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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로 살아남는 법

몬스터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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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코
작품등록일 :
2020.12.24 20:09
최근연재일 :
2021.01.23 19:00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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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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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97,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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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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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3화

DUMMY

《 ‘고스트’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

《 ‘고스트’가 당신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

《 ‘고스트’가 당신의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

《 ‘고스트’가 안도하기 시작합니다. 》


안내문이 뇌까리듯 쏟아졌다.

고스트가 푸른빛을 제 주변에 연기처럼 흘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놈은 투명한 장막이나 다름없는 몸을 차분히 드리우고, 하늘하늘한 커튼처럼 흔들렸다.

곧 스러질 것 같았지만, 모종의 결의가 보였다.


나는 놈의 당돌한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내 정체를 밝히고 나면 적의는 거둘지언정, 이렇게까지 자신을 열어 보일 거라고 생각하진 못한 터였다.

한편으로는 이 기세를 몰아 놈에게서 생각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우선 놈만 이곳에 숨어있는 이유부터 알아야 했다.


“왜 다른 몬스터들처럼 검은 사자들을 따라가지 않았지?”


고스트는 내말에 거칠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보상의 방’ 문을 닫았다.

명이 많이 닳은 상태였지만, 놈의 순간 이동 스킬은 아주 재빨랐다.


놈은 문 앞에 둥실 떠오른 상태로 내 쪽을 향해 멈춰있었다.

별 다른 안내문 없이도 나는 놈이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놈은 검은 사자들을 피해 일부러 이곳에 숨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아직까진 똑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회복 물품이 없는 상태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면, 검은 사자들에게 물품을 배급받아 회복하면 될 일 아닌가.

굳이 다친 몸을 숨기면서까지 사자들을 피하는 모습이라니.

무언가 숨길 거리가 있는 게 아니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았을 때,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설마···

서큐버스를 지키기 위해서···?



“서큐버스가 널 다치게 한 것이냐.”

나는 내 추측을 확실시하기위해 입을 열었다.


고스트는 자신을 다치게 한 존재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제 ‘영혼석’에 담는다.

잊지 않기 위해서.

추적하기 위해서.


고스트에게 있어서 영혼석은 다크 나이트의 푸른 심장과 같았다.

고스트만의 사연을 바탕으로 존재하지만, 테라리언들 사이에선 거래되는 아이템일 뿐.

드롭 확률은 100%였다. 죽고 나면 각인된 원한을 지워야했기 때문이다.


고스트는 잠시간 흐늘흐늘 몸을 일렁였다.

침묵이 파랗게 반짝거렸다.


《 ‘고스트’가 당신의 말을 부정합니다. 》


의외의 대답에 나는 무심코 놀랐다.

나는 서큐버스가 놈을 공격했고, 놈의 영혼석에 서큐버스의 존재가 새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검은 사자들은 놈의 영혼석을 빼앗아 서큐버스를 추적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서큐버스가 공격한 게 아니라니.

다른 존재가 그녀와 함께 있었단 말인가.


···납치인걸까?

아니다. 한낱 테라리언이 몬스터를 던전 밖으로 감히 이끌어낼 힘은 없다.

죽음은 몬스터들에게 협박이 안 되고, 몬스터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스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조련 스킬은 오직 필드 몬스터들에게만 적용되고, 지속 시간이 제한적이다.


그녀는 분명히 스스로 이곳을 나갔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군.”

나는 혼잣말마냥 중얼거렸다.


고스트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긍정보다 더한 긍정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함께 있던 누군가가 널 다치게 한 것이고.”


슬슬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카른 던전을 오래도록 들락거리다 사라진 테라리언. 마리언.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의 실종이 이곳 보스 몬스터 서큐버스와 무언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널 공격한 자는 테라리언이었을 테지.”


《 ‘고스트’가 당신의 추리력에 화들짝 놀랍니다. 》


고스트의 순박한 반응을 보며, 나는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결심이 섰다.


놈은 다친 몸으로 이곳에 영영 갇혀있을 수 없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검은 사자들에게 발견 된다면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른다.

서큐버스의 추격을 방해한 죄로, ‘봉인의 시간’을 견뎌야할지도 모른다.


고스트는 그저 서큐버스가 이곳을 떠나지 않길 바랐나 보다.

그리고 기어코 달아난 그녀가 검은 사자들에게 붙잡히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제 주인에 대한 애정과 의리로 놈은 그녀가 스스로 위험에 빠지는 걸 원하지 않는 것이다.


“넌 그녀가 이곳으로 알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구나.”

나는 덤덤히 말했다.

고스트가 정곡이 찔린 듯 푸른빛을 더욱 번쩍거렸다.


“검은 사자들에게 붙잡히면, 그녀는 벌을 받을 테니 말이야.”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 영혼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곳에 숨어 있었던 거고.”


“하지만 그 때문에 넌 지금 가파른 절벽 위에 서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 ‘고스트’가 두려움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합니다. 》


고스트는 과연 기민했다.

놈은 순간 이동 스킬을 사용하며, 자신이 숨어있었던 상자 속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몸을 숨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내겐 아무 소용없는 동작이었다.

나는 등 뒤의 투 핸디드 소드를 재빠르게 뽑아들었다.


《 스킬 ‘의지의 슬래쉬’를 발동합니다! 》


수컹!


빛과 같은 속도로 나는 고스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나풀거리는 푸른빛이 기다란 섬광에 반쪽으로 갈라졌다.

이어서 사방으로 희디흰 먼지를 풀썩이며 고스트가 모로 쓰러졌다.

놈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죽었다.

