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느린 결말

아포칼립스에 이유는 없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10.29 23:30
최근연재일 :
2022.12.14 19:01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4,378
추천수 :
152
글자수 :
175,692

작성
22.11.01 10:27
조회
461
추천
15
글자
12쪽

달아나 닿은 낙원 (2)

DUMMY

중대 부지 전체를 돌았다. 쓰레기장은 막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싸지방은 내기 게임하는 분대로 가득했으며, 체력단련실은 짙은 체취가 자욱하니, 이름을 따라서 향한 휴게실은 석식이 맘에 들지 않았던 이들로 바글거렸다. 하여, 기껏 찾아낸 쉴 곳은 샤워실이었다.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내려온 이곳은 군대라기에는 너무 고요했다. 그런 시간이기는 하다. 일과가 끝나고, 하루를 보상 받으려 몸부림치는 시간이 아니던가. 당장 내일부터는 일과가 없는 주일이니, 몇 사람은 굳이 방문하지도 않을 터였다.


넓은 샤워실 안에 홀로 선다. 본래라면 수증기로 가득해 보이지 않을 모습들이 보인다. 누군가 잊고간 면도기, 병장 주기가 적힌 각종 세정제,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나쁘지 않게 생겼지만, 딱히 오래 보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할 일은 없으니, 그냥 뜨거운 물이나 맞자.


한참동안 물줄기 아래 서있으니, 공기가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적막에 익숙해진 귀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잡아낸다. 그 사이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인기척 또한 들려온다. 걸음걸이는 평소와 달랐으나, 탈의실에서 말하는 목소리는 익숙했다.


“そこはどなたですか? (거기 누구십니까?)”


피로가 가득 담긴 음색,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쳐져있었다. 텐션은 항상 낮은 주제에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를 섞어쓰는 기괴한 놈이다.


“나야.”

“Don’t know because echoes. (울려서 모르겠는데.)”

“···마지막으로 뒤지고 싶다고?”


힘을 실어 말하자, 탈의실의 기척이 점차 빨라진다.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훌렁훌렁 벗어던지는 생활복이 보였다. 문을 벌컥 열으며 들어오는 녀석은 과장되게 웃고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와 거뭇하게 탄 피부, 반짝이는 치아가 서로 대비를 이룬다.


“그럴리가요. 이선영 병장님.”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죠. 천승연 상병님.”

“이제 선임들한테 실수하지는 않잖습니까.”

“오, 나는 이제 선임이 아니다?”

“그냥 선임으로 대하시기를 바랍니까? 아니실 것 같은데.”


샤워기를 하나 건너 뛰어서 자리잡은 천승연이 물온도를 맞추며 되물었다.


“오, 눈치 없던 애가 이제야 나를 좀 아네.”

“제가 좀 부족하기는 했죠.”


아무튼 잘 되었다. 이 녀석과 함께 나가면 시간이 얼추 맞겠지. 이등병 때처럼 옆 사람의 박자에 맞춰 몸을 씻는다. 떠나가는 선임과, 남아있을 후임과의 사소한 예우였다.


샤워를 끝마친 뒤 마주한 중대는 어딘가 부산스러웠다. 복도에 옹기종기 모여 웅성대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려온다. 직속상관 전달사항이라도 생겼나? 계단을 올라 층계참에서 살펴보니, 허리에 손을 얹은 포술관이 보였다.


“금일 점호는 근무자신고와 병행하여 약식으로 진행한다!


나와 눈이 마주친 포술관이 오랜만의 군인다운 발성으로 소리쳤다.


“전역자 앞으로!”


아, 전역사··· 어쩐지 일과 동안 조용하다 했어.

승연이가 말없이 내 세면도구들을 건네 받았고, 나는 계단을 마저 올라가 포술관 옆에 선다. 복도를 가득 채운 후임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내가 잘 모르는 막내들은 자리에 없었다. 포술관은 이런 디테일을 모르는데, 이 전역사는 병장들이 입김이 닿은 모양이었다.


