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루시오
17. 루시오
데이브는 릴리를 집으로 보낸 후, 성벽 안으로 홀로 들어갔다.
루카스를 납치한 자들이 오라고 한 곳은 도시 던전의 수많은 슬럼가 중 하나인 ‘애매한 골목’으로, 진흙타운 못지않게 위험하고,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뒤섞였으며, 높고 낮은 건물이 엉켜 미로처럼 복잡한 샛길이 무수히 많았다. 벽마다 음란하고, 천박한 낙서가 써져 있는가 하면, 시체를 5듀로 구매해주겠다는 광고문구도 보였다.
슬럼가이기는 하나 나름 사업은 번창하는 것 같았는데, 창고로 보이는 곳에 원주민 노예가 짐을 나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예 중 어린 것이 갑자기 도망을 쳤는데,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경비병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끌려갔다.
데이브는 이 낯선 곳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지지 않고 용기를 냈다. 저도 모르게 레이첼이 만들어준 가죽 팔찌를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레이첼.....’ 배신감과 고통에 찬 그녀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과연 두 번 다시 안보겠다는 그 말은 진심이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 데이브는 그런 잡생각을 머리에서 밀어내 버렸다. 지금 눈앞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기 버거웠다. 데이브는 일단 눈앞의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로 하였다.
쓰레기 더미가 쌓인 골목과 고양이 떼를 지나 데이브는 한 으쓱한 지하 건물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입구 앞에는 뚱뚱하고, 빼빼 마른 경비원이 서 있었다.
삐쩍마른 경비병이 데이브를 보곤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요?”
데이브가 긴장한 것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
“여기 마스터를 뵈러 왔습니다..... 루카스 일로 말이죠.”
그러자 경비병들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온화했던 두 눈이 지금은 먹잇감을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데이브는 차분하게 숨을 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겁먹은 모습을 보이는 순간 모든 걸 빼앗길 게 뻔했다.
“마스터를 뵈러 온 것 치고는 양손이 가볍습니다?”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후회할 텐데....” 삐쩍 마른 경비병이 비웃듯 말하며, 뚱보에게 잠시 혼자 보라고 하더니 데이브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려가는 길이 어두우니 조심하쇼.”
삐쩍 마른 경비병 말대로 계단은 어두웠다. 데이브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한 계단 한 계단 걸어 내려갔다. 다 내려가자 희미한 등잔에 비친 복도가 보였다. 삐쩍 마른 경비병이 계속 따라 오라고 손짓했다.
낡은 벽, 먼지가 쌓인 바닥. 그다지 돈이 있는 곳 같지는 않았다. 여러 문을 지나 복도 끝에 다다르렷다.
삐쩍 마른 경비병이 문을 두들기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접니다. 마스터. 뼈다귀. 루카스 건으로 사람이 왔습니다..... 아뇨. 처음 보는 놈입니다. 남자고요....... 들어오랍니다.”
문이 열리자, 데이브는 경비병의 재촉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큰 사무실로, 가운데 거대한 탁자 앞에 앉은 갈색 피부 사내가 데이브를 반겨주었다.
“반갑습니다.”
사내는 상상했던 것보다 말끔한 모습을 하였는데, 심지어 꽤나 친절해 보이기도 하였다.
습관처럼 지은 부드러운 인상은 꽤나 호감이 갔으며, 기름을 바른 머리나 말끔하게 면도 된 수염은 그가 성공한 사업가라고 말해주었다. 심지어 옷마저도 주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쩌면 잘 풀릴지도.’ 사내의 호감 가는 모습에 데이브가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했다. 허나, 그의 옆에선 덩치 큰 중년의 사내를 보는 순간 곧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덩치 큰 중년의 사내는 건달보다는 도시 경비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우람한 어깨와 굳은 표정이 사람이 아닌 골렘처럼 보이게 하였다.
갈색 피부 사내가 데이브를 지긋이 보더니 친절히 자리를 권했다. 전문가적인 분위기에 데이브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반갑습니다. 성함이?”
데이브가 당황하지 않은 기색을 내며 앉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데이브입니다.....”
이번에 사내가 자기를 소개했다.
“전 ‘루시오’라고 합니다. 자그마한 사업체를 몇 개 운영하는 선량한 사업가죠.”
말은 겸손했지만, 자신만만한 태도에 데이브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거렸는데, 다행히 루시오 라는 남자가 먼저 입을 열어주었다.
“이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이브 씨. 괜찮으시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시간은 귀중한 재화이니.”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 씨 때문에 오셨다죠?”
데이브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오는 살짝 미소 짓고선 말했다.
“혹시 모르니. 제대로 된 배경 상황을 제가 설명 좀 드리도록 하죠................. 앞서 말했다시피, 전 자그마한 사업가입니다. 작은 사업을 물려받아 조금씩 키웠죠. 대단한 규모는 아니지만 전 제 사업을 사랑하고, 자식처럼 애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루카스가 밤중에 제 사업장을 습격해 불을 질렀더군요. 경비를 포함해 직원 여덟 명이 죽거나 다쳤고, 사업에 속한 재산도 열다섯 마리 정도 잃었습니다. 손해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에요. 거래처에 상품을 납품할 수도 없게 됐으니...... 무슨 말인지 알죠?”
데이브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손해가..... 얼마나 되죠?”
“3만 듀로. 계산하기 귀찮으니 우수리는 빼죠.”
액수를 듣자마자 데이브는 명치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표정을 보아하니 몰랐던 것 같군요.”
