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세대 무협의 맛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세로줄 대본소 무협의 맛도 질리도록 본 사람으로서 장황한 초식이름 나열하기가 곱게 보이지 않더군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두 취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무협으로 시작했느냐, 어떤 무협에 크게 감동하여 무협장르에 몰입하게 되었느냐가 취향의 결정적인 차이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홍콩이나 대만작가의 무협을 접하기 전에 끼니를 걸러가며 미친 듯이 만화방 대본소 무협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매 편마다 나오는 아름다운 히로인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맹목적으로 주인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매 편마다 뜨거운 러브씬이 동반합니다. 결국은 일곱 부인을 얻고 절대강적을 물리치면서 종결이 나는 스토리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고 가슴은 미친 듯이 뛰는 환타스틱한 이야기였죠. 절대로 명작동화나 교과서에는 없던 이야기였습니다.
짧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똑 같은 패턴에 결국은 식상하게 되고 열기는 차츰 식어 가더군요. 그래도 무협은 남자의 로망인지라 미련처럼 만화방을 들락 거렸는데 그쯤 되니 무협을 선택하는 기준이 두 가지로 압축되더군요.
그 첫째가 장면 바뀜에서 * * * 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 이었습니다.
글이 진행 되다가 갑자기 흐름이 끊기는 것 같아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얼마나 글재주가 없으면 책에 기호까지 달아서 장면이 바뀌는 것을 표시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해 보면 좀더 세밀한 묘사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그 둘째는 무협초식의 장황한 나열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 이었습니다.
그건 과거 무림을 설명하면서 천황으로 끝나는 오대 고수나 십대 고수의 이름으로 한 페이지 전체를 도배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무슨 놈에 절대고수가 저리도 많은지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등장하는 케릭터라고는 모두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 놈들뿐이고 주인공이 무공을 시전 함과 동시에 반드시 등장하는 열자가 넘은 이름도 생소한 초식 나열은 짜증은 두 배가 증가 시켰습니다.
생각해 보면 장황하고 긴 초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냄새 나지 않는 주인공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초식 이름이 길어질수록 묘사는 줄어들고 적들은 긴장감 없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지 읽을 맛이 뚝 떨어졌던 거죠.
이제 많은 세월이 흘러 그때 상황을 정리해 보면 그 당시 작가들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이지는 한정되어 있고 공식처럼 등장해야 하는 이벤트를 거치자면 대부분의 상황묘사는 생략해야 하지 않았을까 머리가 끄덕여 지는 겁니다. 그래서 * * * 기호로 장면을 바꾸고 장황한 초식이름으로 싸움묘사를 생략했던 것을 아닐까 하고요. 어쨌든 그 당시 무협은 그러한 여러 기법으로 작품성은 떨기면서 대신 독자의 빠른 몰입을 유도하는 데는 성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본무협의 기법들이 여전히 출판무협까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는 기법들은 아니지만 작품의 진한 감동을 원하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아주 편리한 기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래 들어서 과거 그러한 투박한 기법이 좀더 세련되게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보아 왔으니 반드시 질이 떨어지는 표현방법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장르문학은 절대 시장성에 좌우된다고 봐야 합니다.
무협장르 소비주체가 아니라면 취향을 바꾸거나 가만히 지켜보면서 좋은 작품을 찾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빠른 전개와 간결한 문장은 작가가 시장에서 살아남는 한 가지 키워드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어쩐지 요즘 장르시장이 옛 만화방 대본소 무협시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 집니다. 조만간 전례를 따라 다시 한번 뒤집어 질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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