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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아포칼립스에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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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10.29 23:30
최근연재일 :
2022.12.14 19:01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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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5,692

작성
22.11.0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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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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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1쪽

달아나 닿은 낙원 (4)

DUMMY

필히 해야할 일들이 끝난 중대는 고요했다. 각자의 책임을 조금씩 내려놓은듯, 훨씬 가벼워진 속삭임들이 얇은 벽을 타고 흘렀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휴대폰의 사용은 우리가 잠시 떠나있을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대는 개인을 존중할 수 없었으니, 각자의 이름을 밝히는 건 바깥의 형상 뿐이다.


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올린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 한 조각이 최소한의 윤곽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데, 시선을 빼앗는 물건이 없어도 잡다한 상념이 끊이질 않는다. 그에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누워있는 김동숙을 바라본다. 내가 뒤척일 때마다 그만 자라는 말을 해주던 그도 어느새 잠들어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을 청하기는 이미 글렀다. 아무도 모르게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적어놓았던 이름이 한참 전에 닳아보이지 않게 된 슬리퍼를 신고 복도로 나간다. 아직 불이 켜져있는 생활관도 있다. 무언가 켜놓은 채 깜박 잠이 들었거나, 아침을 신경쓰지 않는 놈이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휘적휘적 걸어 복도 한 가운데에 있는 공용 냉장고를 열어본다. 주기를 적어놓은 간식, 취사장에서 남은 부식이 들어있었다. 개 중에는 민성이가 넣어놓은 음식도 있었다. 올해부터 병장 월급이 늘어났다고, 가끔 먹던 물건으로만 사온 것이 못내 웃겼다. 커피를 꺼내 주둥이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붙잡은 채 상황실로 들어간다.


포술관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불침번도 도망갔는지 상황을 보고 있는 건 전민성 한 명이었다. 탁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열쇠 두 개가 그의 처지를 알려주었다. 병사들의 분위기가 들떠 간부들의 마음까지 풀렸을까. 슬슬 얼굴에 피로가 묻어나기 시작한 전민성은 본인의 휴대폰을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아무리 편한 날이라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할만해보인다?”

“자리 비울 동안 졸지 말라고 꺼내주더라.”

“어디갔는데?”

“남은 음식 가지고 본청 갔지.”


말을 건 뒤에야 휴대폰을 내려놓은 전민성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여러방향으로 비틀었다. 굳은 몸이 연신 비명을 지른다. 이어서 축 늘어진 자세로 서랍을 뒤지더니, 미리 작성해둔 일정표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눈을 질끈 감는다.


“회의에서 배수로 체크하라고 하던데.”

“글쎄? 이쪽은 이맘때면 아직 눈이지 않나.”

“작년에는 그렇긴 했지.”


전민성은 내 말에 호응하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통신보안, 탄약고 근무자 일병 이승원입니다.]

“어, 지금 외부 온도 몇이냐?”

[확인해보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내외초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부산스러운 기색이 전해지는 것이 전화가 온 김에 위치를 다시 바꾸는 듯 싶었다.


[통신보안, 탄약고 근무자 상병 이석호입니다. 외부 온도 영하 2도로 나옵니다.]

“날씨 좀 풀리는가 싶더니 또 춥네.”


역시 놀라운 강원도, 경칩을 훌쩍 지났는데 여전히 영하다. 저 아랫쪽은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는데 이쪽은 상록수을 제하면 아직도 풍경이 황량하다. 전민성은 통신을 스피커 모드로 변경한 뒤, 지금까지 기록해놓은 온도를 조금씩 낮췄다.


[저 그런데 혹시···]

“왜, 너도 똥 마렵냐?”


전민성의 반응을 보아하니 매 타임마다 벌어지고 있는 이벤트 같았다. 양측에서 새어나오는 허허로운 웃음이 상황실을 채웠다. 하기야, 짬밥 먹다가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넣으면 배가 아플만도 하다.


“근데 지금 불침번이 신병인데 어쩌냐? 사관도 없는 마당에.”

[아, 남은 시간동안 못 참을 것 같은데 아직 안자는 사람 없습니까?]


가만, 안자는 사람?


그 말에 전민성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모습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훑어본 그는 두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그냥 말년도 아니고, 몇 시간 후면 전역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잠도 안오는 마당에 대충 자리만 지켜줄까.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전민성은 그제야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야, 석호야··· 사람이 있기는 한데 우리 인원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


이석호의 말끝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적막이 짙게 깔리자 수화기로부터 들리지않던 올빼미 울음 소리가 넘어왔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간다.”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쐐기를 박는다. 경험상 이런 상황이 생기면 고민하던 끝에 초소 옆에 똥을 지려놓는 경우가 있었다. 얼어붙은 변은 냄새를 풍기지 않으니 이맘때면 한 번씩 벌어지는 일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굳이 그런 꼴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생활관으로 돌아가 전투복으로 환복한다. 몇 번 입지 않아 더욱 빳빳한 촉감, 옷감이 구겨질 때마다 작은 소음이 난다. 서랍을 여니 포장을 뜯지않은 두꺼운 고무링과 새 양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것만 남겨두며 상상했던 아침의 풍경은 아니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더없이 익숙한 느낌이다. 착장을 끝낸 뒤 문을 열고 나오니 한층 서늘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야간 근무 투입 때의 감각은 늘 비슷하다.


중앙현관 쪽으로 걸음을 향한다. 딱딱한 전투화 밑창이 계단을 두드리고, 유리문 뒤쪽 벤치에 앉아있는 인영이 보였다. 선명한 불꽃을 입에 문 그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먹구름이 가득한 밤하늘일지라도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당직이 자리를 비워?”


입에서 연기를 뿜어낸 전민성이 본인의 생각을 말한다.


