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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님의 서재입니다.

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연재수 :
2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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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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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1.01.0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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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막간-피오네(Fionne)(2)

DUMMY

“도대체···무슨 일을 꾸미려고, 정화교에 이렇게 큰 빚을 지우려 드는 거지, 사제 피오네?”


부주교가 두려움과 결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피오네는 그 모습에 의문스러워하면서도 대답했다.


“그저 옳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게!”


부주교는 어떻게 해서든 세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저들의 야욕을 이 자리에서 막아내고야 말겠다는 열의로 소리쳤다.


“옳은 일이 스스로 몸담은 교단에 2825만 2021개 정화코인의 부채를 선물하는 것인가? 나의 정의는 그것을 결코 옳다고 인정하지 못하겠네!”

“그저 원금 그대로 계산했을 뿐입니다.”


피오네의 무뚝뚝한 말에 부주교는 잘 걸렸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그래, 말 한 번 잘 했네. 그게 실제 금액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청구서를 보면, 칼날 개미만 23만 마리에, 강철 말벌도 18만 마리를 잡았다고 되어 있던데···.”


벽을 쾅! 주먹으로 때리며, 유논의 눈치를 한 번 보고, 다시금 내뱉는 말.


“물론 마법사님께서 마법으로 대단히 많은 수의 언데드들을 죽였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정확한 수치를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군. 미안한 이야기지만, 자네가 혹여 수치를 속여서 기록했더라도 그때 죽은 언데드들은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지 않은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증거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청구서에 적힌 대상의 개수가 정확한지를 증명할 증거를.


보통 의뢰를 행할 때는 그 의뢰가 확실히 수행되었는지를 증명할 실물을 가져오고는 하니 아예 이해 가지 않는 요구는 아니었지만···.


조금 추한 요구이기는 했다.


“흠, 흠.”


피오네의 감정 없는 눈빛에 부주교는 스스로도 멋쩍은지 헛기침을 했다.


유논이 마법으로 없앤 언데드들은 형체 하나 남지 않고 전부 가루로 변해 날아가 버린 바, 증거가 남을 리 없는 것이다.

그 점을 이용해 부주교도 이리 생떼를 부리는 것이고.


게다가 유논이 부린 마법은 증거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쉘터 공성전에 참전한 모든 이들이 그 위력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 점을 감안하면, 수치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며 증거를 가져오라고 어깃장을 놓는 것은 생떼를 부리는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주교 입장에서는 나름의 이유와 정의가 있어 체면을 불구하고 저지른 일이었겠지만, 피오네나 유논이 그의 입장까지 신경써줘야 할 이유는 없다.


피오네는 부주교의 어깃장에도 별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러실 줄 알고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 이제 순순히 교단에서 보낼 보수를 받고 만족···어?”


준비해 둔 게 있다고?

부주교는 원인 모를 불안감에 몸을 움찔했다.


“유논 님께서 마법사, 그것도 대단한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이시라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그야 그렇지.”

“그래서 그런지, 유논 님께서는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연산능력과 기억력을 지니고 있어 당시 마법으로 소멸된 모든 언데드들의 수와 종류를 전부 머릿속에 기록해 놓으셨다더군요.”


이번만큼은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고는 하나, 그게 가능할 턱이 있나! 그리고 설령, 정말 만에 하나의 확률로 가능하다고는 해도, 개인의 단순한 머릿속 기록은 결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부주교는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지만, 난 못 믿겠네! 그 기록이라는 것을 눈앞에 직접 꺼내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군요.”


피오네는 뜻밖에도 수긍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불안감이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설마?


“그러실 줄 알고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그래. 아까부터 자꾸만 뭘 준비해 뒀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보여나 줘 보게. 그게 정말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라면, 내 인정하지.”


부주교의 당당한 그 발언에 피오네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유논에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유논 님.”


유논은 그저 별일 아니라는 듯 손가락만 한 번 튕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다음 순간, 부주교의 눈앞에는 수많은 검은색 입자들이 떠올라 허공에 3차원의 홀로그램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여기는, 쉘터 성곽······공성전 당시의 모습이로군.”


