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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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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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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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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1

DUMMY

아카데미. 기사 직위를 구입하는 과정을 거치는 공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타락한 곳. 기사, 이름만을 취하기 위해 돈많은 상인, 이름없는 귀족, 타국의 도망자 등 그들의 자식들이 이곳에 들어가게 된다. 준남작이라 불리기도 하는 기사란 직위는 귀족이 되고픈 평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고, 굳이 이걸 원하지 않는 이들은 자식간의 관계를 통하여 이름있는 귀족과의 교류를 원하였다. 이런 썩은 사상 속에서도 순수하게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도 얼마안가 이 아카데미에 물들어 버리기 일쑤. 흡사 거대한 병원균 같은 이 곳은 실로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왜 이런 아카데미가 유지되는지 말이다. 그 이유는 수백 년에 걸친 역사때문이기도하지만 황제의 극약처방 때문이기도 하였다. 통일 제국. 대륙을 제패한 황제에겐 말 못할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반란의 세력이였다. 이러한 세력은 당연하게도 악으로 규정되고 탄압받아 최근에는 반란의 조짐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황제의 근심이 깊어져 만일을 대비해 군사 양성에 힘썼고, 자연스럽게 기사를 배출하는 아카데미의 역할도 크게 되버렸다. 그에 맞춰 기사에 대한 대우를 조금 높여주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자리로 만들되 작위를 취해내기 상당히 까다롭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아카데미에는 언제나 지원자가 들끓었고, 당연히 접수를 받는 사람도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다음."




약간 노후한 건물에서 나무받침대에 턱을 괴고 있는 남성. 안그래도 험악한 얼굴은 지원서가 100장을 넘어간 순간 짜증이 잔뜩 서렸다. 물론 이건 평민이 왔을 때의 얘기, 조금이라도 높은 직책을 가진 귀족이 왔으면 얼굴을 싹 고치고 깍듯한 태도로 지원서를 받는다.




"다음."




크람. 그는 하품을 쩍쩍 하며 길게 늘어선 수수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이룬 줄을 바라보았다. 입 주변의 큰 흉터가 그의 턱을 따라 쫙 벌려졌다.


오늘따라 화가 나기보단, 지루한 느낌이 강했기에 대놓고 화를 내는 건 없었지만, 이곳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은 안심할 수 없단 걸 알았다.




"응?"




낡은 종이. 확실히 지원서이긴 했지만 이걸 제출한 이가 꼬질꼬질한 차림이다보니, 뗏국물이나 흙먼지가 묻은듯 했다. 크람은 근육이 밀집되어 두꺼운 팔을 툭 올려놓으며 말하였다.




"지금 이걸 지원서라고 낸 거냐?"




흉악한 그의 태도에 거지 차림의 중년인은 벌벌 떨었다.




"그… 그렇습죠…."


"캬악! 퉤!"




크람은 긴 받침대 위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최소한 이런 먼지는 털고, 오물은 닦아서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말씀이지. 어! 너 지금 내가 이런 일이나 한다고 무시하는 거냐?! 어? 나도 기사야, 기사. 검 들고 삐까뻔쩍한 갑옷 입고 행군하는 그런 기사! 네놈이 지금 날 어떻게 보고 이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서둘러 지원서를 털고 문지르며 사죄를 했다. 크람은 콧구멍을 후비며 그가 낸 지원서를 받고 대충 팽개쳐뒀다.




"다음."




줄을 섰던 이들 전부가 그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비난하였다. 한참이나 어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막대하는 모습은 가관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낼 지원서에 무언가 묻지 않았나 확인할뿐.












"나중에 휴학 기간 오면 놀러와. 알아? 우리 영지의 해변가. 거기에 쫙 펼쳐진 모래 사장을 보며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 크으!"




금발의 청년이 무언가를 마시는 시늉을 하며 말하자, 주변의 소녀들이 꺄르륵 웃어댔다.




"정말 데려가 주시는 건가요? 거긴 높으신 분들만 가는 곳이라는데…."


"그럼, 내가 외부인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무능해 보여?"




옆에서 수줍게 웃는 소녀의 목에, 청년이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소녀는 몸을 꼬면서 은근슬쩍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몇몇 소녀들이 질투에 찬 눈으로 흘겨보았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래서말이야…."




와장창-!


