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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벤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용은 사랑을 모르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헤르벤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22.11.19 12:09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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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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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수 :
156,753

작성
22.08.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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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1)

DUMMY

공주는 평소에도 역사와 마법, 문학, 예절 수업 등 다방면의 소양을 쌓기 바빴다.


그녀가 엄한 눈을 한 선생들에게 시달릴 때면, 너는 그녀의 침실 옆에 마련된 쪽방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녀의 방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생각한 너는 귀를 쫑긋 세웠다.


‘간만에 수업이 일찍 끝났나? 아니면 아침의 일을 사과하려고 도중에 나왔나?’


너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총총 달려나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네 앞에 서 있는 것은, 토라진 새침데기가 아닌 유모의 손을 하나씩 잡은 공주의 친척들이었다.


외가 친척이 아닌 호족의 꼬마들이었기에 너는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에일의 친부는 호족의 족장과 후처로 들어온 루시아(루시안의 뿌리로 추정되는 루시아 일족은 루시안과 그 특질이 유사하나, 루시안 왕가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서 대륙의 종족이다.)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이복형제들을 제하고 하나뿐인 손위 누이가 호족 사내와 낳은 남매가 호나와 호기라였다.


숲의 호족은 검은자로 구성된 씨족집단이었다.


5대륙으로 뻗쳐나간 왕자의 혈통들과 달리 그들은 검은자들의 뿌리인 검은 산맥을 지키며 살았다.


그들은 여전히 검은 신들을 숭배했으며 열성인 암 속성을 지키기 위해 족내혼을 선호했다.


호족에서는 결혼 상대를 족장이 점지했고 그들 일족 내에선 혼혈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심지어 이방인의 피가 많이 섞인 잡종이나 루시안에게 상납할 아이를 낳지 못한 개체는 그들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왕자의 후예라면 응당 나타나야 할 특이적인 능력이 없었던 너를 시동들은 쫓겨난 호족의 아이라 여겼고, 당시의 너도 이를 부정하거나 의심할 까닭이 없었다.


얌전히 있으라는 유모의 잔소리에 예닐곱 살의 아이들이 검은 눈을 끔뻑였다.


너는 그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요, 꼬맹이들! 1년 새 많이 컸네!”


홀로 땅굴을 파던 너의 마음은 그새 고양됐고 사내아이가 토끼 같은 몸짓으로 네 품으로 뛰어들었다.


호기라가 네 품을 파고들며 얼굴을 비비자 네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너는 호나에게도 전처럼 네 품에 안기라 손짓했다.


그런데 여자아이는 수줍은 티를 내며 뒷걸음질쳤다.


호기라를 한쪽 팔에 낀 채 호나에게 다가가자, 아이는 아예 유모 뒤로 숨어버렸다.


“난 호우야, 기억 안 나?”


네가 상체를 숙여 꼬마 아이와 눈을 마주치자 기라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형, 누나는 빼고 놀아. 누나는 오늘 이상하다니까! 갑자기 머리띠를 하질 않나 치마를 입지 않나.”


공주처럼 고급옷을 입진 않았지만, 작은 리본이 달린 머리띠에 갈색 치마를 입은 아이가 너는 사랑스러웠다.


“귀엽구먼, 왜 그래. 기라야.”


네 칭찬에, 호나가 싱글벙글 웃었다.


“꼭 곰 인형 같네.”


다음 순간 입꼬리를 축 내려뜨린 호나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유모가 널 보며 미간을 찌푸리자 너는 모르는 일이라며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우는 이유도 알 수 없으니 억울할 따름이었다.


“호우야, 꼬마 숙녀한테 곰이 뭐니?”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돌아온 에일이 우는 아이를 침대로 데려가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는 능숙하게 아이를 달랬다.


에일이 호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으며 아이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자 호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멈췄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너는 어리광을 피우며 소녀의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옆의 호기라는 나가 놀고 싶다며 네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누이에서 관심을 뺏긴 아이는 공주의 처소를 방방 뛰어다녔다.


그는 사물의 이름을 물어보고 그걸 손에 그러쥐고 도망치길 반복했다.


녀석은 벌써 체스 말 세 개를 잃어버렸고, 이번엔 선반 위에 놓인 장식 인형을 훔쳐 달아났다.


“이 말썽꾸러기 자식! 네 누나가 진정되면 나간다고 했잖아! 안 멈춰? 야!”


너는 침대 위에 올라간 호기라의 발목을 간신히 붙잡았다.


씩씩대는 녀석을 네 쪽으로 끌어당기려는데, 호나의 느닷없는 질문에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럼 언니는 호우 오빠 안 좋아해?”


