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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아포칼립스에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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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10.29 23:30
최근연재일 :
2022.12.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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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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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5,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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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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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하루 끝 (2)

DUMMY

침대에서 일어나 밝아진 방을 둘러본다. 작은 선반과 탁자, 침대가 가구의 전부인 작은 방이다. 탁자 위에는 랜턴와 커피포트가 있고, 선반에는 찻잎과 원두나 소량의 첨가물만 단촐히 놓여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잠을 청하기 위한 방으로 보였다. 나는 체스를 위한 물건들을 정리해 선반에 올려놓은 뒤 방의 키를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탁자 위에는 내가 가져왔던 무장들이 올려져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주섬주섬 착용했고, 덕분에 그의 뒤를 쫓아가지 못했다.


복도는 일렬로 이어졌다. 합성목재로 마감한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길게 깔려있었, 일정한 간격마다 작은 꽃들이 놓여있었지만 향기는 나지 않았다.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조화였다. 복도에서 통하는 문은 아까와 같은 침실 뿐이었다. 문에 호실이 쓰여있기는 했으나 층을 표시하는 앞자리는 없었다. 내가 있던 방은 72호실이었다 그 뒤로도 방은 많았고, 이곳은 대략 중앙 근처인 듯했다.


양쪽 다 나름의 출구로 향하는지 방향을 표시하는 기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왼쪽 길을 따라 걸었다. 호실의 번호가 작아지는 방향이었다. 걷다보니 곧 위로 향하는 흰색 계단이 나온다. 윗층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층계참에는 열쇠를 보관하는 수납함이 벽면에 설치되어있었다. 72번 함에 키를 넣는다. 계단을 마저 올라간다. 한 번 왔던 곳이다.


침실 구역의 윗층은 탑의 일층이었다. 나는 곧장 광장으로 나왔다. 수호자들의 머릿수가 확연히 적어져있었다. 카페 역시 문을 닫은 상태다. 그가 문답을 통해 말해주었듯, 거점은 이미 퇴근 시간이었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늘은 수호자가 되어 첫 단추를 채운 날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많았다. 광장의 홀로그램은 일층의 테이블이 거대해진 버전에 불과했다. 크기 때문에 레이드로 분류된 재앙의 정보 확인에 쓰일 뿐이다. 나는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조작판을 작동시켜 그에게 들었던 재앙을 검색했다.


[EMS-220013] 정찰자 : 한설영, 이지혜, 천예령, 신진희

규모 E 에 따른 진입 한계점 - 372 : 41 : 23

중력 이상 최고점 2.638 N, 지역에 따라 무장에 차등을 둘 것.

지형도 제작 78.3%...


주요 활동지는 고산 지대로 증기로 뿜어지는 수은 확인.

거처는 각도가 수직에 가까운 동굴로 내부에 유속이 빠른 물길이 존재.


···한 눈에 보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내용들이 적혀있다.


고개를 들어 미완성된 지형도를 살펴본다. 대상의 마지막 관측 지점이 점멸하고 있다. 붉게 빛나는 점을 누르자 놈의 마지막 모습이 표시된다.


길쭉한 얼굴에 굵고 긴 모발, 안구는 하나지만 동공이 여러 개다. 코는 보이지 않고 입은 하관의 절반을 채운 상태로, 살짝 벌린 입에는 상어처럼 겹쳐 자라난 불규칙적인 치열이 보였다. 팔이 길고 다리가 짧으며 몸이 전체적으로 얇다. 사진상으로는 네 발로 뛰는 중이었으나 이족 보행이 가능하다고 적혀있다.


체적은 신장 4.3M, 팔 길이 3.2M에 다리는 팔의 절반 수준.


퇴근을 위해 지하쪽으로 향하는 사람을 기준 삼아 크기를 상상해본다. 놈이 눈을 데굴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몸을 일으켜 선 뒤에 나를 경계한다. 잠시 전투 과정을 예상해본 나는 고개를 저어 상상을 지웠다. 저것의 간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작판을 다시 닫는다. 방금 지나간 사람을 마지막으로 광장은 황량해졌다. 활동 시간이 다른 인원들도 있다고는 했으나, 지금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걸음을 옮겨 지하의 입구로 향했다. 지나는 길, 일전에 보았던 중고 무구 진열대 앞에 멈춰서 가장 앞에 놓여있는 기다란 외날검을 잡아들어본다.


신장과 엇비슷한 길이지만, 내가 쓰기에는 다소 가벼운 느낌이 있었다. 이런 걸 들고 있으면 놈의 간격도 잴 수 있을까. 나는 잘 관리하여 번쩍이는 날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예기에 감화되어 바로 옆에 있는 나무의 가지를 노리고 휘둘러본다. 가지가 소리없이 떨어진다. 결을 가르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현실의 총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무기다. 가만, 최지명의 총을 만져보면 소감이 또 다를까? 그 또한 몇 번의 밤을 보내면 자연히 알게 될 터였다. 기대가 되는 일이다.


나는 지하통로를 지나 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아직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출근하는 사람들도 소수이지만 있었다. 그 중 거대한 장궁을 들고 있는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두 팔로 쏘는 활보다는 온 몸을 사용해 쏘아내는 투석기에 비견될 크기다.


“혹시 신입이신가요?”


나는 그녀의 수준을 빠르게 훑었다. 피부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근육들,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 활을 제외한 무장은 전부 경장이었다. 역할군이 확실한 현역이었다. 언젠가 도움을 받게 될지 모르기에, 나는 그녀에게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어··· 부담스럽게 왜 허리를 숙여요?”


