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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아포칼립스에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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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10.2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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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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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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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수호자 (3)

DUMMY

침대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젖히고 세상을 바라본다. 죽음이 보이지 않는 거리, 사회의 첫 단추를 채우는 직업들이 곳곳에 보였다. 아파트 단지를 나가는 쓰레기차를 지켜보니, 차량은 도로를 따라 운행하여 모습을 감췄다. 어디를 보아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한 현실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정식 수호자의 진입 방법은 이전과 다른 걸까? 아마 아닐 거다. 수호자에 대한 정보는 민간에 실마리조차 퍼져있지 않으니까. 다름아닌 내게 문제가 있다. 감각을 일깨워 상태를 확인하다. 가시지 않은 몽롱함, 머리를 지긋이 누르는 수면제의 잔재. 특이점은 그것 뿐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수면제 봉투를 확인하고, 적혀 있는 약의 명칭을 휴대폰으로 검색해본다.


로라제팜,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향정신성의약품.

4주 이내의 단기간에만 처방할 것을 권고.


약을 슬쩍한 상자에만 대략 3개월 분이 있던데, 아버지의 불면증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마음을 써주는 편이 좋을까? 관계에 대한 저울질을 고민할 무렵, 방문이 천천히 열린다. 얇고 길쭉한 손가락이 유리컵을 감싸고 있다. 절반쯤 찰랑이는 물, 세화가 내 방에 슬그머니 들어온다.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일찍 일어났네?”


그녀는 새벽임에도 감정을 한껏 담아 웃었다. 원래는 얼굴에 뿌리려던 물을 내게 건넨다. 얼음을 넣지 않았을 뿐이지, 유리를 통해 전해지는 차가움은 피부가 에일 정도였다.


“오늘은 깨울 필요 없었잖아?”

“···그렇지?”

“걱정이 과해.”


그녀가 건넨 찬물을 한달음에 넘긴다. 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다. 아버지도 일요일은 쉬시니 외가나 한 번 가볼까. 외할머니가 하실 말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게도 수호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지, 단지 소소한 지원을 약속할지. 그도 아니면 이제서야 뒤늦게 내 생각을 물을지. 짐작이 가는 부분은 많으나, 정작 마음이 기우는 방향은 없었다. 딸의 죽음은 분명 그녀에게 큰 슬픔이 되었으나, 가장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화살을 본인에게 돌리지는 않았으니.


그녀는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났다는 말을 처음으로 입에 올린 사람이었다. 그 집안의 시선에 돋친 가시가 날카로워졌을 때도 그날부터였지. 집안의 웃어른이 마음 편히 탓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비극들이 불쌍하지 않았다. 나에겐 되려 희극에 가깝다. 삶의 그늘도, 가문의 하락세도.


“점심 지나서 외가에나 가볼까?”

“아빠도 같이?”

“그래야지.”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건물들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태양이 보인다. 아직은 희미한 여명에, 나와 세화는 그 수줍음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또다른 날의 시작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소총들을 만져본다. 내 랩탑은 굼벵이 같았기에, 세화의 물건을 빌려 구조도를 띄운 상태였다. 몇 분 되지 않아 분해가 끝난 총기들의 상태는 다행히 양호했다. 공기관의 물건이니만큼 관리가 소홀하지 않았다. 한 번의 전투로 인한 화약만을 닦아내고, 기름이 뭉친 부분은 청소뒤 재도포한다. 세화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비가 끝나고 총기를 재조립한다.


“오빠, 그런데 계속 총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지금 가진 특성들이 전부 총기 관련이니까 앞으로도 같지 않을까.”

“그러다 총이 안 먹히는 상대를 만나면?”


총기를 더플백에 넣은 뒤 붙박이장 구석에 둔다. 총의 화력이 먹히지 않는 상대라. 애초에 그런 놈을 만나면 수호자의 육체와 냉병기의 조합으로도 뚫을 수 없지 않나. 아니면, 그쪽 계열의 특성들은 전부 더 강한 출력을 내는 데에 집중되어있는 걸까?


“글쎄, 체급이 더 높은 총기를 구해서 쓰거나 그것도 부족하게 되면 규격을 넘어선 물건을 들고 다니거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나중에는 박격포라도 들고 쏘려고?”


나는 몸에 힘을 주고 근육의 경도를 확인했다. 쉽게 느껴지는 악력도 거점에 입장하고 나서 더 강해졌다. 신체를 강화하는 특성을 얻게 되면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오, 그러고보니 4.2인치 정도는 들 수 있을 것 같아. 좋은 생각이네.”


긍정을 들은 세화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아름다운 투쟁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승리에 취하는 건 과정 중에 망가는 사람 혹은 현장과 멀리 떨어진 사람 뿐이다.


“타 거점이랑 거래하는 법을 알아봐야겠네. 사수 역할을 하려면 경기관총 한 정은 있어야 하니까.”


내 혼잣말을 들은 세화는 더 이상의 반론을 포기했다. 원거리 사수면 안전하기는 하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새벽은 그렇게 소모되었고, 우리는 거실로 스며든 햇살을 커피 한 잔과 즐기며 한적함을 누렸다. 나는 아버지의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은 약을 먹지 않았는지, 단잠에 젖은 고요한 숨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원래 몇 시에 일어나셔?”

