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죽령 이북 (12) - 하슬라 (2)
사신의 이름이 을지운랑이라는 말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일원이 이를 대표하며 말했다.
“알천 공, 당장 사로잡아 목을 쳐야 합니다! 그놈은 춘추 공을 죽인 장본인 아닙니까!”
그의 부장도 나서 거들었다.
“맞습니다! 먼저 사신을 죽인 건 그쪽이니, 저희 또한 그자를 죽인다고 해도 고구려가 문제 삼진 못할 겁니다.”
그때, 김흠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고구려가 춘추 공을 죽인 것과 우리가 지금 을지운랑을 죽이는 건 엄밀히 따지면 다른 경우입니다.”
일원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춘추 공은 고구려가 아닌 당으로 가는 사신이었습니다. 막말로, 고구려 입장에선 사신이 아니었단 뜻이지요.
허나, 을지운랑은 고구려에서 직접 신라로 파견한 사신입니다. 타국으로 가는 사신을 잡아 죽인 것과 본국에 찾아온 사신을 죽이는 건 엄연히 그 무게가 다르옵니다. 어느 쪽이 더 국격을 낮추는 일인가는 말해봐야 입 아프고요.”
말문이 막힌 일원을 뒤로한 채, 김흠순이 말을 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을지운랑을 죽일지 말지가 아닙니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느냐. 그 이유가 중요하지요.
막말로, 지금 고구려의 군세라면 솔직히 무력으로도 충분히 하슬라를 공략할 수 있을 터.
그럼에도 협상을 제의해왔다는 건, 분명 그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알천이 물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김춘추의 죽음에 그 누구보다 분노하던 그는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아 보였다.
김흠순의 영향도 있었지만, 일전에 벌력천현에서 퇴각할 때 보여줬듯, 원래 알천이란 사람 자체도 쉬이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성격이기에 금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듯했다.
“따로 예상되는 바가 있는가?”
“아마, 이곳 하슬라주를 요구하기 위함일 겁니다. 어제 고구려 군의 일부가 하슬라 남부로 이동한 것도 만약 이곳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아군의 퇴각로를 막겠다는 협박일 테고요.”
일원이 분노하며 읊조렸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들 같으니라고. 춘추 공을 죽인 것도 모자라, 감히 이곳 하슬라까지 넘보다니.”
김흠순은 그의 눈치를 살짝 살핀 뒤 말했다.
“알천 공,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장은 고구려의 협상에 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일원이 발끈하여 그를 꾸짖으려던 그때였다.
알천이 그를 손짓으로 제지한 뒤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연유를 말해보게.”
“솔직히, 현재 신라가 처한 상황상 하슬라를 잃는 건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리 단정하는가. 만약 우리가 회군하지 않는다면 또 모를 일이잖나.”
김흠순은 조금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공께선, 정녕 그런 선택을 내리실 수 있으십니까?”
회의실의 분위기가 일순 숙연해졌다.
고민한다곤 하긴 했지만, 알천을 포함한 모든 신라의 장수들은 이미 느낌적으로 알고 있는 거다.
알천이 이끌고 온 원군은 결국 도성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하슬라를 잃으면 신라가 위험해지는 건 맞지만, 여하튼 그건 나중에 일.
반면, 비담과 염종의 반란은 당장 신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일국의 장수(將帥) 씩이나 되는 자들이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단 사실을 모를 린 없을 테니, 그들은 결국 회군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병사들과 장수들의 사기를 고려해 봐도 마찬가지다.
그가 이끌고 온 원군은 말단 병사부터 지휘관들까지 모두 도성 인근 출신들로 구성됐다.
그 말인즉, 현재 반란 한가운데에 그들의 가족들이 놓여있다는 뜻인데, 그런 불안감을 가진 병사들과 장수들이 어찌 높은 사기를 낼 수 있겠나.
알천은 무거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김흠순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회군해야 한다면, 소장은 고구려의 협상을 받아들여 적의 포위망을 풀고 병력을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도성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과 싸울 여력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고구려도 분명 이를 알고 양쪽 모두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자는 의도로 이번 협상을 제의했을 겁니다.”
알천은 씁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자네 말이 맞지만, 그래서 더더욱 씁쓸하군. 협상이라곤 하나, 결국 모든 걸 고구려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회의실의 분위기가 또 한 번 숙연해졌다.
모든 신라 장수들의 얼굴이 알천과 같아졌고, 개중엔 몰래 눈물을 훔치는 자들도 있었다.
허나, 이번에도 딱 한 사람.
김흠순만큼은 포기하지 않은 채 고구려를 향한 반격을 준비했다.
“아니. 아직 낙담하긴 이릅니다, 알천 공.”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물론, 협상의 전체적인 흐름이 고구려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자체를 막을 순 없겠지요.
허나, 소장에게 우리 신라 또한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고 손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일순 반색 됐다.
알천이 생기를 되찾은 얼굴로 물었다.
“정녕 그런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게 무엇인가.”
김흠순은 여전히 차갑게 정색한 얼굴이었으나, 그 속에서 묘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소장에게 이번 협상의 전권을 맡겨주십시오. 그럼, 소장이 반드시 그 손해를 줄여내 보겠사옵니다.”
***
난 안내받은 빈실(賓室)에서 알천을 기다렸다.
곁에는 호위무사로 따라온 검모잠이 함께했다.
