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소도외전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18.11.28 15:30
최근연재일 :
2023.05.10 22:33
연재수 :
105 회
조회수 :
29,549
추천수 :
273
글자수 :
706,311

작성
18.12.02 19:44
조회
733
추천
5
글자
10쪽

뱃머리를 남으로

DUMMY

정말 그랬다. 아무리 훈련된 정예의 군사들이라 하더라도 큰 나라 조선이 일개 변방의 반란군 따위에게 무너질 정도는 결단코 아니었다. 조선은 한나라의 내로라하는 강성한 제후국들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도 가진 건실한 나라였다. 왕위가 세습되어 왕의 권위가 살아있었고, 관료 제도도 정비되어 안정적인 국정을 운영하던 큰 나라였다. 그런 나라였기에 준왕으로서는 더더욱 위만에게 당한 패배가 아팠다.


패배의 원인이 무엇이든 철저히 준비된 기습공격에 대한 응전의 온전한 실패는 준왕에겐 혹독한 경험이었다. 변방에서도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깊은 사려나 의심의 눈초리 한 번 없이 위만의 위선적인 충성 맹세와 거짓 서신에 빠져 단 한 번 정변(政變)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도주해야만 하는 깊은 상처 속에서 헤매였다.


“저희들에게 갈 곳을 일러 주십시오!”

흠차대신 경욱이 흐느낌의 절정을 지난 준왕의 급격히 수척해진 표정을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

“¹ 경(卿)의 생각은 어떠하오?”

목소리 마저 방향을 잃은 힘없는 답변이 되물음으로 돌아왔다.

“신의 소견으로는 남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제께서도 아시듯 남쪽에는 팔십 개의 소규모 부족국가 연맹이 있사옵니다. 그중 월지국이 가장 강성하여 나머지 소국들을 거느린다 하니 제께서 월지국으로 납시어 전하의 위엄을 새로 세우시고 조선을 되찾기 위한 후일을 그곳에서 도모하심이 마땅한 줄 사료되옵니다.”

“흐 - 음, 하 ... 아”

준왕은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마르고 건조한 호흡을 엷게 뱉어 내었다.

“경의 생각에 일리가 있소. 경의 뜻대로 하시오. 나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으니... 조속히 그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주시오.”

“명(命), 받들겠나이다.”

흠차대신 경욱이 배들을 출발시키기 위해 급히 돌아섰다.

그의 뒤에 있던 경비 무사 하나가 쏜살같이 뛰어올랐다.

뒤에 정박하여 출발 준비를 마친 배들에게 행선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심신이 피폐(疲弊)해진 준왕은 아들인 탁왕자의 부축을 받아 선실에 별도로 마련된 작은 방으로 와서 쓰러지듯 누웠다.

곧 반란을 진압하고 속히 데리러 가겠다며 안전지대로 피신시킨 왕비는 물론 병상(病床)에 누워계신 어머니조차 모시고 갈 수 없을 정도로 우왕좌왕한 지경으로 급히 피난을 해온 이런 황망(慌忙)한 상황이 제발 꿈이길 바랐지만 현실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식이 더욱더 또렷해져서 못 견디게 괴로웠다.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위만에 의해 죽어가는 자신의 군사들과 불타고 있는 왕검성에서 그를 부르는 왕비와 어머니의 모습이 교차되며 번쩍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는 준왕의 안쓰러운 표정 위로 탁왕자가 꾸역꾸역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피가 나게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뱃머리로 나온 탁왕자의 눈앞으로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배가 닻을 올리는 분주한 소리가 허겁지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말을 타고 달려오며 활을 쏘아대는 위만군의 화살들이 포구를 건너 점점 배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저들을 쳐부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들과 다른 바다 위의 세상에 있었다. 이제 저 땅을 다시 밟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니 분노보다는 비감함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피난 가는 신하들의 심정도 같았는지 한 척 한 척 출발한 배들의 갑판 위에서 망국의 설움을 몸으로 느끼며 흐느끼던 통곡소리로 메아리치더니 차츰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상태에서 그들은 지쳐서 탈진했을 것이다.


배들은 조용히 그러나 신속하게 포구를 뜬 다음 점진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다른 모든 것들은 좋지 않았지만 천만다행으로 일기(日氣) 하나만은 좋았다. 천운(天運)이었다. 배들은 잔잔한 바다 위를 빠른 속도로 내달려 얼마 되지 않아 조선으로부터 벗어나 먼 바다로 접어들었다.

“다행입니다. 남쪽까지 무탈하게 가야 할 텐데요.”

흠차대신 경욱이 아까부터 계속 왕검성 쪽의 방향을 바라보며 굳은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는 탁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까지 비탄(悲歎)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는 일. 바삐 걸음을 재촉하여 남쪽에서 자리를 잡아야겠지요.”

두 사람의 진지한 대화 사이로 수평선 너머에서 석양의 그림자가 바다 밑으로 막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 때,

“휘 ~ 익”

바람소리를 내며 비둘기 한 마리가 흠차대신 경욱의 손바닥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늘 겪는 일인 양 경욱은 자연스레 비둘기를 받았다. 비둘기의 발에는 작은 서신이 단단히 동여 매어져 있었다. 경욱은 빠른 동작으로 서신을 풀었다. 능숙했다. 경욱이 서신을 읽는 사이 전서구로 온 비둘기는 뱃머리 위의 지붕에 걸터앉아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서신을 읽기 전 경욱이 옷소매 속에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곡류의 씨앗 한 웅큼을 꺼내 그곳에다 던졌기 때문이었다. 아마 먹이를 먹고 조금의 휴식을 취한 후 아무도 몰래 왔던 곳으로 날아갈 것이리라.


