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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검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전선의 성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연혼문
작품등록일 :
2021.06.30 15:10
최근연재일 :
2021.07.18 16:00
연재수 :
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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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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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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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구도자의 사명(1)

DUMMY

몇 시간 후, 촌장이 신전까지의 가이드를 도와줄 마을 청년이라며 한 사람을 데려왔다.


“사제님과 안면이 있다기에 데려왔습니다. 자, 인사하거라.”

“사, 사제님, 반갑습니다.”


살짝 구릿빛 피부에 진보라색 머리카락을 올려 묶었고 눈동자의 색도 똑같았다. 눈매가 날카로운 게 드센 성격으로 보인다.


“저, 정식으로는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볼튼의 딸, 산짐승 사냥꾼인 도라입니다.”

“반가워요, 도라.”


도라는 지나치게 서희건의 눈치를 보았다.


순간 의아했으나, 처음 만났던 순간 나를 활로 겨누고 협박했던 것 때문이리라. 이런 분위기는 나도 불편하다.


“제가 치료에 전념할 때 주위를 지켜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아,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아버지를 치료해주시고 마을 사람들과 촌장님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촌장이 허허허 웃으며 도라에 대한 신뢰를 설명했다.


“도라는 어려서부터 사냥에 자질이 뛰어났습니다. 제 아비인 볼튼을 따라서 어려서부터 그 재능을 개화했지요. 산을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니 신전까지도 금방일 겁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라.”

“저,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촌장의 배웅을 받으며 높은 곳으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녹색 천이 나뭇가지에 묶인 표식이 걸려 있었는데, 이곳은 산의 중턱이었기 때문에 길을 잃기 쉬웠기 때문이다.


길을 떠나고 얼마 동안은 둘다 말이 없었다.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래서 나 홀로 생각에 잠길 일이 많았는데, 덕분에 어째서 배웅을 나오는 길이 촌장님 한 분뿐이셨는지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도라.”

“네, 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도라가 놀라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모았다.


“막 웜홀의 괴물들과 싸우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도와주겠다고 자원해줘서요.”

“아, 아닙니다. 사제님께서도 의식을 잃고 쓰러지실 때까지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셨으니까요.”


그 기점부터 우리는 조금씩 대화를 나눴다.


“도라는 사냥꾼이라고 했죠? 여기는 위험한 짐승도 나오나요?”

“네, 가끔요. 하지만 대부분은 웜홀의 괴물과 함께 싸워주는 훌륭한 동료들이에요.”


동료라, 이쪽 세계의 상식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드루이드나 테이머 같은 개념일까?


“사제님께서는 큰 도시에서 오셨죠? 입고 계신 옷을 보자마자 딱 알았어요. 어디에서 오신 건가요? 팔리아? 디녹스?”

“어, 음······, 아뇨. 그, 저는 저 멀리 바다 건너 먼 동양에서 온 사람입니다.”

“아하!”


생각해보니 내 신분이 부실했다. 사람들이 나를 사제님이라고 부르니 본명을 댈 일이 없어서 그렇지, 서희건이라는 이름도 이 세계에서는 낯선 이름이 아닐까?


“여기는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도라는 그러면서도 본분에 충실하게 나를 잘 인도했다.


“왜, 그, 사제님들은 본명보다 세례명을 많이 쓰신다고 하던데! 사제님의 세례명은 뭔가요?”

“아, 제 세례명이요.”


아, 그거? 하는 식으로 말했으나, 모르겠다. 알 리가 없다. 세례명을 받지를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지!

이름을 함부로 댈 수도 없다. 지구의 세례명과 이곳의 세례명이 다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궁금하신가요? 제 세례명은···.”


그 순간 미끌, 하고 균형이 부조화를 이루었다. 아무런 소리도 뭣도 없었지만, 감각으로 알았다. 아, 내가 미끄러졌구나, 하고. 운이 좋았다. 아니, 위기를 넘겼으니 됐지만, 이게 맞나?

몸이 뒤로 쭈욱 당겨지는 감각과 함께 한발 앞서가던 도라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속절없이 넘어지겠구나, 싶던 순간.


“사제님!”


도라가 마치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단숨에 등을 휘감은 팔이 나를 지탱했다. 그녀의 얼굴이 내 지근거리까지 닿았다.


