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에게 삶이란 비겁이었다.
그 비겁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늘 어둡기에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밖의 소란이 사라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또한 사라진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난 그곳을 나왔다.
문을 열자 불에 타 죽은 말의 시체가 문 아래로 부서져 내렸다. 아마 내가 들어간 후에 죽은 말의 시체를 끌어다 놓았을 것이다. 말의 시체는 불에 타서 야위어 있었다. 죽었기에 야위었다는 말을 써도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집의 형태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난 바로 등을 돌리고 떠났다. 저 안에는 내가 볼 수 없는 것들만이 남겨져 있을 것이 뻔했다. 이제 저 안에서 있던 것 중 남은 것은 나와 내가 찬 한 자루 검뿐일 것이다.
난 그믐의 밤에 기대에 걸었다. 동쪽을 향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동쪽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은 점령지에 주둔군을 남기지 않았다. 마치 말살이 목적인 자들 같았다. 그랬기에 말살에서 벗어난 난 오히려 안전했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밤에 기대어 걸었고 가끔씩 썩은 시체를 밟고 넘어졌다. 넘어져 마주하게 될 얼굴들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이 없길 바랐다.
그믐이 보름으로 바뀌었을 무렵 난 더 이상 시체를 밟고 넘어지지 않았다. 달이 밝아진 것은 작은 이유였고 큰 이유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시체였다. 아마 레벤후크와의 국경지대일 것이다. 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쿠슬란은 확실히 망해버린 것이다. 깨지거나 패한 군(軍)은 군이라 할 수 있지만 도망가 버린 군은 더 이상 군이라 부를 수 없었다. 땅은 있으되 그 위에 사는 사람은 없고, 사는 사람이 없기에 지킬 것이 사라진 나라를 더 이상 나라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곧 레벤후크에 닿을 것이다. 동쪽의 나라. 바다를 벗하기에 바다를 닮아가는 자들의 나라. 이곳에서 난 하늘을 보고 바람을 가누며 바다위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나의 이야기는 시작될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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