틀림없었다.

유논의 마법에 의해 공간이 얼어붙던 당시, 사람들과 각종 언데드 괴수들이 뒤엉켜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현장이 인화된 듯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부주교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정교하게 재구성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피오네가 옆에서 말을 붙였다.


“말씀하신 대로, 기억을 재구성한 과거의 기록입니다. 확인해보시면, 보이는 언데드들 중 색깔이 진하게 표현된 종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종류가 있을 겁니다.”

“아, 아. 그래. 나도 보이네.”


부주교는 눈앞의 경이로운 광경에 따지는 것도 잊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색깔이 진한 언데드들이 거의 대부분인 가운데, 아주 드물게 색깔 연한 언데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개중 색깔이 진한 것들이 유논 님의 마법에 의해 죽은 언데드들이고, 색깔이 연한 것들이 다른 요인으로 인해 죽은 언데드들입니다. 계산해 보시면 색깔 진한 것들의 개수와 종류 모두, 청구서에 적힌 것과 일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


피오네의 말에 부주교는 식겁해 눈을 부릅떴다.

눈을 찡그리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축소된 전장의 모습을 바라보니, 대지를 온통 뒤덮을 지경으로 새카만 점들이 밀집된 채 몰려 있었다.


이것들이 전부 대마법에 당한 언데드들이라는 소리 아닌가.

정말 수십만은 족히 될 것 같았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피오네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마주보자 실감이 갔다.


청구서에 적혀 있던 것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측정한 개수였구나. 이제 와서 방해를 해 봐야 통하지 않겠구나.

이미 모든 증거가 다 준비되어 있구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 증거를 가져가서 면밀히 측정을 해 보겠다는 식으로 시간을 끌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 추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추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지경까지 이르면 정도가 더욱 심해져 아예 쉘터를 구한 영웅을 무례하게 무시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증거가 필요하다 해서 증거를 내놓았는데, 이제는 은인이 내민 증거조차 의심하는 모양새로 흘러가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애초부터 악수惡手였다. 무작정 시간을 끈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 시간 동안 교단과 쉘터가 전장의 영웅에게, 대마법사에게 마땅한 보상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막대한 손해를 봐야 할 것이다.


‘피오네가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지는 않지만···혹시 또 모르지. 다른 쪽에서 말이 퍼질지도.’


반대로 유논 측에서 터무니없는 보상금을 요구했다는 쪽으로 여론전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상대는 쉘터 전체에게 은혜를 입힌 선망과 두려움을 받는 존재,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대마법사였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쉘터의 존망만 위태롭게 될 것이다.


쉘터 입장에서 최적의 상황은 시간을 끌기보다는, 빠르게 유논과 협의를 맺어 적절한 선에서 보수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러기 위한 계획이 지금 정화교의 가장 든든한 우군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주교는 하늘색 머리칼의 여사제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짙은 패배감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정화교를 부채의 늪에서 구원하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래. 개수와 종류 모두 들어맞는다는 것은 인정하겠네. 철저하게 증거를 준비해 놓았군. 하지만, 괴수들 각각을 처리하는 데에 합의된 보수가 너무 높지 않은가?”


수치로 어떻게 할 수 없다면, 괴수 하나하나에 정산된 의뢰 보수 금액을 문제 삼아서라도 어떻게든 값을 깎아내야만 한다!

그런 각오로 꺼낸 말이었다.


“맙소사, 일반 언데드 칼날 개미가 무려 정화코인 54개라니. 게다가 강철 말벌은 그보다도 더 높군! 이 정도면 평상시의 의뢰 시세에 비해 훨씬 높은 값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전쟁 당시 교단에서 용병들을 모집할 때 용병들에게 약속했던 보수를 그대로 이번 의뢰에 적용한 것뿐입니다만.”

“······.”


부주교는 할 말이 없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인지라, 쉘터를 떠나려 하는 용병 전력들을 어떻게든 잡아두기 위해 값을 한참 띄워서 불렀던 것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보수를 깎았다가는 정화교의 은인이자 영웅을 일개 용병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것이 되어버릴 터였다.