그녀가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나는 그런 순수함에 웃으며 자세를 바로했다. 내 반응을 본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계산된 행동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 삼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퇴근도 처음이겠네요.”

“그렇죠? 지금까지는 그냥 잠에서 깨어났었는데.”


그녀는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흉터가 가득한 손이 눈에 들어온다. 상흔은 하나같이 불규칙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가진 장궁을 좀 더 면밀히 살폈다. 핏물이 배어든 시위에는 수없이 많은 세제향에 가려진 말라붙은 피고름 냄새가 났다. 장력을 지속으로 늘리며 피부도 그만큼 갈라졌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때보다는 나을 거에요.”


그녀는 힘찬 목소리와 걸음으로 통로를 통해 멀어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플랫폼 안쪽에 마련된 보관소로 들어갔다. 일렬로 늘어선 캐비닛을 따라 걸으며 내게 배정된 자리를 찾는다. 위치는 너무 깊지 않고 적당했다. 신입 다운 끝자리가 아닌 것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가장 최근에 이탈한 사람의 자리를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수호자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단지 자격이 끊어질 뿐이다. 수많은 기억을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간 이들은 사회 곳곳에 섞여 살고 있었다. 특성과 특이점을 잃고, 일반인보다 조금 강한 신체를 가지고서. 아, 재능은 열화된 채 남는다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이 수호자가 되어 강화되었을 뿐이니 다시 앗아갈 필요까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정리가 끝난 뒤에는 그가 말해주었던 위치에 서서 열차를 기다렸다. 게이트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열차는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재앙에서 채취한 자석으로 운행되는 영구적인 자기부상열차였다. 최대 탑승 인원이 오십 명 정도, 그만큼 작은 크기였다. 각 승차장에서 일분 동안 서있다가 출발한다.


열차에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인원들만 탑승해있었다. 한국 거점에서는 아무도 타지 않았으니, 저 사람들은 일본 거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수호자의 세계는 한중일의 사이에 끈끈한 우애가 이어진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거점 한 곳에서 감당할 수 없는 레이드는 인접 거점과 연합하여 처리하고는 했다며, 급한 때에는 모두가 당연하게 모여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리없이 출발한 열차는 흰색 터널을 달리기 시작했다. 노출된 접점없이 통으로 깎아낸 통로는 속도를 체감할 수 있는 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이동수단이었다. 게이트는 중국과 한국의 사이에 자리했기에 열차에 탑승해있는 시간은 몇 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같이 내려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반대편 길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저쪽은 한창 퇴근 시간인 듯했다. 그들 중 몇몇은 우리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일본인들은 그들과 면식이 있는지,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었다.


어느 정도 나아가니 중국의 인파가 우리쪽과 맞붙는다.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 속도는 모두가 같았다. 어떤 언약이라도 맺은 듯,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밀도를 조절했다.


어느덧 저 끝에 게이트가 보이기 시작한다. 너머가 보이지 않는 하얀색 문이다. 광휘가 뿜어져 나오는 출입구, 사람들은 그곳으로 줄을 맞춰 들어가고 있었다. 문이 가까워오자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넓은 통로에 맞는 거대한 문의 크기, 그리고 직선으로 뚫린 길.


그가 말했던 끝이 온다면··· 이곳이 마지막 방어선이 될 자리였다. 그의 말과 이어지는 현장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뒤를 돌아보던 모습 그대로 문을 넘었다. 얇은 선을 뚫고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침대 위에서 깨어난다. 누워있는 채로 마지막 자세를 유지한 상태였다.


집이 조용하다. 곧바로 몸을 일으켜 창가의 블라인드를 걷어낸다. 해는 이미 밝아있었고, 시계는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나는 오늘, 분명 많은 첫 경험을 치뤄내었다. 처음이 익숙한 날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를 바라지 않았었다.


늦잠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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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끝 (2) 22.12.07 37 1 10쪽
32 하루 끝 (1) 22.12.06 39 2 14쪽
31 지금 (5) 22.11.30 46 2 14쪽
30 지금 (4) 22.11.29 41 2 9쪽
29 지금 (3) 22.11.28 38 2 10쪽
28 지금 (2) 22.11.27 37 2 10쪽
27 지금 (1) 22.11.26 42 1 9쪽
26 수호자 (9) 22.11.25 47 1 10쪽
25 수호자 (8) +1 22.11.24 55 4 9쪽
24 수호자 (7) 22.11.23 50 1 10쪽
23 수호자 (6) 22.11.22 53 2 11쪽
22 수호자 (5) 22.11.21 54 2 10쪽
21 수호자 (4) 22.11.20 47 2 10쪽
20 수호자 (3) 22.11.19 57 2 10쪽
19 수호자 (2) 22.11.18 59 2 10쪽
18 수호자 (1) 22.11.17 65 3 11쪽
17 남은 손가락 (10) 22.11.16 70 4 17쪽
16 남은 손가락 (9) 22.11.15 72 3 11쪽
15 남은 손가락 (8) 22.11.14 69 3 10쪽
14 남은 손가락 (7) 22.11.13 69 2 10쪽
13 남은 손가락 (6) 22.11.12 74 2 9쪽
12 남은 손가락 (5) 22.11.11 78 3 11쪽
11 남은 손가락 (4) 22.11.10 92 3 12쪽
10 남은 손가락 (3) 22.11.09 113 3 10쪽
9 남은 손가락 (2) 22.11.08 125 4 10쪽
8 남은 손가락 (1) 22.11.07 171 5 9쪽
7 달아나 닿은 낙원 (7) 22.11.06 223 6 12쪽
6 달아나 닿은 낙원 (6) 22.11.05 217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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