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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아포칼립스에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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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10.29 23:30
최근연재일 :
2022.12.14 19:01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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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글자수 :
175,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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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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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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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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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달아나 닿은 낙원 (3)

DUMMY

“이제 위병소 통과했다네.”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던 포술관이 먼저 방을 나선다. 곧, 각 생활관마다 두 명을 호출하는 방송이 울린다. 어디선가 홀연히 들려오는 ‘나다싶’ 소리에 막사 전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복도로 뛰쳐나오는 막내들의 발소리가 주차장 쪽으로 사라진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방을 나오자, 계단 쪽으로 사라지는 애들의 꽁무니가 보였다.


누워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일어났을 때와 다른 모양으로 놓여져있는 침낭, 아마 정리하려다 상사 계급 주기를 보고 놀란 게 아닐까. 막내들은 단순한 계급장에도 위압감을 느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침상 위에 올라가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간다. 특 A급 침낭은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지금껏 자연스럽게 써왔던, 지워지지 않는 때와 한참 전에 죽은 솜을 연상하기 힘들 정도다.


자세를 잡고 누워 천장을 보니 남아있던 인원이 알아서 안쪽 등을 꺼주었다. 한창 실세 때나 받았던 대우를 이제와서 또 받다니. 내가 숨어있는 동안 어떤 이야기가 오갔던 걸까. 조미료가 꽤 많이 첨가되었을 듯 싶었다. 눈을 감고서 수많은 발소리들을 듣는다. 전투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단독 군장이 맞부딪혀 덜그럭 거리는 소리···


“각 분대장 행보관실으로!”


포술관의 외침이 막사를 쩌렁쩌렁 울리기에, 나는 좀 더 침낭 안으로 파고 들었다. 내 견장은 색을 잃은지 오래다. 분배가 다 끝나면 어련히 내 것이 남아있겠지. 시간은 언제나 상황을 가라앉힌다며, 두 눈과 귀를 닫은 채 기다린다. 생활관의 등이 다시 켜진 건 그 직후였다. 인기척은 꽤 많았고, 옆자리에 음식들을 내려놓음과 함께 내게 말한다.


“이선영 씨, 일어나세요-”


침낭을 느릿하게 걷으며 주변을 바라보니, 분대장들과 두 달 차이 병장들이 있었다.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한없이 부담스러운 장면이었다. 병장들이 내 옆에 붙어앉고, 분대장들이 음식들을 세팅한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은 생활관 문틀에 기대있던 전민성이 들려주었다.


“전역빵 생각은 없어. 우리도 느낌이 새로워서 그래.”


내 옆에 앉다보니 창가 바로 아래로 간 차병호가 민성이의 말에 치를 떨었다.


“어휴, 오글거려. 그냥 중대 맞선임이라 몰려왔다하면 되는 걸.”

“이 새끼는 항상 이러니까 우리가 소개를 해줘도 모쏠인 거야.”


자리에 앉자마자 닭다리를 집어든 김동숙이 그 말에 태클을 건다. 이제 서로를 공격하는 게 일상인 놈들이 어떻게 이등병 때는 그렇게 잘 붙어다녔지. 평소처럼 서로 삿대질하기 시작한 녀석들을 뒤로하고 피자 한 조각을 들어올린다. 가져오는 동안 살짝 식어, 치즈가 늘어날지언정 흘러내리지 못했다.


하긴, 조명 한 점 없는 산속의 밤은 언제나 서늘하기는 했다. 입술 앞까지 다가온 피자를 두고서 민성이에게 손짓한다. 그는 본인의 당직마크를 두드리며 쓰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말장난을 치며 음식을 먹고, 화제가 떨어지니 각자의 입대일에 맞춘 노래를 틀며 짬찌 시절 이야기를 한다. 그마저도 끝나니 남자들끼리 할만한 이야기는 이미 동났을 때가 되었다. 왜 그랬는지, 바깥의 이야기는 은연 중에 멀리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돌고돌아 각 분대의 막내 이야기, 요즘 군대 편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이었다. 그것이 못내 불편했는지, 가장 계급이 낮은 분대장이 내게 질문했다. 군번이 꼬여, 갓 상병이 된 녀석이었다.


“선영아, 근데 인사과장님이 갚겠다는 빚이 뭐야?”