“그럼 이선영 병장의 전역사가 있겠다.”


포술관이 살며시 비켜서니 그토록 많은 시선이 나에게 꽃혔다. 동기 없는 설움을 실세가 되고부터는 느끼지 못했는데, 마지막이 되어 또다시 체감한다. 나눌 사람이 없는 경험은 쉽게 왜곡되고, 일그러진 잔상은 더욱 오래간다는 걸 안다.


나는 이 부대에서 어떤 사람이었지?


기억을 더듬는다. 일머리는 있지만 사회성이 없는 놈, 그게 나에 대한 첫 평가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선임들과 능률이 비슷해졌을 때, 나는 그들에게 특이한 놈이 되었다. 그 뒤로 내 군번을 기준 삼아 위와 아래의 비율이 비슷해졌을 즈음, 나는 중대의 에이스가 되어있었다. 작업을 하던, 주특기를 하던, 간부를 보조하던··· 내가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을 때에야 깨달은 위치였다.


솔직하게 말하자. 머리를 굴리면 말이 길어지니, 애들도 싫을 터였다. 계단 아래, 형광등이 깜빡이는 층계참 중앙에 멀거니 서있는 천승연을 바라보며 말한다. 복도에 있는 애들을 바라보면 언젠가 부담스러워 내가 말을 절을 테니까.


“너무 노력하지 말자. 어차피 포상에는 한계도 있고 우리는 GOP 들어가면 위로휴가가 나오니까. 부여받은 주특기만 잘하면 돼. 물론 필요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내서 대우를 받을 때는 좋긴 한데, 따져보면 해낸 만큼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애초에 병의 직위로 수여받을 수 있는 보상은 병장쯤 되면 별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아무도 다치지 말자. 경험상 규모 있는 훈련을 하게 되면 꼭 한 명씩은 다치더라고. 특히 일꺽부터 상초 애들. 그맘때면 자기도 모르게 무리를 하게 되니까. 서로 잘 살펴줘.”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포술관을 본다. 노력하지 말자거나, 다치지 말자거나와 같은 당부는 사실 식상한 전역사다. 다만, 그게 내 입에서 나왔다는 게 불편할 수 있다. 그들이 내 편의를 봐주었다는 건 확실하니까.


“나 병 출신이잖아, 새끼야.”


그의 말에 살짝 웃는다. 참, 포술관도 아직 이십대였지. 군인 아니랄까봐 액면가가 높단 말이야. 다소 경직되어있던 후임들도 포술관의 말을 듣고서야 자세를 푼다. 민성이가 일부러 큰 몸짓으로 박수를 쳤다. 그에 이어 몇 초간 박수 세례가 끝나고, 오늘의 점호를 약식으로 처리한 이유를 들을 때가 왔다.


“이제 막내들도 나와라!”


생활관 문틀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막내 군번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정렬한다.


“알다시피 내일은 주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선영이의 말출날이기도 하다. 자가전역하니까 사실상 마지막이지. 해서, 오늘 사령이신 인사과장님이 빚을 갚겠다고 하셨다.


첫째로, 자율 연등이다. 피곤한 사람들은 대전차 소대나 근무자 취침방에서 자도록.

둘째로, 분대장들이 계획한 냉동 파티는 보급관님이 반려했었지. 그런데 지난 달 부대 회식비가 좀 남았었다. 신예림 중사랑 김현규 하사가 배달음식을 좀 가져올 거다. 메뉴는 치킨, 피자, 햄버거. 너희들이 걷기로 한 돈은 신예림 중사한테 보내. 부족한 금액은 간부들이 나눠서 내마.


오늘 야간 근무자들은 좀 아쉽게 됐는데, 불쌍하다 싶으면 알아서 교대해라. 나중에 CCTV 기록지를 가지고 사유를 물어보면 냉동식품 취식으로 인한 단체 복통이라고 전달하면 된다.


