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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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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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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쪽

4

DUMMY

은둔자 알카드마.


흑마법사인 그는 실력은 크게 높지 않으나, 대죄를 저질러서 막대한 현상금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있었다. 다름 아닌 블루 크리스털의 교장인 에이블 제플록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언데드로 만들었던 것이다. 에이블의 위치는 현 아카데미의 총교관인 멜베스크와 비슷하나, 실질적인 지위는 백작 급 귀족에 가까웠으니 그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알카드마가 죽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호위대를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 일개 평민 출신인 그가 귀족을 죽일 것이란 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이 일로 가장 분노를 표출했던건 라르카 백작이였다. 그는 에이블의 단짝이라고 할 정도로 친하였고, 그 정도가 계급을 넘어 말을 틀 정도였다.




"녀석을 잡는 이에게 3만 길드(G)를 내리고 나의 직위로 기사 작위를 내리겠노라."




이것이 알카드마에게 현상금을 걸며 했던 라르카 백작의 말이였다. 3만 길드면 값싼 저택 하나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돈이였다. 거기에 아무런 과정 없이 바로 기사의 작위라 한다면 늙어죽을 때까지 돈 걱정없이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홀몸이면 사창가에서 여자들을 사고, 매일 고기와 비싼 술을 먹어도 돈이 남을 정도! 이 파격적인 조건에 모두가 군침을 흘렸다. 현재 알려진 알카드마의 수준은 이제 막 4단계에 진입한 정도였다. 이 정도면 블루 크리스털에선 교관직을 얻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에이블을 살해하기란 불가능하였다. 에이블의 수준은 7단계였으니 말이다. 불가능의 경지라 알려진 10단계를 제외한다면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 경지인 9단계와는 단 두 단계 차이였다. 심지어 마법쪽은 단계가 높을수록 그 격차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부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검술 깨나 쓴다는 용병들도, 책을 구하지 못해서 그저 그런 경지에 머물고 있는 마법사들도, 돈 좀 제법 만지면서 수준 있는 녀석들을 고용할 수 있는 상인들도, 그저 고액의 맛있는 사냥감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잡히지 않았다. 은둔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의 '재능'은 숨는 데 탁월하였으니 말이다.


한동안 이 일로 포스티어 제국은 떠들썩했지만 금방 조용해졌다. 아카데미쪽은 4급 학생들의 첫 몬스터 사냥 출전과 밀레트와 헤스타, 라이가스를 포함한 유례없는 엄청난 배경의 1급 학생들의 졸업 준비 때문에 자연스레 잊혀졌다. 마치 아카데미 내부와 외부는 별개의 세상이라고 인식하는 듯 말이다.
















렘피룬트는 근엄한 표정으로 네 그룹으로 나뉘어진 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몬스터 사냥을 하기 한 달 하고도 8일 전, 조를 지었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달라지긴했었지만 처음 보였던 '특색'이 나타났다. 조별로 치를 거라는 시험은 본래 조장들에게 내린 개인 임무였다. 당연히 조장들은 전부…… 아니,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알아차렸고 위장용 시험인 근지구력 시험에 혹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후.


우선 제트가 조장인 1조는 집중이 안되는 처음과는 다르게 제트에게 완벽히 귀속되어있었다. 그의 조용한 카리스마에 압도된 학생들이 입을 다물고, 그의 갑작스러운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절도있게 서있었다. 흐리멍텅한 눈을 가진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근지구력 시험 때도 지쳐서 쓰러지는 녀석이 있었어도 완수하지 못한 아이는 없었다. 어째서냐 묻는다면 제트 때문이라고 하겠다. 시험의 과제로 내준 건 내리치기, 휘두르기, 올려치기 세 동작 중 하나를 택하여 100회 휘두르는 것이였다. 쉬워보이는 과제였다. 하지만 들고 휘둘러야하는 건 진검. 철심을 박은 목검과는 천지차이의 무게를 가진 이것을 사용해야 했다. 익숙하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어떻게 힘을 사용해야하는지 모두가 몰라서 헤맸다. 당연히 시간이 좀 오래걸렸고, 도중에 포기하려던 조원도 있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끝낸 제트는 렘피룬트가 통과하였다고 외치는 소리에도 말없이 처음 골랐던 휘두르기를 계속 하였다. 몇 1조의 조원들은 포기하려했지만, 제트의 모습을 발견하고 검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1조의 조원 모두가 완수하였을 때, 제트도 그제야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숨을 몰아쉬면서 엄지를 치켜세웠고 수고했다라는 말을 날렸다. 반하였다. 제트의 그 모습에 모두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였다. 진검 휘두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들이 직접 겪어서 알고 있었고, 제트는 어느 하나의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자기가 손수 나서서 끝까지…… 검을 휘둘렀다. 자기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았을 것을 최고위 귀족의 아들이 직접 한 것이다. 그의 품위와 마음씀씀이에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이다.