나는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가벼운 사담을 나누거나, 업무상의 교류는 꽤 나눴지만 마음의 빚을 지울만한 일은 없었다. 내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지칠줄 모르고 먹던 김동숙이 그에 답변했다. 입가에 잔뜩 묻은 기름이 번들거렸다.


“너 전입왔을 때 탈영병 이야기는 들었지?”

“예, 그것 때문에 이병들은 상병 이상 통솔자가 동행해야 움직일 수 있게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놈 잡은 사람이 선영이야. 무려 인사과장님의 진급을 지켜줬지.”


···그런 사연이 있었나? 모든 간부들이 연대 지역을 벗어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는 했었는데. 나는 그저 연대 포상을 받았다는 게 기꺼웠을 뿐이었다.


“아, 나도 탈영병 한 번만 잡으면 말출 만박인데···”


창문 밖의 난간에 두었던 콜라를 꺼내마시던 차병호가 상상하기도 싫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니, 김동숙이 또다시 태클을 건다.


“니가? 저 강원도 산기슭에서 탈영병을?”


조금 찾다 뻗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결이 비슷한 지적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단지 차병호의 동기 뿐만 아니라, 슬슬 사람들이 편해지기 시작한 분대장들까지 입을 맞춘다.


“와, 나도 선영이처럼 이빨 다 빠졌네···”

“그것도 정정해야지. 선영이는 그냥 귀찮아서 안 무는 거야.”


그들의 끝날줄 모르는 유치한 말싸움에, 결국 나도 가볍게 웃음짓고 말았다. 내 웃음에 모든 잡담이 멈추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녀석들은 담배를 피러가자며 일어났다. 나는 같이 태우자는 말에 고개를 저었고, 되려 한 개비가 부족한 보루를 꺼내며 말했다.


“이거 사 만원에 살 사람?”


벌써부터 입에 꽁초를 물고 있던 차병호가 손을 번쩍 들며 반응했다. 이게 행보관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걸 알아도 저렇게 득달같을까? 상황실을 오가며 자리를 지키던 민성이의 표정이 잠시 해괴해졌으나, 어차피 내게 쓸모없는 물건이니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나, 나! 돈은 외박 때 보냈던 계좌로 보내주면 되지?”

“어··· 그게 국민인가, 기업인가?”


이게 스피드퀴즈도 아니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서 휴대폰을 매만지던 차병호가 답했다.


“국민!”


그와 함께 휴대폰에 알람이 뜬다. 다들 쓰는 송금앱, 차병호 이름으로 4만원.


“성격도 급하지.”


나는 보루를 가볍게 던졌고, 신나는 표정으로 건네받은 차병호의 안색이 잠깐 굳는다. 시선은 뜯겨있는 포장재를 향해있다. 설마, 내가 수지타산이 안맞는 교환을 걸었다고 생각했을까? 한 보루가 맞는지 눈으로 훑고서, 개봉 흔적이 있는 담배갑을 열던 녀석에게 말한다.


“딱 한 개비 폈어.”

“아, 그렇지?”


놈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차병호의 동기들이 ‘저 새끼는 머리길러도 연애 못한다.’ 라며 수근대는 것이 들렸다. 그에 맞서 소리치며 차병호가 따라가자, 생활관을 가득 채웠던 실세들이 사라진 자리만큼의 고요가 자리했다. 오직, 담배를 피지않는 분대장 두 명만 남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제 정리할까?”


자리를 끝내자는 내 말에, 그들은 생활관 문 근처에 모여있던 일병들을 불러 한바탕 소란이 지난 침상을 훝어냈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소란스러움이 복도로 밀려들고 있다. 전부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모인 집단인지라, 식사가 끝나는 시점이 비슷하다. 흡연장으로, 분리수거장으로, 취사장의 짬통으로··· 통로에서 만난 발길은 또다시 계급에 따라 나눠진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니 그 중에서도 유일한 발걸음이 들려온다. 문틀을 두드리는 손가락, 포술관이었다. 그의 손에는 익숙한 모습의 종이가 들려있다. 아마, 연대 앞에서 터미널까지가는 편도행 차표일 거다.


“과장님이 보내신 전역 선물이다.”

“그렇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차표를 받아든 채, 나는 잠시 갈등했다. 인사를 드리러 가야할까? 굳이? 표정에 고민이 드러난듯, 포술관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평하자면,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을 단촐한 답례다. 그도 그를 바라지 않았을까. 그런 마음에 티켓을 가볍게 주머니에 털어넣었다.