에일이 슬쩍 네 쪽을 돌아보며 우리는 간만에 눈이 마주쳤다.


그 와중에도 기라는 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에일은 그런 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나에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언니는 호우보다 기라 손에 들린 못생긴 인형이 더 좋은걸.”


손에 힘이 빠진 너는 아이의 발목을 놓쳤다. 발버둥치던 아이는 그대로 추락했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소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어졌다.


두 동강 난 유리 인형의 대가리가 카펫 위를 굴러다녔다.


*


너는 바지 안주머니에 노트를 챙겼다.


가죽 수첩의 중간에는 연필이 끼워져 있었고 백지 반대편에는 공주를 그린 그림이 빼곡했다.


네 취미는 에일이 없는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었지만, 너는 공주의 얼굴을 그릴 때 가장 행복했다.


그래서 너는 노트에 공주의 얼굴을 작게 담고, 후에 그 도안을 화지로 옮기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했다.


아이들이 실내에서처럼 날뛰면 연필을 잡을 새도 없겠지만, 화지에 옮길 도안이 다 떨어졌던 너는 혹여나 싶어 그것을 챙겼다.


에일이 뭐하냐는 얼굴로 널 슬쩍 쳐다보자 너는 괜히 찔려서 목이 꺾일 듯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너 혼자 보는 도안이었기에 마음에 드는 밑그림에 네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녀가 노트에 관심을 두는 건 퍽 위험했다.


“기라야, 호나야. 호우 오빠가 술래 한대. 우리는 마법 진을 그리자.”


에일이 제 곁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놀이를 하려고?”


졸지에 술래가 된 너는 기가 막혀 물었다.


마법 진 술래잡기는 네가 작년에 만든 놀이었다. 아이들의 작은 보폭을 배려해 만든 그 놀이는 시작 전 땅바닥에 여러 개의 원을 그려놓아야 했다.


술래에게 잡히기 전, 참가자가 가상 마법 진에 숨으면 바로 옆의 진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진에 들어가 땅을 짚는 건 뺄 거야.”


에일이 술래인 너를 골탕먹일 작정이었다.


“그래, 우리 귀한 공주님 옷이 더러워지면 쓰겠어.”


너는 작년 일을 떠올리며 빈정댔다.


공주의 친척들과 서먹하던 네가 그들과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어울리자, 에일은 이를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벤츠에 교양있게 앉아 양산으로 볕을 피하던 공주는 벌떡 일어나 놀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놀이에 열중한 나머지 숙녀의 본분을 잊었고, 해 질 무렵 그녀의 드레스 밑단은 엉망이 돼 있었다.


‘나쁜 계집애.’


너는 이를 갈았다.


공주의 서민적인 꼬락서니에 유모와 시종장이 기함했다.


현명한 공주는 네가 제 치마에 흙이라도 뿌린 양 범인으로 널 지목했다.


그렇게 온갖 꾸지람을 너의 몫이 됐다.


“호우, 뭐해? 빨리 잡아! 너 때문에 재미없잖아.”


그녀의 예쁜 눈이 어느새 널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이 망할 계집애야! 공주님이고 뭐고, 오늘은 기필코 널 자빠트릴 테다!’


패기는 장대하나, 뜻대로 되는 건 없었다.


간악한 에일과 꼬마들이 공터에 너무 많은 원을 그려놓은 탓이었다.


줄지어 그려진 모래 진을 따라 지긋지긋한 술래의 역할이 이어졌다.


공터에서 놀던 우리는 어느새 초목이 자란 숲의 초입에 당도했다.


멀어진 루시안 성은 인형의 집처럼 작아졌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너는 불운한 숲을 등진 채 양옆의 아이들을 끼고 오도 가도 못 하는 사냥감을 보며 간사하게 웃었다.


“10초 다 됐는데, 공주님. 그만 나오시지?”


너는 마법 진에서 10초 이상 머물 수 없는 규칙을 상기시켰다.


네가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자 그녀가 차갑게 네 손을 거부했다.


“아니거든. 기라가 검은 숲의 동굴에도 마법 진을 그려놨거든!”


거짓말쟁이가 이번엔 객기를 부렸다.


“맞지, 호기라?”


에일이 윙크하며 묻자 호기라가 개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애로운 공주니까. 겁쟁이 호우를 위해서 거기까지는 안 갈게. 그러니까 술래가 열까지만 세는 거야. 그동안 우린 다시 숨을 테니.”


분을 참지 못한 너는 오리 마냥 꽥 소리쳤다.


“야!”


