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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 님의 서재입니다.

인류애 없는 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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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ator
작품등록일 :
2022.07.0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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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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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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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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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8화-역린

DUMMY

더 들을 필요는 없겠다. 남자의 반응을 확인하고 곧바로 뒤를 돌았다.



"잠깐, 잠깐만요!"



"소리치면 죽인다고 했지?"



세가지 조건 중 하나를 어긴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마른 침을 삼키는지 목젖이 크게 출렁거렸다. 눈을 꼭 감고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드는 모습은 퍽 우스꽝스러웠다.



"그, 그게···."



"이제 마지막 조건만 지키면 살아갈 텐데, 알량한 호기심으로 목숨 버리려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이 남자를 죽이고픈 생각은 없다. 그때 주점에서 분명히 시에라와 일행이라는 것 정도는 기억한다. 이 남자는 잘 모르는 거 같다만.



그래서 아까 '모른다'는 선택지를 줬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다.



그가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검을 거뒀다. 거친 숲길이지만, 저 시에라랑 같이 다니는데 짐승을 상대로 절절매진 않을 거다. 더 늦게 가면 그 용이 의심할 지도 모르고.



발길을 재촉했다. 더 할 얘기가 없어서다.



"잠시만요, 당신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아나요?"



심어준 공포가 그리 효과가 있진 않았나 보다. 아니면 내 생각 이상으로 이 남자가 멍청이거나.



'그걸 꼭 알아야 하나.'



속으로 대답했다. 이미 예상 가는 걸 짚어줄 필요는 없는데,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다. 질문은 자유지만 난 대답해준다고 하지 않았다.



"못 버틸 거에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래, 그렇겠지."



녀석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미 수백 수천 번은 들은 말이라서 대답도 어렵지 않게 튀어나왔다.



그러나 흘려듣는 태도에 화가 난 건지, 남자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 외쳤다.



"기회를 주려는 거예요!"



내딛는 발걸음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내가 멈춘 것은 남자의 말에 경청하기 위함이 아니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라고요."



내 반응이 상당히 좋은 모양이었다. 내 마음을 돌렸다고 생각한 건지 아까보다 목소리가 유해졌다. 뭘 이야기하는 것인지 예상은 가지만 뒤돌아 물었다.



"무슨 기회?"



"우리 인류가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요."



내 눈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설명하는 남자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용사님, 당신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약해요. 우리에게는 더 큰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아까 내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말의 의미가 이거였나.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내 실력을 의심해서 나빠진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하필 내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더 말해보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더 듣고 싶은 마음은 손톱 만큼도 없건만, 내 앞에 남자는 신이 난 듯이 떠들어 댔다.



"당신 같은 사람이 거들어만 준다면···!"



-콰악!!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어졌으면 내가 용납하지 못했을 거다.



남자의 턱을 으스러뜨릴 정도로 움켜쥐어 나불거리는 입을 막았다. 휘둥그레 떠진 눈에는 의문과 당황이 드러난다.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걸 분명 봤을 텐데."



일방적으로 쏟아낸 이에게 차례가 넘어왔음을 알렸다. 이제는 내가 입을 열 차례였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그가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니, 입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평상시의 나 답지 않았다. 그냥 허허 하면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 앞의 남자가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생면부지에 가까운 사람이 그걸 알아내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가 역정을 내듯 소리친다. 그 말을 듣고 입을 열고 싶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너라는 말을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남자가 한 발 더 빨랐다.



"모든 인간이 당신처럼 강하진 않아요!"



또박또박 귀에 박히는 말, 머리에서 뭔가가 톡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



가슴으로 올라오는 답답함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자 기세에 눌린 남자가 눈만 크게 뜬 채로 침묵했다.



다시 열리는 입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 같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처럼 죽어나갔는지 알아?!"



같은 전장에서 한솥밥 먹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너랑 아니, 너보다도 약한 사람들도! 빌어처먹게 강한 마족들을 상대로 뛰어나갔어!!"



