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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설국의 천재 칼잡이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4.01.09 20:53
최근연재일 :
2024.02.19 18:20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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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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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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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노스탤지어 (10)

DUMMY

레오나르도. 천칭의 성좌 유스티티아의 대전사. 젊은 나이에 계시를 받아 리브라 시의 성명교회에 귀의한 젊은이. 그리고 머지않아 이단심문관이 되었을 열성 신자.


비록 대전사로서는 아직 미숙한 몸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앞날에 올바름과 찬란함이 가득하리라 믿고 있었다.


30년 만에 등장한 천칭의 대전사라는 이름과 리브라 시 사람들의 기대가 언제나 그와 함께하였다.


그는 이를 양분 삼아 고행에 가까운 수련과 학대에 가까운 교리 공부를 병행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음을 자부하였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는 언젠가 빛을 보리라. 젊음을 태워 쌓아 올린 공적은 길이 기억되리라.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문명의 밑거름이 되어 활활 타오르리라.


미래와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던 스물한 살의 청년. 이를 위해 일생을 별에게 바치리라 맹세했던 젊은이는 산호의 성채에 나타난 해신을 바라보며 몸이 굳고 말았다.


에테르의 소용돌이가 한 번 휩쓸고 나더니 성채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빛으로 어둠을 밝히던 이단심문관의 등불 또한 흔적도 없이 빛을 잃었다.


저편에서 희미하게 반짝거리던 성검의 기운 또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어둠의 중심에서 산호를 뼈대 삼아 나타난 바다뱀은 거대한 몸체를 움직여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하울. 창백한 색채의 해신.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화전민 대대의 포병 부대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를 보며 몸이 굳고 말았다.


신앙이 신실한 자들이었기에 찬란하게 타오르던 등불이 꺼져버리는 것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어둠 속에서 고요함만이 남고. 사람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 침묵하던 순간.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르도님...”


모두가 침묵에 빠져있던 순간.


그는 자신보다도 어린 말단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천칭의 대전사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명...명령... 명령을 내려주십쇼... 부탁드립니다...!”


이제 갓 성인식을 치렀을 것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평신도 보병. 그는 울먹임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며 대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습은 군인이라기엔 부족해 보였다. 그는 초인에 이른 힘은커녕 이제 막 한 사람 몫을 하는 것마저 버거울 터인 신출내기였다.


다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레오나르도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평신도 병사는 현실을 압도하는 고요함에 겁이 질렸음에도 유일한 희망을 향해 간신히 목소리를 낸 것이다.


천칭의 대전사. 리브라 시에 떠오른 샛별. 신앙과 정의를 바로 세울 이단심문관 후보. 언젠가 성좌가 될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는 인재.


레오나르도는 이 모든 기대과 희망을 잊어버린 채 굳어버린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해신의 고요함에 압도당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살아온 스물한 살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로 세우기 위해 목소리를 내어야만 했다.


“총원! 주목하도록!”


레오나르도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우덱스.


크로스가드의 양쪽에 천칭이 달린, 재판관이라는 이름의 보검.


그는 리브라 시의 수호 성좌 유스티티아의 가호가 담긴 성물을 보여 포병대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았다.


“본대 쪽 구조는 내가 맡는다! 나머지는 현 위치를 지키며 본대 쪽의 신호를 기다릴 것! 별들이 우릴 보우하시길!”


레오나르도가 구호를 외치자 병사들의 눈빛이 생기를 되찾았다. 그들은 리브라 시의 샛별을 바라보며 구호를 외쳤다.


“천칭이 우리를 굽어보시길!”


레오나르도는 검을 한 번 더 치켜들어 함성에 대답했다. 그리고 포병대를 뒤로한 채 성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 속을 달리며, 자신이 섬기는 성좌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천칭의 별 유스티티아시여. 당신의 대전사가 청하나이다. 부디 저에게 당신의 적을 심판할 힘을 빌려주시길!”


해신의 영향 탓일까.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적막이 맴돌았다. 등불마저 켜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대전사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성좌에게 버림받은 것은 아닐지 의심했다.