2조는 낙오자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표정이 굳어지거나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신의 실패를 자책하거나 안타까워하였다. 그 이유는 선두인 피블론에게 있었다. 피블론은 정확히 99회에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였고, 1조의 패기에 압도되어 부담감이 상당하였다. 조원 모두가 든 생각은 그것이였다. 피블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친화력은 2조의 조원 중에서 그의 친구가 아닌 자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처음봤던 이들도 말이다. 인품으로 따지자면 제트 이상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피블론은 다른 이를 잘 이해하고 챙겨주었다. 그랬기에 이번 시험에서 '낙오'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만일 자신이 낙오한다면? 1조에 비해서 2조가 뒤떨어져 보일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조장의 체면과도 연결될 것이다. 피블론은 체력적으로 한계가 온 아이들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몬스터 사냥이 벌어진다는 것 역시 미리 통보받았기에 알고 있었다. 이 이상 무리하면 그때 무슨 일이 생기리라. 피블론은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몇 얼굴들을 보며 렘피룬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검을 땡그랑 떨어뜨리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이 이상은 힘이 들어 못할 것 같습니다."




피블론은 그 말을 하고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조원의 몇몇이 허탈해하였다. 하지만 이어서 들리는 말에 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조장이 힘들어서 먼저 포기한다. 근데 조원이 완수해버리면 내 얼굴은 완전히 먹칠이라고! 그러니 쉬엄쉬엄해!"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들 때문에 포기하였단 것을 말이다.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처음 했던 말도…… 피블론 본인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조원들의 상태를 보고한 것이였다. 실제로 이 이상 무리했다면 완전히 탈진해서 당분간 검을 휘두르지 못할 학생들이 많았다. 그간 연습을 게을리 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피블론은 그걸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걱정해서 솔선수범하여 검을 놓은 것이다.


힘들면 포기해라. 그것이 나의 판단이다. 너희는 아직 무리다.


물론 이 뜻을 읽은 몇 학생들은 고집을 부리면서 악착같이 완수하였다. 물론 보에르도 그 중 한 명에 속하였다. 시험을 끝내고 나니 피블론이 조장 체면이 말이 아니라면서 투덜거리더니 완수한 아이들을 일일히 찾아가 어깨를 두드려주며 괜찮냐, 내일 일어날 수는 있겠느냐면서 장난스레 물었다. 조원들은 피식 웃더니 이러다 조장이 바뀌는게 아니냐며 낄낄 웃어댔다.


2조의 시험이 끝나고 3조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각자 무얼할 지 선택하고나서 검을 움직이려던 그때, 3조의 조장 나다크가 한 마디 하였다.




"포기하면 버린다."




깊은 파괴력을 가진 말이였다. 조장으로서의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내치겠단 소리였다. 정말 무심하게 내뱉은 한 마디에 해이해졌던 몇 조원들의 기세가 불타올랐다. 이것은 경고이자 도발이였다. 자신을 따르는 조원에겐 정신을 차리라는 차가운 물이였고, 약간의 반감이나 불만이 있는 조원에겐 명백한 도발이였다.


당연히 3조에도 낙오자가 있었다. 나다크는 한계까지 힘을 쏟아 붓고 시험에 실패한 학생들을 모아놓으면서 말하였다.




"너희는 포기하지 않았었어."