청년은 물론, 소녀들도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자 돌아보았다. 거기엔 곱슬거리는 담갈색 머리칼의 청년이 엎어져서 허겁지겁 쏟아진 검들을 모으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뒤통수를 문질거리다가 그를 가리키며 불렀다.




"이봐, 로이트. 조심해서 들고가야지.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하하… 실례했습니다…."




그는 반쯤 찢어진 넝마같은 주머니로 모아놓은 검을 싸맸고, 허둥지둥 일어나 달려갔다.


툭-


와장창!


살짝 내민 발. 그것에 걸린 로이트는 검과 함께 고꾸라졌다.




"저런! 조심해야지 로이트. 자자,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또 교관님한테 혼나겠다."


"네…. 하하…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에 베인 것인지 손에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데도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연신 꾸벅였다. 청년은 멀리가는 로이트를 보면서 다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다정다감한 말을 내뱉었다.












"이 새끼가! 잘 닦은 검에 오물을 묻혀!"




우람한 손이 로이트의 뺨을 갈겼다. 고개가 돌아갔어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버틴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였다. 붉어진 빰에 입술 사이로 피가 터져나오는데도, 그렇게 웃는 모습에 그를 때린 남성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네놈 때리는 것도 질리는데…. 검이나 제대로 닦아놓고! 알았냐!"


"네…."




로이트가 고개를 숙이자, 남성은 콧김을 씩씩 뿜으며 돌아갔다.


똑- 똑-


피가 몇 방울 떨어지자 로이트는 서둘러 입가를 닦고, 발로 피가 묻은 바닥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부어오른 볼을 만지작거리며 마른 헝겊을 들고 검이 쌓여진 창고로 향하였다.




"응…?"




검들 사이로 하얀 무언가가 꼬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로이트가 의아해하며 다가가자, 그것은 좀 더 깊이 숨어버렸다. 로이트는 쪼그려앉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이리와…."




로이트도 낯선 감이 없잖아 있었다. 왜 그랬을까? 분명 처음 보는 무언가인데도 두려움 없이 친근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말하였다. 스스로 의아해할 때, 그 허여멀건 것이 꼼지락거리며 다가왔다.


끄응…


이제 막 젖을 뗀 듯한 강아지. 그것도 떼묻지 않은 새하얀 털의 강아지였다. 로이트가 손을 뻗자, 강아지는 꼬리를 말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손이 천천히 바닥을 향하더니 손등을 붙였다.


헥… 헥…


강아지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그의 손바닥에 코를 댔다. 킁킁. 몇 번 냄새를 맡은 강아지는 로이트에게 다가왔다. 로이트는 가볍게 그를 안아들었다. 품에 폭 안기는 작은 체구. 부드러운 털. 그런데 강아지치고는 어딘가 이상하다 느낀 그가 입 어림의 미끌거리는 촉감을 느꼈다.




"핥으면 안 돼…."




유독 입 주변을 집중적으로 핥아대는 통에 로이트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떼어내기 바빴다. 강아지는 피섞인 침을 꼴깍거리며 삼키더니 축 늘어진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이 채워져, 진심을 담은 웃음을 보였다.












다음 날.


지금껏 아카데미에서 벌어졌던 일을 잊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인지 태양이 맑은 빛을 뿜어댔다. 속속들이 건물에서 나온 정갈한 복장의 젊은이들은 허수아비가 세워진 넓은 공터로 달려나왔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줄을 맞추더니, 멀리서 위엄있게 걸어오는 큰 덩치의 남성을 바라보았다. 번쩍거리는 갑옷과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중년인이였는데, 등에는 아이만한 거대한 검이 매달려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도열해있는 청년들 앞에 서서 말하였다.




"반갑다. 아카데미의 새 얼굴들이여. 나는 이곳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교관 렘피룬트라고 한다. 정식 입학하기 전에 주의사항은 잘 숙지했군."




그가 날카로운 눈매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몇몇이 하품을 하다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좋다. 일단 기본적인 자세부터 알려주겠다. 알다시피 한 학년 동안 검만 계속 휘두를텐데. 이것은 체력은 물론 근성, 정신력까지 단련하는 것이다. 괜히 요령부리다가 걸리지 않길 바란다. 난 너희들과 오래 있고 싶으니까."




