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보물 (2)
며칠 뒤, 나는 완성된 연탄 몇 개와 연탄 제조법이 적힌 서신을 술탈에게 보냈다.
난 철광 개발 탓에 앞으로 최소 몇 달은 더 이곳에 머물러야 했기에, 그에게 미리 연탄 사업 준비를 지시한 것이다.
지금이야 무더위가 푹푹 찌는 한여름의 7월이지만, 북방의 고구려는 이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또 금방 겨울이 찾아온다.
몇 달 뒤 내가 수도로 돌아갔을 때부터 사업을 준비했다간 올겨울 장사는 공칠 거란 얘기.
수도에 놀고 있는 내 손과 발이 버젓이 있는데, 굳이 그런 손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이후, 술탈은 틈틈이 진행 상황을 보내왔다.
연탄공장 건설부터 구들장을 정비할 건설업자들까지.
사업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달 전 도착한 그의 마지막 서신에서 곧 인부들의 고용이 마무리될 것 같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한창 연탄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것이었다.
난 지금까지 술탈에게 온 모든 서신을 한 번씩 더 훑어보며 읊조렸다.
인부 고용, 이게 의외로 오래 걸렸단 말이야...
연탄 제조법이 간단하긴 해도, 사업의 핵심 기술이기에 인부를 아무나 갖다 쓸 순 없었다.
개중 흑심을 품은 누군가가 신라나 백제로 도망쳐 기술이 유출된다면, 연탄 독점권을 가진 덕에 생길 막대한 무역 수입이 대폭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이것 때문에 술탈이 고생을 꽤나 하긴 했지. 돌아가면 이번엔 그가 칭찬해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해줘야겠네.”
술탈은 한동안 오골성과 평양성 사이를 발이 닳도록 왔다 갔다 했다.
평양 사람들 보단 을지문덕 때부터 우리 가문이 관리한 오골성 사람들이 더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 박작성의 처려근지이자, 지금은 아버지의 부하가 된 소부손(所夫孫) 장군도 인원을 선별하는 데 꽤 많은 애를 써줬다고 들었다.
이후로도 아버지의 명을 받아, 그는 잠시 거처를 평양으로 옮겨 술탈과 함께 계속 사업을 돕고 있다고 한다.
“술탈, 소부손. 조금만 더 고생해라. 이제 곧 내가 갈 테니.”
그로부터 1달이 더 지났다.
어느새 가을의 중반부를 넘어 10월이 되자, 북방의 고구려엔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곧 몰려올 한파를 피해 곧장 평양으로 내달렸다.
장장 5개월을 갈아 넣은 철광 및 탄광 개발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돌아가는 길, 나는 중간 지점에서 연정토와 합류했다.
그가 말했다.
“운랑, 소식 들었는가?”
“어떤 소식 말입니까?”
“얼마 전, 그대가 발명한 제철법으로 뽑아낸 강철이 개마무사들의 갑옷에 쓰였다는구먼.”
“아, 들었습니다.”
술탈의 서신에 적혀있던 게 얼추 기억난다.
영류왕은 코크스 용법으로 뽑아낸 강철을 가장 먼저 군사력 증강에 사용했다.
최전선부터 군사들의 무기와 갑옷을 교체하기 시작했고, 개마무사들을 육성하여 말갈 정벌전 때 소모됐던 전력을 회복했다.
아니, 정확히는 회복한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증강됐다.
전해 들은 바론 새롭게 육성된 개마무사의 수가 5천에 육박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내가 물었다.
“헌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본래 개마무사가 이렇게 단 몇 달 만에 육성이 가능한 병종입니까?”
연정토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방식대로라면 절대 불가능하지. 기병 육성은 보병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개마무사는 그 기병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허면, 폐하께선 대체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5천이나 되는 개마무사들을 육성하신 겁니까?”
“듣기론 본래 중앙군에 있던 경기병 5천을 개마무사로 훈련 시켰다고 들었네.”
아, 그럼 말이 되긴 한다.
본래 기병이었던 자들을 개마무사로 바꾸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테니.
허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중기병인 개마무사와 경기병은 전장에서 수행하는 역할 자체가 다르다.
