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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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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2
추천수 :
122
글자수 :
31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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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20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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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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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
25쪽

2

DUMMY

3일째.


신입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올려치기 1,500회, 휘두르기 1,000회, 내려치기 500회였다. 진검에 비해 크게 무게가 나가지 않은 목검이라지만 앞에서 누적된 피로도 채 풀지 못하였고, 횟수도 횟수인지라 끝내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졌다. 처음엔 노을이 지기 전에, 그 다음은 석양을 바라보며 끝이 났었다. 하지만 현재, 해가 많이 기울었음에도 끝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흐유… 못 해먹겠네…."




끝나지 않았어도 목검을 내려놓고 쉬는 사람은 많았는데, 그 중 반은 휴식, 나머지 반은 포기한 사람이였다. 전체가 50명쯤, 거기서 쉬지않고 검을 휘두르는 이가 10명 가량이였다. 그리고 여기에 라인과 보에르가 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야, 진학 시험이 그렇게 쉽다며?"


"나도 들어서 알고있어. 혹시나 해서 해봤는데 이게 무슨 노가다야!"


"난 안 할란다. 요즘은 교양만 배우면 다 기사던데."




콧방귀를 뀌며 목검을 내던지는 모습에, 옆에 있던 청년도 피식 웃으며 따라했다.




"나도 안 해야겠다…. 될대로 되라지 뭐."


"킥킥. 너네 부모님이 돈 좀 쥐어주셨나보다? 야- 너네들 언제까지 하고 있을 거야~"




깡마른 아이가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10여명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돌아온건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쳇. 야, 블루 크리스털 쪽은 여자들이 가득 하다며?"


"말도 마라. 어찌나 많은지, 입구 근처만 가도 향기가 솔- 솔- 크으!"


"참 나…. 왜 우리는 땀내나는 남자들끼리 있어야 하는 거야? 이것 봐 옷이 마를 날이 없어."




자신이 입고있는 간편한 천옷을 쭉 늘여보이니 땀이 반이요, 나머진 땀이 말라붙은 허여멀건 얼룩이였다. 그걸 본 맞은 편 아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과장된 손짓을 보였다.




"어유! 야! 니 옷에서 소금뽑아도 되겠다!"




그 말에 쉬고있던 모두가 낄낄대면서 웃어댔다.




"어? 너… 하려고…?"


"아아… 계속 구경하니까 좀이 쑤셔서말이야."




검은 더벅 머리의 청년이 목검을 들고 일어나자, 주변의 친우들이 말렸다.




"뭐하러 계속 하려고? 듣자하니 찔러준 돈에 따라서 시험도 쉬워진대. 혹시 부모님이 많이 못 주셨어?"


"그건 아니고… 심심하잖냐. 남자가 무슨 재미로 계집애처럼 떠들고 있겠어."


"야~ 그거 우리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주변의 야유를 물리치고, 청년은 보에르의 옆에 서서 올려치기를 하였다. 검끝이 바닥을 향하게 하고 검날이 하늘을 보게 한 후에 빠르게 위로 밀어올린다! 보에르는 그걸 곁눈질로 보다가, 점점 청년의 움직임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처음은 조금 엉성했지만, 갈수록 비슷하게 변하더니 어느샌가 둘은 동시에, 똑같은 자세로 목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을 처음 발견한 건 옆에서 검을 휘두르던 청년 본인이였고, 그 다음은 라인, 그 다음이 주변 아이들이였다. 검을 휘두르던 아이들도,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들도 숨을 죽이며 둘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후!"




숨을 내뱉는 것도 동시에! 이쯤되니 누가 따라하고, 누가 처음부터 했었는지 알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청년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속도를 붙였다. 보에르가 잠시 주춤하다가, 침착하게 그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빨라진거 같지 않아?"


"설마…? 원래 컨디션이였어도 저런 속도라면…."




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호흡은 일정하지만 육체가 쓰는 산소가 들어오는 것보다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지쳐가고 있는 것이다.




"하아…! 하아…!"




호흡이 하나가 되어 점점 거칠어진다. 끝끝내 검은 머리의 청년이 목검을 내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보에르는 그가 검을 내리자마자 한 번 더 올려치고 주저앉았다. 주변 아이들이 환호를 보내며 보에르를 칭찬할 때, 청년이 말하였다.




"천… 오백… 회… 끝…."