그 말을 하고서 이따 낮잠이나 자러 가자면서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돌아섰다. 처음의 자극적인 말과는 달리 지금만큼 다정한 말은 없었다. 포기하지 않았으니 버리지 않겠다. 제트와는 다른 강렬한 분위기에 조원들은 매료되었다. 평소의 나태한 이미지와는 달리 할 땐 하는 반전적인 분위기가 한 몫 했으리라. 몇 조원은 나다크를 향해 언젠가 너를 꺾고 말겠다는 도발을 날렸고, 나다크는 나긋하게 한번 해보라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4조. 낙오자가 가장 많았고, 조원들간의 불화도 심하였다. 검이 부딪쳐서 말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었고, 조장인 리든은 그걸 또 말리지도 못하면서 성질만 부렸다. 한심한 그룹의 표본이였다. 당연히 이 상황을 자각하고 있는 리든은 괜히 화만 더 나서 신경질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당연히 낙오하였다. 4조에서 유일하게 낙오하지 않은 건…… 로이트였다. 그는 땀 한 방울도 안흘리고 진검을 휘두르고서 합격했단 소릴 들었다. 리든은 로이트의 성공에 더욱 분노하여 이를 갈아댔다.


렘피룬트는 시험이 끝나자 몬스터 사냥을 한 달 후에 간다면서 통보하였고, 그때까지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치 실수하면 죽을 거란 듯한 말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껏 연습 과제를 땡땡이 치던 아이들도 목검을 놓지 않았다. 그중에도 귀족의 아이도 몇몇 있었는데, 1조와 3조에 있는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제트와 나다크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썼다. 제국의 1인자 비하크마 대공과 황제의 총애를 받고있는 충신, 리호데 백작은 어느 누구도 부족하지 않았다. 굳이 그가 조장이여서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배경까지 그들을 굽히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지금. 1조는 통일된 기세를 갖추고 제트의 뒤에 도열해있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잘 연마된 금속처럼 반짝반짝 하면서도 차갑고, 단단했다. 그 어느 누구도 튀지 않고, 기사단이도 된 것처럼 그들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2조는 서로간의 신뢰와 조장에 대한 믿음과 우정으로 잘 연결되어있었다. 마치 하나의 군집처럼, 그들은 누군가가 있음으로서 좀 더 거대해졌고, 더 강해졌다. 3조는 1조와 2조의 특성을 전부 이어받은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신뢰와 경거망동하지 않는 절제를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조보다 색이 진하고 특별하단 것을 렘피룬트는 알고 있었다. 나다크는 언제라도 자신에게 도전할 기회를 주면서 조원들을 도발하였다. 이길테면 이겨봐라란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대전 상대와 싸울 때는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하면 이길 것처럼, 거기서 조금 더 뻗으면 추월할 수 있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그러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리호데 가문의 핏줄답게 그의 눈은 렘피룬트만큼이나 정확하게 상대의 약점이나 강점을 파악하였고, 나다크는 약간의 힌트만을 주어서 그가 스스로 분석하여 강해지게 만드는 '숙제'까지 내어주었다. 언제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 지 모르는 상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조원들은 나다크를 이기길 희망하였지만 감히 그를 거꾸러뜨리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지휘자의 재능을 갖추었다. 제트처럼 압도적인 힘이 아닌, 나누고 베푸는 힘으로 자연스럽게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마지막으로 4조는…… 부산스럽고, 요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했다. 빈 깡통의 소리가 무엇인지 확연히 보여주는 욕설과 큰 소리는 듣기 거북했다. 음치가 악기를 연주해도 이것보단 듣기 좋다고 생각될 정도로 엉망이였다. 원인은 당연히 리든에게 있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 조원,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은 조원에겐 손을 싹싹 비볐고, 그게 아니라면 한없이 깔보기 바빴다. 대표적으로 로이트는 리든을 통해서 항상 따돌림을 받았고, 갖은 잡일을 도맡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따금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쓰레기.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4조는 버리기 충분했다. 다른 조장을 내세워도 아마 삽시간에 무너지리라. 앞서 3개의 조에 비해서 빛을 덜 발하는게 아니라 이미 불이 꺼져버린 밀랍초 같았다.


