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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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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조회수 :
25,826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4.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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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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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거지 소녀

DUMMY

다음 날, 세현은 쾌속선을 타고 홍교 나루를 출발했다. 성으로 들어가서 안기의 원림저택을 찾았다.

문지기들은 세현에게 아가씨가 답장은 못 썼지만 ‘알았다’는 말을 전해주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례금을 요구했다. 세현은 콧방귀를 뀌며 주먹을 사례로 주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하라고 했다. 문지기들이 발끈하며 세현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세현은 괜한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 그냥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배를 타고 홍교로 돌아왔다.


세현은 배를 대고 사동각으로 향하다 송풍루에 들렀다. 거기에서 술과 안주를 시키고 사동각의 밥값 두 달치를 지불하려고 했다. 주인은 그건 이미 승호가 지불했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승호가 이미 술과 안주도 시켜놓았다고 하며, 금방 배달해주겠다고 했다.

세현은 웃으며 사동각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점소이 둘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셋은 낮부터 송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형, 이거 수호부적으로 가지고 다녀.” 준이 세현에게 그림 한 장을 내밀며 말했고, 승호가 통역했다.

“이게 뭐야? 포대화상(布袋和尙)이잖아?” 세현이 그림을 보며 말했다.

“그게 포대화상이야? 그건 모르겠고, 천녕사 갔을 때 형이 유일하게 합장했던 나한을 그린 거야.”

“그게 포대화상이라고. 근데 너 이걸 이렇게 똑같이 그렸어? 이 그림가게에서 그림 파는 건 어떨지 몰라도 화가가 그림 그리는 건 확실하네.” 세현이 감탄했다.

“미륵을 여기서는 포대화상이라고 하나?” 승호가 통역하다 세현에게 물었다.

“여기서는 미륵보살이 포대화상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다고 해. 그는 언제나 지팡이에 자루를 걸어 메고 다니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고 부르는 거야.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여 포대 속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지. 그리고 먹을 것도 시주를 받아서 먹고 남은 것을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어두었다고 하더라. 근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나 모든 걸 미리 말하는데 들어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해. 어쨌든 나 어렸을 때 잠깐 중노릇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부터 포대화상이 마음에 들었어.”

“형 어렸을 때 중노릇을 했다고?” 준이 승호의 긴 통역을 듣고 물었다.

“그래. 명희 데려다주면서 얘기했었는데, 너희한텐 나중에 얘기해줄게. 그건 그렇고, 이 포대화상 그림은 수호부적으로 잘 팔릴 것 같아.”

“그래? 조선에서는 달마 그린 걸 보긴 했는데···”

“달마든 미륵이든 어쨌든, 술이나 마시자.”

그들은 술을 마셨고, 세현은 승호와 준이 취해서 뻗을 때까지 마시다 둘을 잠자리에 눕혔다. 그러고는 혼자 남은 술을 다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세현은 승호와 준의 배웅을 받으며, 북쪽으로 향하는 운하를 타고 양주를 떠났다.


세현이 떠나고 나흘 뒤, 승호는 혼자서 가게를 지켰고, 준은 그림재료도 사고 천녕사 만불루에도 다녀오겠다며 배를 타고 성으로 향했다.

준이 그린 천녕사 만불루의 불상 그림은 의외로 잘 팔렸다. 송풍루 주인과 일꾼들은 사동각에 표구도 하지 않고 걸어놓은 그림을 구경하러 왔다가 다들 불상 그림에 관심을 갖았다. 주위에서도 사동각이 주루가 아니라 그림가게라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 때문에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양주 사람치고 양주의 대사찰 천녕사의 만불루에 안 가본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자신이 본 불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에 매료됐다. 준은 판다는 생각도 안 하고 연습 삼아 그린 그림이었는데, 사람들은 좋아했다. 송풍루 주인은 준에게 만불루의 일만 일천 기의 불상을 모두 그려달라고 했다. 그걸 송풍루에다 모두 걸어놓고서 가게이름을 만불각으로 바꾸겠다는 농담도 했다.

준은 만불루의 불상을 다시 한 번 관찰하기 위해 천녕사로 향한 것이다.


준은 천녕사 앞의 나루에 배를 세우고 성안의 천녕대가에 가서 그림재료를 샀다. 그러고는 천녕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녕사 앞에서 거지 행색의 중년남자 하나가 팔을 잡아끌었다.

“공자님, 여자를 팝니다. 제발 사가세요.”

준은 말을 대충 알아들었으나 잡아끈 손을 뿌리쳤다. 남자는 준의 뿌리침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준은 미안한 마음에 그의 팔을 붙들어 일으켰다. 뼈밖에 안 남은 팔은 너무나 가벼웠다.

