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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벤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용은 사랑을 모르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헤르벤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22.11.19 12:09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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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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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수 :
156,753

작성
22.09.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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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소년은 절망했다(3)

DUMMY

-아버지는 속도 좋지. 놈들에게 당한 역사가 몇천 년인데. 후계자인 호우라를 붉은 공주와 결혼시킨다는 게 도대체가 제정신이신 거야?


-호시라, 조용히 해. 루시안 공주님께 무례다. 그리고 호우라도 다 생각이 있을 거야.


-생각이 있어? 참나, 란 형은 저게 생각이 있는 거로 보여? 종일 약혼지만 만지작대고 어린 요물한테 홀려서 정신이 나갔구먼.


그는 공주가 선물한 반지를 차마 끼지 못하고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네 잘나신 형제님의 혀를 잘랐다가 붙이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궁금해지네. 나 역시 달갑지 않아. 아버님께서 한번 결심하시면, 말이 통하는 사람이냐는 말이다. 나야말로 당장 옆방 계집의 목을 치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란 말이다.


그녀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죽고 싶은 건 자신이었다. 소녀를 보면 쓰라리게 뛰는 심장을 꺼내고 싶었다.


다시는 그런 가증스러운 마음을 품지 못하게 박살 내고 흔적도 남지 않게 으스러뜨리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존재를 부정해왔다. 그의 신념과 분노, 복수는 소녀 앞에 서면 속절없이 부서졌고, 무의미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 소녀와 공생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약혼식 다음 날 그는 그녀와 감옥에서 다시 만났다.


그곳에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너무 많은 것을 두고 왔다. 그녀는 네 삶의 전부가 됐지만, 너는 이전의 그녀를 잃었고 이전의 너를 잃었다.


낯선 노파가 이야기하는데, 검은 오 형제들에 관한 얘기였다.


그는 그 얘기에 형제들이 떠올랐는데 이젠 그 얼굴들이 기억나지 않아 울 뻔했다.


눈물을 참은 게 아니었다.


눈가에 힘을 주던 순간에 그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곁에 있던 소녀가 그를 빤히 본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호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때, 너는 너의 이름이 호우였다는 걸 마침내 깨닫는다.


아, 길이 끝나가는구나.


이 순간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구나.


이젠 고해해야겠다.


나의 그림자여, 심연이여.


나는 그들이 미치도록 두려웠으며, 그들을 죽도록 증오했다.


아······나의 루시안, 아······나의 소녀!


나에겐 다른 빛이 있었는데, 나는 어둠과 함께한 그 시간이, 그들에게 무릎 꿇고 그 다리에 키스하던 순간이, 내 삶의 영원한 행복이었다.


고백한다.


그 수많은 겨울날에 나무에 하염없이 올랐던 이유가 소녀의 품이 그리웠기 때문임을, 소녀의 차가운 숨결이 그리웠음을 죄로서 고백한다.


그러나 마법은 찰나의 것이기에, 마법이겠지.


말발굽이 모래에 닿는다.


저 멀리 불빛 하나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마을이 보인다.


너는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가, 그 불씨들이 이내 꺼져버렸다.


무척 고양됐으며 한편으론 쓰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립고 고귀한 뭔가가······그런 뭔가가 너의 가슴을 가득 채우다가 이내 흩어졌다.


너는 말 허리를 발로 찼고, 들썩이는 몸과 함께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뭔가가 희미한 확산 운동을 해왔다.


그것은 네 몸에 퍼지고 너를 이루며, 동시에 잊힌다.


왜인지 마음이 무너지고,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


호시라는 뱃머리 너머 동대륙에 시선을 맞춘 채 물었다.


“소감이 어때?”


“글쎄, 이렇게 떨어졌던 적이 처음은 아니라서···.”


“의외네.”


소년이 호기심을 내비치자 나는 화제를 돌렸다.


“다른 형제에 관한 얘기는 언제 해줄 거야, 호시라?”


“내가 그들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들 얘기는 그들에게 들어, 난 내 얘기를 해줄게.”


“진심이야?”


영혼 없이 웃던 호시라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은 내 형이니까. 하지만 내가 형에게 들려줄 얘기는 대단치 않아. 여러 번 반복할 만큼 밝은 얘기도 아니고. 굳이 나의 얘기를 듣고 싶다. 지난 10년간 일이야 많았지. 근데 내가 형에게 들려줄 얘기는, 그리 길지 않을 거야.”


호시라는 몸을 틀어 나의 옆에 비켜섰다.


“일단, 호우라. 내 모계 혈통에 관해서는 기억해?”


내가 고개를 저어도 소년은 시무룩한 기색이 없었다.