그들을 둘러보며 생각을 하던 렘피룬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외쳤다.




"준비는 되었는가!"


"네!"


"지금부터 엘더 포레스트로 간다. 마차를 이용하니 그곳까지 오고가는 데 약 이틀을 소요할 것이다. 거기에 숲에서 묵는 하루까지 합하면 약 사흘 동안 아카데미 밖에 있는 것이다. 음식과 무구, 각종 여행 장비는 아카데미에서 지급할테니 너희는 몸만 가면 된다. 질문 있나!"




모두가 눈치를 보는 와중에 나다크가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말하라."


"그곳에서 저희가 잡는 것은 무엇인가요."




가장 많은 인원이 궁금해하는 것을 콕 찝어 물었다. 렘피룬트는 피식 웃어보이더니 말하였다.




"고블린이다. 하지만 너희의 실력으론 혼자서 한 마리를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녀석들의 기초적인 체력은 단련을 한 2급 학생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거기에 작은 덩치만큼이나 몸놀림도 빠르고 숲이라는 지형을 잘 활용하기도 하지. 우리가 사냥할 고블린은 포레스트 종으로 피부는 녹색에 옷가지도 나무의 잎사귀나 풀을 엮어 만들기에 마음 먹고 매복하면 찾아내기도 힘들지. 상세한 것은 그곳에 가서 일러주도록 하겠다. 다음 질문!"




이어서 가벼운 질답이 몇 개 오고갔다. 마차를 통해 숲으로 가는 동안 수련은 쉬느냐, 각 조에게 몇 개의 마차가 배당되냐 등, 이번엔 생활쪽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물론 피블론을 포함한 몇 조장들이 한 질문이였다. 아직 그들은 렘피룬트의 기세를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고 렘피룬트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조 별로 3개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딱 4명씩 나눠지는 2조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조는 마차 하나에 5명이 들어가야했다. 짐칸도 있긴 했지만 푹신한 쿠션이 있는 마차 내부에 비하면 딱딱하고, 심하게 덜컹거려서 앉을 수가 없었다.




"출발한다."




렘피룬트는 자신이 아카데미 측에서 직접 하사한 명마, 리버홀스라는 이름의 말을 타고 마차 뒤에서부터 앞쪽까지 확인하였다. 짐더미 사이에 낑겨 있는 로이트를 보기도 했고, 마차 지붕에 드러누워있는 나다크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1조내에선 제트 다음으로 성적이 좋은 페두크가 마부 옆에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는 것을 보았다.


일단 아카데미의 이미지도 있고, 먼 미래에 기사가 될 몸이니 그런 행실은 좋지 않다고 나다크에게 경고를 해주고 앞쪽으로 말을 몰며 출발하잔 말을 하였다. 다각거리면서 마차마다 2마리의 말이 느릿하게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제법 길가 풍경이 좋다. 아카데미 주변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관리가 되어있기 때문에 길에 그 흔한 박힌 돌도 없었고, 주변에는 잘 다듬어진 나무와 꽃들이 즐비했다. 날씨도 맑아서 저 멀리 상단의 행렬이나 여행자들의 휴식, 새들의 비행처럼 소소한 것들이 잘 보였다. 눈이 즐겁다. 로이트는 일을 쉬어도 된단 생각에 불편한 자리에서도 눈이 스르륵 감겨왔다. 이런 한가로움이 얼마만인지…… 이 일이 끝나면 저 일이 있고, 저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있었다. 모진 욕설과 비난을 견디며 일을 끝내면 고작해야 퉁명스러운 반응과 주먹질이 로이트에게 주어지는 전부였다. 그날 맞지 않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했다. 그리고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하크를 포함하여 다른 '노예 학생'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로이트는 반항할 힘은 커녕 자기 몸을 지킬 수조차 없어 일종의 '보호색'으로서 그들에게 굽실거렸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였다. 자신이 이상한 걸까.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엘더 포레스트로 향하는 마차의 행렬은 해가 지고 한 시간 정도 더 뒤에야 멈추었다. 렘피룬트는 이곳에서 노숙을 한다고 말하며 각자 마차에서 짐을 내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잘 곳을 마련하라고 말하였다. 이 와중에도 학생들은 렘피룬트의 근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였다. 자신들은 푹신한 쿠션 의자에 앉아서 가긴 했지만 렘피룬트는 아니였다. 승마가 얼마나 힘든 지는 귀족의 핏줄은 당연히 알았고, 그에게 말을 들은 몇 아이들도 알게 되었다. 거기에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묵직한 판금 갑옷을 입고 자세에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안색은 마차에 탄 학생들보다 좋았다. 마치 편한 고급 마차를 타고온 것처럼 말이다. 침구를 내리던 두 학생은 과연 기사라는 둥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라는 둥 시덥잖은 잡담을 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했다. 모닥불을 지펴놓고 바깥에서, 밤공기를 맞으며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은 굉장히 새로웠다. 즐겁다…… 라기 보다는 들뜬다가 맞았다. 왠지 모르게 자신이 모험 중이라고 생각되었고, 그것이 발전하여 마왕을 쓰러뜨릴 용사가 될 밑거름 여행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어느 샌가 자신은 마왕을 물리치고 황제에게 예쁜 딸을 소개받고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다. 그의 머릿 속을 들여다 보지 못하는 나머지 아이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조잡한 스튜를 떠먹는 그 아이를 보고 왜 저러냐면서 수근거렸다.




