다줄게.”

“싫어요!”

“······.”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게요. 아무 데나 누울 자리만 줘요.”

“후우.”


엘린츠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이 순간 정말 자신 없었다.


그래. 밤이 깊었고 비도 많이 오는데 억지로 집에 가면 더 아플 거야. 더 힘들게 하면 안 돼. 그래.


엘린츠는 메모지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래. 솔직히 나도 이 빗속에 그대를 보내기 싫어.”

“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걱정하고 계시겠지?”

“······.”


엘린츠는 메모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레이네는 그의 등 뒤에서 글을 읽었다.


「레이네는 지금 제집에 있습니다.

비를 많이 맞아서 오늘 중 귀가가 어렵기에, 송구함을 무릅쓰고 전갈을 올립니다.

영주님께서 걱정하고 계심을 알고 있으며, 어떤 점을 걱정하실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영주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레이네는 내일 오전 중에 제가 집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내일은 쉬어야 하니 보통학교에 병결 통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일에 관한 질책은 모두 제가 받겠습니다.


엘린츠 폰 콜로세린 올림」


엘린츠는 레이네의 찻잔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웠다.


“마법사 댁에 갔다 올게. 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난롯불에 몸 녹여. 이거 다 마시고.”

“욕실만 잠깐 들어갔다 나올게요.”

“응.”


엘린츠가 방을 나갔고, 곧이어 대문 소리가 났다.

레이네는 방 주변을 에둘러 보았다.


“방이 깨끗하고 단순한 게 딱 오빠 같아. 얼마 전까지 아버님께서 쓰시던 방이랬지. 아버님도 그런 분이셨을까?”


그녀는 벽난로의 불빛을 보며 엘린츠의 집에 온 후의 일을 생각했다.


“나는 혹시라도 오빠가 이 밤에 여기 오면 어떡하냐고 화는 내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데, 와 줘서 고맙다고? 많이 보고 싶었다고?”


얼굴이 빨개졌다.

레이네는 제가 그린 엘린츠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안아 줘서 고맙고 좋았어요. 근데 난롯불에 몸을 녹이는 게 아니라, 오빠 때문에 내가 녹는다고요.”


얼굴 보고는 도저히 못 할 소리이리라.

레이네는 욕실에 들어가 젖은 옷을 헹구고 짜낸 다음, 벽난로 근처의 빨래 걸이에 걸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엘린츠는 페퍼민트 차가 바닥을 보일 때쯤 돌아왔다.


“비 맞았어요?”

“괜찮아. ······옷은 놔두지. 내가 하려고 했는데.”

“내 속옷까지 오빠가 짜게요?”

“······!”


엘린츠의 낯빛이 바뀌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까 레이네를 껴안았을 때 그녀는 맨몸에 가운만 두 벌 걸치고 있었다든지, 이런 사실들.

엘린츠는 민망함을 누르며 욕실에 들어가 찬물로 몸을 씻고 나왔다.


“옷 갈아입을래? 엄마 옷이 몇 벌 있어. 사흘 전에 빨아 놨고.”

“아뇨. 가운도 편해요.”

“집이 좀 그렇지? 비좁고.”

“아담하고 예쁜데요?”

“그림만 예쁘지.”


그 그림이 레이네가 그린 거라, 결국은 이것도 레이네를 향한 칭찬이었다.

잠시 서먹한 분위기 끝에 엘린츠가 얼른 화두를 돌렸다.


“머리는 다 말렸어?”

“네.”

“그럼 이제 자야지.”

“······!”


엘린츠는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 놀랐고, 레이네도 고개를 돌렸다.

어색하면서도 야릇한 공기가 방안을 채웠다.

두 사람은 연인이고 지금은 늦은 밤이며, 이곳은 외부로부터 완벽히 격리된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엘린츠는 일부러 황급히 움직이며 장롱에서 겨울 이불을 꺼내 침대에 놓았다.


“여기 들어와.”

“······네.”

“따뜻해?”

“네.”

“이불 하나 더 덮어 줄까?”


레이네가 고개를 젓자 엘린츠는 그녀의 이불 맵시를 가다듬었다.

눈이 가까이에서 마주쳤다.


“이대로 푹 자. 더워도 이불 차지 말고······.”