"뭐?! 그걸 다 했다고…?!"


"우와… 숨겨진 괴물이 있었네…."




보에르의 멍한 얼굴 앞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보에르가 그걸 잡자, 청년이 손쉽게 그를 일으켜주었다.




"제트."


"보… 보에르…."




둘은 별달리 붙이는 말없이, 그냥 자신의 이름만으로 통성명을 하였다.




"보에르? 왠지 여자 이름 같은데…."


"뭐…?"




제트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래, 이제 몇 번 남았어?"


"사백…."


"이런… 난 600번 남았는데…!"




라인의 투덜거림에 제트는 목검으로 자기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였다.




"좋아, 그럼 네가 끝낼 때까지 계속 휘둘러볼까."


"잠깐…."


"음?"




보에르가 가슴을 퍽퍽 치며 숨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트 너… 어떻게 그렇게 빨리 끝냈어…? 평소에는 다른 애들이랑 비슷하게 끝나더니…."




돌이켜보면 보에르와 라인이 가장 빠르게 끝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그 둘보다 한참이나 늦게 끝났고, 당여히 거기에는 제트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어째서 오늘은…? 그 해답은 제트의 입에서 나왔다.




"아~? 난 항상 빨리 끝냈어. 그냥 낙오되는 애들이 쓸쓸해할까봐 옆에서 같이 휘두른거고."


"뭐…?!"


"아니 잠깐, 잠깐…. 우리들보다 빨리 끝냈다고?"




라인의 물음에 제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왜? 다 끝내놓고 또 휘둘러도 안되는거야? 너희가 가장 빨랐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보다 빠른 애도 있는 걸?"




그의 말에 이번엔 쉬고있던 아이들이 놀라 탄성을 질렀다.




"그게 누군데…?"

"로이트."


"뭐…?"




공터에서 멀찍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로이트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다가 금방 시들해져선 자기네들끼리 수근거렸다.




"야, 혹시 저 제트란 녀석 허풍쟁이 아냐?"


"딱 봐도 그래보인다. 쟤네들보다 빨리 끝냈다는데 솔직히 누가 일일히 센 것도 아니고."


"로이트란 녀석 친구 아냐?"


"어우, 상상만해도…. 밀레트님한테 밉보인 애의 친구라니… 으으으…."


"야~! 다 들리거든 인마들아!!"




제트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치자 모두가 싱거운 기색을 띄며 야유를 보냈다. 보에르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옆에 있던 라인도 질 수 없다는 듯, 땀방울을 흘리며 열심히 목검을 휘둘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들 중 몇몇만이 달을 보며 끝냈고, 그 시간이 되도 끝내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밤을 새워서라도 남겠다는 대여섯 명은 의외로 제트가 나서서 말려 모두가 과제를 끝냈다. 하지만 로이트만은 끝까지 목검을 휘둘렀다. 제트는 그를 힐긋 보더니 휙 가버렸고, 로이트는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친 기색을 보이며 마지막 검을 휘둘렀다.




"하… 하아… 하아…."




언제부터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평민의 아들로써 여기에 입학했고, 기사가 되어 시골에 있는 부모님을 공양할 생각뿐이었다. 아카데미에 대한 소문은 그도 익히 들어서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건 소문에 불과하며, 귀족의 자제가 들어가는데 설마 그럴리가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이트의 추측은 허망했다. 오히려 귀족의 자제가 들어와 비리는 더욱 성행했다. 실제로 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귀족 가문의 학생은 대부분이 큰 기대를 받지 못해, 그나마 기사 작위라도 얻어 제 구실을 하게 만드려는 배경이 있었다. 이런 자들은 돈으로 교관을 매수하여 편하게 진급하거나, 권력을 내세워 평민이나 상민 출신의 학생들을 부려먹었다. 이렇게 썩었을줄이야. 로이트가 아카데미를 경험하고나서 생각한건 소문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며, 덜하면 덜했지 결코 현재의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로이트가 근처 나무에 걸어둔 낡은 수건을 집어 땀을 닦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귀족이란 것의 잔혹함을.