이제는 시신이 되어버린 푸른 웅덩이 한 가운데, 투명한 큐브를 떨구었을 뿐이었다.


그게 바로 ‘고스트의 영혼석’이었다.


이로써 놈은 자유를 얻었다. 물론 고스트도 그리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검은 사자들의 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검은 사자들이 부활한 놈을 발견 하더라도, 놈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들이 실수로 깜빡한 놈이라 생각하고, 또 다른 카른 던전에 놈을 던지겠지.


하지만 내가 놈의 구원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단 복잡한 모순이 내 속을 헝클어 놓았다.


그에 비해 내가 해야 할 행동은 간단했다.

나는 얄팍한 푸른 빛 속에 놓인 영혼석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큐브 한 가운데, 진주 같은 새하얀 덩어리가 응어리져있는 게 보였다.

고스트를 공격했던 테라리언이 가까워질수록 이 새하얀 덩어리가 빛을 발할 것이다.

그자가 던전 안에 있을 턱이 없으니, 덩어리는 지금 투명한 큐브에 짱박힌 흰 돌일 뿐이었다.


서큐버스의 도주를 도운 테라리언이 누구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자가 고스트를 죽이지 않은 건 크나큰 실수였다.


그 자의 행동은 서큐버스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로브 후드를 다시 쓰고, 던전 출구를 향해 갔다.



* * *



서큐버스가 탈주한 것은 고작 하루 전.

달아났다 하더라도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던전에 속하는 몬스터의 몸으로는 더욱 그랬다.

나 역시 경험한 바가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서큐버스가 테라리언으로 득시글거리는 던전 로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게 참 대단하게 여겨졌다. 카른 던전은 특히나 인기가 많은 던전으로, 여느 던전 로비보다 테라리언이 많았다.


성장에 도움을 주는 아이템을 많이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보스 몬스터가 빼어난 미녀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삼삼오오 모여 파티원들을 모으고 있는 테라리언들 사이를 헤치며 지나갔다.


[ 서큐버스 희롱 팟 ]

[ 마녀사냥 팟 ]

[ 서큐버스 감상 팟 ]

···


파티원 모집을 알리는 팻말 내용을 보니, 서큐버스가 왜 던전에서 달아난 건지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서큐버스는 그 미모도 대단하지만,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테라리언을 장악하는 꽤 강한 힘을 가진 몬스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테라리언들에겐 그 강함이 그렇게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저 미녀를 희롱하는 재미인 건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로비를 벗어났다.


내 추측에 걸맞게 고스트의 영혼석은 카른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벌써부터 희미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서큐버스가 나처럼 정체를 가릴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숨어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일대에 숨어있기에 딱 걸맞은 장소가 있었다.


이 일대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

미드 헤임 내 작은 피나라고 불리는 곳.

누구도 발 디디지 않으며, 수다쟁이 들쥐들이 찍찍거리는 곳.


미드 헤임 서문을 벗어나 한참을 걷다보면 폐가 일대가 펼쳐졌다.

이곳은 이름조차 없었다.

게임에서도 그저 무너진 외성의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풍경처럼 채워둔 곳이었다.


나는 카른 던전에서 남하하여 이름 없는 폐가 일대에 도착하였다.

역시 테라리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붕이 날아가거나 한쪽 벽이 다 무너진 폐가들이 짙은 어둠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로브 속에 숨겨두었던 영혼석을 꺼내 확인해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흰 빛이 더욱 짙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서큐버스는 분명 이 폐가들 중 한 어둠 속에 제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폐허를 헤집고 다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하며 한 집 한 집 바깥을 둘러 걸었다.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폐가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영혼석의 반짝임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흰 빛이 파장의 범위를 넓히며,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사위 속을 밝혔다.


이 집이었다.


나는 폐가의 벽을 빠르게 둘러 걸으며 입구를 찾았다.


애써 티를 내고 싶지 않다면, 폐가답게 문을 닫아두지 말았어야지.


나는 검 자루로 천천히 손을 가져다대며 단단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나는 느리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미혹의 아우라를 자아내는 존재를.


그녀는 검은 로브로 온 몸을 가리고 무방비하게 앉아있었다.


《 ‘침묵의 검사 루어’가 스킬 ‘정적의 검’을 발동합니다! 》


늘씬한 롱 소드가 소리도 없이 바람을 갈랐다.


“안 돼요!”

동시에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채앵!


나는 디펜스 스킬을 사용하여 루어의 공격을 막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공격이었으니, 방어의 타이밍은 적절했다.


투 핸디드 소드와 롱 소드의 검 날이 어슷하게 맞닿은 채, 우리는 버티고 섰다.


나는 나를 공격한 놈의 정보를 조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대충 보아도 70대 남짓한 레벨의 테라리언. 엄청난 고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얕잡아 볼 수 없는 수준의 남자. 특히 놈이 내게 선보인 ‘정적의 검’은 갑작스런 선방에 아주 적합한 스킬이었다.


“공격을 멈추세요!”

그녀가 외쳤지만, 루어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놈에겐 그녀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몬스터와 테라리언 사이의 대화는 불가했으니까.


“공격을 멈추라는군.”

난 여유롭게 버티고 서서 루어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알아 듣는 건가···?”

루어는 내가 서큐버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는 것에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놀라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네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외침과 동시에 그는 검을 살짝 내빼며, 재차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무마되었다.


검고 칙칙한 로브로도 차마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는 그녀,

서큐버스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양 팔을 옆으로 뻗어, 루어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당신이··· 고스트를 죽였군요.”

서큐버스가 축축하게 젖은 음성으로 날 보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슬픔이 곧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고 예감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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