그들이 과연 강해서 선봉에 섰을까?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들은 이름을 남길 만큼 강하지 않았다.



"승산이 없어도!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도!"



시간을 벌기 위해, 더 큰 승리를 위해.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들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죽는다는 두려움을 함성 하나로 지우면서···."



턱을 붙잡은 손이 떨렸다. 쥔 손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뒤는 어떻게든 해 줄 거다···.'. 그런 희망이 보답 받을 지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 쓰러지는 기분을 아냐?"



처음 크바쉬르와 마주쳤을 때,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그 녀석을 막아내지 못했다.



얼마나 유리한 지형을 우리가 손에 넣었건, 우리의 아군이 얼마나 강력하건.



제 몸 하나 사리지 않는 그의 하수인들은 기어코 우리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 도망가기 위해서 벌였던 처절한 사투. 날 죽음에서 겨우 건져낸 인물의 표정을 기억한다.



죽음을 자각한 그 허망한 표정 속에서 막연한 희망을 담은 눈빛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모를 거다.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적을 만났을 때도! 내가 죽어간 사람들의 희망을 이뤄주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희망에서 태어난 저주는 내 안의 뭔가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쉬운 길이 있었지만, 난 끝내 제국을 등지지 못했다.



막연한 희망을 담은 그 시선이 끝내 향하는 곳은 나였다. 그리고 그 시선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나는 더욱 타협하는 법과 멀어졌다.



"나 같지 않은 이들이 쓰러지는 걸 바로 옆에서 봐왔다면 네 말이 얼마나 병신 같은지 알아?!"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미 적지 않게 흘러내리는 핏물을 억지로 받아 마신 나는 남자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강자에게 안전을 담보로 굽실거리는 이들이 아예 내 주변에 없었다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선택을 하지 않아 쓰러진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만은, 이길 수 없는 싸움에 기꺼이 숨을 묻은 이들을 기억해야 했다.



좋건 싫건, 나는 그들의 핏물을 먹고 살았으니까.



*



"찾아다녔잖아."



불평하듯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안면 튼 용의 것이다.



"오래 안 걸릴 거라며?"



이 주변을 정찰하는 거 말이다. 그래, 정찰은 오래 안 걸렸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나무등치에 등을 기댄 채로 둘러댔다. 표정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날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을 거다.



"르웰린은 두고 온 건가?"



괜히 목소리 높이기 싫어서 주제를 돌렸다. 사실 시에라 성격에 혼자 날 찾진 않을 걸 알지만 일단 이 추궁 당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저 여기 있어요."



역시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숲길을 헤치는 잰걸음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다다른 소녀의 인영, 냅다 무릎을 굽히는 르웰린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걱정했어요."



날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나는 차라리 아까 추궁 당하는 분위기가 더 나았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소녀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피했다. 르웰린이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 이렇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표정."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소녀가 답했다. 좀전에 말한 걱정을 담은 눈빛이, 방금의 대답을 기점으로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거 어지간한 거짓말로는 못 도망가겠는데.



머리 굴리는 걸 제지하듯 르웰린이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오빠 표정 안 좋았어요."



내 표정이 좋았던 적은 있던가? 뒤틀린 농담으로 대화를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진지한 표정의 소녀를 바보 취급하는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머리는 멍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봐온 오빠라면, 갑자기 자리를 비울 리가 없거든요."



소녀가 지금껏 봐온 내 행동을 입에 담았다.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정곡을 찔려서 침묵을 지켰다. 호의가 들킨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아니,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라···."



느닷없는 사과에 르웰린이 당황한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문제라서요."



솔직한 심경을 입에 담으며 일어났다. 나를 따라오는 금안이 어리둥절해 보인다. 소녀에게 손을 건네며 넌지시 말했다.



"궁금하겠지만 말씀드리기에는 준비가 아직 안됐어요."