자, 뭐라고?”


파격적인 이야기에 웅성대던 병사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복창한다.


“냉동식품 취식으로 인한 복통!”


상병장까지 목청을 높이니 온 복도가 쩌렁쩌렁 울린다. 복도의 유리창도 잘게 떨렸는데, 아마 옆 의무 중대까지 들리지 않았을까? 의무대 환자들이 몰래 담배피다 놀랐겠어. 괜한 생각이 닿아 웃음이 난다.


“···평소에도 이 정도 목소리면 얼마나 좋냐.”


포술관은 민성이에게서 인원 현황판을 건네들고서 복도에 나온 인원을 쭉 훑어봤다. 민성이에게만 들릴 소리로 기타 열외자에 대해 물어본 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황판에서 시선을 거뒀다.


“이상, 점호 끝. 근무자 제외하고 해산.”


모든 인원들이 각자의 생활관으로 줄지어 들어간다. 왜 평온해야할 전역 전날밤이 이리도 혼란스러워졌을까. 계단을 올라온 천승연이 내 세면도구를 건넨다. 이제 쓸 일이 없는 물건이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너희 막내 들어오면 주는 게 어때?”

“아, 이제 쓸 일 없으시죠. 그 말을 들으니 실감이 나네요.”


승연이가 양손에 세면바구니를 들고서 복도 끝으로 멀어진다. 대전차 소대의 위치는 박격포 소대와 거리가 있었기에, 그 걸음은 꽤나 길었다. 생활관으로 들어가면 간부들의 대우 덕에 애들의 호들갑을 들을 텐데, 그런 건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포술관이 그렇게 말했다 뿐이지, 내 군생활은 누군가에게 화자될 정도로 이상적이지 못했으니까.


···잠깐 동안 보급관실에 있을까?


소파에 앉아 맛스타 하나를 한달음에 들이킨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곳은 업무를 볼 때가 아니면 들어올 일이 없었다. 가끔은 느긋하게 들어와 농담이라도 몇 마디 주고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나는 끝까지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마음이 복잡해 빈 캔을 손아귀 안에 구긴다. 그렇게나 기다리던 오늘이었다.


기껏 마지막 날이 되어서, 전입 첫날의 감상이 밀려들고 있었다. 더없이 기쁠 하루일 줄만 알았는데, 맛스타의 부족한 맛이 그저 씁쓸함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온다. 약간 들뜬 목소리 사이로, 나에 대한 질문도 간간이 들렸다. 이선영 병장님은 군생활을 어떻게 하셨길래 과장님한테 빚을 지웠나. 간부들이 사비를 써서 전역을 축하하는 건 처음 본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 말에 가슴이 더욱 미어져, 나는 캔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소름, 시원함을 느끼다 이내 알싸함을 보내오는 피부. 캔을 탁자 위에 내려두고 손가락을 보니 핏방울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감정이 과함을 그제야 느낀다.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서랍을 열어 구급함을 찾았다. 포장지가 뜯긴 파스들 뒤로 새로 보급받은 응급도구들이 보인다. 소독약, 연고, 반창고··· 필요한 것들을 책상에 늘어놓고 상처를 감싸던 차에 보급관실의 문이 열린다. 포술관이었다.


“엉? 왜 여기있냐?”


그의 말투가 한없이 가벼워, 가라앉힌 기색에 다시 불이 붙었다. 미워할 대상이 생기자 길을 잃은 상념에 첨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협조관님이 불편하게 만드셨지 않습니까?”

“이제 포술관이라니까. 그런데 뭐가 불편해? 에이스는 불편할 것도 참 없네.”


말끝을 길게 늘이며 빈정댄 포술관은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연신 확인하며 내게 말했다.