“내 어머니는 이메라였어. 권능 공명을 얻기 위해 검은 자들끼리 끝없이 짝을 짓는 광신도 집단 말이야.”


너는 이메라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었지만, 공명이란 단어가 언급되자 괜히 찔렸다.


“간단히 말해, 이메라들은 검은자의 모든 권능이 공명에서 파생됐으니 여러 권능을 지닌 아이를 계속 낳다 보면 언젠간 공명의 메시아가 태어나리라 믿어. 하지만 권능은 여러 개를 지닐수록 오히려 문 안에서 상충해 하나의 권능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되는 게 부지기수지. 무력화와 부활의 이 권능을 지닌 나도 이런 경우이고.”


“권능이 두 개라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어머니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부터가 진짜야. 아니카 왕국에는 총명한 왕세녀가 있었어. 햇살처럼 하얀 머리카락에 혼혈아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지. 그 모습은 천사를 닮은 동시에 전설 속의 어떤 검은 왕을 떠올리게 했어.”


“메키나.”


“그래 맞아, 부활의 권능을 가졌던 첫 번째 검은 왕, 메키나, 저주받은 검은 왕자 중 셋째였던 럭서스의 외동딸 말이야. 이복누이를 몰아내려던 왕자는 제 종이던 내 힘을 이용해 그녀를 악마로 몰았지. 천사 같던 공주는 메르디나의 환생으로 몰려 사형당했어. 왕자의 명령으로 내가 그 소녀의 곁을 머물던 기간은 한 달이 채 안 됐지. 하지만 호우라. 세상에서 천사를 가장 사랑하는 종족은 악마인 법이야.”


호시라의 말은 천사를 그들의 어머니라 부르며 칭송하는 남 대륙의 마족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다른 것에 쉽게 현혹되지. 우리는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찬양하고 혹은 매도하지. 내가 아직도 그 소녀를 깊이 사랑하며 동시에 증오하는 건 그저 순리인 거야. 그녀의 사형을 목도한 나는 뒤늦은 소망을 품었어. 세상에서 진짜 악을 몰아내고 가짜 악을 지우겠다고.”


“악을 지우겠다고?”


“암 속성이라는 이유로 매도당하고 왜곡 당하는, 패자에겐 가혹한 세상을 바꾸겠노라. 소녀를 위해 맹세했어.”


“그럼 네 모습은?”


“소녀 때문이 아니야. 난 오래도록 잔인한 왕자의 노예였거든. 그는 내 권능의 가치를 알았고, 그런 특이한 능력을 사용하기엔 내 마나 양이 너무도 협소하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마나 양을 늘리려고 온갖 고문에 가까운 실험을 했고 말이야. 그런 시간을 견디다 보니 이런 몸이 됐지.”


무미건조한 그의 눈을 보며 나는 왜인지 조바심이 났다.


“호시라. 내가 널, 안아줄 수 있을까?”


“원한다면.”


경직된 작은 몸을 안으며,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작은 호의로 동생을 되찾기에는 그가 이미 손쓸 수 없게 망가져 버렸다는걸.




-1부 너에게 완-




달의 군주가 세운 동방제국, 해태라는 과거의 온화함을 잊었다.


흑발에 흑안, 드물게 금안을 지녔던 황가는 타르 족과 피가 섞여, 머리도, 눈도, 심장도 붉게 타올라 그을렸다.


(화 속성의 타르 족은 심장 부근에 문이 위치한다) 제국에는 전란의 기운이 감돌았고 포악한 붉은 황족은 폭정을 일삼았다.


민가를 지나기 전 외지인에게 쏠리는 이목을 덜기 위해 호시라와 나는 장터에서 옷을 사 입었다.


초가집을 지나 검은 기와집 무리에서 붉은 기와가 홀연히 이목을 끌었다.


호시라가 셋째의 거처로 그곳을 지목했다.


붉은 기와는 왕족의 처소를 의미했기에 너는 반신반의했다.


너의 생각을 알아챈 호시라가 호언장담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가슴에 차는 담벼락 위로 내원에서 주사를 즐기는 붉은 머리의 사내가 보였다.


대낮부터 벌겋게 취한 한량은 하인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을 희롱하고 있었다.


“저 새끼라고?”


호시라의 답은 듣지 못했다. 여인의 저항이 거세지자 나는 담장을 넘고 정자로 달려갔다.


호화로운 술상을 뒤엎고 사내를 덮쳤다.


“너, 이 새끼!”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때려 박았다.


당황한 호시라가 날 작게 불렀지만, 제 친족을 변호할 호시라의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옷고름이 반쯤 풀어 헤쳐진 여종이 뒤에서 날 불렀다.