"나다크. 아버지가 귀족이니까 우리보다 많은 걸 보고 들었지? 고블린은 어때? 무서워?"




연신 하품을 해대며 쩝쩝거리던 나다크가 대뜸 자신이 지목되어 질문이 날아오자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려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1조의 조원들도 곁눈질로 자신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고블린이랑도 싸워봤고, 그 비슷한 코볼트나 놀, 페어리…… 그렘린, 머맨, 데스플라이랑도 싸워봤어."




그 말에 모두가 감탄을 날렸다. 분명 그 일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에 했을터이니…… 그의 강함이 설명되는 기분이였다. 어릴 적부터 몬스터와! 나다크는 괜히 귀찮게 주의가 집중되자 손가락을 몇 번 튕기더니 제트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더 대단한 건 제트지. 쟤는 오크도 잡아봤대."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표가 돌려지자 제트가 당황하여 자신을 가리켰다. 왜 뜬금없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일까. 그가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떠넘긴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설마 그 얘기까지 꺼낼줄은 몰랐다. 안그래도 부담스러운 눈빛이 더 심해졌다. 특히나 1조의 조원들은 기사가 되고나서도 따를 기세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굳이 사실 확인은 하지 않았다. 제트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또래에 비해 압도적인 강함과 너그러움을 품은 그였기에 설사 거짓이라 할 지라도 조금의 흠도 가지 않으리라.




"……사실이지만 가장 약한 녀석이였어."


"그래도 오크의 근력은 성인 남자의 7배라잖아. 거기에 타고난 투쟁심과 질긴 가죽, 딴딴한 근육, 민첩함에 본능적인 지능적 전투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고. 아무리 약한 녀석도 적어도 위험도 2레벨에 해당되는 녀석이란 말이지!"




제트의 말에 3조의 만물박사라 불리는 네보가 그의 신위를 높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구구절절 쏟아냈다. 특히 그는 이번 몬스터 사냥을 대비하여 몬스터 도감을 둘러봤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에 대한 것이라면 토벌 기록, 사냥 기록, 전투 기록 등 온갖 책들을 빌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읽어댔었다. 그 덕분에 그의 머리는 꼼꼼하게 정보의 진액으로 가득 차있었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지 가장 실감할 수 있었다.


위험도는 종합적인 전투 능력을 통해 설정한 일종의 '단위'이다. 위험도는 가장 낮은 1레벨에서부터 최대 10레벨까지 있는데, 2레벨이라면 단련된 기사와 비슷한 수준이였다. 각 레벨 별 격차는 마법사의 마법 단계의 차이만큼이나 심하였으니 1레벨과 2레벨의 차이도 엄청나다고 볼 수 있었다. 1레벨의 최대 전투력은 단련된 성인 남자에게 완전 무장을 시켰을 경우이며, 2레벨의 오크와 대결한다면 검도 제대로 못 쓰고 으스러진다. 물론 네보는 그러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고, 제트는 졸지에 4급 학생의 우등생이 되어버렸다.