그때였다.

쪽.


“······!”


레이네의 볼뽀뽀에 엘린츠의 온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엘린츠는 떨었고, 레이네는 자신의 이불을 눈 아래까지 덮었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


레이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함께 침대에 나란히 누우면 어떨까 하는, 아주 불순한 생각.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똑같이 생각했다.


“난 옆방에서 잘게.”

“네?”

“여기서 따뜻하고 편하게 자.”

“싫어요! 오빠도 여기서 자요.”


엘린츠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래. 옆방에 갔다 올게.”


엘린츠는 옆방의 이불을 침대 밑 공간에 깔고 장작을 벽난로에 더 넣었다.

그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는 옆방에서 잘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빠 평소에 몇 시에 자요?”

“평일에는 새벽 1시, 주말에는 지금쯤. 레이네는?”

“매일 달라요. 어떤 날은 10시에도 자고, 어떤 날은 아침에도 자고.”

“오늘은 빨리 자야 돼. 빗속에서 걸어 다녔으니까. 벌써 늦었어.”

“네. 근데 나는 자려면 불 다 꺼야 되는데.”

“응. 끌게.”


엘린츠는 방에 켜져 있던 등불을 모두 끄고 자리에 누웠다.

새로 넣은 장작이 바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레이네는 침대 바깥쪽으로 기어가서 엘린츠를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오빠.”

“어?”

“나 때문에 공부 많이 못 해서 어떡해요?”

“레이네가 오기 전에 많이 했어.”

“오빠 고마워요.”

“아니야.”

“그리고, 나도 오빠 많이 보고 싶었어요.”

“······!”


엘린츠의 눈이 번쩍 떠졌는데 눈앞이 밝았다. 레이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어!”

“그래서 온 거예요. 울면서도.”

“왜 누워 있지 않고······.”

“오빠 뭐하나 봤죠.”

“어, 어서 반듯이 누워. 찬바람 들겠다.”

“네.”


엘린츠는 레이네를 제대로 눕힌 후 이불을 가다듬어 주고 자리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같은 천장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와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내 마음대로 한 일인데.”

“그래도 비 오는 날에는 오지 마. 내가 갈게.”

“그럼 오빠가 비 맞잖아요.”

“레이네가 했으니 나도 할게.”

“안 돼요.”

“······이제 정말 자.”

“그럴게요. 오빠 잘 자요.”

“응. 레이네도 잘 자.”

“네.”


이때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내일 아침에 눈뜨자마자 서로를 볼 수 있다는 것.

둘은 그 기대를 베개 삼아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엘린츠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했다.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였고, 양배추와 고등어구이를 섞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우와!”

“급하게 만드느라 차린 게 별로 없어.”

“많은데요? 근데······.”

“어?”

“오빠 세수 안 했어요?”

“설마. 일어나자마자 세수부터 했어.”

“어어? 그럼 여기만 안 씻은 거예요?”

“······!”


레이네가 픽 웃으며 엘린츠의 왼쪽 볼을 쓰다듬자 엘린츠의 낯빛이 또 변했다.

사실 레이네는 엘린츠를 놀리려는 의도로 말했는데.


“티가 나?”

“······!”

“알았어. 씻고 올게.”

“아, 아니. 괜찮아요. 근데 이걸 오빠가 다 했어요?”

“밑반찬은 아니야. 샐러드는 처음 했는데 별로 맛없지?”

“으응! 맛있어요.”


샐러드를 씹는 레이네의 가슴이 묘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들을 보며, 그녀는 식빵에 잼을 발라 먹던 평소의 아침 식사를 떠올렸다.


이래서 어머니가 나한테 빨리 시집가라고 하신 걸까?


레이네의 눈에서 미소가 비어졌다.


“샐러드만 먹지 말고 이것도 먹어. 국도 좀 뜨고.”

“네.”


엘린츠는 레이네의 밥에 달걀 프라이를 잘라 얹어 주었다.


***


오전 10시.

두 사람은 엘린츠의 집에서 나왔다.


“나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미안해요.”

“미안한 일 아니야. 어제 통보해 놨어.”


어젯밤의 비가 마치 꿈인 듯, 하늘은 맑게 개었다.

레이네는 엘린츠의 어머니가 입었던 외투를 입었다.