렘피룬트가 씩 웃어보여도 그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기침이라도 나올세라, 입을 가리는 사람도 있었다. 렘피룬트는 흡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손짓하였다. 그의 손짓에 황색 머리칼의 청년, 로이트가 낑낑거리며 수십 자루의 목검이 든 자루를 끌고왔다.




"우선 너희에게 목검부터 나눠줄 것이다. 기본적인 자세부터 알려준 후에, 그 다음은 알아서 해야한다. 할달량을 채우고 더 휘두르든, 아니면 1년을 뒹굴거리든 그건 너희 자유다. 하지만 시험은 엄격하다. 모두에게 똑같은 과제가 주어지며,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검을 휘둘러야한다. 동료들이 검술을 배우고, 교양을 배울 때, 검만 휘두르고 있을텐가!"


"아닙니다!"


"좋다! 이제부터 나를 따라 자세를 취하도록!"




그의 기세에 눌려 모두가 목검을 받아들어 그를 따라하였다. 렘피룬트는 작대기로 그들 사이를 다니면서 자세를 교정해주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외쳤다.




"자! 이것이 기본 자세다. 그리고 이렇게 내려치는 것, 휘두르기, 올려치기. 총 세 가지를 삼일에 걸쳐 배울 것이다. 우선 오늘은 내려치기. 복창한다! 내려치기 1,000회!"


"1,000회!"


"첫 날이라고 봐주거나 하는 건 없다. 괜히 그랬다가 낙오자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자 보아라!"




그는 옆에서 우물쭈물 서있는 로이트를 가리켰다.




"이 로이트란 아이도 현재 4년 째 검만 휘두르고 있다. 동기들은 벌써 세 단계나 올라갔고, 졸업을 1년 앞두고 있다. 그들에겐 명예로운 기사직이 주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평생 아카데미에서 썩거나 쫓겨나거나 둘중 하나다!"




로이트는 대놓고 수모를 주고 있는데도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일뿐이었다. 그 바보같은 모습에 수근거림이 커져갔다.




"조용! 모두 이녀석처럼 되기 싫으면 부지런히 연습하도록!"




그의 외침에 누군가 먼저 내려치기를 한 번 하였고, 자연스럽게 파도가 되어 모두가 목검을 들고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렘피룬트는 헛기침을 하더니 로이트를 향해 말하였다.




"넌 더 부지런히 해야겠지. 이번에도 낙제하면 안되니까말이야…. 2,000회다. 할 수 있겠나."


"네…."




렘피룬트는 자기가 들고있던 목검을 던져주고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누군가는 언젠가 자신도 저렇게 멋들어지게 살 거란 희망을 품으며 계속 목검을 휘둘렀다.














"후아… 후아… 이제 100번만 더 하면 되는데… 팔이 너무 저리다…."




땀을 훔치며 말하는 청색 머리 청년의 말에, 옆에서 같이 휘두르던 짙은 갈색 머리의 청년이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난 앞으로 200번 남았는데… 크으… 그냥 땡땡이칠까?"


"아서라, 아서… 이런 것도 못 해서야 어디 기사가 될 수 있겠냐."




둘은 서로를 보며 웃다가 로이트를 보았다.




"독하다… 쉬는 거 봤어?"


"아니…. 저렇게 근성이 있는데 왜 떨어진걸까…?"


"둔재여서 그렇겠지. 야, 그러지말고 더 쉬었다가 마저 하자. 그나마 우리가 가장 빠르잖아?"




청색 머리 청년은 로이트를 빤히 보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야! 보에르! 어디가!"




보에르는 땀에 흠뻑 젖어 널부러져있는 공터쪽을 바라보다가, 동떨어져서 목검을 휘두르는 로이트를 보며 호기심이 생겼다.




"로이트라 했지?"


"어? 응."




제법 휘둘렀을텐데 그는 땀만 흘릴뿐,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보에르가 놀란 눈빛을 하며 그의 옆에 섰다.




"난 보에르."


"뭐해 너. 지금 검 휘두르는 것도 벅차죽겠는데."


"그리고 이쪽은 라인."




라인은 보에르와 로이트를 번갈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야, 가자 보에르."


"어, 야야… 잠깐만…"




로이트는 끄려가는 보에르를 보며 갸웃거리다가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지금 뭐해 너?"


"너 진짜 소문듣는거 약하구나…? 저 사람이랑 엮였다가 괜히 우리도 말려들어."