처음에는 저런 것도 주인이라고 날 말리려는 줄 알았지만, 뒤에서 날 끌어안은 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와줬구나, 호우라.”


‘여자였어?’


당황한 나는 뒷걸음질 치며 호시라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호시라는 내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틈에 호린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나의 둘째 동생인 호린은 호시라의 친누나였다.


어릴 적부터 경국지색이었던 소녀는 아버지와 왕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던 공주였다.


다정했던 누이는 저를 학대하던 사내의 뺨에 손을 댔다. 호린의 위로에 가증스러운 사내가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동생은 어릴 적과 닮은 우아한 어조로 그를 저주했다.


“도련님, 영원히 악몽에서 헤매시길.”


호린의 권능은, 그림자.


그녀는 마력이 증폭되자마자, 자신을 학대한 왕자의 정신을 그림자에 가뒀다.


‘···악몽이라.’


붉은 사내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영혼이 심연에 갇힌 그의 몸은 죽은 듯 늘어졌다.


남매가 대화하는 사이, 너는 그를 깨워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돌팔매질해도 발길질을 해도,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사납게 번뜩이던 적안마저 점차 검게 물들고 있었다.


호린은 호시라의 제안을 금방 승낙했다.


옷매를 여민 여인은 옷 한 벌 챙기지 않고 혈육을 따라나섰다.


예닐곱 살의 사내아이가 별채에서 뛰쳐나와 호린의 치맛자락을 잡고 흐느꼈다.


그 사생아는 호린을 엄마라고 불렀다.


녀석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나는 그의 존재를 전혀 못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력을 숨기는 일에 제 어미만큼 능숙했다.


그가 뒤늦게 제 짙은 마력을 드러낸 이유는 단순했다.


내게 제 쓸모를 드러낸 것이다.


머리는 아비를 닮아 붉었지만, 녀석은 분명 검은 자였다.


마력량은 어미를 닮아 우수하고, 권능은 희귀한 부활이다.


호시라처럼 반쪽짜리가 아닌 진짜 부활.


노예나 고아 중에는 생존본능 때문인지 저렇게 이르게 권능이 발현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꽤 도움일 될지도.


“꺼져, 잡종.”


얼굴을 굳힌 호린은 문턱까지 따라온 아들을 밀쳐 자빠뜨렸다.

*


“이봐···이봐?”


목에 돌이 박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너는 온몸이 결박된 채였고 입가엔 밧줄이 칭칭 묶여있었다.


전신을 두들겨 맞은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덫에 걸린 맹수처럼 눈앞의 소녀를 노려봤지만, 그녀와 그 일행은 네 발악이 가소로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짓에 다가온 소년이 이죽댔다.


“애국지사께서 깨어나셨군!”


왜소한 체격에 넝마를 걸친 두 아이는 쌍둥이처럼 닮아 보였다. 소년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녀가 재갈을 풀어줬다.


“루시안을 사랑해, 기억해, 충성해!”


소년이 배배 꼬인 목소리로 누군가를 흉내 내자, 소녀가 그의 뒷목을 쳤다.


“어제 발작을 일으켰던 사람한테 너도 참 유치하다. 염병할 애국심에 죽으려고 하시더니. 이젠 괜찮으신가, 애국자 나으리?”


그 기괴한 진술에 너는 잠시 당황했다. 하나 당장에 문제는 네가 발작을 일으켰는지, 그들이 허풍쟁이인지의 유무가 아니었다. 너는 결박된 몸을 비틀었다.


“너흰, 도적이야?”


순진한 반응은 그네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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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노예(2) 22.10.29 22 1 12쪽
25 노예(1) 22.10.22 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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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잿빛 왕도(1) 22.10.03 22 0 12쪽
20 숙부(2) 22.09.30 20 0 12쪽
19 숙부(1) 22.09.26 20 0 13쪽
» 소년은 절망했다(3) 22.09.23 19 0 12쪽
17 소년은 절망했다(2) 22.09.19 2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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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소녀는 사랑에 빠졌고(1) 22.09.09 18 0 11쪽
13 인어의 눈물(2) 22.09.05 2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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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련 22.08.29 18 0 11쪽
10 대부(3) 22.08.26 23 0 11쪽
9 대부(2) 22.08.22 19 0 11쪽
8 대부(1) 22.08.19 22 0 12쪽
7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3) 22.08.15 22 0 13쪽
6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2) 22.08.12 18 0 12쪽
5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1) 22.08.08 34 0 12쪽
4 페렐레(2) 22.08.06 2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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