단지 나아가야 한다는 자각만이 있었을 뿐, 스스로도 해신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처럼 느껴지던 찰나가 지난 뒤.


한 줄기 빛이 검을 향해 내리꽂혔다.


천칭의 성좌는 마침내 해신이 일으킨 해무를 뚫고 내려와 자신의 대전사에게 답했다.


[듣고 있단다. 나의 아이야. 피고의 이름과 죄명을 말하려무나.]


유스티티아. 천칭의 별. 정의를 수호하는 별자리.


리브라 시의 시작을 함께한 수호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레오나르도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천칭의 성좌를 향해 청했다. 정의 성좌 앞에선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피고는 해신 하울.”


철저히 교육받은 대로. 그는 해신의 정체와 죄명을 천칭의 별에게 밝혔다.


“피고의 죄는 인류의 존엄을 위협하고, 문명의 존속을 저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필히 이를 멸하여 별과 천칭의 법도를 바로 세워야 함이 옳습니다.”


[해저에는 해저의 법이 있음을 알고 있느냐. 법은 공정해야 하고, 천칭은 균형을 맞춰서 사용해야 하는 법이란다.]


천칭의 성좌가 그를 시험했다. 대전사는 이에 고개를 저으며 천칭의 성좌를 향해 탄원했다.


“그럼에도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가 있음을 알아주시옵소서.”


성채는 어느덧 지척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하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천상이든. 심연이든. 한 줄기 빛조차 닿지 않는 해저의 끝자락이든. 마땅히 바로 세워야 할 법도가 있다면 부디 별빛을 허락하소서. 검을 치켜들 수 없는 곳에선 천칭을 바로 잡을 수 없나이다.”


무너진 성벽을 넘어 성채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대전사 레오나르도는 해신이 고요함 속에서 만인을 향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천칭의 성좌가 그에게 답을 내렸다.


그녀는 공정함을 향해 눈을 감길 택했다.


[대전사 레오나르도. 그대는 검을 쥐어 천칭의 균형을 바로 세우라.]


천칭의 성좌가 허락하자 정의의 가호가 성검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해저이고, 상대가 해저의 존재인 탓에 또 다른 가호인 공정함의 가호는 받을 수 없었다.


다만 레오나르도는 검에 깃들기 시작하는 황금색 별빛을 바라보며 성좌를 향해 성호를 그어 감사를 표했다.


정의의 가호란 검을 쥐게 된 이유가 정의에 가까울수록 별빛이 강해지는 힘이었으니.


검으로부터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은 천칭의 성좌가 그의 정의를 보증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별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천칭의 대전사는 검을 높게 들어 고요함 앞에 무릎 꿇은 사람들에게 천칭의 별빛을 보였다.


심연에서도 별은 빛날 수 있다고.


설령 상대가 해일을 몰고 와 등불을 꺼트린다 할지라도, 불을 피우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있다면 별은 기꺼이 불씨를 내어준다고.


대전사는 금빛의 검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만인의 마음에 깃든 고요함을 몰아내었고, 별빛으로 시선이 모이는 것과 함께 사람들의 눈빛에선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막이 깨어진 직후.


허공을 유유히 헤엄치던 거대한 바다뱀은 나른한 목소리로 천칭의 대전사에게 속삭였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


해저를 울리는 속삭임에 대전사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손에 쥐어진 성검에 별빛을 모으며,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놈의 죽음뿐이다.”


대답을 끝낸 직후.


대전사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 별빛으로 이루어진 참격을 날렸다.


검으로 모인 별빛이 한데 모여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황금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주변을 대낮처럼 밝혔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찬란함에 모두가 눈을 감고 말았고, 대전사는 홀로 두 눈을 떠서 자신이 피워낸 별빛을 직시하며 해신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거대한 바다뱀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별빛에 닿은 산호 뼈대는 하얀 잿더미만을 남기며 사라졌고, 에테르로 이루어진 몸통은 신기루였다는 듯이 흩어져버렸다.


곧이어 별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바다뱀이 자취를 감춘 순간.


현장에 있던 모두는 창백한 색채의 바다뱀이 사라진 것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토록 압도적이었던 존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니.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잿더미가 되었던 해신의 몸체에서 한 줄기의 산호가 싹을 틔웠다.