“너 하나 때문에 하는 일은 아니다. 마침 운영비 잔여분을 써야했는데, 마침 군생활 열심히 했던 놈이 전역하는 날이 있네. 그렇다고 매달하던대로 삼겹살이나 구워먹으면 효과가 없으니까. 열심히 하면 이정도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려주려면 뭐가 좋을까. 일을 만든 이유는 그것 때문이야.”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 상황이 맞아떨어졌다는 변명을 거리낌없이 믿기에는, 군대는 일이 생겨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손가락에 붙인 반창고를 다시 고정하며 화제를 종식시킬 다른 말을 찾는다. 그렇게 포술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음식은 몇 명으로 나눠야 됩니까?”


이상욱 중사는 뜬금없는 내 말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생활관 현재원 보고 뿌릴 거야.”

“그래요? 평소 같지 않네요.”

“그래, 군대 같지 않지?”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더라.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소대장의 히스테리를 받아주던 협조관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던 이등병 시절에는 그냥 상사를 잘못 만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일병 3 호봉 쯤인가?


안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던 소대 외박 날, 우리가 소대장이 데려왔던 가족의 하인 노릇을 하기 전까지는.


병사의 신분으로 증거를 모으기는 어려웠기에 나는 조력자를 찾아야했고, 마침 가장 가까운 이가 그를 혐오하고 있었으니. 오늘 같은 날, 우리 둘은 지금처럼 보급관실에 앉아있었다. 결심한 뒤의 일은 어렵지 않았다. 소대장은 본인의 행동이 정당하다 믿어의심치않는 사람이었고, 당시 소대장이었던 현 보급관이 그와 경쟁중이었으니까. 이해가 맞았을 뿐이다. 아까 덮고 있던 침낭을 떠올리며 작게 실소한다.


수많은 변명과 일말의 진심을 엮어내, 결국 서로 뒷짐진 채 악수한 말들은 한껏 뒤엉킨만큼 견고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포칼립스에 이유는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5 하루 끝 (4) 22.12.14 45 2 12쪽
34 하루 끝 (3) 22.12.11 32 1 10쪽
33 하루 끝 (2) 22.12.07 37 1 10쪽
32 하루 끝 (1) 22.12.06 39 2 14쪽
31 지금 (5) 22.11.30 46 2 14쪽
30 지금 (4) 22.11.29 41 2 9쪽
29 지금 (3) 22.11.28 38 2 10쪽
28 지금 (2) 22.11.27 38 2 10쪽
27 지금 (1) 22.11.26 42 1 9쪽
26 수호자 (9) 22.11.25 47 1 10쪽
25 수호자 (8) +1 22.11.24 55 4 9쪽
24 수호자 (7) 22.11.23 50 1 10쪽
23 수호자 (6) 22.11.22 53 2 11쪽
22 수호자 (5) 22.11.21 54 2 10쪽
21 수호자 (4) 22.11.20 47 2 10쪽
20 수호자 (3) 22.11.19 58 2 10쪽
19 수호자 (2) 22.11.18 59 2 10쪽
18 수호자 (1) 22.11.17 65 3 11쪽
17 남은 손가락 (10) 22.11.16 70 4 17쪽
16 남은 손가락 (9) 22.11.15 72 3 11쪽
15 남은 손가락 (8) 22.11.14 69 3 10쪽
14 남은 손가락 (7) 22.11.13 69 2 10쪽
13 남은 손가락 (6) 22.11.12 74 2 9쪽
12 남은 손가락 (5) 22.11.11 78 3 11쪽
11 남은 손가락 (4) 22.11.10 92 3 12쪽
10 남은 손가락 (3) 22.11.09 113 3 10쪽
9 남은 손가락 (2) 22.11.08 125 4 10쪽
8 남은 손가락 (1) 22.11.07 171 5 9쪽
7 달아나 닿은 낙원 (7) 22.11.06 224 6 12쪽
6 달아나 닿은 낙원 (6) 22.11.05 218 6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