- 보고 드립니다. 이곳 월지국은 남쪽의 연맹국가(聯盟國家) 팔십 개 국가 중 가장 큰 맹주 국가로서 다른 소국들에 대하여 그 위세가 대단합니다만, 월지국의 현재 신지인 우도(于道)는 전체 연맹 국가를 아우르는 지도자(指導者)로서의 권위와 존재감이 이전의 월지국 신지들만 못하다는 소문이 많습니다. 따라서 신의 소견(所見)으로는 월지국의 세력이 아직 한계를 보이는 이때가 최소의 노력으로 월지국을 복속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옵니다. 이후 강력한 정책을 나머지 연맹 국가들에 전파한다면 자연스레 연맹 전체를 복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급히 정세를 파악하느라 구체적인 내용을 더 보고 드리지 못함을 혜량(惠諒)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곳으로 오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보다 더 자세한 정황을 보고하겠습니다. 무탈하게 도착을 바라겠사옵니다. 진오 배상(拜上) -


진오는 흠차대신 경욱이 총애하는 간자(間者)로 지시사항에 대한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수집하는데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다.

누구와도 쉽게 친화력을 보여 무리에 쉽게 섞이고, 빠른 눈치를 가진데다 판단력이 명석하여 늘 원하던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발굴해 내고 있었다.

거기다 상당한 경지에 오른 무술 실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여태껏 내려진 어떤 임무도 실패한 적이 없는 숨은 고수이기도 했다.

이번 보고 내용도 적시에 도착한 효용가치(效用價値)가 상당한 정보였다.


“왕자님, 생각보다는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도 같사옵니다.”

경욱이 입가에 지긋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노구(老軀)로 인해 지금껏 겪고 있는 상황들을 견디기 힘들 텐데도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접한 때문인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있었다.

“남쪽 지역의 소국 연맹국을 복속시킨다면 우리는 조선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역시 흠차대신께서는 치밀하시군요. 그 짧은 시간에 어디서 그렇게 의미 있는 정보들을 수집하셨는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하하 ~”

탁왕자 역시 오랜만에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많은 일 챙기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이제 그만 잠을 청하시지요. 연로하신데 다가 오늘 과로하신 탓에 건강을 해칠까 우려됩니다.”

왕자의 걱정스런 눈길에 경욱은 주변을 한 번 더 훑고는 머뭇거렸다.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탁왕자는 애써 부담을 덜 주기위해서 인지 먼저 선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동안 어둠이 짙어지는 바다 위를 무심히 바라보다 선실로 돌아가던 경욱의 뇌리에 불현 듯 진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오의 쌍둥이 형이었던 진소는 위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무예실력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지만 더욱 믿음직스러웠던 것은 대륙, 특히 변방인 연나라의 ² 토어에도 능통했기 때문이었다.

진소로부터의 서신은 처음에는 일상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외부의 출입이 통제된 장소에서 수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동향이 있어 그것을 알아보겠다는 보고를 한 바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 연통(聯通)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경험상 위만에게 발각되어 변을 당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위만은 거짓 서신을 전령에게 보낸 직후 빠르게 군대를 이끌고 왔었다. 경욱이 판단했을 때 위만이 왕검성에 도달한 시간은 준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에 출발해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빠른 시간이었다. 그로 미루어 위만은 급하게 거사를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속전속결의 각오로 반역을 도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의 원인은 아마도 진소에게 반역의 징후가 발각되어 최대한 빨리 수습하려고 한 게 아닐까 짐작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모든 상황은 끝이 났고 결과는 엎어진 물이었다.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게 세상사의 이치였다. 아찔했다.

문득 진소의 그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보고 싶어졌다. 깊은 탄식과 함께,


선실로 들어가는 흠차대신 경욱의 뒷모습에 쓸쓸한 그림자가 뒤를 따랐다. 고단한 하루를 ³ 반추(反芻)하듯 작았고 지쳐있었다. 바다에 떠있는 배들에 누운 사람들에게 단단히 허허로운 서글픈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¹ 예전에, 임금이 높은 관직의 신하를 이르던 말

²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들이 쓰는 말

³ 지나간 일을 되풀이하여 기억하고 음미함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소도외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 고수 탐문 18.12.13 413 4 14쪽
18 확정된 마한의 소도 18.12.12 416 4 10쪽
17 소문에 대처하는 방법 18.12.12 422 4 13쪽
16 사방천지로 퍼진 소문 18.12.10 467 4 8쪽
15 천경보전 18.12.10 494 4 15쪽
14 조선 창업의 상징, 천부인과 비급 +2 18.12.07 518 4 10쪽
13 소도제도의 시행 18.12.06 504 4 7쪽
12 마리산 영봉의 칼바위 평야를 만나다 18.12.06 546 4 12쪽
11 소도의 태동 18.12.05 565 4 10쪽
10 삼한의 탄생 18.12.05 622 4 20쪽
9 반추하는 패망의 원인 18.12.04 597 5 16쪽
8 굳어지는 입지 18.12.04 621 4 6쪽
7 월지국 신지 +1 18.12.04 647 4 11쪽
6 남부소국연맹 18.12.03 725 4 11쪽
» 뱃머리를 남으로 +3 18.12.02 734 5 10쪽
4 위만 18.12.01 826 4 17쪽
3 반란의 개요 18.11.30 960 6 7쪽
2 회상 +2 18.11.29 1,298 8 17쪽
1 악몽 +6 18.11.28 4,488 10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