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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검 님의 서재입니다.

나태한 대(對) 마법학과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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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혼문
작품등록일 :
2021.05.12 10:59
최근연재일 :
2021.05.3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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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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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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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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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신설 대 마법학과 교수(1)

DUMMY

여인의 방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핑크색에 큼지막한 인형이 있는 귀엽고 깜찍한 감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남자아이가 으레 가지는 환상처럼.


그러나 이 방은 갑옷과 여러 정의 검, 그리고 책장과 책상, 소파와 침대가 있을뿐. 여성이고 남성이고 할 게 아닌, 기사의 방이었다.


문제가 두 가지나 생겼다.


내가 왜 여기 나타났냐는 의문이 첫째.

둘째는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자각.


“···뭐야.”


시야가 어지럽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복기해보자.


공중에 소환된 나는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천장의 샹들리에를 붙잡았다. 그러나 샹들리에가 투둑 뜯어지면서 함께 떨어지는 바람에 상황이 악화되었다. 소파에 떨어진 나는 무사했지만, 대신 소파 허리가 뚝하고 부러졌다. 샹들리에는 바닥으로 떨어져서 값비싼 카펫 위를 구르다가 책장을 쳐서 무너뜨렸고.

깔끔하던 바닥 곳곳에 샹들리에의 유리 파편과 쏟아져내린 서적들이 흐드러지게 펼쳐졌다.


나는 멍청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고 쳤네.”


누가 들어오기 전에 복원이라도 해둬야겠는데······. 마법으로··· 마법··· 마법? 뭔 소리야, 마법이라니. 그런 게 어디에 있어?


나는 망가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지러움을 느끼며 포기했다.


머리가 아프다. 어지럽다.

············누군가, 누군가의 영혼이 내 육신을 침범하고 있다.


‘한주오···!’


나와 다른, 또다른 한주오가 느껴진다. 그의 영혼이 이 육신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막아보려고 기억하는 온갖 마법 술식을 뒤적여봐도 이 기이한 현상을 제지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거지? 텔레포트 마법진의 영향인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시점이, 소설의 시작이기 때문.

소설? 소설이라고? 그럴 리가. 이 세계가··· 소설이라고?


마치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몸을 뒤틀던 용병 한주오에게, 다른 세계의 한주오의 영혼이 깃들었다.

마치 완성된 두 가지 요리를 섞어버리는 매스껍고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끝났, 나···.'


영혼이 안착하던 순간 느껴진 감당할 수 없는 충만감에 정신이 휘발되어 날아갈 뻔했다.

간신히 버텨냈다.


'···별다른 변화는 없는데.'


고개를 내려서 신체를 살펴보았다. 육체도 그대로다.

하나의 육신에 두 개의 영혼이 들어왔으니 생각의 혼선이나 감정의 섞임, 하다못해 정체성 혼란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마치 두 세계를 살아가는 한주오가 된 것마냥 아무렇지 않다.

다시 말해서···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젠장, 뭐냐고."


두 개의 기억이 공존 중이다.


전쟁영웅 한주오가 겪었던 치열했던 악마전쟁, 10년의 슬픔,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경과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날백수 한주오가 겪었던 기억도 똑같이 선명하다. 심지어 그쪽 세계의 홍예지와 함께 쓴 원작의 내용마저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세계의 홍예지가 겪은 죽음도.


“어디서도 너를 볼 수 없는 것이냐.”


슬픔에 잠식되려는 감정을억지로 끄집어냈다. 기지개를 켜며 망가진 소파가 삐걱이도록 거칠게 몸을 뉘였다.


“아, 웃기네. 내가 살던 세계가, 너와 내가 쓴 소설이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울고 싶을 지경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엉망이 된 방 위에서 나는 상념에 잠겼다.


예삿일이 아니다. 단순히 과거의 잔재만 처리하고 다시 은거하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세계가 개판이 된다.

지구 쪽 한주오의 영혼을 돌려놓을 방법도 찾아내야 하고, 이쪽 한주오의 세계에 닥칠 망할 일들도 예방해야만 한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사실, 홍예지가 의심스럽다. 죽은 사람 취급으로는 미안하지만, 홍예지가 쓴 소설 속에 들어온 거니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할 수밖에 없다.

소설을 썼는데 그게 하나의 세상을 이룬 걸까?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 차라리 원래 존재하는 세계의 미래를 적어놓았다는 게 가능성 있지 않겠는가.


···뭐가 됐든 좋다.

홍예지가 했다면, 그것대로 그녀에게 뜻이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저 수긍하고 따르면 된다.