라르카 백작의 장남, 밀로트는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외모는 물론, 검을 다루는 것에서도 재능을 보였고, 머리도 비상하였을 뿐만아니라 친화력도 강해 많은 이가 그와 친해지려했고 여럿 여성이 손을 잡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다. 그런데 라르카 백작이란 자가 아카데미에 그를 보냈다? 소문에 대해 무지한 포스티어의 제국민이 볼 땐 당연하다 여기겠지만 귀족들은 이걸 가지고 한동안 입방아를 찧었다. 가끔 실력있는 기사가 나오지만 거의 극악의 확률이라 해도 좋았다. 아카데미 자체가 수준이 낮은건 아니였다. 오히려 그렇게 기사의 수가 적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르침에 있어 소홀함이 없었다. 문제는 유입된 귀족 자제와 돈에 눈이 먼 교관이였다. 소수의 그들로 인하여 아카데미는 썩어갔다. 교양을 가르칠 때 일부러 어긋나게 가르치거나, 척 보기에도 이상한 일을 시켜 다치게 하는 등 들어오는 학생에 비해서 나오는 기사가 적게 된 것이다. 이를 눈치챈 아카데미의 터줏대감이자 총교관인 멜베스크는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교관의 대다수가 돈의 맛을 알아버렸고, 귀족 학생들은 불량배들을 불러모아 깽판을 치는 바람에 노구의 멜베스크는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불량배의 일은 소문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 속사정을 아는 귀족들은 실력있는 방랑 기사를 초빙하는 것이 낫다고 쑥덕거렸다. 라르크 백작이야 돈이 많으니 교관이 딱히 해를 가하진 않겠지만, 주변 환경 때문에 좋지않은 모습으로 물들 가능성이 있었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이때, 하이크라 후작의 차남 라이가스까지 입학했단 소문이 퍼지자 귀족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하이크라 후작이라면 칼릭소 공작과 깊은 친분이 있는 제국의 실권자들중 하나였다. 그런 그의 아들이, 비록 차남이라지만 어째서 아카데미같은 곳에 입학시켰는지 의문이였다. 이에 하이크라 후작은 아카데미를 헐뜯는 이들에게 체계적인 가르침과 교관의 열성을 무시한다고 힐난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라르크 백작까지 거드니 귀족들은 찍소리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1인자인 비하크마 대공도 눈도 꿈쩍않고 있는데 그 누가 반박하랴.


로이트가 생각한건 아카데미의 부흥이였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저 그들이 언제부턴가 아카데미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들에게 조금도 이익이 오지 않을 그 행동에 뭔가 음모가 숨겨져있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넌지시 렘피룬트 교관에게 말해보았고, 그 이후로 순식가에 푸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왜? 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로이트를 몰아붙였다. 그저 단순히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아카데미는 나갈 수 없었다. 시골에 계신 그의 부모님이 얼마나 피땀을 흘리며 로이트를 여기에 입학시켰는가. 로이트는 어떻게 해서든 악조건을 뚫고 아카데미를 졸업할 것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좌절하였다. 그리고 타협하였다. 언젠가… 언젠가 그들이 자신을 놔줄 것이라고 여기며 굳은 잡일도, 거친 비난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신입에게 주어지는 4급. 자신이 3년동안 4급에 머무를 때 동기들은 두세 단계 올라 2급이나 1급이 되었다. 4년째 맞이하는 4급이란 이름. 최하위에서 로이트는 고독함과 인내를 씹어삼켰다.




"후우…."




호흡은 예전에 안정되었다. 하지만 머리는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로이트는 신입들이 대충 놔두고 간 목검들을 모아선 무기창고로 향했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이런 잡일도 서슴지 말고 해야했다. 부모님이 입학비(교육비와 생활비는 따로 내야하며, 교육비만 내도 입학이 가능하다)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하지만 그는 그들이 서민의 돈을 횡령하고 있단걸 내심 눈치채고 있었다. 그걸 안다고 위쪽에 고하기엔 사전에 차단되는데다 자신에겐 후원자도 없었다. 음모에 대해 말해보았을 때 돌아온 극악의 처우가 되풀이 될 수도 있었다. 뻔한 싸움. 괜히 부모님만 고생하실걸 생각하고 묵묵히 이런 노예같은 수련생의 일을 해야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도 지친 상태로 낑낑거리며 무기창고까지 도달했다. 언제나 의자에 앉아 졸고있는 할아버지. 전날처럼 자루를 번쩍 들어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쇳내. 그와 더불어 밤공기 특유의 차가움과 실내의 음습함이 만나 으스스한 기운이 깔렸다. 촛농이 떨어져 무기를 상하게 할 수 있다며 내부에 깔린 초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거기에 뭔가를 덮어 빛이 더욱 시들했다. 그런데도 로이트는 마치 훤히 보이는 것처럼 어딘가에 걸리지도 않고, 정확히 빈 자리에 자루를 털썩 내려놓았다. 사실 그의 눈에 보이기는 했다. 정확히는 몸이 익숙해져서, 창고 내부는 눈을 뜨고 걸으나 감고 걸으나 똑같았다. 로이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늘어질 것 같은 몸을 가누며 창고 깊은 곳으로 몸을 옮겼다.