“나중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럴게.”


우리가 많은 내용이 생략된 말을 나누는 동안, 본관을 통해 올라오는 군홧발 소리가 울렸다. 군장이 맞부딪히는 소리나 방탄을 거칠게 벗는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내 성향을 아시는 과장님이 직접 오셨을까? 아니, 누군가 부담스러울 상황을 만드실 분은 아니다. 포술관의 어깨 너머로 계단을 바라보니, 앞머리만 살짝 남기고 깔끔하게 밀어낸 머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필승! 상병 김민형, 휴가 복귀했습니다.”


나와 포술관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경례를 마친 김민형은 웃음기를 감추지 않으며 우리에게 다가왔고, 복도로 완전히 들어선 뒤 코를 미미하게 움찔댔다. 흘깃, 생활관 안쪽을 살핀 그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나름 빨리 온 건데, 냉동파티는 벌써 끝나신 겁니까?”


우리는 잠시 적절한 대답을 골몰하다, 결국 상황실 탁자에 쌓아둔 치킨과 피자 박스를 가리켰다. 김민형의 눈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쉴틈없이 굴렀다. 하지만 군대의 사고방식으로는 낼 수 없는 정답이다. 되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신병이나 답을 유추할 수 있겠지.


“먼저 복귀한 인원들이 사온 건가요?”


그나마 스스로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김민형은 휴가백에서 내 전역모를 주섬주섬 꺼냈다. 근접기수 넷, 나에게 주특기와 업무를 배웠던 본부분대 인원들의 자수가 가득했다. 못해도 일년 이상 함께한 이름들이다. 한없이 생경하기만 하다. 클립보드를 보았을 때의 우려와 같다. 속절없이 밀려드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군생활 전체의 표상이 단출한 점에서 오는 아쉬움 뿐이었다.


“···고맙다.”


그런 와중에 행복을 연기하는 건 어려웠기에, 상황에 어울리게 꾸밀 수 있는 감정은 오직 어색함 뿐이었다. 완성되지 못한 감사는 유종의 미가 될 수 없기에 서로의 말이 늘어져간다.


“다들 자기 이름을 넣으려다보니 좀 지저분하게 되었습니다.”


내 반응 탓에 김민형은 잡히지도 않는 뒷머리를 연신 매만진다.


“아니야. 이런 물건은 오히려 과한 편이 나아.”


말이라도 쾌활하게 내뱉으며 전역모를 건네받는다. 이젠 내 머리가 꽤나 기니, 베레모보다 한 치수 큰 호수였다. 눌리는 감 하나없이 가볍게 눌러쓴 뒤에야 그에게 묻는다.


“어울리냐?”

“에이스처럼 보입니다.”


김민형은 그제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었고, 나는 그의 표정을 모사해 미소지었다.


“요 몇 년간 봤던 것 중에 가장 화려하긴하네.”


잠시 물러나있던 포술관도 턱을 쓸며 전역모를 평했다. 그 뒤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음식 냄새를 없애라는 말에 모든 창을 열고, 환기를 하는 김에 청소도 조금 앞당겨 수행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도와줄까 싶어 소매를 걷었지만, 손에 들린 도구는 후임들에게 죄다 뺏겨버려 침상으로 돌아와 매트를 깔고 누웠다. 반대쪽 침상을 다 정리한 막내들은 나를 매트 째로 들어 반대로 옮겼다.


“내가 무슨 환자니?”

“민간인이 군대에 있는데 정상은 아니죠.”


과한 대우가 불편해 제지하자 막내들이 장난스런 농담으로 응수했다. 내가 떠날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체감한 모양이었다. 이들의 언행이 서로 어긋났듯, 전역 직전의 위치는 이토록 미묘하다. 사람들의 반응을 빌려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색감이 다채롭게 덧칠되고 있다.


“그래요, 한낱 민간인이 군인들을 방해할 수는 없죠.”


자조적으로 말하며 침상에서 일어나니, 기다렸다는 듯 매트를 접어 정리하는 녀석들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려 흡연장으로 향한다. 끝을 되뇌어보니 시작이 떠올랐기에, 그때보다 확실히 나아진 후임들의 분위기를 보며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인사말에 반응해주니, 어느덧 달빛에 의지해 담배 꽁초를 줍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생활복 지퍼를 목끝까지 올리고 바지끝단은 살짝 접어 양말에 넣어서 발목이 보이게 한 차림이 눈에 띈다. 차병호 놈의 소대 막내들이다. 그 녀석은 다른 부조리는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계급에 따라 복장이나 행동에 차별화를 두는 건 일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당연한 건데 마치 뭐랄까··· 보상 받는 기분이 들었어.’