“사제님, 괜찮으세··· 요···?”


가깝다. 너무 가깝다. 도라도 그걸 깨달았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아, 예···. 그런데, 그.”“네, 네?”“좀, 가깝네요.”

“아, 그, 네!”


도라가 서둘러서 떨어졌다. 티 하나 없던 매끈한 얼굴이 멀어졌다.

도라가 얼굴로 손부채질을 했다. 연한 갈색 피부 위로 도드라지게 붉어진 얼굴에, 내가 말이 너무 직설적이었나 싶어서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제라.”

“아, 아, 아닙니다. 제가, 그, 에, 예······.”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어쩐지 뜨겁기도 하다.


서희건과 도라는 말없이 산꼭대기 근방까지 향했다. 다행히 도착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상에는 넓은 평지가 있었는데, 근방의 산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거대한 신전이 지어져 있었다.


“와아.”


감탄성을 자아내는 신전의 웅장한 자태는 신에게 기도한 인간의 염원 중 제일 깨끗한 것만으로 쌓아 올린 듯했다.

도라가 설명해주었다.


“아무래도 산간 지역은 접근성이 적은 오지여서 사제들의 손길이 닿기 어렵잖습니까. 그래서 이 거대한 신전이 이 산맥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예배당입니다. 우리 사이에서는 성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나 대단한 곳일 줄은 몰랐다. 돌아보니 천사도 조금은 놀란 면으로 신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거룩했다.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천사를 나는 볼 수 있듯, 천사도 내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는 분명, 낡은 신전이라고 했는데.’


보석은 없다. 화려한 문양도 뭉그러졌다. 그럼에도 이 신전은 자체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위용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지금 시간이면 아무도 없을 거예요.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함께 들어가지 않는 건, 아마 날 배려한 거겠지. 내가 독실한 사제고, 안에서 신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왔으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작게 열린 5m 가량의 거대한 신전문을 사이로 들어갔다.


“······.”


안은 어두웠다. 작은 촛불 몇 개와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비취는 희미한 태양빛으로는 이 예배당을 환히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옅게나마 드러난 부분을 본 나는, 왜인지 모르게 촌장이 말한 ‘낡은 신전’이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안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혹시 모른다. 누군가 누워 자고 있을지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걸 알 수 있어?”

〖신성한 곳이니까요.〗

“여기야 신성한 곳이라 치자.”


마침내 둘만의 시간이 갖춰졌으니, 오랫동안 내 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의문을 해소할 때다.


“대체 멸망전선이 뭔데?”

〖멸망전선이란 이 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상한 이름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지구라 칭하는 걸 생각해보면······.


“이 세계는 멸망을 막기 위해 싸우는 곳이야?”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발악하는 중입니다. 멸망은 이미 강림했고 그저 소실을 유예시키고자 할 뿐입니다. 아까 보았던 웜홀과 괴물들도 멸망의 아주 작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천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바르게 이해한 건지 되물을 수밖에 없을 만큼.


“그렇다면 이 세계는 이미 멸망했다는 거야?”

〖맞습니다. 이 멸망전선의 세계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생명체들은 멸망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세계가 소실할 때까지 숨을 쉴 뿐인 잔재물에 불과합니다.〗


서희건은 어벙하게 천사를 올려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여기 사람들은 잘살고 있어. 사람들도 신체 건장하고, 개개인이 싸우는 법도 익히고 있다고. 그저, 그 웜홀의 괴물이라는 녀석들이 계속 나타날 뿐이잖아?”

〖이 신전을 보십시오.〗


심장이 뜨끔했다.


〖신전이 낡았다는 말을 언제 쓰는지 아십니까?〗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사실.


“벽이나, 기물이 상하고 녹이 슬고 거미줄이 쳐지면······?”

〖아닙니다.〗


말하면서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나, 이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오답을 입에 담고 말았다.

천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그녀는, 단번에 이 느낌의 본질을 설명해주었다.


〖이 세계에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 이거다. 이 신전은 결여되어 있다.


〖신전이 아무리 작고 낡고 볼품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안에 신성이 가득하다면 그 신전이 부흥한 신전이고 가장 위대한 신의 집입니다.〗


신을 모시는 당에 정작 섬김받을 신이 없으니.