라인의 말에 보에르가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말려든다니…?"


"진짜 모르고 있었어? 저 녀석… 라르카 백작님의 아들한테 찍혀서 엄청 부려먹히고 있대."


"라르카 백작?"




보에르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통일제국 포스티어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권위있는 자였다. 직위는 다른 권력자들에 비해 낮았지만, 상당한 양의 재물을 바탕으로 거미줄같은 인맥을 형성하여 제국에서 이름을 떵떵 떨쳤다. 그의 영지는 관광업으로 유명해 많은 귀족이 혜택을 받기위해 친해지려 했고, 그가 보유한 거대한 상단을 통해 진귀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아부를 떨었다. 게다가 제국의 2인자이자 검의 귀족이라 불리우는 칼릭소 공작과는 매우 긴밀하여, 그 누구도 감히 백작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보에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로이트를 보았다. 강직해보이던 뒷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라인은 작게 속삭였다.




"아무튼 괜히 다가가지마…. 너희 부모님도 네가 고생하면 가슴아플거 아냐."


"응…."




그리고 그 둘은 해가 지기 전에 렘피룬트가 내준 숙제를 끝마쳤다. 해가 반쯤 땅에 먹힐 쯤에야 모두가 녹초가 되어서 할달량을 채우고, 아카데미 내부의 식당을 향해 가거나 곧장 기숙사로 가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묵묵히 목검을 휘두르는 이가 있었으니.




"후…."




로이트는 한숨을 뱉으며 하늘을 보았다.


달…. 유독 푸른 달이 그의 눈에 비쳤다.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색의 달이 떴는데 이번 달은 푸른 색의 달 카에시룬이 떴다. 로이트가 검은 동공에 달빛을 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땀방울이 또르르 구르며 그의 눈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흘러내렸다. 그는 머리를 털고 자신의 볼을 소리나게 쳤다.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입안에 터진 상처는 그대로여서 정신이 확 깼다.




"이제 300번 남았다…."




로이트는 지쳐 풀린 팔근육을 주무르며 모두가 곤히 잠들고 나서야 할달량을 채웠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후들거렸지만 아직 주어진 일이 더 있기에 열심히 움직였다.




"잘 있겠지…."




전 날 만난 강아지를 떠올리며 로이트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창고 깊숙하게 숨겨놨으니 들킬 일은 없었다. 그런 먼지쌓인 곳을 출입하는건 청소부나 별종이 아니라면 자신이 전부였으니까. 복도를 닦고, 공터의 허수아비를 점검한 후 목도를 들고 창고로 향하였다. 머리가 맑아진다. 로이트는 창고의 문을 열려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있는 백발의 노인. 늘 자신을 걱정해주던 따스한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더니, 조용히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낡긴 했지만 경첩 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살금살금. 하지만 끌려오는 자루 소리가 커, 까딱하단 할아버지가 깬다는 생각에 조심히 자루를 들어 옮겨놓았다.




"휴…."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난 것을 몸으로 느끼며 살금살금 창고 깊숙한 곳으로 갔다.


으릉-.


그러자 어김없이 강아지가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로이트는 그를 안아주며 웃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보았다. 낡은 모포와 반토막 난 빵. 자신이 먹을 것 중 반을 떼주었는데도, 강아지는 먹을 기미도 안 보였다. 로이트는 번쩍 그를 안아올렸다.




"왜 안 먹니…."




힘없는 웃음에 강아지는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어댔다. 마냥 좋아하던 로이트는 시선을 느끼지 못 하였다. 그 시선은 한참이나 둘을 바라보다가 소리없이 창고밖으로 나왔다.
















다음 날도 여지없이 목검 휘두르기가 전부였다. 다만 휘두르기 1,000회에 내려치기 500회가 추가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죽는다! 우아아!"




라인은 200회쯤에 목검을 내려놓으며 뒤로 발라당 누웠다. 모두가 그 모습에 따라눕고 싶었지만, 쉬면서 하는 것보다 한 번에 이어서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말없이 목검을 휘둘렀다.


로이트는 2,000회 그대로에 1,000회 내려치기의 숙제가 주어졌다. 물론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 목검을 휘둘렀다.




"어…? 저 사람…."