오늘 남자에게 쏟아낸 이야기는 날 믿어주던 사람들을 상대로도 꺼낸 적이 없는 이야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앞으로도 꺼내고 싶진 않다. 뒷일을 기약하는 희망을 넘겨 받는다는 건, 때에 따라서 지독한 저주가 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도저히 그 저주를 외면할 수 없어서, 그들의 최후를 옆에서 봐온 나는 그 남자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살아남은 내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고집이라면 고집이다.



그때 상념에 잠긴 내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곳엔 내밀은 손을 꼭 붙잡은 르웰린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금세 일어난 소녀가 튕기듯이 이야기하고 토도도 달려 자리를 벗어났다. 왜인지 모르지만 시선은 맞추지 않았다.



멀어지는 그녀를 보면서 잡은 손을 두어번 주먹 쥐었다. 티 안 났겠지.



*



그의 정체를 알게 되고 나서 어림짐작했다.



용사 같은 영웅이 되면 만인의, 세간의 칭송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매일이 극적이고, 또 멋진 일이 가득할 거라고.



그러나 처음 유카가 사과하며 내비친 속마음이,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표정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되려 소녀의 감정을 건드리고 말았다.



오히려 쪼그려 앉은 자신에게 내밀은 그 손이 왜 그렇게 위태로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에게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유카가 내민 손은, 하나의 도움 요청처럼 보였다.



그가 안쓰러워서 갑자기 눈물이 날 거 같다. 불쑥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녀 답지 않게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얼굴을 마주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빠르게 뒤를 돌았다.



'자기도 안 괜찮으면서.'



속으로 유카에게 쏘아붙인 르웰린이 그로부터 멀어졌다. 저만한 고독을 견디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있어도 저렇게 손을 내미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데리엘 님.'



기도의 형식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르웰린이 간절하게 신을 부른다.



'정말, 정말로 유카 오빠를 저렇게 내버려두실 건가요?'



오늘 그에게서 느낀 고독이, 그동안 있었던 유카의 모습을 완전히 잡아먹는 거 같다.



'제발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갑자기 코 끝이 찡하다. 눈이 매워지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건, 그건···.'



자신이 이토록 타인을 위해 기도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르웰린이 감정을 쏟아냈다.



'···너무 가엾잖아요···.'



자신을 도와주는 남자에게서 깊은 연민을 느낀 소녀가 겨우 눈물을 참아냈다. 밤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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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121화-단 한 사람을 위한(完) 23.08.09 7 1 14쪽
121 120화-단 한 사람을 위한(5) 23.08.08 9 1 13쪽
120 119화-단 한 사람을 위한(4) 23.08.08 10 1 16쪽
119 118화-단 한 사람을 위한(3) 23.08.07 10 1 13쪽
118 117화-단 한 사람을 위한(2) 23.08.07 13 1 13쪽
117 116화-단 한 사람을 위한(1) 23.08.07 9 1 17쪽
116 115화-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처 맞기 전까진 23.08.06 13 1 13쪽
115 114화-만회할 기회 +2 23.08.06 10 1 11쪽
114 113화-그가 쏘아 올린 작은 공 23.08.05 10 1 13쪽
113 112화-함정 23.08.05 12 1 13쪽
112 111화-희생은 올인이 아니야. 23.08.04 13 1 15쪽
111 110화-달갑지 만은 않은(2) 23.08.04 11 1 11쪽
110 109화-달갑지 만은 않은(1) 23.08.03 15 1 13쪽
» 108화-역린 23.08.03 11 1 12쪽
108 107화-실랑이(3) 23.08.03 10 1 11쪽
107 106화-실랑이(2) 23.08.02 10 1 12쪽
106 105화-실랑이(1) 23.08.02 9 1 12쪽
105 104화-성질 더러운 아군 23.08.02 10 1 13쪽
104 103화-야, 그거 아니야. 23.03.06 1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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