"얘… 어딨니…"




목소리를 낮춰 그 아이를 부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자신을 반기러 달려오지않았다.




"멍멍아…?"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같은 잡일꾼이 아니라면 창고 안에 들어올 일도 없거니와, 자신이 있는 곳은 구석. 낮에도 눈에 안띄는 곳이였다. 강아지가 자기와 착각해서 딴 사람에게 달려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 누가…? 그전에 발견했다면 약간의 소란이 날테고, 그러면 당장 자신에게 불호령이 쏟아졌을 것이다.


로이트가 가슴을 움켜쥐며 안절부절 못할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헥- 헥-


분명 사람의 발소리였건만 강아지의 울음이 들려왔다. 로이트가 놀라서 쳐다본 곳은 늘 강아지가 달려나오던 곳이였다. 정확히 그를 위해 낡은 모포를 깔아준 곳. 그런데 그곳에 기척이? 자신을 지나친 느낌도 없었단 것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단건데… 아무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고 해도 눈치를 못챈다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벗어난 이는 작은 털뭉치를 안고있는 남자아이였다. 머리색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두운 계통이란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털뭉치는 언제나 보아왔던 실루엣이였고, 그것이 로이트가 찾던 강아지란걸 알 수 있었다.




"그 애는…"




안고있는 강아지를 말하자 남자아이가 움직임을 보이더니 로이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강아지를 쭉 내민다. 흐릿하지만 데롱데롱, 아이의 두 손에 매달려있는 강아지는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어대고있었다.


로이트는 조심히 받아들고는 턱을 핥아대는 강아지보다 눈앞의 남자아이를 주시하였다.




"너는… 누구야…?"




누구냐는 말에도 그는 답이 없었다. 왠지 멀뚱히 보고있는 느낌에 로이트가 다시 물었다.




"넌 누구야…?"




그러자 아이는 다시 어둠 속으로 쑥 들어갔다 나왔다. 그의 손에는 끝에 뭔가 달려있는 긴 막대가 들려있었다.


로이트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무기라 여기고 뒤로 물러났다가 이질적인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샤악- 샤악-


뭔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매캐하게 피어올라 코를 간질이는 먼지. 강아지는 재채기를 하더니 앞발로 코를 문질렀다.




"빗자루…"




로이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는 멎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속을 스치는 이가 한명 있었다.


흑발. 또래. 청소부.




"너… 청소하던…"




그의 말에 아이의 흐릿한 형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트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얼핏 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제대로 상이 맺히지 않고 어린 청소부란 단어만이 맴돌았다.




"네가 보살펴준거야?"




다시금 끄덕거리는 고개.




"넌 이름이 뭐야?"




이번엔 움직임이 없다. 로이트가 다시 물으려던 순간, 아이가 그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펼쳤다.


한팔로 강아지를 안으며 의아해할때, 뭔가가 손바닥 위를 쓸고다닌다. 아마 손가락이지 싶었는데, 간질거리는 감촉이 하나의 단어를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글자가 완성되자 로이트가 나지막이 말하였다.




"하크…"




다시 고개가 끄덕여지고, 로이트의 머리에 한 명의 사람이 떠올랐다. 음침한 얼굴의 검은 머리칼의 아이. 자신과 동기생 중 하나였던 하크! 말이 없던 그가 벙어리란게 밝혀지자마자 수업을 받던 중에 끌려가는 모습! 잠겨있던 그에 대한 것들이 천천히 떠오르면서 로이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동질감.


로이트는 손을 거두려는 하크의 손을 맞잡았다.


그땐 분명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낙오자,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말그대로 안중에도 없었던 것. 하지만 지금 로이트에게 있어서 하크의 존재는 너무도 반가웠다. 우습게도 이제와서 그가 끌려간 뒤로 어떤 모진 일을 당했을지를 생각하며 동정심을 키우고 있었다.


