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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늑삼

민간 작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일반소설

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12 21:15
최근연재일 :
2019.10.09 16:57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1,344
추천수 :
590
글자수 :
494,197

작성
19.05.17 18:00
조회
275
추천
8
글자
18쪽

<못된 짓의 대가2>

DUMMY

* * *



30분 전, 조선인민군 제 201 군부대 산하 보천 국경수비대의 제 2 순찰대대 제 3 중대장 상위 한정철은 중급병사가 운전하는 삼륜 오토바이 뒷 좌석에 타고 저 앞의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이곳에 세워진 벌통 트럭을 발견하곤 마치 노다지를 발견한 것마냥 그 즉시 핸들을 꺾으라고 했다.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꿀부터 시작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빼앗아 갈 요량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이곳까지 들어와 벌통 트럭의 여주인을 보고 난 한정철은 들어올 때 마음먹었던 그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한정철이 그리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벌통 트럭의 여주인은 나이가 30대 후반쯤이나 되었을 법한데 그야말로 엄청난 미인이었다. 게다가 한정철이 이리저리 살펴보고 이것저것 재어 봐도 뭔가 그림이 허전하고 이상했다. 미루어 짐작컨대 남편도 없이 어린 아들과 단 둘인 것 같았다. 한정철은 어차피 밑져 봤자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은근슬쩍 수작을 걸어 봤는데, 벌통 트럭 여주인이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게 영락없이 수작질에 걸려든 것처럼 보였다.


한정철은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착각에 빠져들자 그 순간 눈에 뵈는 것조차 사라져 대뜸 의기양양해 댔다. 착각도 어느 정도껏이지 그 꼴값이 어찌나 기고만장한지 아주 볼만했는데,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하지만 뭐든지 유분수라고 나름 제 분수가 있는 법인데, 어찌 감히 그런 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고 멍청하기 또한 이를 데가 없었다. 막말로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고 있는데, 미련퉁이마냥 언감생심의 김칫국부터 배 터지게 마셔 대는 꼴이었다.


한편 박옥자는 당금의 상황이 너무나 두려웠고, 그로 인해 오금이 저리며 겁이 난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안 돼. 이럴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얼마 전까지 남조선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했는데, 이렇게 불시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덜컥하니 겁부터 났다. 이런 걸 보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는 속담이 딱 맞는 말 같았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장교가 자신에게 하는 짓거리를 보니 다행히 남조선 사람들과 관계된 일로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러다 무슨 끔찍한 봉변이라도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불현듯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하는 짓거리가 영······.'


박옥자가 그렇게 노심초사하다 보니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상기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박옥자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한정철은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았다. 벌겋게 상기된 채 허둥대는 박옥자를 보고 자신의 수작질이 제대로 먹혀들었다고 판단한 것인데, 그렇게 엉뚱한 착각에 빠진 한정철은 한껏 고무되어 음흉한 웃음부터 먼저 내보였다. 그리고 이내 기고만장함의 극치를 떨쳐 보이려고 막 일어나는 참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방해꾼에 의해 한정철은 그쯤에서 그만 김칫국 사발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하필이면 지금같이 중요한 때에 자신의 직속 상관이 도로변에 지프차를 세워 놓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정철 상위 동무, 이 바쁜 시간에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겐가?"


"예, 대대장 동지. 지나는 길에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려고 잠시 들렸습니다."


조선인민군 제 201 군부대 산하 보천 국경수비대의 제 2 순찰 대대장 소좌 동준표는 지나는 길에 옆쪽 산자락 밑을 얼핏 보니 벌통 트럭이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옆에 자신의 부하들도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잠시 차를 멈추게 하고 안쪽까지 한번 들어와 본 것이다.


그러나 벌통 트럭이 있는 이곳까지 들어와 한정철과 이런 저런 쓸데없는 말 몇 마디를 나누며 박옥자를 힐끔거리던 동준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돌변하더니 자신의 부하들을 노골적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한 상위 동무, 지금 이런 데서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나. 어서 빨리 수비대로 복귀하도록 하게."


"대대장 동지께서는······."


"한 상위 동무부터 먼저 복귀하게. 나도 물 한잔만 얻어 마시고 바로 복귀하겠네."


동준표는 그렇게 부대 복귀를 구실 삼아 은연중에 한정철을 압박해 댔는데, 한마디로 빨리 자리를 비켜 달라는 은근한 강요였고 명백한 축객이었다.