“그, 그렇지만, 시장 경제라는 것이 있지 않나. 그때 당시에는 언데드 괴수들을 사냥하는 것이 그만큼이나 희소성 있고 위험한 일이었기에 값이 뛰었던 거고, 지금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 희소성과 위험성이 없어진 것 자체가 유논이 부린 마법 덕분 아니었던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피오네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는지, 눈썹을 추켜세웠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십니까?”

“······.”

“용병들이 한 일은 희소성 있고 위험했던 데 반해, 유논 님께서 여러 난관들을 무릅쓰고 해주신 일들은 희소성 없고 위험하지도 않은 일이었다는 말입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유논 님께 정화교를 침략하던 언데드들을 한 번에 전부 없애지 말고, ‘희소성’과 ‘위험성’이 오르도록 천천히 처치하라고 말씀드릴 걸 그랬습니다. 그러는 편이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었겠군요.”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피오네의 과격한 발언에 부주교가 당황해 목소리를 높이던 찰나.

정화교의 딸은 역으로 기세를 뿜으며 낮게 말했다.


“차마 못 할 말을 지금 어느 쪽에서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차라리 돈이 주기 싫다고 말하십시오. 그렇다면 이해라도 할 테니. 정화교단의 부주교로서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순간 피오네의 머리 뒤에서 은은한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착시를 본 듯했다.


깜짝 놀라 눈을 부비고 다시 바라보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위압감은 변하지 않아서, 도저히 눈을 계속 마주칠 수가 없었다.


“정화교단이, 그곳의 지부인 쉘터가 이리도 구차하고 또 악독한 곳이었습니까? 제가 평생을 몸담은 교단이 이런 곳이었습니까?”

“······.”

“부주교님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실 겁니다.”


피오네 갈란은 단호히 말했다.


“저는 한때 차기 이단심판관장의 자리가 내정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물러났을지언정 곧, 심문관으로서의 직위에 다시 복직할 예정입니다.”


입을 떡 벌리게 되는 선언이었다.

다름 아닌 그 피오네 갈란이 방랑사제로서의 수행을 그만두고 이단심문관으로 복직한다?

교단의 정치 세력 구도가 뿌리에서부터 뒤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피오네라는 인물이 지니는 상징성이 그만큼이나 어마어마했다.

대주교의 혈육일 뿐만 아니라, 방사능의 아이들과의 전장에서 수많은 공을 세운 정화교의 가장 축복받은 딸.


피오네와 함께 전투에 나섰던 젊은 세대의 교단 전사들은 전부 그녀를 열렬히 지지한다.

가장 무시무시한 전투병기인 ‘까마귀’들은 자처하여 그녀를 까마귀들의 왕이라 받들어 모신다.

직급만 방랑사제에 불과할 뿐, 사실상 젊은 전쟁영웅이자 대체할 인물이 없는 정화교의 차기 최고 권력자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


사실상 일개 지부의 부주교에 불과한 그가 함부로 대할 대상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이어져온 친분이 아니었다면 아까처럼 면전에 대고 아무렇게나 화를 내지도 못했을 터.


“그리고 제가 있는 동안은, 교단에서 저지르는 그 어떠한 부정이나 죄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교단은 언제나 떳떳해야 합니다. 언제나 깨끗해야 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부터가 정화되지 않았다면, 무슨 자격으로 타인들을 정화하겠습니까.”


피오네는 주머니에서 정화코인 하나를 꺼내들었다.


부주교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쥐어짠다.

방사능을 정화하는, 오염된 마력과 원소를 회복시키는 빛이 피오네의 손끝에서 새어나왔다.


“정화코인은 교단의 자존심입니다. 정화의 상징입니다. 정화코인은 반드시 돈과 욕심이 아니라, 정화를 위해 쓰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정화코인이라 부르는 것 아닙니까.”

“······.”

“그런 정화코인을 헐값으로 깎아 지불할 예정이라면, 정화교의 은인을 부정한 방식으로 대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쉘터의 모든 정화코인을 다 없애 버리는 편이 속 시원하겠습니다. 그 편이 더 ‘정화’에 가까울 테니까요.”