산호는 곧이어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인 모습이었다.


[너희들은 늘 그런 식이구나.]


해신은 슬픔을 담아 만인에게 속삭였다. 그는 어느새 거대한 바다뱀의 형상으로 성채 주변의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대화할 여지도 없이. 생명을 가볍게 여기곤 하지. 무례하게도 말이야.]


“천칭이시여!”


대전사 레오나르도가 기합과 함께 다시 한번 일격을 준비했다.


또다시 한줄기 섬광이 해저를 가른 이후.


대전사 레오나르도가 있던 자리엔 한 그루의 산호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산호는 성검과 대전사를 양분 삼아 첨탑만큼이나 무성하게 자라났고,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 사이에선 또다시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해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디선가 피어나 군중을 향해 질문을 계속했다.


[너희들은 무엇을 원하니?]


별빛에 몸이 연달아 타오른 탓일까.


해신의 목소리엔 이전과는 달리 피로와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는 더이상 거대한 바다뱀의 모습을 취하는 대신 자그마한 산호 묘목의 형태로 모두의 앞에 나타났고, 처음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손길에도 꺾여버릴 듯이 가련해 보였다.


다만, 그럼에도 현장에 있던 사람 중 진정으로 해신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고요함 속에서, 대전사가 패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꺾여버렸을 뿐이었다.


별빛은 꺼졌고, 대전사는 패했다.


드높던 이단심문관의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군중들 사이에선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바다를 살해할 수 없다.


파도를 가르고, 깊은 심해로 잠수하며, 물고기를 잡거나 바다에 독을 풀 순 있어도, 바다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해신은 몸소 가르쳐주었고, 이를 깨달은 자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하나씩. 또 하나씩.


마음의 불씨가 꺾이고. 해저의 고요함과 적막이 모든 것을 삼켰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다인은 검을 땅에 꽂은 뒤 두 눈을 감았다.


그는 해신에게 일격을 가한 뒤 사그라진 천칭의 대전사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의 최후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는 천칭의 대전사를 비웃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무의미하다고 평하기엔, 좀처럼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내가 눈보라가 치는 걸 알고도 바깥으로 나갔던 날처럼.’


불길에 이끌리는 불나방처럼. 사람 또한 파멸에 이를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아가게 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었다.


설령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활활 타올라 잿더미가 되는 결말일지라도. 다인의 망막엔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빛이 각인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바람 한 번 불면 사라질, 찰나의 반짝임. 그건 분명 한 사람의 인생을 태워 피워낸 생명의 불씨라 부를만한 경지였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


그가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해신의 목소리는 다시금 사방으로 펴져 나갔다.


그리고 더는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이, 이번에는 목소리와 함께 환각과 환청이 뇌리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자라면 먹을 것을 주겠노라. 먹는 것에 지친 자라면 먹지 않아도 되는 몸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남을 해치는 것이 죄악이라면, 너희는 기꺼이 무결한 몸이 되어 영생을 누릴 수 있노라.


발을 디디는 순간 빠져버릴 듯한 미혹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이를 거부하던 평신도 병사들 사이에선 고통 어린 비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떤 자는 날붙이로 손등을 찌르면서 버텼고. 어떤 자는 스스로 혀를 씹었으며. 어떤 자는 머리를 땅에 박은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분명, 신앙심을 발휘에 미혹으로부터 저항하고 있었다.


다만,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으리라 자부하진 못했다.


제아무리 신앙심이 투철하더라도 해일처럼 밀려오는 속삭임을 영원히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정신력이 바닥나는 순간, 저들은 여느 산호의 신자들과 같은 몰골로 전락하거나 산호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다인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였다. 천칭의 대전사가 피워낸 찬란함이 망막에 새겨진 덕분인지, 그는 다른 이들보단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해신을 올려다보았다.


해신 하울. 비명을 삼키는 바다뱀. 거식과 긍휼을 베푸는 자.


상대는 자신의 힘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이었고, 이는 별의 힘을 빌리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마음을 다잡고 상대를 마주 보는 것뿐이었다.