동준표의 노골적인 핍박에 한정철은 마치 떫은 감이라도 씹은 것마냥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하긴 착각을 워낙 잘하는 한정철이라 지금 심경이 죽 쑤어 개 바라지한 심정일 게 뻔했고, 그런 만큼 그런 표정이 지어지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삼륜 오토바이 뒷 좌석에 타고 무척이나 엷은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는 한정철은 자꾸만 뒤쪽을 힐긋거렸다. 그런 걸 보면 아까 그 같잖은 해몽에 못내 아쉬움이 큰 모양인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같잖은 해몽이 원인이 되어 며칠 후 황천길에 오르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정철 상위를 태운 삼륜 오토바이가 저 멀리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자 동준표는 그 즉시 자신의 운전병에게 손짓을 해 지프차를 이 안쪽까지 끌고 오라고 했다.


동준표의 그런 행동에 수상함을 느낀 박옥자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산중에서 곰 피하면 호랑이 만난다고 하더니······.'


뭔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게 느껴졌기 때문인데, 특히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동준표의 눈빛이 이채를 띠며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표정 또한 징그러울 정도로 음흉하기 그지없었는데,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대하는 말과 행동에서 흉하고 추한 음란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일단 이런 것만 봐도 현재 자신의 처지는 위태로운 순간에 놓여 있는 백척간두의 신세나 다름없었다. 정말이지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흔히 막다른 골목에서 쓰레기차 피하면 똥차 만난다고 하더니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여하간 지금 이 순간이 위태위태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지프차를 벌통 트럭 옆에 세우고 운전병이 차 밖으로 나오자 아니나 다를까 동준표는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운전병 동무, 나는 지금부터 볼일이 있으니 동무는 내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 어린 놈을 꽉 붙들고 있어라. 알겠나?"


"네,알겠습니다. 대대장 동지."


동준표는 운전병에게 형재를 붙잡고 있으라 하고선 곧장 박옥자에게 다가가더니 박옥자의 가녀린 팔목을 억세게 낚아챘다. 그리곤 숲이 우거진 으슥한 곳으로 무작정 끌고 가려고 했다.


한편 형재는 창졸간에 운전병에게 붙잡혀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입으로는 자신의 어머니를 놓아주라며 고래고래 악을 써 댔다. 그렇게 고래고래 악을 쓰는 형재의 모습에서 절박함과 절실함,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론 절망감까지 그대로 표출되고 있었다.


"안 돼요! 어머니를 놔줘요. 어머니! 당장 우리 어머니를 놔주란 말이예요! 어서요! 어머니!"


박옥자는 그런 형재가 걱정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형재를 붙잡고 있는 운전병이 악을 쓰고 있는 형재에게 무슨 해코지를 가할지 몰랐고, 그로 인해 형재가 자칫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걱정이 앞서는 까닭에 박옥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선은 자신의 아위보다는 형재부터 안정을 시켜야만 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박옥자는 호랑이이자 똥차인 동준표에게 마지못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군관 동지. 제 발로 순순히 따라갈 테니 제 아들과 잠시만 얘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동준표는 제 발로 순순히 따라온다는 박옥자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이며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런 내색은 일절 하지 않고, 그저 턱을 두어 번 끄덕이며 턱짓으로 허락하는 제스쳐를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듯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참으로 같잖은 꼴값이 아닐 수 없었다.


"형재야, 잠깐 진정하고 이 어미 말을 잘 듣거라. 너도 삼수갑산··· 한 말 기억하고 있지?"


"어머니··· 흑흑······."


"그러니 이 어미는 걱정하지 말고 진정하거라. 삼수갑산··· 한테 약속을 지키게 하려면 먼저 이 어미가 무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어미가 무사하려면 형재 네가 먼저 무사해야 한다. 형재야, 이 어니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삼수갑산··· 믿고 있거라. 이 어미도 그럴 테니······."


"흑흑··· 어머니······."


정 상사를 암시하는 말을 하며 형재를 어느 정도 진정시킨 박옥자는 독촉해 대는 동준표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떼었다. 박옥자는 이 와중에도 이처럼 강단이 있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믿음이 밑바탕 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강단이었는데, 물론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확실하게 믿는 구석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 * *



이 원사와 정 상사는 이미 산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정 상사, 이건 우리가 갈등 겪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형님, 우리가 나섰다가 일이 잘못되면 빈이를 구출하는 게 어려워지거나 아예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정 상사는 빈이 구출에 대해 염려하는 말을 하면서도 표정 한구석엔 또 다른 염려의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 여왕벌 여사가 저렇게 당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자는 말이냐? 정 상사, 빈이도 소중하지만 저 사람들도 소중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이곳까지 온 사람들이다. 빈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은 충분히 안다만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평상시의 우리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경후와 정진원 고유의 스타일대로 그대로··· 자, 우리 스타일대로 그렇게 가자."