“매번 달라. 일이 있으면 일찍 일어나고, 없으면 늦고. 그러고보니 알람 없이도 시간 맞춰 일어나는 건 오빠랑 똑같네.”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며 방문에서 시선을 거둔다. 아침 식사는 늦을 것 같았다. 세화와 함께 사담을 나누며 장난을 받아준다. 아홉 시를 넘겼을 즈음에 문자 하나가 왔다.


[금액 준비됐습니다. 언제든 시간될 때 방문하시죠.]


적적하던 때에 일거리가 생겼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세화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내 손을 만지작거리다 얼마가지않아 다시 휴대폰을 만졌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적절히 섞어놓은 듯한 행동에 웃음이 나온다.


“같이 쇼핑이나 갈까?”

“갑자기? 좋아!”


[지금 갈게요.]


문자를 남겨둔다. 남자인 내가 준비할 것은 얼마 없었다. 씻고 말리고 적당히 바르고, 옷을 입은 뒤에 향수를 뿌린다. 세화를 기다리는 동안 눈썹과 잔털들을 정리하기는 했다만, 화장이 필요한 여인보다 오래걸리지는 않았다. 거실에 앉아 몇 분쯤 더 기다린다. 세화는 금방 나왔다. 옅게 마무리한 화장과 내 옷과 맞춘 단조로운 의상 탓이었다. 나는 살며시 웃었다. 적어도 오늘의 그녀는 어머니와 다르게 꾸며져 기꺼웠다.


“가자!”


팔 하나를 쭉 뻗으며 소리친 세화와 함께 집을 나선다. 곧, 차량의 조수석이 익숙해진 그녀와 현금 다발이 새롭지 않은 나를 만난다. 그렇게 돈이 담긴 가방 여섯 개로 가득해진 뒷자리와 함께 백화점으로 들어간다. 우리 둘은 딱히 명품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매장이 백화점이었을 뿐이다. 그 덕에 돈을 마련하기도 했으니, 이곳에서 돈을 쓰는 것도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가방 하나 정도 쓰려는 행동을 보이니, 그때부터는 오히려 세화가 더 신나보였다. 이 매장 저 매장 끌려다니며 손에 들린 쇼핑백만 어느덧 열개를 넘어갔다. 나는 그녀를 제지했다.


“세화야, 잠깐만.”

“응?”


행복에 절여진 표정과 몸짓을 보며 헛웃음을 흘린 나는 양손에 가득 들린 쇼핑백을 보여줬다.


“일단 차에 두고 오는 게 어떨까?”


내 모습을 본 그녀는 그제야 바보같이 웃었다. 신나서 그랬다는 세화에게 나는 그저 웃어보일 뿐이었고, 다녀온 뒤 다음층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우리는 발길을 달리했다. 혼자 주차장에 돌아와 물건을 넣고 세화와 약속했던 위치로 향한다. 차량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주차장은 그만큼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나는 특이한 행색의 여인을 만났다.


실내임에도 챙이 긴 모자와 선글라스, 살을 보일 수 없다는 듯한 차림새. 하지만 피부가 약하다기에는 신체 조건이 좋다. 전체적인 체구는 작지만, 골격에 비해 근육의 성장도가 높았다. 여러모로 시선이 가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런만큼 의도적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의 관심을 불편해할 테니.


열린 문으로 탑승하여 지상 2층을 누른다. 여인의 목적지가 나와 같았는지, 그녀는 내 뒤에 서서 휴대폰을 만졌다. 이윽고 장신구 매장으로 밀집된 층에 승강기가 멈춰서며, 나와 여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는 세화와 쇼핑을 지속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중간마다 여인의 시선이 잡혔다가 사라졌다. 나를 관찰하고 있다. 이유가 뭐지? 품 안에 넣어둔 K-5 를 의식하며 세화의 몸을 의도적으로 가린다. 그러면서도 나는 세화에게 팔찌와 반지, 가방을 선물로 주었다. 향수 매장은 일부러 가까이 하지 않았다. 향이 없는 기척을 분간해야했다.


한 시간쯤 되어 세화가 화장실에 들렀을 때, 나는 여인이 남긴 흔적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시선의 위치는 점점 멀어져 까마득한 위쪽으로 이어졌다. 발길은 끝내 최상층의 정원에 닿는다. 그곳의 테이블에 여인이 있었다. 음료 한 잔은 자신 쪽에, 다른 한 잔은 비어있는 맞은 편에 둔 상태다.


나는 여인의 앞에 앉았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음료를 한 모금 마신다. 그렇게 몰려들었던 눈길이 사라졌을 때, 나는 K-5 를 품에서 꺼내어 여인을 조준했다.


“뭡니까? 당신.”


확신이 가득한 행동에 그녀가 가볍게 웃는다. 여인이 면장갑을 낀 손을 들어 짙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손이 그리는 곡선이 완전하다. 그녀의 외형을 살핀다. 긴 속눈썹에 직선으로 끝나는 눈꼬리. 나는 눈가를 씰룩였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노출증?”


내 말을 들은 여인의 미간에 즉시 주름이 진다. 그녀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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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수호자 (5) 22.11.21 54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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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남은 손가락 (3) 22.11.09 113 3 10쪽
9 남은 손가락 (2) 22.11.08 125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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