뱀 앞의 쥐처럼, 그는 피오네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정화의 뜻대로, 은인을 정당하게 대합시다. 정화교단답게 말입니다.”


문득 스스로가 부끄러워져서, 스스로 선택하고 추구했던 ‘정화’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 부주교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잠시간의 참회 끝에 가까스로 내뱉을 수 있었던 말 한 마디.


“···정화의 뜻대로.”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피오네가 아닌 유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념한 어조로, 그러나 아직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은 놓지 않은 채 말한다.


“한 가지만, 한 가지만 약조해주십시오.”

“······?”

“이 한 가지만 지켜주겠다 약속해주신다면, 청구서에 적힌 요구사항을 전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는 순교자와 같은 결연한 투로, 자신의 신념을 담아 말한다.


“앞으로 당신께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이 부채가 미래에 어떻게 작용하더라도 그 또한 정화신의 뜻이겠지요. 다만···.”


부주교는 눈을 딱 감고 내질렀다.


“교단을 해치지는 말아 주십시오. 제발, 교단만은 공격하지 말아 주십시오!”


섣부른 추측과 혼자만의 결론이 뒤섞여 튀어나온, 영문 모를 말.


과연 이 조건을 받아들일까?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대마법사는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유논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교단이 먼저 나를 공격하지 않는 한, 그리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유논 님.”


부주교는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 후, 그렇게 물러났다.


여전히 유논이 손에 넣은 금력과 권력, 무력으로 세계 정복쯤 되는 무언가 크나큰 일을 저지를 것이라 믿고 있는.

다만 정화교만은 그 영향 밖에 벗어나 있기를 바라는 신실하며 충성스러운, 동시에 의심 많고 제멋대로인 늙은 신자의 모습이었다.


여러모로 상대하기는 꽤나 피곤한 스타일.


유논은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부주교와 협상하는 일은 그가 아닌 피오네가 맡았기에, 그로서는 귀찮다거나 짜증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저 흥미롭게 관망했을 따름.


그러나 피오네로서는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정화교의 여사제는 푸른 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쁜 분은 아니십니다. 교단을 위해 여러모로 애쓰는 훌륭한 분이시지요. 다만, 제가 요청한 사안이 조금···과하다고 느끼셨나 봅니다. 혼란스러우셨을 테지요. 평소에도 괴상한 착각을 자주 하는 분이시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하다 느낄 만도 하지.”


유논으로서는 오히려 부주교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만큼이나 천문학적인 액수였고, 금전에 대한 관념이 희미해질 지경으로 큰 부채였다.


무려 2825만 2021개의 정화코인이라니!


많은 절차를 간소화하고 단순한 가치로만 환산했을 때, 소형 마정석 5650만 4042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과거의 신체 연비로만 따지면, 그만한 마정석이면 내 몸을 2만 2천 년을 더 가동시킬 수 있었을 거다.’


한마디로, 과거 유논의 수명 22000년 어치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부주교 입장에서는 기를 쓰고 막을 만도 했다.

저만한 부채를 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쉘터와 정화교에 크나큰 부담이 될 테니.


하지만 반대로···.


저만한 부채와 천문학적인 금액은, 청구하는 입장에서도 가벼이 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피오네 또한 대단한 부담을 안고 벌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로서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왜 부주교와 싸우면서, 스트레스와 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수천만 단위의 정화코인을 대리인으로서 청구한 것인지.


유논으로서는 보수를 주건 말건 크게 상관없다는 의사를 이미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피오네 홀로 진행한 일이었다.

분명 무언가 속에 품은 뜻이 있을 터.


그러나 나서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피오네가 먼저 스스로 이유를 말해주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자리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피오네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눈앞에 섰다.

그녀의 눈에는 기묘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산책이나···함께 하시겠습니까?”


유논은 그 무뚝뚝하게 말 거는 하늘빛 여사제가 내미는 손을 붙잡았다.


“그러지.”


작가의말

5분 뒤에 한 편이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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