“공자님, 마음씨 좋은 공자님, 제발 좀 사주세요.” 남자는 힘없는 팔을 들어 옆에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굶주림에 찌들어 피골이 상접한 소녀와 사내아이 둘과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어어, 어버버.” 준은 어쩔 줄 몰라 그저 벙어리처럼 손을 저었다.

“공자님, 말씀을 못하시나요?” 남자는 대답 없는 준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죽했으면 딸을 팔겠습니까? 저희 가족들 며칠째 아무 것도 못 먹고 굶었습니다. 아니, 다른 건 됐고 그냥 딸아이를 데려가 먹여나 주십시오.”

준은 몇 푼 안 남은 돈을 다 꺼내 그에게 주었다. 남자는 그걸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준은 그걸 보고 미안해서 사온 그림재료를 내밀었다.

“이 가난한 놈에게 물감과 먹을 갈아먹고 죽으라는 겁니까?”

준은 손을 저으며 가진 게 없다는 동작을 계속했다.

“공자님 그렇게 좋은 옷을 입고 계신데, 은자 몇 닢만 더 보태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준의 옷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구걸하는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가리킨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준은 승호가 사준 비싼 옷을 입고 있었고 그걸 달라는 것으로 여겼다. 준은 옷을 벗어 남자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공자님, 복 받으실 겁니다.” 남자는 비단옷을 받아들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의를 표했다.

준은 그들을 남겨두고 적삼만 입은 채 천녕사를 향해 자리를 떴고, 남자는 소녀의 등을 떠밀었다.


준은 천녕사에 들어서 여기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 때의 세현처럼 포대화상에게 읍한 뒤에 만불루로 갔다. 거기서 불상들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따라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 인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남자가 팔겠다는 소녀가 옆에 서 있었다. 얼굴은 넓적했는데 말라서 불거진 광대뼈가 더 불거져 보였다. 코는 짧고 납작했으며 입술은 두툼했다. 굵은 뼈대는 튼튼해 보였지만 그 위에 붙은 살은 얼마나 굶었는지 얇았다.

소녀는 준이 자신을 살피는 눈길에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준은 소녀를 무시하고 불상을 관찰했다. 소녀는 계속 준을 따라다녔다.

준은 만불루를 나섰다. 이번에도 소녀가 준을 따라왔다. 준은 그녀에게 가라고 손짓하며 천녕문 나루로 향했다. 소녀는 몇 걸음의 거리를 둔 채 계속 준의 뒤를 따랐다. 나루에 도착한 준은 다시 돌아가라고 손짓하며 배에 올랐다.

소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배가 출발하자 소녀가 달려오다 엎어졌다. 일어서질 못했다. 준은 급히 배를 나루에 다시 대고 소녀에게 달려갔다. 준은 소녀를 흔들어 깨웠다. 늘어진 소녀는 알아듣지도 못할 한어를 중얼거렸다. 준은 소녀를 깨우다 일어나지 못 하자 부축해서 배에 태웠다. 소녀를 겨우 배 위에 눕혀놓고 노를 저었다.

홍교 나루에 도착할 때까지 소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거기서도 소녀를 깨웠지만 그냥 늘어져 있었다. 준은 배를 세워둔 채 사동각을 향해 뛰었다. 승호를 불렀다. 승호는 준의 이야기를 듣고 배를 향해 뛰었다. 승호는 소녀를 들쳐 업고 사동각으로 향했고, 준은 승호의 뒤를 따라갔다.

승호는 사동각으로 돌아와 정신을 잃은 소녀를 침대에 눕혔고, 준은 승호에게 천녕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정신이 좀 들어요?” 승호가 물었다.

소녀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눈으로만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눈길에 잡힌 준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준도 미소를 보냈고, 소녀는 그걸 보고 환하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힘이 없어서 그래요. 죄송해요.” 소녀는 일어나보려다 맥없이 다시 누웠다.

“얘 뭐 좀 먹여야하지 않을까?” 준이 승호에게 물었다.

“공자님, 말을 할 줄 아는군요. 근데 어디 사투린가요?”

“며칠 동안 굶은 것 같은데, 죽이나 미음을 먹어야 할 거예요.” 승호가 소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준에게 대꾸했다.

“그럼 내가 송풍루에 갔다 올게. 죽이 한어로 뭐야?”

“아니요, 제가 갔다 올게요.” 승호가 대꾸하고 일어나 사동각을 나섰다.


“얘 또 기절한 거 아냐?” 준이 송풍루에 갔다 온 승호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아까는 기절했던 거고, 지금은 잠든 거예요. 죽을 끓여서 가져다달라고 했으니, 가져오면 그 때 깨워서 먹이면 돼요.”