문득, 그가 왠지 빛과 같았다. 지금 자리잡은 창고의 어둠처럼 마냥 암울하기만했던… 자신에게 쪼여지는 한 줄기의 빛. 그리고 이런 로이트의 생각을 하크도 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서로 보듬어주고 동정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하랴. 그저 맞잡은 손만으로도 그간 겪어온 모든 아픔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내 이름은 로이트야."




잘 보이지 않지만 하크가 뻐끔거리며 로이트라 말하는 것 같았다. 로이트는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웃음을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하크…"












그렇게 날이 지나갔다.


올려치기, 휘두르기, 내려치기는 이제 각각 1,000번씩으로 늘어났고, 매일 아침 공터를 10바퀴씩 도는 과제가 추가되었다. 렘피룬트는 과제를 내주며 말하였다.




"다들 어느정도 기본은 맛봤다고 생각된다. 허나 본격적이 수업은 지금부터다. 이 기본이 모든 검술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기본이 무너지면 어떤 훌륭한 검술을 배우더라도 생초짜나 다름없게 되버리니 지금 열심히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되어서 고생한다. 그리고 기본만큼이나 중요한게 체력이다. 앞으로 매일 도는 공터는 일주일에 5바퀴씩 늘린다. 이것이 힘들다면 포기해도 좋다. 그러나 예전의 동료가 훨씬 앞서나가 멋진 기사가 되어있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기 싫다면 내 말에 따라라. 알겠나!"


"네!"




공터는 그렇게 넓지 않았지만 총 삼천번의 베기를 하기 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일정한 주기로 돌아야 하는 횟수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땡땡이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것도 횟수가 추가되기도 전에 말이다!


전 날,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10여 명을 포함해 대여섯 명만이 렘피룬트의 말이 끝남과 함께 공터를 돌뿐, 나머지는 수다로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라인과 보에르는 가볍게 팔을 휘저으며 나란히 뛰고있었다.




"이거 은근히 호흡을 신경써야 하는데…?"


"흠흠…"




라인의 말에도 보에르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앞서 있는 제트의 뒤통수에 꽂혀있었다.




"너 라이벌 의식 느끼는거야?"


"어, 어?"




라인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하자 보에르가 화들짝 놀라며 대꾸한다. 그 모습에 라인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바라본다.




"어쭈 이게 만날 나보다 일찍 끝내더니 라이벌도 먼저 만들어…?"


"무… 무슨 소리야 너…?"




내심 속마음을 들킨건지 보에르가 시선을 딴 곳으로 뒀다. 라인은 이것봐라, 하며 그의 볼을 꼬집어 당긴다.




"으야야?!"


"니가 거짓말로 날 속이느니 지나가는 개가 먼저 속이겠다. 어디서 능청이야 능청은~!"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혹시라도 자신이 제트를 동경하고 있단걸 들킨걸까, 보에르는 괜히 부끄러워 양 볼을 붉힌다. 그리곤 라인의 손을 뿌리치며 있는 힘껏 내달린다.




"야! 거기 안 서!?"




라인도 보에르를 따라 힘차게 달려나간다. 가볍게 달리고 있던 제트는 둘이 추월하자 휘파람을 불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저것들 지치지도 않나봐."


"놔둬. 돈이 없으니 저렇게 해서라도 졸업해야할테니까."


"쳇, 그래도 저러는거 보고있자니 나도 근질거리네…"


"너도 그러냐? 쳇… 이거 말고 이따가 휘두르는걸로 꺾으면 되지. 우리가 유리하잖아?"




둘의 행동은 알게모르게 나태해지려는 청년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아주 조그만 경쟁의식.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아직 아카데미의 실체를 몰라 초조한 것도 한 몫하였다.


제트는 흐뭇한 얼굴로 흘러가는 상황을 만끽하였다. 그러다가 뒤쪽에서 눈에 밟히는 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로이트.


그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달리고 있지 않은가. 언제는 웃지않았냐마는 제트가 느끼기에 평소의 웃음은 가면이였지만 지금의 웃음은 속마음이였다. 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궁금한 마음에 속도를 늦춰 로이트와 나란히 달린다.




"여, 몇 바퀴 째?"




말을 걸어오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웃고만 있다. 제트가 다시 말을 걸자 로이트는 들뜬 얼굴로 그를 마주본다.




"아, 여덟 바퀴."