내가 상말이었을 때, 타 부대의 훈련에 지원나가서 나눴던 말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단지 포반의 운용만을 보여주면 되었기에 시간이 많이 남았었고, 대화가 늘어지던 새벽에 차병호의 진심어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들을 존중했고, 내게 빚이 있는 간부들을 설득했다. 비록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작금이 되어서는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평이 많았다.


바깥처럼 존대를 쓰거나, 복장에 차별화를 두거나, 더 많은 업무를 지지만 소대 외박이 잦거나··· 전 소대원들의 의견을 취합해 전부 다시 편성했으니 문제가 생길 일도 없었다. 그로부터 특이한 문화도 생겼는데, 주특기의 수행에 문제가 없을 경우 병사의 인사이동을 병사가 직접 중대장에게 신청하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러다보니 GOP 생활을 더 좋아하는 놈은 알박기를 시전하는 경우도 생겼고, 당장 지금도 가진 휴가가 두달을 넘는 괴물이 세 명이나 있었다. 그놈들은 아마··· 중대장의 지적에 다음 달에 같이 만박을 나온다지? 만박이면 일시적인 땜빵이어도 휴가가 쏠쏠할 테니 가려는 놈도 많을 터였다. 결론적으로, 애써 바꾼 체제는 병사들의 능률 향상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훈련이나 작업에 대한 사기가 눈에 띄자 좋아지자, 최근에는 본부 중대도 우리의 편성을 일부 베껴 가져갔다. 요즘은 서로의 주특기를 배우려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중이라고 전해 들었다. 사족이 길었지만 아무튼, 각 소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아 연병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주특기 훈련 때 포가 방열되었던 자리는 온통 울퉁불퉁했다.


“한 대 드릴까요?”


청소가 끝난 김일병이 곁에 앉아 호의를 표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받은 것을 돌려줄 수 없다. 내 반응에 김일병은 본인의 무리로 돌아가 담배를 물었다. 그나저나 몇 시나 되었나··· 휴대폰을 꺼내어 확인한 시각은 여덟 시, 알림창엔 짧은 통보가 있었다. 아버지였다.


[오전 시간은 미리 빼놨다.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그러면 그렇지.”


늘 그랬듯, 내 의사 따위는 중요치 않은 사람이다. 염치 불고하고 담배를 받을 걸 그랬나.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내일을 상상해본다. 보기만 해도 답답한 완전한 정장 차림에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새까만 중형 세단··· 설마 기사까지 대동하고 오지는 않겠지. 그래도 눈치가 없지는 않으니 혼자 올 거다.


“이선영 병장님, 저희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쇼.”

“어, 수고했어.”


계단을 딛는 발소리들이 밤의 적막을 깨트린다. 산세를 따라 도는 바람소리와 풀벌레의 울음이 묻히고, 그에 제멋대로 뛰던 심박은 규칙적인 걸음과 호흡을 맞춘다. 그렇게 모든 불씨가 물러난 흡연장 위에서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하는 달을 올려다본다. 처연한 빛줄기가 수없이 산란되어 땅에 닿는다. 완연한 밤이 대지에 맞닿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적막은 그렇게 완성된다. 이제 아무도 없다. 천천히 긴장을 풀자, 조금씩 쌓였던 한숨이 통째로 빠져나온다. 심장과 폐를 밖으로 뱉어낸듯, 가슴 전체가 공허를 말하는 느낌이 든다.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어 눈길이 정처없이 흔들리고, 시선은 온 풍경을 훑은 뒤에야 힘없이 늘어진 팔다리를 만났다. 머릿속에 그려놓은 세상 속에서, 맨 마지막에 따라온 피사체는 늘 그렇듯 나 자신이었다.


“···하아.”


텅 비어버린 시간은 언제나처럼 버겁다. 달아나 도달한 곳은 낙원이 될 수 없으니, 고여 썩을 것이 아니라면 결국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 이제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아들된 자로써, 그리고 아비된 자로써. 두 남자는 오직 미련만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유예된 날이 흐를 때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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