데이브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집꾼은 평생에 걸쳐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펠러의 도움을 받으면 또 모르겠지만, 과연 단기간에 3만 듀로라는 돈을 구할 수 있을까?
중간 매입장의 규모상 결국 한계가 있을 텐데. 무엇보다 펠러가 그만큼의 원석을 줄지도 의문이었다.
데이브가 당황하는 사이 루시오가 역시나 라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온 줄 모르지만, 피해 규모와 배경 이야기를 들으면 절대 오지 않거든요.”
“정말........... 루카스가 한 겁니까?”
그러자 루시오의 눈이 한순간 차갑게 빛났다.
“그 말이 절 슬프게 만드는군요. 제가 거짓말이나 하는 사기꾼, 아니면 잘못된 사람을 붙잡을 멍청이로 보이십니까? 이쪽 바닥에서는 그건 모욕입니다. 물론, 이쪽 사람이 아닌 거 같으니 그냥 실수로 넘어가 드리죠. 하지만 조심하세요.”
데이브는 루시오가 내뿜는 기운에 압도돼 손을 들어 사죄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바보처럼 물었다.
“........ 왜 루카스가 그런 짓을 했죠?”
루시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돈 때문이겠죠. 여느 빈민가, 슬럼가 인생들처럼요. 제가 하는 사업은 경쟁이 심하고, 거칠기까지 합니다. 때때로 경쟁자를 치우기 위해 사업장에 불을 지르거나,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죠.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도............... 아, 오해 마세요. 전 선량한 사업가라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경쟁자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방어할 수는 있죠. 데려와.”
그 말과 동시에 사무실 문이 다시 열리더니 건달 둘이 한 남자를 끌고 들어왔다. 루카스였다.
“이런!” 데이브가 루카스의 몰골을 보고 저도 모르게 외쳤다.
어찌나 맞았는지, 한쪽 눈이 부풀어 감겼으며, 여기저기 멍이 나고, 피가 묻어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는데, 데이브를 보고 놀란 듯 정신을 차렸다.
“다, 당신이 어떻게.......”
데이브가 벌떡 일어나 루시오에게 말했다.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전혀요. 저 친구에게 몇 명이나 당했는지 아십니까? 피해 금액만 보면 아직까지 살려둔 게 자비입니다. 물론,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자비도 바닥을 보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앉으세요.”
데이브가 진정하며 천천히 앉았다.
루시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전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 당신의 대답을 들어보죠. 여기 찾아왔다는 건 피해액을 보상할 수 있다는 거겠죠?”
데이브가 눈을 꽉 감다가 말했다.
“당연히 보상할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죠.” 루시오가 예의 바르게 비웃었다.
“시,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갚겠습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시간.”
“1년...... 아니, 6개월.”
루시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데이브 씨. 착하신 분인 것 같으니 설명해드리도록 하죠, 제 사업의 특성상 그런 식으로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주변 경쟁자가 절 우습게 여기거든요. 단숨에 피해를 보상받던가..... 아니면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1년 동안 푼돈을 나눠서 받으라니. 곤란합니다.”
절망적인 답변에 데이브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보상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 전 저대로 처리하도록 하죠. 친구들.”
그때, 데이브가 말했다.
“한 달!”
“예?”
“한 달...... 한 달만 시간을 주면 갚겠습니다. 3만 듀로.”
루시오의 표정에 호기심과 의심이 뒤섞였다.
“........진흙타운 주민인 거 같은데. 한 달 만에 3만 듀로를 구해오겠다고요?”
데이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달들 몇몇이 비웃었는데, 루시오가 경고했다.
“조용. 신사분이랑 사업 이야기 중이잖아.”
그 순간 흉악한 건달들이 겁을 먹고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데이브는 루카스를 슬며시 보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을 거라고 말이다.
“데이브 씨.” 루시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믿기 힘들군요. 아무리 주판을 튕겨 봐도 진흙타운 태생이 3만 듀로를 구할 방법이 없거든요........ 거짓말 아닙니까?”
데이브가 루시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거짓말 아닙니다.”
루시오와 데이브가 서로의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 열흘 드리죠.”
주변의 부하들이 놀랐다.
“애당초 말도 안 되는 거래입니다.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모두 제가 미쳤다고 하겠죠. 하지만 전 운이 좋은 편입니다. 덕분에 이 자리에 올랐죠........... 어쩌면, 이 모든 사태가 훌륭한 거래처를 얻기 위한 시련일지도 모르죠. 한번 제 행운을 시험해 보도록 하죠. 열흘 드리겠습니다.”
데이브는 본능적으로 마지막 기회임을 깨닫고 바로 승낙했다.
“감사합니다. 열흘.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데이브 씨가 약속을 지킬 때까지 루카스 씨는 저희가 모시도록 하죠. 걱정 마세요. 해치지 않을 테니. 약속만 지킨다면 무사히 풀어 주겠습니다. 혹시 불만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데이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큰 위기를 넘긴 셈이다. 밀려드는 안도감에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간신히 진정하며 자리에 일어나 루카스에게 말했다.
“조, 조금만 기다려. 곧 올게. 꼭 올 테니..... 날 믿고 기다려줘.”
루카스의 눈이 뭐라 설명 못 할 눈빛을 띠었다. 의심, 궁금증, 몰이해 같은 각종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데이브가 사무실을 나가려는 순간 루시오가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만약 이 순간을 넘기자고 한 거짓말이면, 데이브 씨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데이브가 뒤돌아 정중히 말했다.
“절대 그런 일 아닙니다.”
루시오는 그렇게 말하는 데이브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이 점점 생겨 기쁠따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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