“몸은 정말 괜찮아? 춥지 않아?”

“아주 멀쩡하고요, 하나도 안 추워요.”

“그래도 들어가면 따뜻하게 있어. 음식도 따뜻한 것만 먹고, 차도 많이 마시고.”

“그 얘기, 세 번째인 거 알아요?”


보르니온 영지의 연못을 지나자 엘린츠는 레이네의 외투에서 손을 빼냈다.


“오빠는 이제 미들번으로 가죠?”

“응.”


학부 수업은 못 들었어도 보통학교에서 일은 해야 한다.


“레이네, 혹시 오늘도 그림 그릴 거야?”

“네.”

“그러면 딱 하나만 그려. 무리하지 말고. 알았지?”

“알았어요.”


집 앞에 도착하자 레이네는 입었던 외투를 엘린츠에게 주고 덜 마른 외투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방금 벗은 외투가 엄마 품 같다고 생각했다.


“푹 쉬어. 내일 저녁에 학교로 갈게.”

“네. 오빠도 어서 가요. 조심하고.”


레이네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여느 때처럼 창가에 달라붙었다.

오전의 햇살이 엘린츠의 오른쪽으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빠. 어제오늘 나한테 너무 잘해 줬어요. 나 앞으로 어떡하라고 그랬어요······.”


엘린츠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레이네는 한동안 창가에 서 있다가 캔버스 앞에 앉았다.


뭘 그리지? 안아 준 거? 뽀뽀한 거? 아, 아냐. 그건 못 그릴 것 같아. 벽난로 앞에서 차 마신 거? 그것도 아냐. 에이! 오빠는 왜 딱 하나만 그리라고 한 거야? ······아! 그거 그리면 되겠다.


레이네는 도화지에 제목을 먼저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드는 방 안에서 자신의 숟가락에 달걀 프라이를 얹어 주는 엘린츠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제목은 <어머니가 내게 시집가래요>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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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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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봄꽃마리> 재연재 관련 공지입니다. 18.06.25 499 0 -
공지 출판 관련 공지사항입니다. 16.10.25 261 0 -
24 #24. 에필로그 18.07.23 113 2 7쪽
23 #23. 꽃은 져도 또 핀다 18.07.23 80 2 10쪽
22 #22. 영혼이 머무를 준비 18.07.20 63 2 14쪽
21 #21. 하루를 한 달처럼 18.07.19 116 2 13쪽
20 #20. 조금만 더 천천히, 조금만 더 오래 18.07.18 150 2 15쪽
19 #19. 함께 있지 않을 때도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어 행복하다 18.07.17 109 2 17쪽
18 #18. 하나 되어 세상의 끝을 향해 나아가다 18.07.15 141 2 22쪽
17 #17. 상처의 운명을 속사화와 시처럼 살다 18.07.14 109 2 24쪽
16 #16.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아픔 18.07.12 90 2 21쪽
15 #15.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며 18.07.11 127 2 24쪽
14 #14. 그들만의 거대한 도전 18.07.06 119 2 19쪽
13 #13. 간절한 마음이 끝에 닿은 날 18.07.04 111 2 22쪽
12 #12. 텅 빈 무대에서도 외롭지 않은 이들의 춤 18.07.03 120 2 21쪽
» #11. 비 오는 밤 18.07.02 115 2 21쪽
10 #10. 세상을 다 갖다가, 속상하다가 18.07.01 162 2 17쪽
9 #9. 마음이 편해지는 이야기 18.06.29 129 2 21쪽
8 #8. 행복을 품은 그림 18.06.28 100 2 19쪽
7 #7.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18.06.27 117 2 20쪽
6 #6. 가로수길에서의 고해(告解) 18.06.26 106 2 19쪽
5 #5. 예쁘고 귀여워서 더 무서운 소녀 18.06.26 139 2 21쪽
4 #4. 페퍼민트 향기에 씻겨 내려가다 18.06.26 110 3 13쪽
3 #3. 감사의 선물 18.06.25 99 3 17쪽
2 #2. 꿈속에서, 그리고 꿈 밖에서 16.05.16 615 3 19쪽
1 #1. 겨울에 피어난 꽃 13.11.10 1,430 2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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