“얘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아픈 건 아니고, 못 먹어서 이런 거 같아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준이 잠든 소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명희는 잘 지내겠지? 그리고 세현 형은 엄마 보면 얼마나 좋을까?”

승호가 준의 말을 혼잣말로 여기고 대답하지 않자 침묵이 흘렀다. 둘은 소녀가 잠든 방을 나왔다.


얼마 후, 송풍루의 점소이가 전복죽과 죽순볶음을 가지고 사동각에 들어섰다.

승호와 준은 탁자에 앉아 있다가 점소이를 보았다.

“냄새 좋아.” 준이 한어로 말했다.

“오늘은 주방장이 저녁때 생선튀김 해준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죽을 끓여달고 해요?” 점소이가 따끈한 김이 오르는 죽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픈 사람이 있어서.” 승호가 대꾸했다.

“두 분 다 멀쩡하신 것 같은데요.” 점소이가 승호와 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 말고 손님이 한 명 더 있어.”

“죽은 넉넉하게 끓였으니 세 분이 드셔도 될 거예요.”

“그래, 알았어.” 승호가 대꾸했다.

“고마워. 잘 가.” 준이 뒤돌아 나가는 점소이에게 말했다.


승호가 방으로 가서 소녀를 데리고 나왔다.

“앉아. 먹어, 이거.” 준이 그릇에 덜어놓은 죽을 가리키며 한어로 소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소녀는 사양하며 자리에 앉았다.

“먹어, 빨리 빨리.” 준이 일어서서 숟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소녀는 다시 사양하지 않고 죽을 떠먹었다.

“우리도 먹자. 조선에서는 죽이라면 지긋지긋했는데, 이건 맛있을 것 같아.” 준이 승호에게 조선말을 했다.

“어디에서 오신 분이세요?” 소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준의 말을 듣고 물었다.

“우리 왔어. 조선.” 준이 소녀의 한어를 알아듣고 대답했다.

“예? 조선이요? 거기서 양주까지 와서 이런 집에 살아요?” 소녀는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그녀는 세현이 업고 올 때 기절한 상태라 사동각을 집으로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소.” 승호는 대답을 회피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서 쉬고 내일 떠나요. 배로 천녕사까지 데려다 줄 테니.”

“저는 안 가요.” 소녀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부모에게 돌아가야 할 것 아니오?”

“아니요, 전 이미 팔려왔으니 돌아갈 곳이 없어요.”

“내가 너 사려고 옷 벗어준 게 아니야. 무슨 옷 한 벌로 사람을 사?” 준이 세현의 통역을 듣고 말했다.

“그 비싼 옷이면 사고도 남지요.”

“그건 그냥 가지라고 벗어준 거라고. 으이그, 너 쓰러졌을 때 그냥 두고 왔어야 하는데.”

“어쨌든, 전 절대로 안 가요. 아니, 갈 곳이 없어요.”

“가든 안 가든, 우선 죽부터 먹고 오늘은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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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초청장 22.05.21 153 3 10쪽
78 투옥 22.05.20 140 3 11쪽
77 바둑대회 22.05.19 143 3 12쪽
76 협객 22.05.18 141 3 12쪽
75 헤엄 22.05.17 150 3 11쪽
74 인계 22.05.14 152 3 13쪽
73 전수 22.05.13 152 3 11쪽
72 서동(書童) 22.05.12 156 3 11쪽
71 둔재 22.05.11 161 3 11쪽
70 경매 22.05.10 163 3 12쪽
69 또 사년이 흐르고 22.05.07 155 3 10쪽
68 화상(畫商) 22.05.06 157 4 12쪽
67 귀환 22.05.05 153 3 11쪽
66 몸값 22.05.04 154 3 12쪽
65 번개 22.05.03 152 3 12쪽
64 실종 22.04.30 161 4 11쪽
63 분배 22.04.29 159 3 11쪽
62 귀재(鬼才) 22.04.28 162 4 12쪽
61 옥패(玉佩) 22.04.27 178 4 13쪽
60 육년 후 22.04.26 165 4 11쪽
59 물난리 22.04.23 164 4 12쪽
58 잃어버린 편지 22.04.22 158 4 11쪽
» 거지 소녀 22.04.21 160 4 12쪽
56 또 다른 이별 22.04.20 161 4 12쪽
55 대리 매입 22.04.19 156 6 13쪽
54 누나 22.04.16 176 5 13쪽
53 이별 22.04.15 171 5 12쪽
52 해후 22.04.14 172 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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