즉, 무작정 개마무사의 수만 늘린다고 하여 고구려의 전력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개마무사가 증가하는 만큼 경기병이 줄어든 거라면, 이는 전장에서 또 다른 공백을 만들 수도 있다.
전력이 감소한 경기병들이 본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연정토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비어버린 경기병들의 자리는 같은 수의 말갈 기병을 선발하여 중앙군에 편제한 걸로 알고 있네.”
뭐여, 독심 술사여?
여하튼 그런 거라면 다행이네.
고구려의 전력이 증강한 건 물론이고, 이는 또 하나의 좋은 민족 융합 정책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
실제 역사에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도 중앙군 9서당(九誓幢) 중 말갈인으로만 구성된 당(幢)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이군요.”
“그뿐이 아닐세.”
“뭐가 더 남았습니까?”
“서부와 남부 전선 군사들의 무기 교체만 끝나면, 나머지 후방 군사들의 무기는 차차 교체하고 농기구의 교체부터 시작할 거라고 하더구먼.”
오, 이건 처음 듣는 얘기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소식이군.
농기구가 발달 되면 기존 농토들에서의 생산량도 증가하겠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목축에만 쓰이고 있는 동북 평원의 개간도 일부 시도해 볼 수 있다.
물론, 동북 평원 전체를 단번에 농토로 바꿔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천년을 훌쩍 넘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중국 정부가 10만 명이 넘는 인민 해방군을 희생시킨 뒤에야 가능했던 일이니.
허나, 조선 후기 가난을 피해 만주로 넘어갔던 의지의 조선인들은 기어코 동북 평원 일부에서 논농사를 짓는 데 성공했다.
그 성공의 배경엔 지금보다 훨씬 발달 된 조선의 농기구들이 있었고.
허니, 고구려도 농기구를 발달시키기만 한다면 평원 전체는 아니더라도 일부 개간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그곳에 거주하는 말갈 4부 중 예맥계인 속말부와 백산부는 농업에도 종사하니, 그들도 분명 의지의 조선인들 못지않게 그곳의 개간을 원하고 있을 터.
일단 그들에게 발달 된 농기구를 보급하여 개간을 시작하게 한 뒤, 조금씩 범위를 늘려가다 보면 언젠간 평원 전체가 농토로 거듭날 날도 분명 찾아오게 될 것이다.
이거, 연탄 사업이 얼추 안정되면 농기구 발달에도 신경을 좀 써야겠군.
물론 지금처럼 단순히 철의 수준만 올라가도 농기구의 질은 크게 오르겠지.
허나, 이왕 발달 시키는 거 종류까지 늘리면 더 좋지 않겠나.
그 순간, 난 갑자기 밀려오는 씁쓸함에 고개를 저었다.
참, 어릴 때 조부모에게 농사 노예로 부려진 게 살면서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시비법’ 때도 그랬지만, 인생사 정말 아이러니 하다는 게 새삼 느껴지는군.
내 고향은 시골 중에서도 ‘깡촌’이라고 불릴 정도로 낙후된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였다.
그러니, ‘트랙터’ 같은 신식 문물은 구경도 못 했고, 오로지 소와 농기구들만으로 농사를 지어댔지.
그러니, 당연히 내 머릿속엔 21세기 현대에선 낙후된 편이지만, 7세기로 들고 오면 가히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농기구들의 형태와 쓰임새가 세세히 저장되어 있다.
고대의 ‘따비’가 발전된 형태인 ‘쟁기’. 그리고 ‘호미’, ‘가래’ 등 현대까지도 사용되었던 온갖 발달 된 농기구들이 말이다.
내가 갑자기 씁쓸한 표정을 짓자, 연정토가 걱정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가? 안색이 안 좋네.”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농기구까지 교체할 생각을 하시다니. 역시 폐하께선 참으로 지혜로우신 것 같습니다.”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덕분에 고구려는 점점 더 강성해지는군. 아마 몇 년 후면 정말 몰라볼 정도로 성장할 거야.”
그렇겠지.
농업부터 시작해서 목축업과 철광업. 그리고 탄광업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경제란 경제는 다 끌어 올리고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고대 국가에서 경제가 발전하면 당연히 인구도 함께 상승한다.
그럼, 몇 년 안에 고구려의 출산율은 지금보다 적어도 2배 이상은 증가할 터.