누군가 멀리 복도를 가리켰다. 그러자 일제히 시선이 쏠렸고, 라인과 보에르도 눈을 돌렸다. 여러 소녀에게 둘러싸인 금발의 미남자! 수군거리던 누군가가 아차하며 소리쳤다.




"라르크 백작님의 장남! 밀레트님이다!"




그 외침을 들은건지, 저 멀리있던 밀레트가 공터쪽을 돌아보았다. 소리치던 아이는 끽 숨죽이며 숨었고, 모두가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밀레트는 웃는 얼굴로 주변 소녀들에게 뭐라 말하더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분명 똑같이 주어진 생활복이건만, 어딘지 모르게 귀풍스럽게 느껴졌다.




"너희가 신입생이구나?"




밀레트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건내자, 모두가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을 보기 바빴다. 밀레트는 가까운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열심히 해. 너희는 이 포스티어의 일부니까. 꼭 기사가 되어서 제 몫을 한다는 걸 보여줘야지?"


"아, 네… 네!"




긴장섞인 대답에 밀레트는 빙긋 웃어보였다.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저기 로이트에게 말해. 내가 도와주고는 싶지만 로이트만큼 검을 오래 휘두르지 못 해서 말이야. 그럼 열심히 해 얘들아."




그가 웃으면서 손짓을 하자, 다들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로이트를 힐긋 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동기라더니…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구나?"


"야, 난 저것도 부럽다. 우와… 밀레트님이랑 저렇게라도 연이 닿으니 얼마나 좋겠어."


"멍청아. 너도 4년 내리 목검 휘두르고 잔일하고 싶냐?"


"어우, 난 됐다. 차라리 열심히해서 기사가 되가지고 밀레트님께 거둬달라는게 더 빠르겠다."


"기사는 무슨! 너 목검 휘두르는게 빗자루 쓰는 거 같은데 이참에 청소부나 하는게 어때?"


"이녀석이~!"




밀레트가 왔다가자 순식간에 활기가 돋아났다. 보에르는 그 모습에 밀레트가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존경섞인 눈빛을 내보였다.




"어때, 라인. 이래도 저 로이트란 녀석에게 가까이 가고 싶냐?"


"글쎄….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사정은 얼어죽을. 저렇게 좋은 사람한테 찍혔다는건 악한이란 증거야, 악한! 사, 악, 한 할 때 악한. 몰라?"




썰렁한 말장난에 보에르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흠흠, 아무튼 크게 관심가지지 말자고. 이건 친구의 충고이자, 동료의 가르침이다."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어. 그래서… 넌 이제 몇 번 했냐?"


"몇 번 했냐니? 당연히 그대로… 어! 너 그러고보니 말하면서 계속…!"




보에르는 씩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 350번째다."


"너 이자식! 으아아!"












밀레트가 웃으면서 붉은 머리 소녀의 손을 잡았다.




"갈까. 헤스타."


"네."




연인이라 알려진 둘은 뭇 이성의 질투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준수한 외모에 뛰어난 두뇌, 거기다 놀라운 검술 실력까지. 게다가 뒷배경도 라르크 백작이 아버지란 것에, 장남이란 것까지! 아카데미내에선 일등 신랑감에 좇고 싶은 인물로써도 손꼽히는 그!


물론 헤스타도 밀레트 못지 않은 배경을 지녔다. 칼릭소 공작의 딸! 그것도 단 하나밖의 없는 자식이라 보석처럼 애지중지했고, 또 보석같이… 아니, 보석보다 환하게 빛나는 여인이였다.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그녀는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처음부터 이곳 아카데미가 아닌, 블루 크리스털이란 곳에서 마법과 교양을 익히는 중에 검이라는 것에 눈을 떠 뒤늦게 아카데미에 들어와 검술을 익힌 내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늦었음에도 4년을 배운 남학생을 오로지 실력으로 꺾을만큼 천재였다. 과연,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누군가는 드래곤은 드래곤을 낳는다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딱 그녀를 빗댄 꼴이었다.


덤으로 이 일로 로이트는 여인의 몸보다 못 하다는 욕을 추가로 먹으며, 더 많은 멸시를 받게되었다.




"라이가스는 어떤가요?"


"너를 꺾겠다고 난리야. 좀 봐주면서 하지 그랬어?"




밀레트의 말에 헤스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니, 모두가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그보다 밀레트, 최근 다른 여자랑 접촉이 잦더군요…."