이 원사가 평소와 달리 말을 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만큼 당금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 형님, 역시 형님답습니다. 하긴 형님이 이런 분이셨기에 제 형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너에게 이런 면이 있었기에 내 동생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


"형님, 지금 저한테 또 고맙다고 하셨습니까?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한번 봐 드리겠습니다. 다음에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거 아시죠? 그나저나 형님, 제가 여왕벌 여사한테 지켜 준다고 약속한 걸 지킬 수 있도록 형님께서 좀 도와주십시요."


"알았다. 뭐든지 명령만 내리거라."


"허!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제가 뭘 어떻게··· 머리 좋은 형님께서 어서 빨리 호박··· 아니 머리 한번 굴려 보십쇼."


"끄응, 내가 일벌 꼬마 옆에 있는 운전병을 맡을 테니 네가 여왕벌 여사 쪽의 장교를 맡아라. 단, 동시에 제압해야 한다. 만약 제압에 시간 차가 생기면 늦은 쪽에서 분명 총기를 발사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총성이 울리게 해선 절대 안 된다."


"형님, 소음기 장착된 소총은 트럭에 있는데 뭘로 제압하실 겁니까? 제가 단검을 쓸 테니 형님께서 이걸 쓰도록 하십시요."


정 상사는 자신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PB 소음 권총을 뽑아 이 원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 원사는 정 상사가 내민 PB 소음 권총 대신 정 상사의 손에 들려 있는 플라스틱 물병을 낚아챘다. 그리곤 자신의 뒷 허리춤에 꽂혀 있던 마카로프 권총을 꺼내 총구를 물병 주둥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카로프 권총은 중국 지린성 창바이에서 북한 공작원들을 처치하고 취한 전리품이었다.


물병으로 사용하는 병은 꿀을 담는 플라스틱 병이었다. 그 때문에 주둥이가 꽤 넓어 권총의 총구부터 방아쇠 고리 부분까지 물병 안으로 쏙 들어갔다.


"됐다. 이걸로 충분한 것 같다."


이 원사는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어 권총과 물병 사이를 칭칭 감더니 정 상사의 목에 있는 수건까지 가져가 그 부위를 더 칭칭 감아 쌌다.


"형님, 그래도 소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소음기처럼 완벽하게 잡아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버금가게 잡아낼 수 있다."


"시험해 보신 적이 있었습니까?"


"한규천 상사 그놈이 워낙 별종 아니냐. 엉뚱한 짓부터 시작해 별 해괴한 짓까지 다해 보는··· 그보다 여왕벌 여사 똑똑한 사람이니 전화를 해서 미리 언질을 줘야 하지 않겠냐?"


이 원사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그 배경을 밝힌 뒤 자신의 의견을 정 상사에게 넌지시 건넸다.


"그렇게 하면 더할 나위 좋겠지만··· 그러다 괜한 의심만 사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엔 여왕벌 여사나 일벌 꼬마가 워낙 똑똑하고 눈치가 빨라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형님께서 그리 생각하시면 전화를 해 보겠습니다."


정 상사는 곧바로 형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형재가 전화를 받았다.


"외삼촌, 어쩐 일이세요?"


역시 이 원사의 예상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했다.


"어, 허험··· 외삼촌인데 엄마 좀 바꿔 보거라."


"예, 외삼촌.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 어머니. 영지 외삼촌인데 어머니 좀 잠깐 바꿔 주라는데요."


박옥자는 극도로 흥분하는 형재에게 정 상사를 암시하는 말로 눈치껏 달래 놓은 다음 동준표를 따라 막 몇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저, 군관 동지. 제 남동생이라는데 잠깐 전화 좀 받으면 안 될까요?"


뜻밖에 들려온 형재의 말에 박옥자는 속으로 반색을 하며 반겼다. 하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표정은 다소 겁에 질린 듯 파리한 모습이었다.


"에엥? 별, 별안간 남동생이라니··· 남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소? 설마하니 이 근처에 있소?"