‘좋아, 어쨌든.’


원작대로라면 여기는 하이브에서 엘리에게 배정한 방이다.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치워둬야겠지. ······아니, 잠깐만. 글쎄? 굳이 그래야 하나?


원래의 전쟁영웅이라면 칼 같이 일어나서 방을 치웠겠지만.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냉철한 전쟁영웅의 성격과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유순해진 날백수의 성격이 합쳐졌다.


즉, 제법 나태한 성격이 추가되었다.


솔직히 내 잘못도 아니고. 그러게 왜 텔레포트 좌표를 허공으로 설정했냐고. 난 몰라. 귀찮으니까 이대로 쉴래.

산골짜기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피곤한데.


······변명이고, 너무 피곤하다. 영혼이 주입되는 대가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피곤해서 당장 자야겠다.


“잠시··· 눈 좀, 붙이자. 일어나서 할게. 일어나서 할 테니까······.”


스르르 스르르 눈이 감긴다. 엉망인 방을 치우지도 않고 잠들면 홍예지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수마에 몸을 맡겼다. 눈을 감고 꿈을 꾸면, 그녀를 볼 수 있으니까.



□□□□□□□□



뚜벅뚜벅뚜벅뚜벅. 구두굽들이 빠르게 복도를 딛었다.

엘리를 선두로 여러 교수가 그녀의 숙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연합 학교 하이브는 부유섬이기 때문에 모든 교육자, 교육생에게 숙소를 내어준다. 학과 교수 전용의 커다란 저택을 배정받을 수도 있었으나, 엘리는 검소함을 자청하며 방 몇 개가 달렸을 뿐인 숙소를 배정받았다.


“하! 이래서 서민들이 쓰는 숙소란!”


꼬투리를 잡아보려고 따라 나온 올리버 교수가 재잘재잘 떠들었다. 따라붙은 교수들의 절반 이상이 다 올리버 교수와 같은 극단적 귀족주의자들이었다.

사사건건 방해하는 올리버가 짜증이 났지만 엘리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 다급한 건 '그'다. 그가 왔다. 분명하다.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설렘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네 숙소 앞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열린 흔적은 없네요. 진입하겠습니다.”


엘리가 열쇠로 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내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녕, 황녀님. 좋은 아침.”


바닥을 구르는 샹들리에. 무너진 책장. 허리가 뚝 끊어진 소파. 그 위에 누운 잠꾸러기 한 명.


엉망진창이다.


트집거리를 노리던 올리버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중얼거렸다.


“뭐냐, 저 거렁뱅이는.”


엘리는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주오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는데, 어째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나인 걸까.

반대로 분노도 느꼈다. 그따위 말로 모욕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주오 대려, 아니, 주오!"


엘리는 단번에 한주오 앞으로 달려갔다. 날백수처럼 누워있던 한주오가 비몽사몽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일어나봐요! 여기서 뭐하는 거에요!?”

“아아, 정신 차려 보니까 여기던데, 그만 잠이 와서요. 소파 좋네요.”

“그렇죠? 부유섬의 유명한 장인에게 주문 제작한··· 아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한순간이지만 휘둘렸다.

이 사람은 어째 10년 동안 바뀐 게 하나도 없을까.

반갑고 그리워서라도 하루 종일이라도 재워주고 싶었지만.


"허흠! 이거 정말 가관이로군!"


꼬부랑거리는 수염을 매만지며 올리버 교수가 숙소를 둘러보았다. 입술을 아래로 비틀어 내리며 대놓고 못마땅한 소리를 했다.


“이잉잉, 이래서 말이야! 서민용 숙소는 안 된단 말이야! 검소함은 무슨! 외부인이 무단으로 쳐들어올 만큼 보안도 약한 곳인데!”


엘리는 이를 악물었다. 올리버 저 사람만큼은 정말 싫다!


“아니거든요! 보안이 약한 게 아니라, 제가 초대한 사람이거든요! 올리버 교수님!”

“초대? 초대를 했다고? 무슨 초대를 했기에 대체 불법 침입 경보가 울리나? 무엇보다 텔레포테이션이 아니라 왜 여기서 나타난 거지?”


건수를 잡은 올리버 교수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엘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교수용 긴급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했어요.”

“허! 허, 허허! 엘리 교수, 내가 자네 진즉부터 알아봤지! 황녀 출신에 전쟁영웅 출신!? 허!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어디어디 출신이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지! 감히 교수용 긴급 텔레포트 스크롤을 타인에게 주다니! 이건 명백한 권력 남용이야! 위법 행위라고!”