“해신 하울.”


이름을 부르자 거대한 바다뱀이 다인을 응시했다. 그는 해신의 시선으로부터 산사태와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는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이를 견뎌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이 물러나길 원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어째서?]


단 한 마디. 해신이 나직이 속삭이자 다인의 뇌리에 수많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인간의 삶은 척박하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하고,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추잡한 짓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며, 그렇게 식사를 하고 난 뒤엔 거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난 뒤엔 스스로 거름이 되어 다른 생명의 먹잇감이 된다.


해신의 시선으로 보기엔 갸륵한 일생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지금껏 사람을 먹지 않아도 되는 몸으로 만들어 주거나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풍요를 베풀곤 하였다.


무례하게 달려드는 무뢰배들은 볼 수 없을 터였으나, 그는 바다의 너그러운 면모 또한 품고 있는 존재였다.


이 사실이 뇌리를 스친 순간.


다인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고, 피로감이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과도한 정보를 한순간에 받아들인 탓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살아남으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침묵하고, 머리를 조아려, 바다의 질서에 몸을 맡겨야 한다. 애초에 해저란 해신의 영역이며, 이를 인간의 잣대로 헤아리려 하는 시도 자체가 무례한 일이니. 뭇 백성이 그러하였듯 그 또한 마땅한 예의를 갖춰 해신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침침했다.


다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의외의 것이었다.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으니까요...”


말을 내뱉은 순간. 다인은 자신이 어째서 앞으로 나서게 되었는지를 자각했다.


그는 해신에게 동정받고 싶어서 해저에 온 것이 아니었다.


성좌가 그러했듯.


그가 나아가야 하는 길에 힘을 빌려주는 것은 기꺼운 일일 터였으나, 이를 부정하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엔 검을 쥐어야 마땅했다.


적어도 그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해신의 동정 따윈 바란 적도 없었다. 그는 이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에 검을 지팡이 삼아 해신의 앞에 나선 셈이었다.


[너는 닮았구나. 그 검의 옛 주인처럼.]


해신은 나직이 읊조리며 자취를 감췄다. 에테르는 평소와 같이 잔잔하게 파도 소리를 몰고 왔고, 해신이 몰고 온 고요함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대답에 모든 힘을 쏟은 소년이 쓰러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질 무렵.


이를 지켜본 이단심문관 부대의 지휘관 아벨 사제는 등불을 지피며 모두에게 외쳤다.


“총원! 등불을 지펴라! 해신은 물러나고! 승리가 머지않았노라!”


그는 냉정한 지휘관답게 사실만을 선포했다.


해신의 진의가 무엇인지. 죽은 대전사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저 소년과 해신의 관계는 무엇인지 따위의 문제는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사교도의 잔당을 모조리 처단한 뒤 이 땅이 이단의 영역임을 선포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안광에는 어느새 불이 붙어 있었다. 이는 다른 이단심문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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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스탤지어 (10) +7 24.02.10 953 4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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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노스탤지어 (8) +5 24.02.08 1,000 47 13쪽
31 노스탤지어 (7) +3 24.02.07 1,037 50 14쪽
30 노스탤지어 (6) +8 24.02.06 1,120 5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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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노스탤지어 (4) +3 24.02.04 1,174 44 14쪽
27 노스탤지어 (3) +2 24.02.03 1,267 51 13쪽
26 노스탤지어 (2) +4 24.02.02 1,329 46 12쪽
25 노스탤지어 (1) +5 24.02.01 1,470 52 15쪽
24 등대와 마검 (3) +6 24.01.31 1,540 50 13쪽
23 등대와 마검 (2) +5 24.01.30 1,650 57 15쪽
22 등대와 마검 (1) +6 24.01.29 1,686 55 13쪽
21 광란의 성좌 (2) +5 24.01.28 1,760 60 13쪽
20 광란의 성좌 (1) +9 24.01.27 1,829 73 14쪽
19 별과 해저의 환영 (6) +7 24.01.26 1,800 74 13쪽
18 별과 해저의 환영 (5) +5 24.01.25 1,858 6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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