제트는 좀 더 말을 돌려서 해야했나…… 하고 고민했다가 고갤 저었다. 사실 그가 잡았던 오크는 우두머리 급. 비록 아버지인 비하크마 대공이 손수 나서서 힘을 빼주고 정면대결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지만 3레벨에 가까운 힘을 가진 오크를 훨씬 어린 나이의 제트가 쓰러뜨린 것이다. 물론 정정당당하게 이긴 것이 아니였기에 그는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였다.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부끄러웠다. 차라리 나다크처럼 생사가 오가는 전투가 되게끔 수준이 비슷한 몬스터들과 차례차례 겨루었다면…….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무슨 잡생각인가. 지금 상태라면 오크 서너 마리와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비하크마 대공이 그를 믿고 아카데미에 보냈을 정도로 제트는 약하지 않았다. 그에겐 주어진 임무가 있다. 결코 잊어선 안된다. 안이해졌다간 바로 다른 귀족들에게 목덜미를 물린다.




"일단 자자. 내일 되서 피곤하다고 칭얼대지말고."


"에이! 이야기 좀 더 들려줘. 어떻게 쓰러뜨렸는데?"


"맞아! 빼지말고~! 아직 자려면 1시간도 더 기다려야 한다고!"

"교관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저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그가 오크를 쓰러뜨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였다. 제트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 아이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 잠들게 할까, 라고 반쯤 장난섞인 생각을 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생각외로 맛깔나지 않았다. 하지만 네보의 부가적인 설명과 피블론의 맞장구 덕에 점점 흥미진진하게 변하였고, 모닥불의 빛에서 벗어나 있던 로이트도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렘피룬트는 굳이 그걸 막지 않고 하늘의 별을 보면서 이야기가 끝날 쯤에 손뼉을 치며 다가와 취침을 명하였다. 모두가 아쉬워하며 각자 잘 자리로 돌아갔고, 투박한 깔개 위에 몸을 뉘였다. 초롱초롱한 눈빛. 제트의 이야기에 잠을 못 이루는 아이들이 많았다. 모닥불 속의 장작이 빨갛게 달아올라 파스스 무너져내릴 때까지 제대로 눈을 붙인 이는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모두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잠자리를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서 식기를 벅벅 닦아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나 원, 왜 내가 해야 하는 거야~!"

"큭크…… 그러길래 누가 내기에서 지래?"

"가뜩이나 넓적한 잎도 없어서 닦아낼 때마다 손에 조금씩 묻었다고. 으으…… 맡아봐!"




냅다 손을 들이대는 아이의 손을 밀쳐낸다. 마치 고약한 거라도 다가온 것처럼 코를 막고 손부채질을 하면서 달아나기 바빴다.




"자, 자. 조용! 이제부터 세 시간 가량 더 가면 엘더 포레스트가 보일 것이다. 정확히 다섯 시간 후에 도착하니 밤에 잠을 못 잔 녀석들은 지금이라도 자둬라."




렘피룬트의 말에 몇 학생들이 헛기침을 하였다. 긴장으로 잠을 못 이룬 걸 알아채기라도 한 건가. 모두가 마차에 오르고, 말이 투레질을 하며 발을 놀렸다. 덜컹거리는 마차도 이제 슬슬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 밖을 보면서 저기봐! 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일제히 좁디 좁은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삐죽삐죽 내밀었고, 팔다리만 내놓은 거북이같은 모양새로 마차 행렬에 머리들이 숙숙 튀어나왔다. 나다크 역시 마차 지붕에 드러누워 발을 까딱거리고 있다가 외침을 듣고 고개만 슬쩍 들었다.