생각이 짧았다. 올리버가 따라오는 것만큼은 막았어야 했는데. 한주오가 온다는 생각에 설레서, 생각이 짧았다.


“엘리 교수! 각오하시오! 내 이 일은 당장 하인리히 교장 선생님께 보고드릴테니까!”


올리버 교수가 다른 귀족주의 교수들과 함께 회의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올 때보다도 빠른 발걸음이었다.


평등주의 교수들도 당황해서 올리버 교수의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앞의 잠꾸러기는 눈치가 없다!


“우웅, 내가 늦었나요, 황녀님···?”

“이이, 한주오 대령! 어서 일어나라고요! 지금 태평하게 낮잠 잘 시간 아니라고요!”

“아으으···, 황녀님 변했네요. 옛날에는 푹 자게 해줬으면서.”

“빨리 일어나서 따라와욧!”


짝!


결국 양볼이 손바닥에 찍히고나서야 한주오는 일어났다. 엘리는 그의 손을 붙잡고 회의실로 뛰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장 선생님! 부디 일벌백계의 엄한 징벌로 엘리 교수를 처벌해주십시오!”

“맞습니다! 올리버 교수의 말이 사실이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회의실은 이미 난리였다. 엘리 교수에게 강력한 징계를 내려달라는 성토가 들불처럼 일어나 있었으니까.


귀족주의 교수들은 물론이고, 평등주의 교수들조차 이건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자자, 다들 기다려 보세요. 우선은 엘리 교수의 말을 듣고 결정할 겁니다. 예외는 두지 않을테니 다들 엘리 교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한주오가 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 그를 위해서 교수용 긴급 텔레포트 스크롤을 넣어뒀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평범하게 내가 마중나가도 됐을 텐데.


“···곤란하신 모양이네요, 황녀님.”


어느 정도 잠이 깬 한주오가 엘리를 바라보았다. 10년 만에 돌아온 그에게 못 볼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엘리는 진중하게 그의 양팔을 부여잡았다.


“한주오 대령, 내 말 잘 들으세요. 안으로 들어오지마요. 밖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요. 알겠죠?”

“예이, 알겠습니다. 황녀님 본부대로 해드립지요.”


낙천적으로 대답한 한주오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었다.

엘리는 심호흡하고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무겁다. 사방에서 쏘아지는 시선을 부담하며 하인리히 교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교수 엘리, 다녀왔습니다. 회의 중에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보다···”


뜸을 들이는 하인리히 교장을 보았다. 난처하다는 표정이시다. 죄송할 따름이다. 아껴주시는 마음에 이렇게 보답하다니.

하인리히 교장은 어쩔 수 없이 질문했다.


“외부인에게 교수용 긴급 텔레포트 스크롤을 주었다는 게 사실인가?”


올 것이 왔구나.


“네, 사실입니다···!”


교수진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다들 조용해주게. 이야기를 듣고 있잖나.”


하인리히 교장의 말투에서 존대가 조금 빠졌다. 화를 내기 직전의 유예라는 걸 아는 교수들이 입을 꾹 닫았다.


“어째서인가요, 엘리 교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누구에게 왜 주었나요?”

“이번 대 마법학과 교수 추천 명단에 제가 후보로 추천한 자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반드시 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무심코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올리버 교수가 끼어들었다.


“허! 자기가 추천한 사람에게 편의를 주기 위해서 그런 위법 행위를 저지르다니! 정녕 하이브의 보안이 듀로만트 제국 황실의 보안만큼 엄밀히 다뤄지고 있다는 걸 몰라서 한 행동인가!?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네!”


하인리히조차 말릴 수 없었다. 정론이었기에. 교장이 말리지 않자 극단적 귀족주의 교수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퍼붓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징계를 내려주십시오!”


악의 서린 한 마디, 한 마디가 엘리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그러나 강직한 그녀는 한 마디도 못했다. 어쨌든 위법이고, 잘못한 건 자신이었기에.


“엘리 교수.”

“네, 교장 선생님.”

“나는 자네에게···”


“이야, 다들 안녕하십니까.”


교수들의 당황한 표정이 입구로 향했다.

엘리도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한주오. 그가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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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태양과 달의 소녀(3) +2 21.05.13 237 5 14쪽
6 태양과 달의 소녀(2) 21.05.13 250 4 13쪽
5 태양과 달의 소녀(1) 21.05.12 266 6 14쪽
4 신설 대 마법학과 교수(2) +1 21.05.12 295 6 11쪽
» 신설 대 마법학과 교수(1) +2 21.05.12 328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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