숫자에 놀란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자기보다 한 바퀴는 먼저 돈 것이다. 지금까지 쳐져있던게 아니라 먼저 돌고 뒤에서 따라붙었던 것! 제트는 뭔가 재밌는걸 발견한듯 씩 웃으면서 말하였다.




"와아~ 그래? 그럼 이번 진급 시험은 따놓은 당상이겠네?"




사실 제트도 의문이였다.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원석이다. 그런데 어째서 가공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아카데미의 실체에 대한 의혹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로이트의 대답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응. 왠지 이번엔 붙을 것 같아."




아카데미의 비리로 계속 떨어졌었다면 한탄하는 말이나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말을 했을텐데… 그런데 웬걸, 로이트는 지금까지 못 붙은 이유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는게 아닌가! 제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였다.




"오오, 그거 좋겠네. 그럼 왜 지금까지 떨어진거야?"




내심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은 자신을 탓하다가 로이트의 되돌아오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다 내가 부족해서지."




너무 애매했다. 첫번째 대답도, 두번째 대답도… 진실을 알지 못하면 모를 애매한 말이였다. 비리 때문인지 실력 때문인지, 그 어떤걸 적용해도 아귀가 맞다. 제트는 한 발 물러서기로한다.




"하하, 그랬구나. 이번에 꼭 붙길 빈다."


"고마워."




제트는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가 자신을 보는 시선에 전과 같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때, 로이트는 계속 떠오르는 생각에 웃음을 멈출줄 몰랐다. 정말…처음으로 가져보는 친구이다. 가슴이 뛰었고, 머리는 진정할줄 몰랐다. 그리고 하크와의 만남은 곧 전날의 쓰린 기억으로 이어졌다. 나이로 따지자면 자기보다 어렸고, 기수로 따지자면 후배인 아이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부려먹었을 때…. 물론 로이트도 반발은 해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 돌아오는건 더 큰 괴롭힘.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로이트의 웃음에는 감정이 사라졌고, 생각도 점점 단순하게 변하였다.


포기하자.


그 말이 머리를 지배하고나선 모든게 편해졌다. 깎아내리는 욕설에도, 참기힘들 정도의 조롱에도 그는 웃으면서 견뎌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의 마음에는 벽이 쌓여져갔다.


그리고 그 높다란 벽이 흔들렸다.


하크란 존재로 인해서…


로이트는 투닥거리며 달려가는 라인과 보에르를 보며 웃음지었다. 언젠가… 자기도 저런 친구를 만들겠지. 로이트의 마음속에 희망이 피어났고, 감정이 깨어났다. 즐겁다!












끄응… 끙…


창고 구석에서 은색의 털뭉치가 꼼지락거린다. 그것은 곧 한 마리의 작은 강아지가 되어선 파르르 몸을 떤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주위를 살펴본다. 쌓여진 무기나 몇 개의 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깔려있는 낡은 천과 빵 몇 토막이 있었지만 그의 관심사는 되지 못했다. 그 짧은 다리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기지개를 쭉 편다. 꼬리가 바짝 세워지다가 축 늘어진다.


자리를 잡고 앉아 헐떡인다. 그의 머리속에 스쳐지나가는건 피. 로이트에게서 맛본 피! 아직도 입안에 맛이 남아있는 피! 순진한 눈망울이 곧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아직 채 돋지않은 송곳니가 번뜩인다. 앓는 소리는 어느샌가 사나운 울음으로 바뀌었다.


크릉- 크르릉…


갈망. 목이 마르다. 그가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죽일 듯이 움직이려다가 발소리에 귀를 팔락인다. 그리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다가오는 존재의 냄새를 맡는다.




"잘 있었어?"




헥- 헥-


강아지는 어느새 순한 모습으로 돌아와선 로이트를 반기고 있었다. 그의 손엔 지저분해보이는 고기가 들려있었다.




"미안해… 돈이 없어서 좋은 것도 못 주고…"




로이트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손에 들린 고기를 내밀었다. 강아지는 냄새를 맡아보다가 허겁지겁 고기를 먹어치운다.




"귀족들은 음식을 많이 남긴다니까… 가끔 이렇게 먹을 수 있을거야…"




고기를 다 먹고 손을 핥아대던 강아지가 왕! 하고 짖자 로이트는 생글생글 웃었다.




"하크를 만나서 다행이야. 이렇게 고기도 줄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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