그가 물었다.
“대형. 문득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
“대형께선 신라군의 퇴각로를 열어주어 알천의 군대가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으로 하슬라를 요구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랬지.”
“헌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백제와의 약조를 어긴 게 되진 않을까요?”
“우리가 무슨 약조를 어겼단 말인가.”
“백제에게 옛 가야 땅을 수복할 기회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허나, 난 그걸 위해 김유신만 붙잡아 준다고 했을 뿐, 알천까지 붙잡아 준다고 하진 않았네.”
“그래도 백제의 어라하가 알천 또한 이곳에 발목이 묶인 걸 언급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라도 괜히 이를 꼬투리 잡아서 책임을 묻는다면, 동맹 관계에 있어 좋을 게 없을 것입니다.”
“자네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긴 하다만, 너무 걱정하진 말게. 백제의 어라하는 결코 이 일로 우리 고구려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니.”
“어째서입니까.”
“시기의 문제일세. 만약, 지금 백제가 한창 땅을 수복하는 중이고, 이것이 끝나기 전에 알천의 군대가 백제군 앞에 당도한다면 자네 말대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
허나, 지금 백제는 이미 대야성을 제외한 모든 옛 가야 땅을 수복했네. 전쟁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단 뜻이지.
이런 상황에선 알천의 군대를 내려보낸다고 해도, 그들이 닿기도 전에 이미 대야성은 함락되고 전쟁이 끝난 상태일 걸세.”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대야성은 신라 최고의 철옹성 중 하나입니다. 식량과 군사만 넉넉하다면 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네. 만약, 이곳을 떠난 알천의 군대가 곧바로 대야성으로 향할 수 있다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선 절대 무리야.”
검모잠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 반란부터 진압해야 하는군요..!”
“그렇지. 또한, 대야성이 아무리 철옹성이라고 해도 백제는 이미 10년 전에 그 성을 함락시켜 본 경험이 있네.
물론 그간 신라도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여 나름의 방책을 세우긴 했겠지만, 그래도 이미 얻어간 경험치를 완전히 상쇄시킬 순 없지.”
“오호...”
검모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사실, 알천의 군대가 그 군세를 온전히 유지하여 신라로 돌아가는 건 단순히 신라를 설득하기 위해 내세운 조건만은 아니다.
이는 곧, 의자왕의 검은 속내를 완전히 막아내기 위한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의자왕은 분명 고구려가 당과 전쟁을 치르느라 사이, 신라를 먼저 공격하여 훗날 백제가 고구려보다 더 많은 신라의 영토를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를 위해서라도 아직 신라에는 그 백제의 군대를 막아낼 정예병들이 존재해야 한다.
헌데, 만약 협상이 결렬되어 그 정예병 중 하나인 알천의 군대가 만약 이곳에서 궤멸 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설사 고구려가 무력으로라도 하슬라를 확보하여 추가 진격로를 얻어낸다고 해도, 그 진격로를 써보기도 전에 신라의 주요 거점들은 백제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즉, 고구려는 의자왕의 검은 속내를 완벽히 막아내기 위해서라도 하슬라를 무력으로 빼앗는 것이 아닌, 협상을 통해 무혈(無血)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번 협상의 중요성을 되짚으며 더더욱 결의를 다지던 그때였다.
끼익-
방문이 열리고, 건장한 풍채를 가진 노장 한 명과 차갑게 생긴 중년 장수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검모잠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집에 손을 올리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뉘시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 손으로 사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깬 이상, 나 또한 사신이라는 신분만으로 목숨을 보장받긴 힘들 테니.
물론, 지금 신라의 상황상 그럴 확률은 극히 낫기에 위험을 감수하고도 직접 온 것이지만 말이다.
그때, 신라의 노장이 검모잠의 예민함이 무색할 정도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갑소. 신라의 상대등이자, 원군 대총관 알천이라고 하오.”
이어서 곁에 있던 중년 장수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총관 김흠순이오. 이번 협상에서 총책임을 맡게 됐소.”
....김흠순이라면, 김유신의 아우인 그 김흠순인가.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앞장섰던 만고의 역적 그 김흠순?
이거, 김춘추를 죽이고 나니 또 죽여야 할 놈이 눈에 들어오는군.
난 순간 끓어오른 화를 누르며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
“고구려의 중리대형이자 사신으로 찾아뵙게 된 을지운랑이라고 합니다.”
알천이 말했다.
“알고 있소. 아마 지금 신라인 중 공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찾기 힘들 것이외다.”
말에 뼈가 있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에선 천불이 끓고 있어 보여.
난 속으로 코웃음 쳤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쩔 거냐.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신라 주제에.
그때, 김흠순이 말했다.
“그럼, 바로 협상을 진행해도 되겠소? 알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시간에 좀 쫓기고 있어서 말이오.”
“아, 예. 그러시죠.”
그렇게, 훗날 삼국시대 역사상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른바, ‘하슬라 협상’이 시작됐다.
- 작가의말
본래는 금일 새벽, 늦어도 금일 오후에는 재연재를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급하게 전개를 수정하다 보니 생각보다 글이 늦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수정 전에도 독자님들께 실망을 드려 놓고, 더 일찍 수정본을 보여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독자님들께 죄송하단 말보다 감사하단 말을 훨씬 많이 전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하단 말씀드립니다!
모두 즐거운 저녁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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