그들이 그대로 자라주기만 한다면, 10년에서 20년 뒤 고구려는 또 수십 만의 젊은 노동력과 군사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헌데, 고구려에 충심은 없다던 연정토가 영류왕의 칭찬에 동의하다니.
혹시, 그 사이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걸까?
“공께서 폐하를 인정하시다니, 의외군요.”
“허허, 내 아무리 고구려에 충심이 없다 해도, 확실히 드러난 사실까지 부정할 정도로 속이 좁진 않네.”
쩝, 아직 고구려에 충심이 생긴 건 아닌가 보군.
그때, 연정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곧 고구려에 충심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지.”
.....어랍쇼?
“오호, 심경에 어떤 변화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폐하께서 자네와 내 공을 치하하는 공문을 내려주셨을 때 말일세.”
“예.”
그는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허허, 그때 기분이 좀 좋더구먼. 어딘가 형님께 처음 칭찬받았을 때가 기억나기도 하고 말이야.”
난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켜냈다.
아~ 진짜. 이 아저씨,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네.
무슨 칭찬 한 번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고 있어.
그래도 뭐, 마음은 이해된다.
원래 누군가를 향한 충심은 그 사람에게 인정받는 작은 느낌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나도 영류왕에게 그랬고.
이후, 나와 연정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도성으로 돌아갔다.
몇 달간 함께 고생하다 보니, 꽤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도성에 도착하고 며칠 뒤, 난 곧바로 ‘대장간 마을’로 향했다.
영류왕이 새로 지었다는 수십 개의 대장간이 모인 촌락이었다.
마을은 대성산 근처에 조성되었는데, 유사시 대장장이들을 대성산성으로 이동시켜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어우, 평양성 백성들은 이제 슬슬 겨울을 대비하던데, 여긴 아직 한여름이구먼?”
내가 마을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대장간의 열기에 놀라던 그때였다.
“운랑~!~!”
한 사내가 머리 위로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달려왔다.
너무 멀어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평준임을 알 수 있었다.
듣기론 그가 대장간 마을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아휴, 저 푼수는 변하지를 않네.
그는 금세 내 앞까지 달려와 반갑게 인사했다.
“정말 반갑네, 운랑!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한 반년 정도 되었지.”
“그니까!! 그 긴 시간 동안 연락 한 통도 없고, 서운했네!”
“내가 따로 연락할 필요가 뭐 있나. 자네가 이미 하루를 멀다 하고 술 장군을 찾아와 내 소식을 물어대는데.”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헤헿.. 들었나?”
“다 들었지 그럼. 술 장군도 자네 못지않게 말이 많은 사람이거늘, 내게 당연히 말하지 않았겠나?”
“하긴, 그건 그렇군. 그래도 나 술 장군과 제법 친해졌네.”
“그것도 들었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푼수 같은 성격을 지녀서인지, 내가 없는 동안 둘은 금세 친해졌다고 한다.
“아, 그런가?”
“그래.”
“그나저나, 자네 사업 준비하느라 바쁜 거 아니었나? 술 장군 말로는 연탄인가 뭔가를 판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랬지. 헌데, 술 장군과 소 장군이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어 여유가 좀 생겼네.”
며칠간 지켜본 결과, 술탈도 술탈이지만 소부손은 정말 유능한 사람이었다.
장군보단 사업가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지시하지도 않았던 사업 홍보도 귀족들 대상으로 꽤 해놨고, 이미 몇몇 귀족으로부턴 주문도 받아놔 구들장 정비까지 마쳐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흡족한 소부손 생각에 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였다.
“여유가 생기면 이제 좀 쉬지. 뭣 하러 예까지 또 찾아왔는가?”
평준이 묻자, 난 소매 가득 챙겨온 두루마리들을 내밀며 말했다.
“자, 받게.”
“이게 뭔가?”
그의 물음에 난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뭐기는. 고구려의 두 번째 농업 혁명을 불러올 아주 귀한 보물들이지.”
- 작가의말
조금 늦어 죄송합니다ㅠㅠ 앞으로 늦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가로 30화의 제목과 연결짓기 위해 29화의 제목도 보물 (1)로 변경되었습니다!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