저 토라진 입술은 뽀뽀를 해줘야 멈추는데, 저 어리숙한 꼬마가 그걸 알 리 없었다.


에일은 그 야만적인 행동에 화들짝 놀라다가, 경멸이 가득 찬 눈으로 널 쏘아보았다.


“동굴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자. 거기에 마법 진이 있으면 네 말대로 하고, 만약에 없으면!”


너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도발했다.


“네가 술래 하는 거야.”


그녀에게 쌓인 불만이 한 번에 터지며 너는 눈이 돌아갔다.


우리는 아이들을 공터에 남겨둔 채 바보 같은 내기를 위해 검은 숲까지 들어갔다.


검은 산맥과 이어지는 숲은 성 꼭대기에서 전경이 보여 익숙한 장소였다.


그러나 너나 그녀나 그곳을 꺼렸다.


유모가 일전부터 그 숲에 얼굴 없는 망령이 떠돈다며 겁을 준 탓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수천 년 전 검은 숲에는 짐승의 형상을 한 검은 자의 신이 살았다.


포악한 신은 저의 우둔한 백성을 노예이자 먹이로 삼았다.


그는 나약한 인간 무리에게서 이름과 감정을 갈취했다.


우민들은 그의 시중을 들었고 그를 위한 제를 지내며 혈족을 제물로 바쳤다.


이리도 사악한 악신과 맞섰던 용맹스러운 영웅, 루시안.


그는 기꺼이 괴물을 물리치고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황제가 되었다.


검은 백성은 해방됐고 성군은 핍박받던 이들과 검은 짐승의 살과 피를 나눴다.


죽은 신의 가죽을 왕관 대신 두른 북부의 황제.


그를 위한 검은 군대는 사방위로 뻗어 나가 다른 대륙에 위대하고 거룩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오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 루시안이 제국이었던 찬란한 시대의 이야기다.


그 위대한 혈통을 이어받은 우리 공주님은 검은 숲에 들어서자 작은 어깨를 오들오들 떨었다.


그녀는 얇은 하복 드레스와 공터에 두고 온 외투를 핑계로 지나온 길을 물리자고 널 살살 구슬렸다.


평소의 상냥함을 벗어던진 네가 내기에서 질까 봐 그러냐며 그녀에게 면박을 줬다.


마음이 상한 공주는 꽁무니 빼기를 포기하고 소심하게 널 노려봤다.


이전의 우려와 달리 너는 이 장소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유모의 경고와 달리 숲은 고요했다.


잔잔한 물소리와 새 지저귐이 귓전을 간지럽히고 코끝에는 향긋한 풀 내음이 머물렀다.


나뭇잎 새로 뻗친 햇빛이 피어오르는 안개에 부서져 반짝였다.


살 썩은 내도, 짐승의 울부짖음도 숲을 떠도는 악령도 없었다.


그 단조로움이 망가진 네 마음에 평온을 줬고 동시에 영문 모를 서글픔을 불러왔다.


악신에게 짓밟힌 영혼을 본다면 너는 두려워하기보다 그를 위해 기꺼이 기도하고 어쩌면 울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숲에는 길이 없었다.


무성한 수풀이 이따금 발목을 할퀴어왔고 그럴 때마다 그것이 제단의 손이라도 되는 양 소녀는 깜짝깜짝 놀랐다.


그녀는 어느새 네 옷자락을 잡고 걸었다.


너는 여전히 화가 난 채였지만, 금방에라도 울음보를 터뜨릴 것 같은 유리 눈을 보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치, 거짓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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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노예(1) 22.10.22 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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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잿빛 왕도(1) 22.10.03 22 0 12쪽
20 숙부(2) 22.09.30 20 0 12쪽
19 숙부(1) 22.09.26 20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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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소년은 절망했다(2) 22.09.19 25 0 11쪽
16 소년은 절망했다(1) 22.09.16 20 0 11쪽
15 소녀는 사랑에 빠졌고(2) 22.09.12 26 0 11쪽
14 소녀는 사랑에 빠졌고(1) 22.09.09 18 0 11쪽
13 인어의 눈물(2) 22.09.05 22 0 11쪽
12 인어의 눈물(1) 22.09.02 42 0 12쪽
11 대련 22.08.29 18 0 11쪽
10 대부(3) 22.08.26 22 0 11쪽
9 대부(2) 22.08.22 18 0 11쪽
8 대부(1) 22.08.19 22 0 12쪽
7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3) 22.08.15 22 0 13쪽
6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2) 22.08.12 18 0 12쪽
»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1) 22.08.08 34 0 12쪽
4 페렐레(2) 22.08.06 2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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