〖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낡고 무너진 죽은 신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낡은 신전이 되는 것이다.


〖촌장의 말에 따르면 사제 아르반이 단말이 되어서 신전에 신성을 유지했었으나, 그조차 죽었으니 신전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지요.〗


인간이 신을 위해서 지은 집이 신전이라면, 신이 피조물과 자신을 위해 지은 집이 행성이다.

그렇다면 신이 없는 세상이란.


〖이제야 기억이 납니다. 이 신전의 잔류 신성이 제 소실된 기억의 일부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외계의 침략을 받았었습니다. 이미 신들은 싸움에서 패배하고 소멸했지만, 수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모른 채 터전을 꾸리고 웜홀의 괴물들과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는 거야?”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건 신들의 자비로우심입니다. 그분들이 사라졌으니 바르게 유지되던 질서는 사라지고 불균형과 무질서의 혼돈으로 돌아가겠지요. 지금은 그 과정일 뿐, 진정한 소실이 시작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가히 상상도 못 할 것입니다.〗

“그럼, 진짜로, 멸망한 세계에서 의미 없이 싸우고 있을 뿐이니, 이 세계는······.”


멸망전선.


〖동반자여. 제가 당신을 이끄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왜 이 마을에 도착했는지도요.〗


천사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를 내버려 두고 신전의 가장 안쪽, 신전의 중심이라 할만한 심처. 예배당에서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 단상이었다. 그 앞에, 거대한 냄비 같은 것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위대하신 신성이시여, 깨어나십시오. 멸망시키는 자들이 원대한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고 물러났으니 마침내 반격의 봉화를 올릴 때입니다.〗


천사가 화로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뭐하는······.”


***



“······.”


도라는 신전 외벽에 쪼그려 앉은 채 사제님을 떠올렸다. 이름도 세례명도 모르지만, 정말로 착한 사람이었다.


‘대체 마을 안에는 어떻게 들어오셨던 걸까?’


웜홀의 괴물들이 언제 마을로 침입할지 몰라서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성벽을 세웠다. 작은 마을조차 성벽을 쌓는다. 이제는 이게 상식일 정도로 방비와 경계는 삼엄했다.


‘그 골목길은 분명······.’


치명상을 당해 죽기 직전의 볼튼을 빼내던 도라는 골목길에서 갑자기 등장한 사제를 기억했다.


‘막다른 길이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당연히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제님이셨을 줄이야. 엄청난 실례를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사제님이라.’


15년 전을 기억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겠지. 분명.


하늘이 불타올랐다. 바다가 뒤집어지고. 땅이 갈라졌다. 저 먼 하늘 공간에서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신화의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았다.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 정확하게는, 전지전능하신 신들께서.


{오오오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아아!!!!!!!}


산맥 신전의 유일한 사제인 아르반 사제께서 간밤부터 갑자기 비통 어린 통곡을 일주일 동안 내지르셨다.

우리도 모르긴 해도 위대하신 신들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칩거하시던 아르반 사제께서는 일주일 만에 나오셔서.


{성벽을 지읍시다. 우리가 우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 후부터 웜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웜홀에서는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갉아먹는 괴수였다. 우리는 황량한 오지의 개척자처럼 많은 희생을 겪어야 했다. 마을 주민들의 절반이 죽고, 재산은 탕진했으나 우리는 마침내 자급자족이 가능한 안전지대를 형성해냈다.


{아아, 태양신이시여······.}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아르반 사제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신 후부터 신전은 특유의 생기를 잃고 낡아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공물을 바쳐봐도 신전이 다시 빛을 내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의 은혜도 자비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전을 찾던 사람들도 뿔뿔히 흩어지며 가끔 한두 명만 찾는 휴식터가 되고 말았다.


“아.”


도라가 눈을 떴다. 어느새 잠에 든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산자락 너머로 태양의 끝부분만 살짝 엿보였다.


‘큰일이다! 밤이 되면 초행자는 산길을 타기 힘들 텐데!’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잠결에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을 깨달았다.


‘왜 밝지?’


뒤에서 밝고 따뜻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뒤돌아본 순간.


“아아······!”


대신전이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태양처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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