“내가 가고, 네가 상황을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데.”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 선택이 되려 석호와 민성이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앞으로 볼 일 없는 사람이니, 마음에만 남을 빚은 금방 잊혀질 터다.


“승원이랑 노가리 좀 까려고.”

“···”


전민성은 꽁초를 바닥에 버린 뒤 짓밟으며 일어섰다. 아까처럼 길다란 꽁초가 눈에 밟혔다.


“알았어. 대신 석호가 좀 늦을 거야.”


그도 앞으로 더 많이 볼 사람을 택했다.


나는 연병장을 가로질러 탄약고로 향했다. 본래의 투입로는 이쪽이 아니지만 훨씬 빨랐다. 너른 땅을 걸으니 칼바람이 가감없이 와닿는다. 머리는 길러서 괜찮았지만 손이 시리다. 그에 걸음을 빨리하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채 돌계단을 내려간다.


“정지! 카라멜.”


어렴풋이 경계 초소가 보일 때쯤 암구호를 묻는다. 음, 나오기 전에 보는 걸 깜박했다.


“그걸 민간인이 알겠냐?”


내 잘못을 포장해 후임에게 던진다. 이승원은 그런 내가 신기한지 히죽히죽 웃었다. 내초의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창백해진 이석호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열린 문틈으로는 방탄과 판을 삽입하지 않은 탄조끼, 경계 방향으로 거치해놓은 총기가 보였다.


“···감사합니다.”

“안색 하얀 것 봐. 엉덩이에 힘주고 빡 가야겠네.”


내가 내려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오르는 이석호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그대로 내초로 들어갔다. 장구류는 일절 건들지 않은채 거치된 총기를 집어든다. 바람이 차니 창문을 닫아야지. 총만 대충 몸에 붙여둔 채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한숨도 못 자신 겁니까?”


졸지에 사방 경계를 시작한 이승원이 내게 물었다. 계속 힘을 줬다 푸는 손이 보이고, 조금씩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잔 거 같은데. 그런데 너는 파카 입고 투입하지 왜 야상이냐?”

“어··· 스키파카는 지난 주에 수거했습니다.”

“그래? 나는 열외하고부터 진작에 뺏겨서 몰랐네.”


아직 한창 때의 일병과 대화를 나누니, 서로의 생활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만 체감된다. 어중간한 말을 하면 놀리는 게 될 것 같은데.


“나가시면 뭐부터 하실 겁니까?”

“글쎄. 계획대로 되는 일이 워낙 적어서.”

“뭘 산다거나, 먹는다거나··· 간단한 거요.”


이승원의 말이 다나까에서 존칭으로 바뀐다. 변화를 즉시 느끼는 걸로 미루어보니, 나는 아직 군인 티를 벗지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거라면··· 그냥 늘어지게 자려고.”

“그건 주말이나 휴가 때도 똑같지 않아요?”

“내가 달라질 게 있나. 그냥 날이 온 건데.”


우리의 대화는 그쯤에서 끝났다. 일병 초에 불과한 후임은 군대와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없었고, 나는 바깥의 일을 가져오기 싫었으니까. 그렇다고 군생활의 팁을 주기에는 나는 사람을 잘 대하지 못했다. 경사면을 따라 우는 바람소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울음소리. 편안한 울림들이다.


그제서야 잠이 밀려온다. 텁텁하고 건조한 공기를 들이키며, 약하게 틀어놓은 라디에이터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점차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 참으로 특이한 울음소리가 아스라이 울려퍼진다.


“캬아아악-! 와아악-!”


무겁게 감겼던 눈이 살짝 떠진다. 이승원이 흠칫 놀라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그래, 모든 자연물이 아름답지는 않지. 저 눈치없는 고라니만큼은 제하자고. 그의 반응에 옛 생각이 난다. 모든 게 어설펐던 시절이 흐릿하게 떠오르고, 미화된 추억을 마주한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달렸다. 그로부터 점차적으로 감각이 둔해진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몽롱함이 몸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한 줄기 빛이 머리를 관통한다. 그에 눈을 부릅뜨고서 총을 고쳐잡는다. 귓속에서 울리는 이명에 시선이 흔들렸다. 잠이 덜 깬 정신을 다급히 붙잡으며 위치를 가늠한다. 야간의 소음은 분지 안에 갇혀 메아리치고 있었다.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당장 중대로··· 아니, 절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손을 뻗어 핫라인의 수화기를 붙잡으며 부사수석에 손을 뻗는다.


“하 키 내놔!”


몇 초가 흐른다. 그제서야 주변이 달라졌다는 현실을 인지한다. 훨씬 우거져있는 나무들과 을씨년스러운 경계 초소, 창문이 있던 자리는 휑하고 지붕은 거친 풍랑에 조금씩 흔들렸다. 본래 후임이 서있어야할 공간에는 엄폐물이 없다. 나는 옛 기억에서 몇 마디 말을 끄집어낸다. 현 행보관이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서 했던 말이었다.


‘야, 지금 이 정도면 존나 괜찮은 거야. 원래는 말이야! 지붕은 대충 얹어놓고 위장도 없었고! 창문이나 가림막은 당연히 없던데다 부사수 자리는 뻥 뚫려있었어!’

‘소대장님, 그게 대체 언제적 이야기입니까?’


대작하던 선임들이 묻자, 그는 대답했다.


‘나 막 임관하고 여기 왔을 때.’


손에 들고 있는 핫라인은 구형 장비에 유선 전화기는 없다. 탄통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봉인을 활짝 열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번, 멍한 머리가 날카롭게 진동한다.


확실하다. 잠결에 잘못 듣지 않았다. 수없이 들었던 소리, 그건 방금까지만 해도 한없이 평온했던 방향에서 들려왔다.


총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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