박옥자가 난데없이 남동생을 언급하자 동준표는 대뜸 떨떠름한 표정부터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남동생이란 훼방꾼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었고, 만약 그렇다면 다됐다고 생각한 밥에 재가 뿌려지는 것이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작스레 생각지도 못한 염려가 생기다 보니 동준표는 가장 먼저 남동생이란 존재의 위치부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무척이나 못마땅한 상황인 만큼 말투 또한 고울 리가 없었다.


"아, 아니예요. 동생은 지금 평, 평양에 있어요."


박옥자는 형재의 말투에서 전화를 한 사람이 동생 영지가 아닌 정 상사라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 근처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려다 얼떨결에 평양을 들먹이고 말았다. 평소 거짓말을 모르고 살았던 박옥자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엉겁결에 뜬금없는 평양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박옥자의 그런 어리바리한 행동과 어수룩한 대답이 동준표에게 먹혀들었다. 훼방꾼이 될 수도 있는 남동생이 이 근처가 아닌 평양에 있다고 하자 동준표는 일순간에 희색만면해지더니 다시 한 번 큰 선심을 쓰는 척하며 허락을 해 주었다. 대신 빨리 끝내라는 짜증 섞인 독촉도 잊지 않았다.


"알겠소. 대신 냉큼 끝내시오."


그리고 그때부터 동준표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제자리를 뱅뱅 헛돌기 시작했다.


"어, 영지야. 어, 어쩐 일이야?"


"여왕벌 여사님, 조금만 참고 계십시요."


"어, 그래. 나하고 형재는··· 네가 약속 지킬 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어떡하지? 누나가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통화하기가 좀 곤란한데··· 이만 끊어야 될 것 같은데······."


"예, 알겠습니다. 저만 믿고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요."


"··· 그래, 그리고··· 조, 조심해."


역시 박옥자도 박영지 못지않았다. 비단 얼굴만 예쁜 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척'하고 암시를 주면 '착'하고 바로바로 알아들을 정도로 머리 또한 비상했다.


박옥자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형재에게 돌려준 다음 곧바로 동준표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그 모습이 방금 전과 달리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방금 전 휴대폰을 형재에게 돌려줄 때도 그랬다. 마치 조가비마냥 입을 굳게 닫고 아무 말도 없었는데, 하긴 시시콜콜하게 말해 주지 않아도 형재는 이미 모든 상황을 눈치 채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만큼 행여 긁어 부스럼이 될지도 모르는 행동은 구태여 행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말해 형재도 통화 내용에 대해 훤히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굳이 설명해 주려다 자칫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고, 여차하면 그게 도리어 화사첨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박옥자는 통화 내용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이 휴대폰만 건네주고 그 즉시 뒤돌아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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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산수 병풍의 삼수갑산> 19.10.08 241 6 23쪽
71 <사격의 진수> 19.10.07 215 6 32쪽
70 <도주가 아닌 도주2> 19.10.04 226 7 18쪽
69 <도주가 아닌 도주1> 19.10.03 214 7 19쪽
68 <구출 작전> 19.10.02 208 7 28쪽
67 <보천 국경수비대3> 19.10.01 206 6 19쪽
66 <보천 국경수비대2> 19.09.30 198 5 17쪽
65 <보천 국경수비대1> 19.09.27 270 6 16쪽
64 <못된 짓의 대가3> 19.09.27 206 7 18쪽
» <못된 짓의 대가2> +1 19.05.17 276 8 18쪽
62 <못된 짓의 대가1> 19.05.16 266 8 16쪽
61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3> 19.05.15 241 7 13쪽
60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2> 19.05.14 275 7 23쪽
59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1> 19.05.13 229 7 18쪽
58 <북한 잠입3> 19.05.10 245 7 15쪽
57 <북한 잠입2> 19.05.09 258 7 10쪽
56 <북한 잠입1> 19.05.08 241 7 20쪽
55 <변경되는 작전 계획4> 19.05.07 253 6 11쪽
54 <변경되는 작전 계획3> 19.05.06 236 7 15쪽
53 <변경되는 작전 계획2> 19.05.03 235 6 19쪽
52 <변경되는 작전 계획1> 19.05.02 258 8 13쪽
51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5> 19.05.02 256 7 4쪽
50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4> 19.05.01 252 8 15쪽
49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3> 19.04.30 257 8 16쪽
48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2> 19.04.29 270 7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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