장관! 이게 진짜 숲이구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방대한 나무들의 행렬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빽빽한 군집. 거기에 높기는 또 얼마나 높으며, 굵기는 또 얼마나 굵은 지. 거리가 멀어서인지는 몰라도 숲 안쪽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오로지 숲으로 향하는 길과 나무 그리고 하늘의 태양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와……"




웅장한 대자연.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모험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공간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이제 곧 있으면 몬스터란 것도 만나볼 수 있고, 어쩌면 그것들을 쓰러뜨려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자기도 몰랐던 새로운 힘이 깨어나 엄청나게 강해질 수도 있는 일이였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엘더 포레스트의 앞에 도착하였다.


마차에서 내리고 바라본 숲은 생각 이상이였다. 아니,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 엄청났다. 이따금 풀벌레 소리와 말 투레질 소리만 들릴뿐, 적막이 감도는 숲은 학생들의 심장을 꾹 움켜쥐었다.




"자! 모두 주목!"




모두가 뒷짐을 지고 있는 렘피룬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을 뽑아들더니 바닥에 푹 내리꽂았다. 그리곤 손잡이에 손을 텁 얹어놓으며 말하였다.




"지금부터 우리가 들어갈 곳은 경계 레벨 4에 해당되는 곳이란 걸 명심해라. 엘더 포레스트의 외곽 지역은 경계 레벨 2에 불과하지만 자칫 길을 잃는다면 거목도 으스러뜨리는 오우거의 손에 뭉개지거나, 그 오우거를 잡아먹고 사는 실버팽에게 물어뜯겨지거나, 우리가 불을 피우는 데 쓰던 나무에서 태어난 몬스터 엔트에게 짓밝힐 수 있다. 그러니 나와 조장의 말을 듣고 잘 따라와야 한다. 알았나!"


"네!"


"그럼 출발한다. 내가 앞서갈 것이나 후방까지 집중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앞에 있는 녀석들을 잘 보살펴준단 소리도 아니다. 긴장하거라. 찰나의 순간 목숨을 잃을 수 있으나 그 찰나를 버틴다면 내가 나서서 구해줄터이니."




그의 말에 겁을 집어먹던 학생들이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맨 뒤여도 그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보가 이르길, 렘피룬트 교관의 실력은 3레벨이며 어쩌면 그 이상인 4레벨, 5레벨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여튼 엄청나게 강하니 그의 말을 의심할 필요 없단 말도 곁들였다. 믿게 되었다. 이런 위험한 곳일 수록 강자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아직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는 강하다. 그것만으로도 믿을 수 있다.


철그럭거리는 렘피룬트의 발소리에 맞춰 1조부터 4조까지 차례대로 두 줄로 들어갔다. 마차를 지키는 마부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서로 떠들기 시작했고, 맨 뒤의 로이트까지 숲으로 들어가고나선 편히 앉아 쉬었다.


















당분간 자리를 비우게 된 로이트를 대신하여, 강아지를 돌봐주게 된 하크가 무기 창고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라호드는 그가 로이트의 친구인 것을 알기에 아마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해줄 것이다. 헌데 언제나 보이던 그 노인이 없었다. 의자는 그대로 있었지만 정작 창고지기가 보이지 않았다. 하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급한 볼일로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하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들어와도 적응되지 않는 진한 쇳내가 코를 찌른다. 하지만 금세 코는 그 냄새에 둔해져서 숨 쉬기가 편해졌다. 하크는 품 속에 감춰들고온 고기를 흔들면서 크게 발소리를 냈다. 말을 하지 못하니 이렇게 냄새와 다른 소리로라도 강아지한테 자기가 왔음을 알려야했다. 그는 로이트처럼 이곳 창고의 지리를 익혀두지 못했다. 심지어 이곳은 횃불도 적어서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고, 주변을 더듬거리던 하크는 병장기 몇 개에 몸이나 손 따위를 긁혀 피를 흘렸다. 따가워…….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탈탈 털어내고 다시 강아지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들려오는 자그마한 발소리. 자신에게 달려오는 강아지를 보며 하크는 반갑게 웃어보였다. 헌데…… 이상하다. 강아지의 상태가 매우 이상했다. 녀석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직 덜 자란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고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그대로 하크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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