사납게 노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밀레트가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격식없이 친해지는 것도 좋지만, 내년이면 졸업이에요. 명예로운 기사가 그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하하… 미안…. 다음부턴 주의하지."


"그리고 로이트란 사람에게 너무 관여하시더군요. 자칫 잘못하다간 나중에 명성에 흠이 갈 수도 있어요."




밀레트는 따갑게 말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걱정을 알고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 놈은 그러지 못할테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친절을 베풀어줘야지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는 법이야."


"후후… 과연… 제가 괜한 참견을 했네요…."


"아니-. 귀여운 숙녀가 나를 걱정해주는게 참견이라면 언제든 참견해줬으면 좋겠어."




헤스타는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어색한 반응을 보였다.




"참. 애완동물을 잃어버리셨다고…?"


"아, 그거. 신경쓰지마. 어련히 알아서 잘 살겠지."


"하지만 희귀하다면서요?"




그녀가 갸웃거리며 묻자 밀레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답하였다.




"실버 팽이 희귀하기하지만 조금 사납잖아.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어. 어린 녀석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니까 말이지."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목적은 그거였구나?"




밀레트가 섭섭하단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헤스타가 볼을 살짝 붉히며 말하였다.




"아, 아니에요! 그저 걱정이 되서…."


"다음부턴 이런저런 말 묻지말고 그냥 본론만 말해. 아무도 뭐라 안할테니까."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헤스타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밀레트는 그 모습이 좋아서일까, 싱글벙글 웃어댔다. 그러다가 맞은 편에서 오는 청년을 보며 손을 번쩍 들며 말하였다.




"이봐, 라이가스!"




또래치고는 큰 키에 근육이 붙은 몸매의 그는, 몇 달 전 헤스타와 대련에 패한 검술의 3인자, 라이가스였다. 원래는 2인자였지만말이다.


윤기있는 고동색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외형은 밀레트만큼이나 많은 여성의 심금을 울렸다. 라이가스는 하이크라 후작의 차남으로, 황실의 친위대장을 꿈꾸며 열심히 수련하는 노력형 인간이였다. 그래서 이 성실함을 높이 산 밀레트가 가까이하였고, 지금은 고민을 나눌만큼 친분이 깊어졌다. 물론 이로 인하여 라이가스의 인기도 더욱 높아졌다. 물론 대다수가 조금이라도 밀레트와 연줄이 닿으려는 사람이였지만.


어찌됐든 라이가스는 밀레트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보였다가, 헤스타를 보고 살짝 표정이 변하였다. 이걸 눈치챈 헤스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라이가스. 밀레트. 저는 먼저 가볼게요."


"아닙니다 헤스타. 저는 신경쓰지 말고 계시죠."




라이가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하는 말에 헤스타는 조금 기쁜 얼굴로 끄덕였다. 라이가스는 헤스타의 반대쪽에 섰다.




"수련은 잘 되가?"


"어찌어찌 되더군요. 하지만 아직 밀레트와 헤스타를 이기기엔 무리입니다."


"나야 당연하지. 이거이거… 벌써부터 이길 생각을 하다니… 나중에 기사로 받아주는건 생각해봐야겠는걸?"


"하하하. 나중에 친위대장이 되지 못하면 그때 질 생각만 하겠습니다."




둘의 농에 헤스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보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검이 말이야…."




밀레트가 말을 시작할 때, 헤스타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착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에 음침해보이는 표정의 청년. 그는 산책로를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샤악- 샤악-


흙먼지가 피어올라 얼굴을 때려도,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종일관 무표정. 왠지 소름이 끼친 헤스타는 밀레트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그래? 어디 아픈거야?"


"아, 아니에요."


"음? 저녀석…."




밀레트가 실눈을 뜨며 검은 머리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아…. 나랑 동기였던 녀석인데… 이름이… 하크였나?"


"하크?"


"응, 아마 맞을거야. 청소부로 일하고 있나보네. 쫓겨난줄 알았는데…."




그의 말에 헤스타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쫓겨나다뇨?"


"처음에 아무말 없길래 과묵한 애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벙어리래. 그래서 쫓겨날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네."




헤스타는 벙어리란 말에 하크란 청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밀레트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말하였다.




"자, 가자 헤스타. 슬슬 식사시간이고 하니 말이야."


"아, 네…."




멀어지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에 계속해서 하크가 밟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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